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장마가 걷힌 다음, 모처럼 맞는 맑은 휴일 경북 김천시에 소재한 직지사를 걷는다. 직지사는 12년 전 시인이 되겠다는 나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준 소원성취의 본향이다. 이곳에 첫발을 딛던 2007년 이맘때, 서울에서 오는 동안 태풍으로 폭우가 쏟아졌다.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탓에 사고가 날까 봐 먹구름만큼이나 가슴을 조였다. 그렇게 도착하니 마음 졸이던 험상궂은 날씨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눈 부신 햇살을 내어주었다.

하늘은 그날처럼 맑고 높아 가슴 벅차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눈시울 젖게 하는 추억으로 나를 데려갔다. 도심의 먹먹하던 나의 마음은 직지사 입구로 들어서자 그동안의 혼탁해진 숨골이 열리는 듯했다.

백일장이 열린 다음 날, 물안개 핀 희뿌연 새벽녘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직지사에서’라는 시제를 입으로 되뇌었다. 나는 운이 좋게 300여 명 가운데 직지사라는 주제의 제3회 백수 전국시조백일장에서 장원을 수상했다. 그때 고 정완영 선생님이 시상하시면서 축하해 주셨던 모습이 떠올랐다.

직지사를 걸으며 그 당시 추억을 함께한 우물가에 다가서니 늘 허리 굽은 채로 묵은 책 보느라 밴 냄새는 사라지고 안온한 물소리가 혈관을 돌 듯, 내 안에 길을 내며 막힌 곳을 열어주는 듯했다. 이제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신 정완영 선생님은 계시지 않지만, 추억이 쌓인 그 숲길에서 “등단은 시작일 뿐 시집을 내야 비로소 시인입니다. 열심히 창작하여 훗날 꼭 시집을 내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신 말씀이 인경 소리처럼 들려오는 직지사의 오후였다.

나는 선생님의 당부처럼 그 후 3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 되었지만 왠지 시인이라는 말이 어색한, 풋내기 지망생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찰을 유유히 거닐다 보니 어느새 대웅전 앞. 자신을 태우며 푸르게 녹아 반짝이는 촛불을 들여다본다. 선생님께서 “시조의 초장은 ‘초의 불꽃’으로서 시작(詩作)을 알리는 것이며, 중장은 ‘초의 심지’로서 자신의 시어의 몸을 태워 녹이는 것이며, 종장은 ‘초의 받침대’로서 시인의 정신을 담는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30대 초반 젊은 기억 속 대웅전처럼 환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생님과 짧은 만남 이후 나는 그의 작품을 필사하며, 한 자루의 초처럼 초장, 중장, 종장을 언어의 촛불에 달구어 녹여서 나만의 작품을 완성하려고 애써왔다. 그럴수록 나의 언어는 시조 3장 안에 갇혀서 나의 생각만 불사르는 나날을 보내며 맘고생을 하였다. 그러다 조금씩 시조를 알아가던 차에 선생님께서 전화하셨다. 물에 젖은 풀잎처럼 가냘픈 어조로 김천에 올 수 있느냐 하셨는데, 당시 내 사정이 여의치 않아 선생님께 다음에 꼭 찾아뵙겠다는 말씀을 남겼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몰랐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일이라 선생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 가슴 한구석에 바위처럼 무겁고도 깊게 자리 잡았다.

‘제1회 백수 문화제’를 참석해 천불상 사이사이로 지나가는 군상들을 보며 선생님의 죽음을 이제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인연과 죽음을 받아들이고 그 인연과 나 자신의 마음을 똑바로 들여다봐야 하는 한층 어려운 관계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우연히 백수문학관 한쪽, 선생님 서재를 재현한 곳에 유물로 놓인 모자를 보았다. 그 모자는 선생님과 서울에서 잠깐 만났을 때 쓰고 계셨던 모자였다. 주인 잃은 모자는 혼자였지만 나를 보며 반기던 선생님의 모습이 고스란히 거기에 담겨 있었다. “서정화 시인 어서 오세요. 그동안 잘 지냈는가요. 그리고 여기까지 오시는데 힘드셨지요.”라고 하시는 듯했다.

선생님을 뵈었을 때 끝내 하지 못한 마음속의 고백이 있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을 방명록에 쓰는 순간, 돌아가시기 3개월 전 선생님의 부름에 응답하지 못하는 죄송스러운 마음도 모자처럼 가벼워지고 있는 듯했다.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직지사에서 방명록 뒷면처럼 넘어가고 있었다.

직지사를 나오는데 사찰 입구에 선생님의 대표작 〈직지사운(直指寺韻)〉을 새긴 시비가 눈에 들어왔다. “오가는 윤회(輪廻)의 길에 승속(僧俗)이 무에 다르랴만/ 사문(沙門)은 대답이 없고 행자는 말 잃었는데/ 높은 산 외론 마루에 기거(起居)하는 흰 구름.// 인경은 울지 않아도 산악만 한 둘레이고/ 은혜는 뵙지 않아도 달만큼을 둥그느니/ 문득 온 산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노메라.” 마치 선생님께서 나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듯이 세월의 무게에도 변하지 않는 시비로 꼿꼿하게 서서, 구름처럼 떠다니며 왔다 갔다 좌충우돌하며 살고 있는 나의 인생을 ‘두 수의 시조 풍경’으로 바로잡아주시는 듯했다.

집으로 돌아와 나는 ‘직지사’와 같은 사원 하나를 가슴속에 품게 되었다. 그 사원에서 나의 시는 더욱 깊고도 짙게 대웅전처럼 환해질 것이다. 우풍순조(雨風順調) 해야 풍년이 들 듯, 시작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초심으로 돌아가 박차를 가하라고 울려 퍼지는 백수 정완영 선생님의 ‘인경 소리’를 들으며.

허리를 꼿꼿이 펴고 모자를 쓰고 계시던 선생님이 그윽하게 웃으시며 들려주신 말씀이 다시 귓가에 찡하게 울려 퍼지는 듯하다. 나는 다시 한번 선생님의 ‘승속’을 묵묵히 따라가면서 고요하게 서 있는 중심 없는 중심으로부터 멀어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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