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와 노장(老莊)의 유사성과 차이점

‘선’과 ‘노장’은 사상적으로 유사한 것인가? 사실상 형식적인 논리나 표현양식으로 볼 때, 상당한 유사성이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후기 조사선(祖師禪)’으로 분류되는 시기에 출현한 어록들을 일람한다면, 이러한 유사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분명하게 조사선은 불교로부터 나왔고, 노장은 바로 도가의 사상이다. 그렇다면 불교와 도가의 사상이 동일한 측면이 있는가? 엄밀하게 논하자면, 불교와 도교의 사상은 결코 서로 합치될 수 없는 차별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조사선에서는 대량으로 노장의 용어와 개념을 사용하고, 표현양식에 있어서 유사성이 나타나는가?

이 문제를 명확하게 해명하려면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고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모두 논해야만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이는 단편의 글로써는 결코 밝힐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간략하게 말한다면 중국인의 민족적 정서와 역대의 정치적 상황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측면으로 말하자면, 불교가 중국에서 뿌리내리고 발전하는 과정은 결국 ‘조사선’으로 가는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역경(譯經)에서 노장 용어의 채택, 그리고 왕필(王弼)의 ‘현학(玄學)’에 원용된 ‘반야(般若)’의 논리, 승조(僧肇)의 《조론(肇論)》에 나타난 노장과 반야의 융합, ‘반야’를 노장의 잣대로 해석하고자 출현한 격의불교(格義佛敎), 성현영(成玄英)의 반야학파인 삼론학(三論學)을 바탕으로 한 ‘중현학(重玄學)’ 제창 등의 과정은 바로 중국불교가 조사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지닌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종합한다면, 중국에 있어서 ‘반야학’의 전개는 철저하게 노장의 도움을 받았으며, 중국 노장은 사상적으로 반야학에 의하여 끊임없이 재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사선은 바로 혜능(慧能) 대사로부터 출발하고, 또한 그 대표적인 사상은 《육조단경(六祖壇經)》으로부터 볼 수 있다. 그런데 《단경》의 사상적 특질은 바로 궁극적인 경지인 ‘부처’를 어떤 초월적인 상위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늘 접하는 일반인들의 ‘인성(人性)’과 ‘심성(心性)’으로서의 ‘자성(自性)’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로부터 유가의 사상과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이는 맹자(孟子)가 우리의 존재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만물비아(萬物備我)’를 제창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른바 ‘반구제기(反求諸己)’, 즉 나로부터 돌이켜 구하면 성현(聖賢)을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단경》에서는 그러한 과정을 바로 ‘돈오(頓悟)’를 통한 ‘무념(無念)’ ‘무상(無相)’ ‘무주(無住)’를 제시하는데, 이는 노장의 ‘무정(無情)’ ‘무물(無物)’ ‘무대(無待)’와 깊은 관련성이 있다.

그런데 《단경》에서는 철저하게 ‘즉심즉불(卽心卽佛)’의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불성’을 바로 ‘유정(有情)’의 고유한 성품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무정(無情)’에 불성이 있다는 주장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렇지만 성현영이 제창한 중현학을 바탕으로 발생한 우두종(牛頭宗)에서는 ‘무정’에도 ‘불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단경》을 중심으로 하는 남종선과 우두종은 불성에 있어서 ‘유정’과 ‘무정’의 대립이 발생하였고, 다양한 문헌에서 서로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중국에 중대한 변고가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안사(安史)의 난’이며, 이로 인하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문명을 구가하던 당조(唐朝)는 철저히 쇠락하게 되었다. 특히 난이 발생한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의 지역은 인구의 70%가 감소할 정도로 심각하였으며, 이러한 변고는 지식인들로 하여금 불교에 대하여 상당히 비판적인 태도를 갖게 하였다. 그 까닭은 살아남은 이들이 죽은 이들을 위하여 다양한 ‘재(齋)’를 지냈고, 이는 쇠락한 당시 경제 상황을 더욱 어렵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회창법난(會昌法難)’을 발생하게 하였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회창법난의 목적은 바로 기존의 모든 불교를 없애버리고 ‘우두종’을 건립하고자 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회창법난을 주도한 이는 승상의 직위를 가진 이덕유(李德裕)와 도사(道士) 조귀진(趙歸眞)이었다. 이덕유는 대대로 불교에 귀의한 가문의 출신이며, 청량징관(淸凉澄觀)은 그의 부친 이길보(李吉甫)를 위하여 《화엄정요(華嚴正要)》를 찬술했다고 하지만, 그의 부친은 만년에 우두종에 귀의하였다. 그에 따라 이덕유 역시 우두종에 귀의했으며, 막대한 재시를 하여 우두법융이 주석했던 사찰을 중창하고 탑을 건립하는 등 다양한 불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덕유가 ‘법난’을 일으켜 수많은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주살했지만, 우두종계의 승려와 사찰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우두종을 건립시키려 했던 의도를 충분히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회창법난 이후에 중국불교는 사실상 선종이 장악했으며(우두종은 이화(李華)와 이덕유의 노력으로 남종선의 법계로 편입됨), 사상적으로는 ‘즉심즉불’과 ‘무정불성’이 병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점차 선사들의 어록에 노장, 특히 《장자》의 문구들을 대량으로 인용하는데, 이는 우두종의 종풍, 멀리로는 중현학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선종의 ‘노장화(老莊化)’ 혹은 ‘장학화(莊學化)’라고 칭하며, 이 때문에 《단경》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선을 ‘전기 조사선’, 《장자》의 색채가 많이 보이는 것을 ‘후기 조사선’이라고 구분한다. 또한 전기 조사선은 ‘불성’의 ‘인성화(人性化)’, 후기 조사선은 ‘불성’의 ‘물성화(物性化)’라고 하여 그 사상적 특징을 평가한다.

짧은 지면에 장황하게 조사선과 노장의 관계를 언급한 까닭은 바로 이은윤 지음 《노장으로 읽는 선어록》의 북리뷰를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은 주로 ‘후기 조사선’에서 나타나는 선어록을 대상으로 노장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필자가 서문에서 “학문적 천착이 아니라 선어록을 《노자》 《장자》와 함께 읽은 독후감 같은 것”이라고 밝히는 바와 같이 학술논문이 아니라 수필임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일독을 마치면서 상당히 다양한 주제를 논하고 있음에 적잖이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으며, 그 가운데 필자가 중시하고 있는 몇몇 주제가 들어 있어 매우 주의 깊게 숙독하였다.

이 책은 ‘제1장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잔다’로부터 시작하여 ‘제8장 불립문자’까지 총 8장이며, 각 장은 또한 몇 꼭지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 · 하 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편제는 마치 미리 기획하여 저술한 것과 같이 체계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글을 읽으면서 무언가 미진한 감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차분히 생각해보니 늘 학술논문만을 읽었던 습관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상 수필은 수필로서 읽어야 한다는 점을 오랜만에 각성하게 되어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 책은 다양한 측면에서 그 가치를 논할 수 있다.

우선, 사실상 상당히 난해한 주제를 평이하고 자연스럽게 논술하고 있어 초심자에게 아주 뛰어난 선의 입문서 역할을 할 수 있겠다. 게다가 논술 가운데 다양한 소주제의 설정과 관련된 다양한 언급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이들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이는 필자의 방대한 지식과 평생을 통한 필력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결코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선사들의 어록을 노장으로 읽는다는 것은 두 분야에 모두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불교는 그 초기부터 노장뿐만 아니라 유가, 나아가 제자백가의 사상을 모두 파악했을 때, 그 이면까지 파악할 수 있다. 중국 불성론 연구로 유명한 중국 남경대 라이용하이(賴永海) 교수는 그의 저서 《불교와 유학》에서 “중국불교를 연구하려는 사람이 만약 중국 고대철학, 특히 유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가 알고 있는 중국불교도 한 부분일 뿐이다. 그리고 그 진행하는 중국불교학 연구도 똑같이 깊이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라고 논하면서 책을 마치고 있다. 여기에서 동일한 논리로 중국선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노장을 통하지 않는다면, 그가 알고 있는 중국선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 책의 가치를 논할 수 있다.

세 번째, 몸이 지치고 마음에 산란함이 일어날 때, 이 책은 상당한 효용성을 발휘할 수 있다. 최근에 필자는 과중한 원고 작업으로 몸과 마음이 상당히 지친 상태에서 이 책을 정독하면서 나름의 휴식을 얻게 되었다. 이는 부드러운 필치와 흥미로운 주제, 그리고 긴장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되는 문맥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였다고 하겠다.

이 외에도 다양한 장점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 무엇보다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실상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에서 재미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도 억지로 재미있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책을 읽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재미를 느낀 것은 필자와의 관심사가 일치해서일까?

그러나 《노장으로 읽는 선어록》을 숙독할 때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이 있다. 조사선과 노장은 결코 같은 사상체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슷하지만 아니라는 의미로 ‘사이비(似而非)’라는 말이 있다. 용어와 형식논리가 같다고 궁극적인 경계가 같다고 판단하기에는 어느 정도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사실상 역대로 왕필과 승조, 성현영과 같이 불교, 특히 ‘반야’와 노장을 융합시킨 경우가 많이 존재한다. 왕필과 성현영은 도가의 입장에서, 승조는 불교의 입장에서 서로의 논리를 원용하였지만, 결코 궁극적인 경계를 혼용하지는 않은 듯하다. 후기 조사선에서도 이른바 ‘노장화’를 이루었지만, 선사들은 그 행간에 불조와 조사들의 날카로운 칼을 숨겨놓았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책의 저자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여 마지막 장에 선과 노장의 유사점과 상이점을 논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는 좀 더 신중하게 판단을 유예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

 

김진무
 원광대학교 강사.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중국 남경(南京)대학 철학과에서 《불학과 현학의 관계연구(佛學與玄學關係硏究)》(中文)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부교수 역임. 현재 원광대, 서울불교대학원대학 등에서 강의를 맡고 있다. 저서로 《중국불교거사들》 《중국불교사상사》 등과, 번역서로, 《선과 노장》 《도해 단경》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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