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으로 논증하는 불교의 핵심

불교를 철학하는 시간

“불교에서는 윤회를 주장하는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윤회하는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불성(佛性)이 있다는 주장 역시 무아의 가르침과 모순되는 것 아닌가요?”

이런 질문들이 일반 불자들 사이에서도 많아진 것 같다. 불성,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라는 ‘비판불교’의 영향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불자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높아진 수준에 맞는 교육체계를 오늘의 불교계가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오늘 소개할 책에 주목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어느 정도 비판적 사고에 익숙한 이들은 어떤 해석이나 주장을 듣게 되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제시된 전제나 근거가 결론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면 ‘타당하다(valid)’고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가차 없이 ‘부당하다(invalid)’는 평가를 내린다. 이처럼 전제와 결론으로 이루어진 진술을 논증(argument)이라고 하는데, 이는 철학을 위시한 모든 학문체계에서 중시되고 있다.

그런데 철학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성이 강한 불교의 가르침을 이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난감한 문제들이 많다. 논증의 범위를 넘어선 주장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윤회, 전생과 같은 문제는 주장은 할 수 있어도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분석적이거나 경험적인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다. ‘죽어보면 알 수 있다.’는 농담 섞인 이야기가 오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간편하면서도 유의미한 대답은 종교는 믿음의 대상이지 논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붓다의 주요 가르침을 논증의 영역에서 분석한 이채로운 책을 만났다. 홍창성 교수의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는 서양철학이라는 도구를 활용해서 불교의 핵심 교리가 옳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보편적인 개념과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도 어렵지 않게 불교의 철학적 향기를 음미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미국 바이블 벨트(Bible Belt)에 속한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미네소타는 “대학에 와서야 평생 처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고 할 정도로 기독교 전통이 강한 지역이다. 아무리 교수와 학생 관계라고 하지만, 어찌 보면 논리라는 무기 하나 들고 적진에 뛰어든 셈이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을 지적 토론을 상상하면서 이 책을 펼쳐보았다. 강의실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되어 무척 즐거운 독서 여행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신학대학에서 예비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불교철학을 강의해본 경험이 있어서 이 책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왔다.

얼마 전 연재하고 있는 신문에 종교와 철학 사이의 경계인(mar-ginal man) 같은 느낌을 토로한 적이 있다. 불교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을 철학계에서는 종교인으로, 불교계에서는 철학자로 보는 시선이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행위를 하고 있는데, 때로는 종교인이 되기도 하고 철학자가 되기도 한다. 어느 곳에도 속할 수 있지만, 반대로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일종의 경계인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이 책에 관심이 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과정이 내겐 불교를 철학 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책은 ‘불교란 무엇인가?’를 시작으로 연기와 무아, 그리고 연기의 대승적 해석인 공(空)으로 이어지는 불교철학의 핵심 주제를 24개로 나누어서 소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 대학생들의 시선, 특히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무장된 학생들이 던지는 질문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여 그들을 설득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철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대체로 자명(自明)한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문제가 분명하다고 밝혀질 때까지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미네소타주립대학 학생들은 모호하게 느껴지는 붓다의 교설에 계속 질문을 던지고, 교수는 그것이 자명하다는 결론에 이를 때까지 논리적으로 대응하였다. 한국에서는 쉬이 보기 힘든 장면이다. 그곳 강의실은 한바탕 지적 향연(symposium)이 펼쳐진, 불교를 철학 하는 아고라였다.

믿음과 앎의 간극 줄이기, 그 의미와 한계

우리는 믿음과 지식 사이의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살고 있다. 그 안에는 완전히 잘못된 믿음과 불완전한 믿음, 옳은 믿음이 혼재해있다. 우리는 별다른 근거 없이 자신이 믿는 것을 사실이거나 옳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것을 믿을 수는 있어도, 사실이 아닌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지구가 네모라고 믿는 것(잘못된 믿음)은 자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안다고 할 수 없다. 자신의 믿음이 앎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이거나 분명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믿음이 증거와 사실이라는 조건을 갖추면 그것은 옳은 믿음, 즉 앎(knowing, 지식)이 된다.

이 책은 종교적 믿음이라고 여겨졌던 불교의 교리들을 앎이라는 지위에 이르도록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붓다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 즉 진리임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이를 위해 저자가 사용한 무기는 아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철학적 논증이었다. 예컨대 저자는 무아(無我)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학생들과 많은 토론을 한다. 때로는 ‘자네를 자네이게끔 해 주는 것’을 증명하면 최고 학점을 주겠다는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무아가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반문하고 또 반문한다. 그 질문에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반박하면서 저자는 결국 학생들을 설득시킨다. 그리고 “눈감고 믿는 신앙으로 영혼이나 참나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면 모를까, 합리적으로 이치를 따져가면서는 결코 무아론을 물리칠 수 없다.”고 자신 있게 결론을 맺는다.

생각이란 익숙한 상황이 아니라 낯선 상황과 만날 때 발생하기 마련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무아의 가르침은 매우 낯선 만남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학생들은 “충격을 받으며 어리둥절해” 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학생들은 새로운 사유(思惟)의 세계에 눈을 떴다. 불교와의 낯선 만남을 통해 잠자고 있던 그들의 삶[生]이 새롭게 깨어난[覺] 것이다. 분명 학생들의 철학적 지평은 훨씬 넓어졌을 것이다. 교육이란 바로 이런 낯선 만남을 통해 학생들이 새로운 생각(生覺)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영혼이 없는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윤회하는 것은 없지만 윤회는 있다고 답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촛불이 꺼지기 직전에 다른 촛불로 옮긴다는 나가세나 존자의 ‘촛불 이어 켜기’ 비유는 매우 적절했다고 보인다. ‘촛불(삶) 사이를 관통하는 어떤 불변하는 주체’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설명이 윤회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윤회는 검증의 범위를 넘어선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불교의 교리 가운데 검증 불가능한 것은 의미의 영역으로 남겨두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윤회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변화로 해석하면 모르겠지만, 죽음 이후의 문제로 이해하면 이는 이미 검증할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윤회가 옳은지 그른지 논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난센스(nonsense)인지 모를 일이다. 윤회는 논증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며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성찰하는 일이다. 윤회를 믿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서구 중세 신학자들은 존재론적 증명이나 우주론적 증명, 도덕론적 증명 등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하였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입장을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 부르는데, 이것을 자연적(natural)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성을 통해 신을 아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성에 대한 자신감이 도를 넘은 경우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증이 신을 증명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타당한 논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 배운 철학적 교훈이 있다. 신은 검증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검증 불가능한 문제를 증명하려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이 책은 논증을 통해 불교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믿음과 앎의 간극 줄이기’라고 정리할 수 있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의미도 여기에서 찾고 싶다. 특히 현대철학과 형이상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붓다의 가르침을 현대에 맞게 분석하는 일은 저자의 지적대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가진 깊이와 넓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앞으로 불교를 강의하면서 이 책을 많이 인용할 것 같다.

그러면서도 논리의 한계를 인식하는 일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불교 역시 논리적으로 검증 불가능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붓다의 깨침을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마음으로도 헤아리기 힘들다(心行處滅)’고 한 이유를 헤아려봐야 한다. 붓다의 교설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만큼이나 논리의 겸손 역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비판불교의 영향으로 불성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아트만(ātman)과 같은 영원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한 유기물이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 깨달음과 열반을 이루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의 특정한 상태”라고 해석한다면 이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부분이 좋았다. 불성에 대한 비판불교의 입장에 지나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교를 신앙하는 이들을 불자(佛子), 즉 붓다의 아들이라고 한다. 아들이 아버지[佛]의 성품[性]을 닮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DNA가 같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닮은 아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여 연기와 무아의 진리를 깨치면 멋진 아버지가 된다. 이것이 우리들의 꿈이자 저자가 강조한 ‘깨달음 산출의 원리’에 입각한 불자로서의 삶이라고 믿는다.

붓다의 가르침을 신앙하는 불자로서 이렇게 멋진 철학 여행을 할 수 있게 해준 저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

 

이일야
 본명 이창구. 전북대학교 철학과에서 학부와 석 · 박사과정을 마쳤고 현재 전북불교대학 학장과 사단법인 부처님세상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아홉 개의 산문이 열리다》 《동화가 있는 철학 서재》 《안다는 것, 산다는 것》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란 무엇이 아닌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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