해양부 동남아의 불교문화와 보로부두르 사원

동남아 종교문화권 구분

오늘날 대륙부 동남아는 불교 문화권으로 자리 잡았고, 해양부는 이슬람과 가톨릭 문화권으로 크게 양분되어 있다. 믈라유 문화권은 믈라유족의 포용성으로 다양한 종교를 섭렵하였지만, 국제교역의 매개체 역할을 한 이슬람을 가장 많이 받아들였다. 필리핀과 태국 남부도 믈라유 문화권이다. 그러나 이들 두 나라는 각각 세계 최대의 가톨릭국가와 세계 최대의 남방불교국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필리핀 이외에도 인도네시아 영내에 파묻혀 있는 동티모르도 가톨릭국가이다. 그래서 해양부 동남아에서 불교문화를 다룰 국가는 스리비자야 왕국 시대 이래로 믈라유 문화권의 큰 물결을 이어 온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등 4개국으로 한정할 수도 있고, 필리핀을 포함하여 5개국으로 외연을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해양부 최초의 불교왕국 스리비자야 왕국

   스리비자야 왕국(650-1377)은 일찍이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사이의 말라카 해협의 양안(兩岸)에 산재되었던 수많은 군소 무역왕국을 평정하고,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뿐만 아니라, 미얀마와 태국 남부로부터 쟈바와 칼리만딴(보르네오)을 거쳐 술루(Sulu) 해와 필리핀 군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며 크게 발흥했던 해양부 동남아 최초의 불교왕국이었다. 무역왕국 스리비자야는 영토 확장을 통해서 왕국의 통치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고, 교역 행위를 통한 상호 이익제고에 초점을 맞추었으므로, 해안 요지의 군소 무역왕국들은 큰 부담 없이 스리비자야의 영향권으로 들어 왔다. 스리비자야 왕국은 역사적 유물이나 유적을 많이 남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확한 사료를 통한 분석에는 미치지 못하나, 학자들은 이 고대왕국의 생존방식이 농업에 의하지 않고 해상무역에 치중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 거대한 왕국은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의 동양학자 세데스(George Coedes: 1886-1969)에 의해서 역사적 배경이 복원되었다.

   스리비자야 왕국을 마쟈빠힛 왕국과 더불어 자국 역사의 위대한 두 왕국으로 여기고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스리비자야는 Srivijaya로 표기하기도 하고, Sriwijaya로 표기하기도 한다. Sriwijaya라고 표기하면, 스리위자야로 읽는다. 쟈바(Java)를 쟈와(Jawa)로 표기하는 하는 인도네시아 신 철자법(1966년과 1972년)에 따른 것인데, 둘 다 사용하고 있다. Sriwijaya와 Jawa(쟈와)는 주로 쟈바에서 쓰인다. 스리위자야(Sri Wijaya)는 따로 떼어 표기하기도 하는데, 각각 의미가 다른 두 단어가 합쳐진 까닭이다. 인도 고어인 산스크리트(Sanskrit)어로 스리(sri)는 ‘번영’의 의미를 가지며, 위자야(wijaya)는 ‘승리’라는 뜻이다. 중국사에서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불교왕국이라는 의미를 가진 삼불제(三佛齊)로 등장한다.

   스리비자야 왕국의 중심지는 수마트라 빨렘방(Palembang)이었다. 이곳에서 발굴한 산스크리트어로 된 비문을 통하여 스리비자야는 불교왕국이자 강력한 해상 무역왕국이었음이 밝혀진 것이다. 말라카 해협의 전략적 해상 요충지에 위치했던 이 왕국은 일찍이 말라카 해협에 산재된 군소 무역왕국을 통일하여 안전한 통행로와 정교한 무역망을 보장하였으며, 인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항로를 개척하였다. 동부 쟈바에서 발흥한 마쟈빠힛(Majapahit)과 말라카 해협 중앙부의 말라카(Malaka) 등 두 왕국의 번영도 스리비자야의 터전 위에서 이루어졌다.

   당(唐)나라 스님 이징(義淨)이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한 스리비자야 왕국 여행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징 스님은 믈라유(Melayu) 전 지역이 이미 스리비자야 왕국의 영향 하에 놓여 있다고 했다. 믈라유는 오늘날의 말레이 반도를 말한다. 말레이 반도 중서부의 말라카 해협의 말라카에서 말라카 무역왕국이 번영하였다. 해협 이름도 말라카이고, 왕국 이름도 말라카이며, 말라카 왕국의 중심부를 흐르는 강(江)도 말라카 강이며, 말라카 강 어구로부터 말라카 해협 쪽으로 무성하게 전개된 빽빽한 밀림도 대체로 말라카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보로부두르를 축조한 사일렌드라 왕국

   스리비자야 왕국의 발흥과 거의 같은 시대에 좁은 순다(Sunda) 해협을 사이에 두고 쟈바에서는 산자야(Sanjaya) 힌두왕국과 사일렌드라(Sailendra) 불교왕국이 등장하였다. 스리비자야는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사이의 말라카 해협과 수마트라와 쟈바 사이의 순다 해협의 주요 항로를 장악했으나, 내륙의 농업 지역을 충분하게 확보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식량을 쌀의 섬 쟈바로부터 공급 받아야 했다. 산자야 왕국이 곧 스리비자야의 주요 식량 공급지가 되었으나 머지않아 수마트라와 쟈바 간의 해상 무역 주도권을 놓고 두 왕국은 경쟁관계에 돌입하였다.

   스리비자야는 항상 식량 공급원에 신경을 썼다. 이 왕국이 산자야와 쟁패하는 동안 쟈바 동북부에서 발흥한 불교문화 배경의 사일렌드라 왕국이 중동부 쟈바를 지배하에 두고, 같은 불교 왕국인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인도네시아 군도의 불교문화는 이 때 만개하였다. 사일렌드라가 산자야를 대신하여 스리비자야의 새로운 식량 공급원이 되었다. 현존하는 주요 인류문화유산의 하나이자 공식적인 세계 최대의 불교 유물인 보로부두르(Borobudur) 대탑(大塔) 사원도 사일렌드라 왕국의 전성기에 축조되었다. 9세기 초에 축조를 시작하여 825년경에 완공한 것으로 믿어진다.

   

   혜초 스님과 스리비자야 왕국

   700년 넘게 장수한 스리비자야 왕국은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500년 동안 동아시아 불교문화의 중심부였다. 이 왕국은 수마트라 남부 빨렘방을 중심으로 말라카 해협 양안(兩岸)의 전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태국 남부와 미얀마와 쟈바에 걸쳐서 광대한 통치권역을 형성하며 크게 발흥했던 불교왕국이었다. 말라카 해협의 전략적 요충지를 모두 차지했던 스리비자야는 8세기 말에 이미 400-600톤 규모의 거대한 선박을 건조하여 인도와 중국을 왕래하는 정기 무역항로를 개척했었다. 이 왕국의 통치자는 불교도였으며, 중국과의 교역품목 중에는 비단과 도자기 이외에도 사찰에서 사용하는 각종 불교용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나라 고승 이징(義淨)의 스리비자야왕국 여행기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과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스리비자야에서 1,000명이 넘는 승려를 발견했으며, 여러 나라에서 온 무역 상인들이 자주 어울리고 있더라고 쓰고 있다. 이징은 이어서 인도로 가는 학승(學僧)들은 한두 해쯤 스리비자야에 머무르며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추천하고 있다. 그는 12년에 걸친 인도와 당과 인도 간의 바닷길에서 만난 남해제국의 여행기를 통해서 인도와 스리비자야 왕국 등 여러 나라의 불교 상황과 승려들의 생활상, 그리고 일반 서민들의 사회와 풍물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이징은 당대 으뜸의 고승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로부터 삼장(三藏)이라는 불교계 최고의 칭호를 하사 받았다. 산스크리트어로 삼장은 뜨리삐따까(Tripitaka)라 하여 세 가지 모음집 또는 둥우리를 뜻한다. 붓다의 말씀(阿含)을 아가마(Agama)라 하며, 붓다 말씀을 받아 적는 것(經)을 수뜨라(Sutra)라 하고, 붓다 말씀을 제자들이 논의하고 해석하는 것(論)을 사스뜨라(Sastra)라고 했다. 믈라유 문화권에서 아가마는 종교(宗敎)로, 수뜨라는 비단(緋緞)이나 진귀한 보물로, 사스뜨라는 문학(文學)이라는 뜻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신라 스님 혜초(惠超)(704-787)는 열여섯의 나이에 당나라에 건너가 금강지(金剛智)라는 중국 이름을 쓰고 있던 천축국(天竺國) 인도의 밀교승 바즈라보디(Vajrabodhi)의 가르침을 받았다. 밀교(密敎)는 7세기 후반 인도에서 일어난 대승불교의 한 갈래로 혜초 스님 당대에 크게 융성하고 있었다. 혜초의 나이 20세가 되었을 때, 스승의 권유로 천축국 인도로 떠나게 되었다. 혜초는 723년 광저우를 떠나 이징의 여행길을 더듬어 바닷길로 인도에 닿아 다섯 천축국을 돌아 중앙아시아를 거쳐 파미르(Pamir) 고원을 넘고 둔황(敦煌)을 지나 727년 만 4년 만에 장안(長安)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혜초의 구법(求法)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이 전해지고 있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Paul E. Pelliot)가 중국 서북부 간쑤성(甘肅省) 주취안(酒泉)에 있는 둔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에서 발견했을 당시 혜초의 기행문은 아홉 장의 황마지(黃麻紙)를 이어 붙인 두루마리였다. 총 길이 358센티, 너비 28.5센티의 황마지 두루마리는 앞과 뒷부분이 많이 잘려나간 나머지로, 마모되어 확인할 수 없는 글자까지 합치면 6,300여 자가 쓰여 있었다. 그러나 여러 관련 자료로부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전체 분량은 약 1만 1,300자로 추산된다고 한다. 원본 왕오천축국전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이나 모로코 출신 탐험가 이븐 바투타(Ibn Battuta: 1304-1377)의 세계 여행기인 <리흘라(Rihla)> 보다 5세기나 앞선 것이다. 왕오천축국전은 출발지로부터 목적지를 향해서 가는 방향과 소요시일, 경유지에서 만나는 왕국의 도읍지와 규모, 통치상황, 주변 왕국과의 관계, 지형과 기후, 음식과 각종 특산물, 의상과 풍습, 주민들의 언어생활, 불교의 발전 정도와 기타 종교 상황 등을 순차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징과 같은 바닷길을 택한 혜초 스님은 사전에 이징의 스리비자야 왕국 여행기를 거듭거듭 독파하였을 것이고, 이징의 권고에 따라 얼마간 스리비자야 왕국에 체류했을 것이며, 잘려 나간 왕오천축국전 앞부분에 이 왕국에 관한 성실한 사실적 묘사를 많이 남겼을 것이다.

  언덕 위의 승방(僧房) 보로부두르

   보로부두르(Borobudur) 대탑사원은 인도네시아 중부 쟈바 마걸랑(Magelang) 남서쪽에 위치하는데, 인도네시아의 역사문화 중심도시인 죡쟈카르타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보로부두르는 ‘바라(bara)’와 ‘부두르(budur)’ 등 두 단어의 합성어로 이루어졌다. 바라는 산스크리트어의 비하라(vihara)에서 차용하였는데,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 ‘힌두교나 불교 사원이 있는 공간’을 뜻하는 비하라(bihara 또는 Wihara)로 쓰이고 있다. 부두르는 비하라의 어원과 달리 발리(Bali)어의 브두후르(beduhur)에서 차용하여 부두르로 변형되었으며, ‘위 쪽’이라는 뜻이다. 보로부두르를 우리말로 직역하면 ‘위쪽의 절’ 또는 ‘윗동네의 절’이 된다.

   보로부두르는 캄보디아 시엠립의 앙코르 사원과 인도 마드야 프라데쉬(Madhya Pradesh)에 위치한 산치(Sanchi) 사원과 더불어 세계 3대 불탑(佛塔)사원으로 알려졌다. 기네스북은 2012년 오랜 논란 끝에 이들 세 사원 중에서 보로부두르를 세계에게 가장 큰 불교사원으로 공식 발표하였다. 위쪽의 절이나 윗동네의 절로는 거리가 느껴지는 이유다. ‘큰 재 너머 대승원(大僧園)’으로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봐도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 인도네시아에 현존하는 세계 최대의 불교사원의 이름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큰 불교 사원과 차별성을 가지기 위한 역발상(逆發想)에서 누군가가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언덕 위의 승방(僧房)’으로 작명해 놓았다. 이 또한 불교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불자들의 최대 축일은 와이삭(Waisak)이라고 한다. 와이삭은 태음력과 태양력을 둘 다 기초한 인도 달력 2월인 비사카(Visakha) 월의 보름날이다. 북방불교에서는 석탄일을 음력 4월 초 8일(2020년은 4월 30일)로 정하고 있지만, 남방불교에서는 비사카 월의 보름날을 축일로 삼고 있어서 2020년의 경우 5월 7일이다. 이 날을 베삭(Vesak)이라 하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어 발음의 편의에 따라 와이삭으로 부른다. 북방불교의 석탄일과는 달리 남방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탄생(誕生)과 성불(成佛)과 열반(涅槃)이 모두 이 날 하루에 이루어졌다고 믿는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와이삭을 공식적인 국가종교로 채택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불교문화는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빼고는 설명이 어렵다. 그만큼 보로부두르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인도네시아의 불교왕국 시대는 스리비자야 왕국이 열었다. 같은 시기에 쟈바에도 스리비자야 영향 하의 사일렌드라(Sailendra)왕국이 크게 발흥하였다. 이로써 수마트라와 쟈바에 불교문화가 만개하는 시대가 내도하였는데,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이 이 때 축조되었다. 사일렌드라 왕조는 9세기 초에 보로부두르 사원 축조를 시작하여 825년경에 완공하였다.

   산자야 힌두왕국과 결혼동맹으로 쟈바의 주도권이 산쟈야로 넘어 가면서 보로부두르는 점차 사일렌드라 불교왕국과 불교도들의 관심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는 1006년에 일어났다. 인근 머라삐(Merapi) 화산의 대폭발로 두 쟈바 왕국의 터전이 사라지면서 보로부두르 대탑사원도 화산재에 묻히게 되었다. 그러나 설득력을 지닌 반론도 있다. 사원 축조의 완성과 동시에 불교의 깊고 오묘한 뜻에 따라 인위적으로 덮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원 기초를 닦은 흙과 사원을 덮고 있는 흙이 화산재 말고도 사원 바닥과 같은 성분의 흙이라는 것이다. 쟈바의 불교가 힌두교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여 힌두불교로 칭하고 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800년 넘게 흙더미에 묻혀 있던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이 적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토마스 스탐포드 래플즈(Thomas Stamford Raffles) 덕분이었다.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받던 인도네시아 군도가 유럽 정세의 변화로 잠시 영국의 통치(1811-1816) 하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때 영국 총독으로 바타비아(쟈카르타)에 등장한 인물이 래플즈 경이었다. 말레이어에 통달하고 말레이 문화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었던 그는 쟈바의 각종 고문서와 자료를 통해서 보로부두르의 존재를 확신하고, 1814년 탐사에 착수하여 수개월 만에 인류문화재를 발굴해 내는 쾌거를 이루었다. 태양 아래 드러낸 보로부두르는 다시 네덜란드의 수중에 놓이면서 고초를 겪었다. 여러 차례 대륙부 동남아로 진출을 시도했던 네덜란드는 다수의 보로부두르 불상의 두상 부분을 절취하여 태국 왕에게 진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총 504기의 부처님이 모셔진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의 불상 중 약 35퍼센트는 두상 부분이 없다.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은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적으로 복원하기로 결정하고, 1973년부터 만 10년 동안 막대한 예산을 지원하여 세계 7대 불가사의 하나로 세계인 앞에 웅자를 드러내게 되었다. 1990년대 이래로 연간 최소 25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보로부두르는 1991년 아시아 최초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보로부두르는 웅장하기가 실로 경이적이다. 폭 124미터의 정방형 위에 9층 건물 높이로 세워졌다. 원래는 42미터 높이였으나 현재는 35.3미터로 침하된 상태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가로와 세로가 각각 50센티미터 높이가 30센티미터 크기의 안산암(安山巖)과 화산암(火山巖)을 깎아 돌벽돌로 사용하였는데, 내부의 공간 없이 접착제나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보로부두르를 불가사의로 칭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사원을 중심으로 반경 30킬로미터 이내에는 보로부두르 축조에 사용한 돌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14,165 평방미터에 달하는 면적 위에 100만 개가 넘는 돌벽돌 350만 톤을 완벽한 배수시설 위에 차곡차곡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쌓아 올린 것이다.

   보로부두르에는 총 73기의 종탑 모형의 스투파(stupa)와 504기의 부처님이 있다. 이곳에는 4개 층에 거쳐서 5킬로미터에 달하는 회랑이 있고, 회랑 좌우면에는 총 2,500면의 부조(浮彫)가 있다. 이 부조에 등장하는 인물은 1만 명이 넘는다. 거대한 조각 작품의 숲인 셈이다. 이 조각 중에는 항해 중인 대형 선박들이 많이 나온다. 사일렌드라 왕조시대에 이미 인도네시아 군도는 해상 실크로드와 연결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이 회랑을 따라 돌면서 마지막 계단에 오르면 종탑 모형의 스투파가 있고, 스투파 안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곳을 찾는 불자들은 부처님의 몸에 손을 대고 소원을 말하면, 언젠가는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해양부 동남아 5개국의 불교문화 개황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중국, 인도, 미국에 이어 세계 4대 인구대국으로 전체 인구 2억 7000만 명(2019년)의 87퍼센트가 무슬림인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이다. 국토도 동남아의 적도 상에 17,508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동서로 최대 6000 킬로미터, 남북으로 2000킬로미터로 길고 넓게 분포되어 육지 면적만 192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이 나라는 정체를 공화제임을 내세우고 종교적으로는 세속국가임을 명시하고 있다. 헌법에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 ‘모든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는 등식이 적용되어 모든 국민은 국가가 보장하는 종교를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무신론자는 명문 조항은 없지만 국가에서 거부하고 사회에서 격리된다. 국가 종교로 이슬람 이외에 힌두교와 불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나아가서 유교까지 보장하고 있다. 당연하게 국가 공휴일에 종교 축일이 가장 많다.

   인도네시아 통계청의 2000년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전체 국민의 0.8퍼센트인 170만 명이 불교도임을 내세웠다. 2019년의 인구를 같은 백분율로 적용해도 불교도는 200만 명을 조금 넘는다. 그러나 잠재적인 불교도는 이 수치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2006년 2월 당시 유도요노(Yudhoyono) 대통령에 의해서 유교(儒敎)가 인도네시아의 여섯 번째 국가종교로 공인되면서 주민등록증(KTP)에 자신의 종교를 유교로 명시한 국민이 전체 인구의 약 4퍼센트에 달했다. 1000만 명을 초과하는 숫자다. 거의 모두가 중국계인 이들을 잠재적인 불교도로 보는 것이다. 유교를 국가종교로 공식화하기 이전에는 중국인들은 대체로 기독교나 가톨릭으로 자신의 종교를 표시했다. 1965년 9·30사태 직후, 성난 무슬림 군중들이 인도네시아공산당(PKI)을 공격하면서 불교를 중국인과 동일 시 하였기 때문이다.

   수하르토 32년 군부통치 하의 반중(反中) 반공(反共)정책에 따라 중국계 국민들은 질곡의 세월을 보냈다. 많은 숫자가 해외로 탈출하였고, 불교 사찰이 폐쇄되었으며, 한자 간판이 철저하게 통제 되었다. 중국 문화를 상징한다하여 붉은 글씨를 엄금하고, 촛불까지 의심을 받았다. 아직도 이들이 선뜻 불교도로 나서기를 꺼려했던 이유다. 문민정부로 들어선 이래 중국계 국민들에 대한 인식과 행정적 경계가 와히드(Wahid)와 메가와티(Megawati) 대통령 통치기를 거치면서 점진적으로 우호적으로 변화하였다. 유도요노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 말기 인도네시아 정부의 공식문서에 중국(中國)은 띠옹꼭(Tiongkok)으로, 중화(中華)는 띠옹후아(Tionghua)를 사용한다는 대통령령을 공식화하였다.

   인도네시아의 불교는 다양한 불교문화가 혼재되어 발전하였다. 그 갈래를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전체적으로는 고대 인도의 원시 불교인 마하야나(Mahayana)불교, 태국의 테라바다(Theravada)불교, 일본의 선(禪)불교, 뜨리다르마(Tridharma)라 칭하는 유교와 불교와 도교가 합치된 유불선(儒佛仙)교, 보로부두르 대탑사원을 건축했던 사일렌드라와  마쟈빠힛 왕조에서 번성했던 밀교 형태의 탄뜨라야나(Tantrayana)불교 등이다.

   쟈카르타의 차이나타운 글로독(Glodok)에 금덕원(金德院)이라는 큰 절이 있다. 인도네시아어로 다르마 박티 사원(Wihara Dharma Bhakti)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와 공자를 같이 모신 서원(書院) 같은 사원이다. 이 사원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시대 초기인 1650년에 중국 남부 복건(福建) 사람들이 세웠다. 금덕원의 중국어 발음인 킴텍레(Kim Tek Le)라고 명명하고 고단한 이주노동자들의 안식처로 삼았다. 1740년에 소실되었다. 그러나 초기부터 안치되었던 불상들이 잿더미 속에 남아 있었고, 중국인 후예들이 재건과 복원을 거듭하였다. 이곳에는 1825년에 제작된 범종이 남아 있어서 오늘도 먼 곳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을 맞고 있다.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태국 다음으로 전체 인구 대비 중국계 국민이 많은 나라이다. 2019년 인구통계로 전체인구 3260만 명 중 23퍼센트인 760만 명이 중국계이다. 이 나라는 믈라유계가 69퍼센트로 가장 많고, 중국계 다음으로 인도계(7퍼센트) 순이다. 불교는 말레이시아에서 이슬람 다음으로 큰 종교로 중국계 국민들이 주 대상이다. 불교 분포를 나타내는 다양한 수치가 있는데, 약 20퍼센트를 중심으로 적게는 19퍼센트, 많게는 22퍼센트로 나타나 있다. 다종족 국가인 이 나라는 정치적으로 짜 맞춘 종족 간의 화합구도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종족문제나 종교문제를 깊게 다루는 조사나 연구를 법률로 금하고 있다. 대부분의 세밀한 통계는 외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면 된다.

   중국계 국민들이 주요 신봉하는 이 나라의 불교는 중국의 도교와 원시 형태의 불교인 마하야나 불교가 혼합된 형태이다. 중국계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삐낭 섬에 켁 록 시(Kek Lok Si)라는 사원이 있다. 극락사(極樂寺)다. 웅장하고 세밀하게 아름다운 켁 록 시는 동남아를 대표하는 불교사찰 중의 하나인데, 1890년에 시작하여 1905년까지 축조하였고, 다시 1930년까지 보완하였다. 이 사원은 초기 말레이 반도로 건너오기 시작한 객가(客家) 출신 기업인들이 만들었다.

   

   싱가포르

  싱가포르의 종족 분포는 2019년 통계로 전체 인구 580만 명 중 중국인이 74.1 퍼센트, 말레이계 13.4 퍼센트, 인도계 9.2 퍼센트 순으로 분포되어 있다. 여타의 소수 종족들은 유럽인과 중앙아시아인 등 3.3 퍼센트에 불과하다. 중국계가 대종을 이루듯이 같은 해 종교 분포도 중국계의 중심 종교인 불교가 33퍼센트로 으뜸이다. 190만 명이 불교도이다. 기독교가 19퍼센트, 이슬람이 14퍼센트, 도교나 중국 토속 신앙이 10퍼센트, 힌두교가 5퍼센트 순이다. 다종족국가를 상징하듯 기타 소수 종교(무신교 포함)가 18.5퍼센트나 된다.

   싱가포르의 불교는 2500년 전에 전래된 것으로 믿어지는 석가모니 불교로부터 중국계 세계 이민들과 함께 들어온 전 세계의 다양한 현대 불교까지 혼재하고 있다. 또한 이 나라에는 수많은 불교종단과 불교재단이 있다. 싱가포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은 치안 혹 켕(Thian Hock Keng)인데, 부처님의 치아를 모셨다는 불아사(佛牙寺)다. 1839년에 짓기 시작하여 1842년에 완공되었다. 성공한 복건 출신 기업인들이 당시 국제화폐였던 스페인달러로 3만 달러를 모아 축조하였다. 싱가포르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바닷길을 지켜준 바다의 여신 마조(媽祖)를 기려서 치안 혹 켕을 헌정했다. 진롱시(Jin Long Si) 사원도 유명하다. 1941년 싱가포르를 거점으로 성공한 여러 지역 출신의 중국 기업인들이 세웠다. 금룡사(金龍寺)다.

   

   브루나이   

   동남아의 강소국이자 절대왕권의 이슬람왕국인 브루나이의 국토면적은 5270평방킬로미터로 제주도의 세 배쯤 된다. 인구는 45만 명(2020년 추계)이며 국민 평균 연령은 30세이다. 이 나라의 모든 수치는 법률로 엄격하게 통제하고 중앙 관리한다. 국가자산과 정부재정 문제를 비롯하여 국가안보와 사회적 안정을 해칠 수 있는 모든 수치가 이에 해당된다. 이슬람에 관한 문제나 여타의 종교와 종족문제도 이 범주 안에 든다. 한 국제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는 2019년 브루나이 국민의 75퍼센트는 이슬람을, 기독교 9퍼센트, 불교 8퍼센트, 토착종교 6퍼센트라는 통계자료를 내놓고 있다. 중국계가 15퍼센트인 이 나라의 불교도는 14퍼센트에 육박한다는 자료도 있다.

   이 나라의 형식적인 종교의 자유는 개인의 ‘신념의 자유’로 해석되며, 이슬람 이외의 종교 행위는 매우 조심스럽다. 무갈(Mughal) 건축양식과 믈라유 전통양식이 조화롭게 배합된 술탄 오마르 알리 사이푸딘(Sultan Omar Ali Saifuddin) 이슬람궁전이 1958년에 완공되었는데, 아태지역을 통 털어 가장 아름다운 이슬람사원으로 꼽힌다. 부유한 왕국답게 모든 이슬람 사원은 아름답고 정갈하다. 불교 사원도 하나 있다. 이 나라 수도 반다르 스리 베가완(Bandar Sri Begawan)에 텡윤(Teng Yun)이라는 이름의 작은 불교사원 등운전(登云殿)이 있다. 100년 전인 1918년에 세워진 사원이다.

 

   필리핀

   필리핀의 초기 불교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역사자료의 편린으로부터 필리핀군도에도 9세기경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수마트라에서 쟈바와 보르네오, 술라웨시를 거쳐 필리핀 군도를 연결하고 있는 대순다열도의 일원인 필리핀도 6세기부터 13세기까지 순다열도 전역을 폭넓게 관장하고 있던 스리비자야 불교왕국의 영향권이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9세기경의 스리비자야 불교유적이 필리핀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바닷길이 이어져 있고, 상호 이익이 되는 정교한 교역망으로 연계되었으며, 믈라유어를 사용하는 믈라유족이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토대로 9세기나 아마도 그 이전에 이미 원시불교의 한 갈래인 바즈라야나(Vajrayana)불교가 필리핀에 전파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2010년 인구센서스에서 필리핀의 불교도는 당시 인구 9200만의 0.05퍼센트인 46,558명으로 조사되었다. 2퍼센트에 달한다는 자료(Wikipedia)도 있다. 그러나 10900만 인구(2019)를 포용한 종교천국의 나라 필리핀에서 생활종교를 지향하는 필리핀불교계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다소 교세가 신장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나라의 대도시에는 현대식 불교사찰들이 꽤 많다. 대만불교를 대표하는 불광사(佛光寺)도 마닐라에 있다. 메트로 마닐라에 위치한 호구앙산 마부하이 사원(Fo Guang Shan Mabuhay Temple)인데, 이곳에서도 불광산만년사(佛光山萬年寺)라 칭한다.

  

 

양승윤
한국외대 명예교수.  인도네시아 가쟈마다대학교(Gadjah Mada University) 정치학박사. 주요 저서로 <인도네시아사>, <동남아의 이슬람>, <바다의 실크로드>, 역서로 <막스 하벨라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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