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준 교토불교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

시작하며

필자는 오래 전 마산에 사는 한 장애인소녀 화가가 티비에 출연하였을 때 [어떤 종교를 믿느냐]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던 것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저가 전생에 나쁜짓을 해서 이렇게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성당(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이 소녀가 불교를 그렇게 보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그러한 해석은 불교인으로부터 들은 것인가?

장애의 원인과 책임을 모두 본인에게 돌리는 이러한 통속적이고 자의적인 해석, 고통받는 자에게 의지처가 되기는 커녕 고통을 가중시키는 세간의 해석과 오해에 대하여, 불교는 어떠한 해명노력을 하여 왔는가? 한국불교는 그 소녀에게 장애가 일어난 원인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 소녀의 말을 들은 이후 이러한 의문이 필자의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고, 왠지 그 소녀에게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부담을 가져 왔다.

필자는 원래 사회복지사상과 사회복지정책비교연구를 주전공으로 하고 있으며 정책분야로서는 고령자복지를 주로 연구하는 사람이다. 최근 수년간은 한중일 3국의 고령자정책비교연구를 집중적으로 행하고 있다. 불교에 관해서도, 또 장애인복지에 관해서도 깊이 연구한 바가 없지만, 필자가 가져왔던 앞의 의문에 대해서 정면으로 부딪쳐 보고 싶다는 의욕이 있다.

글에서는 전후 일본불교계의 장애인복지사업을 소개하고, 국제장애인의 해를 계기로 본 일본 불교와 기독교의 장애인복지에 대한 인식을 비교해 보고, 일본불교의 장애원인에 대한 인식과 그 현대적 해석을 소개한다.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이 한국불교에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비교적 많은 비중을 두어 논의하고자 한다.

일본의 현상에서 한국사회의 시사를 발견하고자 할 때에는 한국과 일본의 장애인복지 기반에 차이가 있고, 사회복지에 대한 사찰의 역할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차이가 있다는 점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일본의 장애인복지는 수준급이라고 할 수 있고,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눈도 성숙되어 가고 있으며, 장애인을 사회속에 참여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북해도의 우라카와(浦河)라는 곳에서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정신장애인들이 모두 참여하는 경제공동체가 만들어져서 결과적으로 이 지역은 정신병원이 없는 지역이 되었다(탈시설화가 실현되었다). 차별을 유발하는 용어의 개선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올해부터는 예를 들어 치매라는 용어가 인지증(認知症)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었다.1 한국에서는 과거 장애자라는 용어가 차별적이라고 해서 장애인이라는 용어로 대체된 적이 있다. 원래 차별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주관적인 판단이 중시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요구들은 신속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사찰이 근대화 직전까지 국민의 삶터 속에 존재하면서 한국사찰에 비하여 커뮤니티와 보다 밀접한 관련을 가져왔다는 사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일본에서는 사회복지에 관련된 교육시설, 보육시설, 장애인시설, 정신병원 등의 기원이, 새로운 문물의 도입에서가 아닌 일본 사찰의 전통적인 활동에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서양사회에서는 교도소나 처형시설이 정신병원의 기원이 된 경우가 많이 발견되지만, 일본의 경우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전에 정신병자의 구호시설의 역할을 행하던 사찰이 메이지유신 이후 정신병원으로 발전해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1. 전후 일본의 불교장애인복지의 발전

(1)전전(戰前)

일본의 불교사찰은 지역주민의 복지에 대하여 커뮤니티센터와 같은 중요한 역할을 행하여 왔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 등 긴급한 일이 있을 때 피신하는 절이라는 뜻의 [카케코미데라] (驅け?み寺)는 현재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일상용어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일본불교가 지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지역과 밀착되어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전통적인 일본불교의 모습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明治維新(1868년)과 같은 해 발령된 신불분리령(神佛分離令)2이었다.

그것이 신불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폐불훼석(廢佛毁釋: 불교사원이나 승려를 배척하는 운동이나 사상)운동으로 전개되어 불교의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것을 계기로 불교계의 각성이 이루어지면서, 불교개혁이 단행되어 포교제도 쇄신, 사회복지사업의 중시, 해외포교의 진출, 대학이나 학교 등 새로운 승려양성교육의 확립 등을 내용으로 하는 근대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赤坂一, 1982: 77).

일본 불교사회복지의 역사에서 볼 때, 현대적 의미의 사회복지사업의 기원을 이룩한 것에는 서양문불을 경험한 많은 승려들의 기여가 있었다. 예를 들어, 와타나베(渡?海旭, 1872-1933)는 독일에 10년간 체재하면서,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동자보호를 적극적으로 행하고 있던 독일사회개량정책을 배운 뒤 귀국하여, 불교사회사업연구회를 결성하여 불교사회복지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자선구제사업에서 근대적인 사회사업에로의 분기점이 되는 사상적인 역할을 행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정토종(淨土宗)노동공제회를 조직하여 빈곤예방적인 사회사업을 선도하였다. 그의 주도로 1910년 淨土宗 창립자 호넨 (法然上人)의 700주기 기념사업으로서, 부랑인을 대상으로 한 무료직업소개소(숙박소 부설)가 설립되었는데, 거기에는 정토종 사찰의 재정적인 지원이 있었다.

1911년 정토종노동보호협회에 이어 노동공제회가 설립되었고 그것은 明治時代의 대표적인 시설이 되었다. 정토종노동공제회규칙 제2장은 [본회는 노동자의 생활상황을 개선하고 향상시키는 목적으로써, 노동기숙사, 음식물 실비제공, 유아의 주간탁아, 직업소개, 질병구호, 주택개량, 기타 필요한 사업]을 그 사업으로 정하고 있다(吉田久一、2003: 98-104).

(2)전후 복구 및 부흥기

제2차대전의 패전후 전후 복구기에 있어서, 불교사회복지활동은 장애인시설의 개설이나 단체의 결성, 불교경전의 점자사본이나 점자번역사업 등의 활동이 산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시설의 개설이나 단체의 결성에 있어서는, 1952년 三重縣에 있는 정토종사찰(?永寺)이 신광회라는 이름의 난청자연맹을 결성하였다. 같은 해 靜岡縣의 정토종사찰(大分寺) 주지가 신체장애아시설을 설립하였고, 1956년에는 日蓮宗 사찰(久遠寺)이 정신박약아교육시설을 설립하였다. 한편, 불교경전 등의 점자사본이나 점자번역사업이 이루어져서, 1953년에 淨土宗 知恩院에서는 한 신자의 기부금으로 의역한 遺??의 점자판을 650부 작성하여 전국맹아학교 등 맹인시설에 무료로 배부하였다. 또한 1954년에 大阪에서는 맹인후생시설의 점자사본사업에 협력하는 [중앙점자도서관봉사회]가 결성되었고, 東本願寺 등이 이 운동에 참가하였다.

고도경제성장기에 들어 서면, 장애인복지활동은 (1)불교경전을 중심으로 한 점자사본, 점자번역사업, (2)불교계복지시설의 개설 등 두가지의 사업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長谷川匡俊編, 2003).

불교경전을 중심으로 한 점자사본, 점자번역사업에 대해서는, 점자번역시업에 대한 각 방면에서의 표창기록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1959년 金澤市 淨土宗 사찰주지는 맹농아학교에 점자책을 보낼 것을 제안하여, 金澤 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점자강습회를 실시하였다. 동년에 臨濟宗의 사찰이 중심이 되어 맹인용 불교경전출판을 위한 [慈眼協會]가 설립되어, 점자번역된 불교입문서를 각 학교에 발송하였다. 淨土眞宗 本願寺派는 전국 맹학교 71개교와 맹인시설 19개소, 점자도서관 등에 점자번역서를 배부하였다. 여기에는 교도소 재소자와의 협력이 있었다.

이 시기에는 장애자관계의 시설이 많이 설립되었다. 우선 1959년에 淨土宗 長野敎區 사회복지법인이 정신박약아 통원시설 및 보육소를 준공하였고, 1960년 石川縣의 日蓮宗 사찰에서 정신박약아시설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 大阪府의 眞言宗 사찰에서는 [맹인의 집]이 개설되었고, 이어 맹인을 위한 노인홈도 설립되었다. 1963년에는 奈良의 東大寺 법인이 病舍) 새로 지어 신체장애아의 수용보호를 행하였고, 그 후 한번에 50명을 치료할 수 있는 중도장애 전문병동이 완성되었다. 1964년 長崎縣의 日蓮宗의 한 사회복지법인이 정신박약자시설을 창설하였고, 뒤이어 각지에서 정신박약아시설과 지적장애시설이 완공되었는데, 직업훈련실이 부설되어 있었다. 1972년 大阪府는 지체부자유아 시설을 개설하여 그 운영을 四天王寺 복지사업단에 위탁하고 있다.

(3)경제성장기 이후
1981년의 국제장애인의 해를 계기로 각 종파는 장애인문제에 적극 대응하였다. 그 중심이 된 것은 (1)장애인시설의 설립과 확충, (2)사찰의 장애인을 위한 설비의 충실화, (3)장애인 차별문제 해결을 위한 계몽활동으로 집약된다. 먼저 다양한 지역의 불교계시설 개설은 다음과 같다(長谷川匡俊編, 2003).

ㆍ1976년 淨土宗 사회복지법인 정신박약아시설과 유아원 개설
ㆍ1977년 日蓮宗 사회복지법인 정신박약아 갱생시설
ㆍ1978년 天台宗 법인 장애아의 통원시설(100명 규모)
ㆍ1980년 天台宗 법인 정신박약자 통소재활시설 개설
ㆍ1981년 眞言宗 와상상태 시각장애노인을 위한 특별양호노인홈(요양원)
ㆍ1981년 淨土宗 신체장애자요호시설 개설
ㆍ1983년 日蓮宗 일련종 정신박약자 갱생시설(30명)

1980년대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단체로서 四天王寺 복지사업단이 있다. 1985년 재가 발달장애아동의 집단적 원조나 자립생활을 위한 지도훈련을 목적으로 한 四天王寺 요육센타가 개설되었고, 1988년 신체장애자요호시설, 1992년 지적장애자갱생시설, 동년 10월에 중도장애자 주간보호서비스센터를 개설하고 있다.

사찰의 장애인을 배려한 설비도 발전하였다. 사찰이나 불교관계시설이 그러한 설비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된 것은 국제장애인의 해를 앞둔 1978년경이다. 사찰에서는 장애를 가진 참배자와 고령자에게 대응한 바리어프리 설계, 시공를 시작하였고, 그것은 종계계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1982년 창립106주년의 京都平安學園은 불당을 완공했는데, 불당에는 점자표시판, 점자블록, 휠체어용 스로프 등이 완비되어 있었다. 또한 일반사찰에서도 설법에 대비하여 청각장애인을 위한 보청기를 배치하거나, 사찰의 종합안내소에 점사소식지를 배치하는 등의 활동이 있었다.

2. 불교장애인복지의 사례: 한 시각장애인스님의 활동

(1)일본불교와 시각장애인

일본의 시각장애인복지에 있어서 불교의 공헌은 크다. 일찍이 廢佛毁釋의 폭풍기에 휘말려 있던 1878년에, 淨土宗 본산 知恩院과 東西本願寺를 중심으로 한 불교계는 京都에 시각, 청각장애인의 교육과 복지의 거점이 되는 [京都盲啞院]을 설립하였다.

[눈먼 거북과 부목(浮木)]의 설화는 法華經에도 나오는 이야기이고, 불교경전에서도 5안(肉眼, 天眼, 慧眼, 法眼, 佛眼)을 가르치고 있다. 불상을 만들어 開眼의 의식을 행하는 것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고통속에 있는 시각장애인이, 원래 불교가 가진 무차별평등의 사상에 끌리는 것은 당연히 이해될 수 있다. 모든 중생은 성불할 수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는 불교의 가르침은 광대한 복음이었으며, 사람 각각은 모두 외견은 달라도 마음속에 불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사람과 부처님사이에 조차도 경계가 없고 평등하다고 하는 이 교리가 맹인에게는 더 없는 구원의 복음이 되었던 것이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 불교는 매우 많은 종파로 나누어져 있다. 그것은 그만큼 불교경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종파중에 淨土門(淨土宗이나 淨土眞宗 등)이 특히 시각장애인에게는 큰 의지처가 되었다. 그것은 이 종파의 稱名念佛卽得往生(아미타불만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곧 왕생할 수 있다)라는 易行道가, 각 종파의 복잡한 교의와 복잡한 수행과 계율 속에 방황하지 않고 의지할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赤坂一, 1972: 135). [念佛이야말로 無碍의 大道]라고 설법은 맹인에게 慈眼과 佛眼이라는 마음의 눈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본인 스스로가 시각장애인으로서 장애인복지발전에 헌신한 승려 曉得의 활동을 소개해 둔다.

(2)曉得(山本曉得: 1886-1932)의 생애

曉得은 福井縣에서 태어나 총명한 아이로서 주위의 기대를 받았으나 7세때 목욕탕의 세균으로 양눈을 실명하였다. 그러나 실명 후에도 재주가 남달라 세공 등에 특별한 기술을 보이는 등, 全盲者로서의 날카로운 감각과 우수한 지능 등이 어우러져 일반인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특별한 통찰력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6세때인 1901년 京都盲啞院에 입학하였는데, 교육에 의해 재능이 훌륭하게 연마되어 재학중인 6년간 맹학교에 굉장한 수재가 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1907년 우수한 성적으로 맹아원 졸업 熊本의학전문학교(현, 熊本의과대학)부속병원 침, 마사지과 봉직하게 되면서, 熊本盲啞院을 운영하며 맹인을 지도하였다. 29세 때(1914년)에 石川縣立 의학전문학교(현, 金澤大學 의학부)로 전근하게 되었는데, 金澤가 淨土眞宗의 창시자 신란(親鸞)의 출신지이기도 하여, 불교에 경도되어 개종하여 淨土眞宗의 신자가 된다. [맹인이 구원받는 길은 불교 이외에는 없다]는 신념을 굳히게 된 것이다.

1920년(35세), 독실한 카토릭신자인 부인과 협의 이혼하고 이후 京都에서 침 마사지업을 하면서 독신생활을 하였다. 大谷大學의 특별한 배려로, 동대학의 특별청강생으로 3년간 불교를 전문적으로 배우게 되었고 그 해 출가하였다. 그 3년간은 철학, 불교학, 淨土眞宗學의 공부에 맹렬히 정진하였고, 윤리학이나 철학, 관련학문에도 정진하여 慧眼, 佛眼, 心眼을 열어갔다. 大谷派의 교사시험시에는 그의 답안지를 보고 시험관이 혀를 내둘렀다고 하며, 연구회를 통하여 교류하던 京都大學 교원들로부터도 놀랄만한 평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불전을 깊이 읽을 수 있게 되어, 그것이 일반적인 지식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우치고, 독서의 가장 가치있는 것은 불교성전을 읽는 것]이라고 확신하여, 그 성전을 시각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는 점자번역사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3 曉得은 1927년 필생의 사업인 [新譯佛敎聖典]의 점자번역 시작하여 1928년에 6책을 발행한 이후 매월 혹은 격월로 1책씩 번역해 나갔으나 그동안 건강을 해쳐서 47세의 나이로 입적하게 되었다. 근대일본맹인사에 있어서 위대한 성자로 기록되고 있다.

(3)시각장애인을 위한 복지실천활동

曉得은 출가 다음해인 1921년, 점자인쇄기를 구입하여 弘誓社를 설립하여, 大谷派의 지원으로 일본최초의 점자불교지인 [佛眼]의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일본에서 맹인을 위한 점자투표가 행해지게 되어 맹인의 공민권이 보장된 것은 1925년의 일이다. 이 시기 이전 인 1922년 曉得 등이 중심이 되어 京都에서 [佛眼協會]가 결성되었다. 佛眼協會는 맹인교육과 복지향상을 위하여, 시각장애인의 무료진료, 중도(中途)실명자 구제를 위한 안마, 마사지, 침술의 강습회를 개최하였는데, 1929년에는 [京都佛眼協會]로 개칭하였다. 그 이후 야간무료진료, 안마나 침술의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932년에는 7천명이 넘는 환자를 치료하였고, 전후에 이 협회의 침구강습회는 [佛眼厚生學敎]로 京都府의 인가를 받았고, 그 이후 후생성의 인정학교가 되었다. 그 후 1995년 佛眼鍼灸理療學校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中西直樹, 2004: 170-173).

3. 국제장애인의 해를 계기로 본 장애인식: 일본 기독교와의 비교

(1)국제장애인의 해와 일본불교
1981년의 국제장애인의 해(International Year of Disabled Persons)는 불교계의 장애인복지방향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불교장애인복지활동은 장애인의 사회참가를 촉진하고,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우선 장애인복지를 위한 모금활동이 전개되었다. [다나의 날]4 행사로 대표되는 불교부인연맹(佛敎婦人連盟)의 활동 등을 통하여 휠체어 등의 기증이 이어졌다. 또한, 장애인지원을 위한 서클단체활동이 활성화되어 점자번역과 수화의 보급이 촉진되었다. 예를 들어, 1979년 山梨縣의 日蓮宗 단체는 700부의 점자책자를 무료 배부하였고, 1981년 曹洞宗에서는 점자의 원간지를 편집 발행하였으며, 淨土眞宗의 점자번역서클은 점자책을 기부하고 있다. 또한 불교전도협회에서도 맹인복지협회 등에 점자책을 기증하였으며, 日蓮宗 단체에서는 법화경입문 번역과 함께 시각장애인을 위한 낭독자원봉사를 행하기도 하였다. 점자번역 강습회 등도 개최되었으며, 1981년 盲導犬 보급추진을 목적으로 한 단체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한 조사에 의하면, 국제장애인의 해를 계기로 한 불교계의 현실인식은 기독교계(카토릭 포함)의 그것에 비해 미흡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예를 들어, 300개 이상의 말사나 포교소를 가진 유력불교종단 40종단에 대한 1981년 전화조사에 의하면, 전화에 응답한 종단관계자 중 [국제장애인의 해]를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75.5%였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국민에 대한 여론조사(동년 9월 26/27일 조사)에서의 인식도가 87.1% 였던 것이 비하면 오히려 낮은 수치였다.

더우기 국제장애인의 해가 1981년 한 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 계속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大橋隆憲, 1982). 이것은 일본 불교계의 장애인관이 현실적인 차별문제 등에 관한 심각한 인식과 반성을 전제로 하지 않은, 안이한 인식, 즉 불교는 만민이 평등하고 따라서 사찰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평등하게 대우하므로 당연히 평등한 장애인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인식이라고 비판받았던 것이다. 자신이 차별하고 있다는 인식이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차별받는 장애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2)국제장애인의 해와 일본 기독교계(카토릭포함)

일본의 불교계에 비하여, 국제장애인의 해에 대한 기독교 교단의 인식은 보다 적극적이었다고 평가된다. 예를 들어 카토릭계에서는 1980년 12월 [국제장애인의 해 사제단 호소]를 발표하였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국제장애인의 해의 목표에서 본다면, 교회가 아직까지 완전히 교회답게 되어 있지 않다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카토릭사회는 얼마만큼 장애인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 점은 고사하고, 교회 안에서조차도 완전한 참가나 평등이 충분히 지켜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닌가?](カトリック新聞 1981.1.4일자)라고 하여 카토릭계의 반성과 새로운 결의를 나타내고 있다. 곧 이어 카토릭계는 [장애인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교서-봉사의 4원칙]을 발표하고, 東京敎區에서는 [장애자문제위원회]를 설치하고 있다(大橋隆憲, 1982).

일본크리스트교협의회(NCC)는 1979년NCC총회의 결의에 근거하여 [장애자와 교회문제위원회](1979.6)가 설치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문제는 단순히 장애자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문제, 즉 교회가 주로 비장애인들의 교회가 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다]는 문제인식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위원회의 첫 사업 중의 하나는 1981년 세계기독교협의회(WCC) 신앙직제위원회와의 함께 [신의 가족-장애인과 교회]라는 책을 출판한 것이었는데, 그것에는 장애인과 관련하여 교회의 모습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교회는 육신의 가족에서 신의 가족으로, 시대의 세속적 평가에서 신의 평가에로의 전환이 약속된 해방의 장소이다. 그러나 교회의 주류는 여전히 강자이자 유력한 사람들이 되어 있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효율을 중시하는 세속의 모습이, 그대로 교회에 투영되고 있다는 비판을 들을 만한 것이 아니던가?](島崎光正, 1981).

이 책의 첫장 [장애인이 없다면 완전한 것이 아니다](Leslie Newbigin, Not Whole without the Handicapped)는 글은 장애인관에 대한 교회의 통렬한 반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U. バッハ?H. ウイルキ???木優他著, 1981: 36-37). [강한 자, 완전한 자, 건강한 자가 중심에 있고, 장애인이 그 주변에 있다는 생각은 강자의 환상이다. 교회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고, 거기에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고 환상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안된다. 교회의 중심에 장애인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십자가에 의해 우리들을 치유하고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지만 자신을 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던 그분을 부정하고, 모욕하는 것이 될 것이다。

4. 불교의 장애개념과 그 해석의 문제

(1)현대적 장애의 개념과 그 발전
한국의 장애인복지법은 장애인을 [신체적 정신적 장애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제2조)로 규정하고 있고, 일본의 장애자기본법(障害者基本法: 1970년 5월에 시행된 심신장애자대책기본법을 1993년 12월에 개정) 역시 장애자란 [신체장애, 지적장애 혹은 정신장애가 있음으로 하여, 장기간에 걸쳐서 일상생활 혹은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한을 받는 자](동2조)로 규정하고 있다.

장애의 개념은 국제적으로 볼 때에도 발전적으로 변화되어 왔다. 1975년 국제연합에서 결의된 장애인의 권리선언에 의하면 [장애인이란 신체적 혹은 정신적인 능력의 불완전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힘으로는 통상의 개인생활이나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을 확보하기가 부분적으로 혹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사람]으로 규정되었다. 그 후1980년 국제연합에서 채택된 [국제장애인의 해 행동계획]에서 세계보건기구는 국제장애분류(ICIDH)를 제창하였다. 그것은 장애를 기능손상, 능력장애, 사회적 불리라고 분류하였다. 그러나 [기능장애가 생겨서 능력저하가 일어나고, 사회적 불리가 발생한다]고 하는 순차적인 도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되어, 2001년 새로운 분류로서 공표된 것이 국제장애분류 개정판인 [국제생활기능분류](ICF)이다.

새로운 분류에서는 기능저하를 기능 및 구조, 능력저하를 활동으로, 사회적 불리를 참가로 하고, 각각의 영역에서의 부정적인 문제를 [기능 구조상의 문제, 활동의 제한, 참여의 제약]으로 보고 있다. <표1>에서 보듯이 새로운 ICF에서는 기능장애가 곧 능력저하가 아니다. 이것은 기능저하의 원인이 단순히 그 인간 고유의 문제(개인인자)뿐만 아니라 물리적 사회적 제도적인 많은 환경요인에 의해 달라지고, 그 각각의 배경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에 근거한 것으로, 장애는 환경인자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 것으로 간주되므로, 장애는 누구라도 가질 수 있고 특별한 것이 아니다.

이상의 개념들을 종합해 보면, 장애의 현대적 개념의 핵심적 요소는 첫째, 어떤 원인에 의해 정신적, 신체적으로 고정적인 기능장애 혹은 결함을 가지고 있는 것, 둘째, 그러한 장애로 말미암아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혹은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한을 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불교의 장애 개념

그런데, 불교에서의 장애의 개념과 범위는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그것과는 어떻게 다른가? 일본에 번역되어 있는 다양한 불경에 나타난 장애의 범위에 관한 한 연구(?海 正, 1979)에 의하면, 불경에 나타난 장애의 명칭은 다음의 다섯가지이다. 즉, 신체적 장애, 병약, 기형, 정신적 장애, 악업(惡業)이 그것이다. 그 각각의 내용은 <표2>에 나타난 바와 같다.


불전에 나타난 장애의 개념을 현대적 장애개념과 비교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海正, 1979).

(1)불교적인 장애개념은 현대적 의미의 장애를 내포함과 함께, 그 외연이 넓고 일과성의 질병이나 장애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장기간에 걸친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의 적응장애를 가지지 않은 경우라도, 장애로 간주하고 있다.

(2)현대에서는 정신적 장애를 구체적이고 좁게 규정하고 있는 데에 반하여, 불교적 개념은, 심란, 결백증, 의심증 등 사회생활에 부적응을 초래할 가능성을 높이는 다양한 정신적 문제를 장애의 개념에 포함시키고 있다.

(3)현대의 장애인개념은 사회적인 개념이지만, 불교의 개념은 종교적 개념이다. 불교적 정의에 의하면, 인간존재는 고통인데, 일체중생을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에서 [인간의 이상세계인 니르바나(nirvana: 열반)에 도달하는 데에 장애가 되는 행위를 하거나 그러한 정신적 신체적 상태에 있는 자]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구제되어야 할 고뇌하는 인간]이 장애인이다. 따라서 범죄적인 행위와 악업도 장애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표3>은 불교적 개념의 장애와 현대적 개념의 장애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불교에서는 비장애인이란 일부의 현자와 성자를 말하며, 부도덕이거나 어리섞음으로 인하여 열반에 도달할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장애로 분류되어 있다. 이러한 관념에서 본다면 사회는 [대부분의 장애인과 소수의 비장애인]으로 구성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적인 개념으로 본다면, 범죄나 일시적 질병, 그리고 악업 등은 장애 개념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대부분의 비장애인과 소수의 장애인]으로 구성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회의 다수가 장애인이라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불교계에는 장애인 차별이 없는 것일까?

5. 한국불교에의 시사

(1)불교는 소외받은 사람들 편에 있었는가?

종교계가 장애인을 진정으로 섬기는가? 한국불교는 장애인의 편이었는가?

필자는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는 답을 하면서, 그 근거의 하나로, 좀 엉뚱한 것 같지만, 지역별 종교분포를 들고 싶다. 한국의 지역별 종교분포를 <표4>에서 보면, 부산과 대구의 경우, 종교를 가진 사람중 불교가 각각 72.0%와 62.7%로 압도적으로 많다(기독교와 천주교의 비율은 각각 25.7%, 35.3%). 그에 비하여 광주, 전남, 전북의 경우를 보면, 불교가 각각32.6%, 36.6%, 28.1%에 불과한 반면, 개신교 및 천주교의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고 있다(각각 73.5%, 58.8%, 67.2%). 이것은 극명한 대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상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흔히 경상도 지역이 보수적이라고 일컬어진다. 보수라는 개념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은 [변화에 저항하는 것]에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전라도 지역은 들판이 넓고 곡물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에, 소수의 대지주가 대규모의 소작인을 동원하는 생산시스템이 정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상도 지역은 중세 유럽에서 보여지는 요멘(yeoman)과 같은 소규모 자작농민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생산양식이 매우 대조적이었다. 그 만큼 전라도지역에서 수탈이 심했고 민생이 피폐했을 것이라는 점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민중들 사이에서 삶의 새로운 비전을 찾고자 하는 노력도 그만큼 절박했을 것이고, 그것이 새로운 종교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교가 민중을 핍박하는 세력에 대하여 대항하거나, 보다 핍박받는 사람들에게 안식처와 새로운 희망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필자는 그러한 현상의 책임이 현재의 불교에 있다고 추궁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 한국불교는 현재 가장 많은 신도수를 자랑하는 종교이며, 최근의 종교관련 조사결과를 보면, 신도수의 증가율도 타종교에 비하여 높다.5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걸고 의지하며, 앞으로 의지하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종교가 불교인 것이다. 더구나 필자는 한국사회의 시급한 과제가 [평화적이고 관용적인 사회만들기]이고, 그것이 우리사회의 희망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맏고 있는데, 그러한 사회원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종교가 다름 아닌 불교라고 믿고 있다.

평화적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수록 불교적인 삶을 교리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실천적으로 선도해 갔으면 하는 불교계에 대한 기대가 어느 때보다도 높아져 있다고 본다. 그럴수록 한국불교가 지금까지 장애인을 포함하여 보다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다 많이 배려하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하여 몸소 노력해 왔는가 하는 질문을 피하지 않도록 촉구하고 싶은 것이다. 새로운 발전의 기회는 그러한 반성에서 나온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일본의 경우, 사회적 및 신분적 차별을 용인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폐불훼석의 바람이 거세던 시기에, 그에 반발하기 보다는, 그것을 심심한 반성의 계기로 삼았던 것에서, 일본의 근대적 불교사회사업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사회전반의 복지추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불교의 장애원인론

여기에서 말하는 장애의 원인이란 의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장애의 직접적인 원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왜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정의 사람들에게서 장애가 일어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어떤 종교라도 이에 대해서는 일정한 견해가 있을 것이다. 장애를 가지게 된 당사자로부터 [왜 저는 장애를 가지게 되었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불교는 어떻게 답할 것인가? 한국불교는 이러한 질문에 정면으로 답할 필요가 있다. 그 문제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해석하여 옳바른 원인관을 세우고, 불교인들은 먼저 자신들이 그것을 공유하고, 나아가 그것을 사회에 적극적으로 알려 나가는 일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될 것이다.

불교는 인도의 산물이다. 카스트제도로 알려져 있는 극심한 차별이 뿌리깊어, 지금까지도 유례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물론 석존은 그러한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長谷川匡俊, 2002: 95-96). 또한 일본불교에서도 그러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불교인의 노력들이 있어 왔다.6 인도사회의 산물이었으므로 비록 불교가 깊은 인간평등적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과정에서는 그 사회의 부조리한 관습을 다소 용인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이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때에 따라서는 민중교화의 수단으로서 세속적이고 교훈적인 색채의 교설을 전파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고 설법하라는 뜻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반영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러한 경우의 교설을 불교의 본질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그러한 통속적 해석은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輪廻?生과 인과업보는 특히 장애인 당사자에게는 조심스럽게 그리고 현대사회에 맞도록 해석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盲僧 曉得은 스스로 불교의 장애원인론을 검토하고 있다(山本?得, 1934). 그는 우선 인생의 과거, 인생의 성립에 관해서는 기본적으로 두가지의 생각이 있다고 하여, 목적인생관과 인과적 인생관으로 나누고 있다. 목적인생관이란 인생이라는 것은 좋든 나쁘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연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 즉 인생의 모든 사실에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다는 생각이며 失明이라는 사실도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생을 신이 창조한 것으로 보는 기독교의 생각이 여기에 속한다고 하고 있다.7

이에 대하여, 인과적 인생관 인연업보관이라고 할 수 있는 불교의 인생관은, 인생이나 세계라는 것이 신과 같은 존재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도 아니라고 보고 있다. 불교는 인생의 모든 일이 과거의 원인에 관련하여 일어난 결과로 본다. 어떤 특정한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은 무수무량인데, 인과 연의 움직임이 현재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한가지 중요한 것은, 불교적 인생관이 숙명적 인생관(현재의 모든 과보는 모두가 과거에 만들어진 약속의 표현이기 때문에 인력으로서는 어쩔수 없다는 인생관)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석존은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돌리는 바라문의 숙명설에 반대함과 동시에, 당시 제창되고 있던善惡無因說(모든 것를 우연으로 보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따라서 인연관은 결코 고정된 진리가 아니고 변화 그 속에 나타난 움직이는 보편적인 진리이다.

曉得은 우리들 인생의 현실이라는 것이 자연적 인연과 인간적 인연이 결합하여 나타난 업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현실이 그렇게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자연적인 요소 이외에 인간의 도적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질병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원인도 있겠지만, 부주의 등의 도덕적인 원인도 있다는 것이다. 질병 뿐만 아니라 모든 인생사는 자연적 성질과 도덕적 성질이 연계된 인연과, 그 업력에 의한 것이며, 이것은 현재의 인생에 그치지 않고, 먼 과거세계와 미래세계에까지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소위 三世因果說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명의 원인도 인연과 업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속에는 인간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하는 원인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曉得은 본인이 장애 당사자이기도 하였기에 장애원인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가능하였다고 생각되지만, 그러한 해석과 깊은 통찰이 속세에 있는 장애인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필자는 그에 대한 보다 명쾌한 답이 부처님의 [무기(無記)의 가르침]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부처님 제자 마룬캬풋타가, 이 세상은 영원한지 아닌지, 세상에 끝이 있는지 없는지, 생명은 육신과 같은지 아닌지 등 부처님이 한번도 설하지 않았던 문제의 답을 주지 않는다면, 수행을 그만두겠다고 하던 것에 대하여, 부처님은 [독바른 화살] 비유를 통하여 명쾌하게 답하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아서 사람들이 의사를 불러 화살을 뽑고 치료를 하려 하는데, 그가 말하기를, 활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계급의 사람인지, 활이나 화살은 어떤 모양의 것인지 등등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을 수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무 것도 알아내기 전에 죽고 말 것이다.

이 세상이 영원한지 아닌지, 세상에 끝이 있는지 없는지, 생명은 육신과 같은지 아닌지 등의 문제제기는 수행의 근본원리가 아니고, 번뇌의 소멸이나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상이 유한하든 무한하든, 정신과 육체가 같든 다르든, 세상의 끝이 있든 없든, 나서 병들고 늙고 죽은 현실의 고통이 있다. 나는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서부터 벗어날 것인가를 설할 뿐이다.](권오민역, 1982:70-71; 浪花宣明、2004: 303-311)

만약 어떤 장애인이 [나는 왜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까? 어느 전생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결과입니까?] 하고 부처님께 다가서 묻는다면,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하실 것으로 확신한다. [그것은 답이 있을 수 없는 물음이며, 답해도 아무른 도움이 되지 않는 물음이다. 나는 그러한 물음이야말로 번뇌이고 또한 번뇌의 원인이라고 설할 뿐이다. 전생이 있든 없든, 전생에 어떤 일이 있었든 말든, 현재의 장애라는 고통이 있고 번뇌가 있다. 나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은 장애는 전생의 어떤 악업에 의한 결과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불교의 입장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장애인 당사자가 자신의 장애의 원인이 전생의 어떤 행에 있다고 것을 믿어 받아들인다면, 장애의 극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전생의 행이 진리인 것은 아니며, 다만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한 방편일 뿐이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에 집착할 이유가 없듯이, 그러한 고통에서 벗어난다면 전생이라는 문제에는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전생이란 그러한 방편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사회사업방법론의 심리치료분야에서는 [통찰요법]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심리불안의 원인을 스스로가 찾아보는 것이며, 그것을 찾아 내었을 때, 심리불안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스스로 찾아낸 그 원인이라는 것이, 자신을 괴롭혔던 진정한 그 원인인지 아닌지에 지나친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문제가 해결된다면, 자신이 짐작한 원인규명이 진정한 것이었는지 아닌지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고, 다만 그 원인이 진정한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믿으면 되는 것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불자로 하여금 이런 종류의 통찰을 하게 하여 번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방편으로써 이 [전생]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왔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애인에 상처를 주기는 커녕, 장애의 고통에서 벋어나기 위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불교의 이러한 입장을 사회에 전파함으로써, 장애인당사자에게 고통을 가중시키는 통속적 원인론을 불식시키는 일을 더 이상 미루어서는 안된다.

(3)장애(시각장애)에 대한 불교적인 눈과 자비

전후 일본사회복지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저명한 두 사람(宮武達男와 鈴木信一)의 대담에서, 시각장애인 아이들에게 바이올린교육을 시킨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중에 [흔히 사람들은 맹인이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 잘못된 선입관을 가지고 있어요]라는 이채로운 대화가 불교사회복지학회지(堀要氏, 1982: 3)에 소개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만 나올 수 있는 발언이자, 우리의 장애인관에 깊은 시사를 주고 있다.
장애인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는 장애인을 만났을 때, 장애를 보고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앞을 볼 수 없는 것은 하나의 장애이고, 그 때문에 많은 것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사회가 원조를 제공해야 할 대상]으로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앞장에서 본 바와 같이 불교적인 눈으로 보면, 장애란 [열반에의 도달을 방해하는 부도덕이나 어리섞음]일 뿐이므로, 시각장애인이 가질 수 있는 [사물을 본다는 의미에 대한 깊은 생각과 깊은 정신세계], [눈으로 사물을 보지 않기 때문에 만들어진 독특한 반응양식과 특별한 감각]에 오히려 더 깊은 관심과 존경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필자가 소속하고 있는 불교대학은 사회복지부문의 비중이 큰 대학이기 때문에, 켐퍼스에서 맹도견을 보거나 시각장애인체험을 하는 학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시각장애인체험의 취지에 대해서는 보다 불교적인 이해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그 취지는 시각장애가 얼마나 불편한 것인가를 체감하고 일반인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회시스템의 개선노력을 경주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불교적인 눈으로 본다면 그것은 보다 지엽적인 부분이 아닐까? 보다 근본적인 취지는,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물리적인 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통찰력과 정신세계에 대하여 존경과 경외의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된다.

한국불교가 불교적 관점의 정체성에 근거하여 장애체험의 파라다임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새로운 생각들을 사회에 불어 넣어 주기를 기대한다. 불교적인 접근이 부진했던 이유에는, 불교복지의 정체성을 확보되지 못한 것에도 그 원인이 있다고 보지만, 타인의 생각이나 정신세계를 존경심으로 이해해보려는 태도가 매우 부족한 현재의 한국사회의 문화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본다.

한편, 三世因果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존재란 [과거를 짊어지고 미래를 잉태하는 영원한 오늘로서의 역사적 현실](?海正, 1979: 67-68)이다. 현세 이후의 삶이 현재의 삶에 의해 잉태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희망인 동시에 크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自力作善이 가능한 일부의 賢者는 별개이지만, 自力作善의 길을 갈 수 없는 사람은 여래의 善因을 받는 길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 그러한 불안한 상황에 처한 중생들에게 있어서, 참회의 마음을 일으켜 오로지 염불한다면, 善因이 없어도 [諸法實相除滅罪]의 원리에 의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더이상 숭고할 수 없는 자비라고 ?得은 결론짓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 인과관이 곧 여래의 자비관(山本?得, 1934: 449)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필자는 그것이 심오한 통찰이라고 공명하고 있다.

來生에 대한 생각과 걱정,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많은 생각과 번뇌에 고통받는 사람에게 있어서, 오로지 염불로써 성불할 수 있다는 淨土門의 가르침은 더 이상 없는 慈悲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來生이란 죽음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 현재 이후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현재의 고통을 제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래의 삶에 대한 불안이 남다른 장애인들이 이러한 숭고한 불교의 자비를 경험하도록 불교가 그들에게 한걸음 더 다가서면 어떨까?

(4)불교적 삶의 확산운동과 벽허물기

1981년 국제 장애인의 해는 ?완전참가와 평등?을 그 모토로 하여 장애인과 노인의 완전한 사회참가를 저해하는 세 개의 벽, 즉 [마음의 벽, 제도의 벽, 그리고 물건의 벽]을 허물 것을 촉구하였다. 그 가장 높은 벽은 물론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의미하는 마음의 벽이다. 하지만, 이러한 벽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불교사찰이 장애인들의 방문과 참배가 쉬이 이루어지도록 다양한 바리어프리설비를 갖추는 것은, 물건의 벽을 넘는 노력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가 큰 교육적 기능을 하는 것이므로 장애인의 편견과 차별철폐의 중요한 초석이 된다. 일본불교계에서의 대응이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많이 정비되어 있음은 제1장에서 확인하였다.

불교사찰 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시설이나 학교 등의 경우에도 그러한 노력을 하여 한국사회의 평화적이고 복지적인 분위기 조성에 불교가 솔선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