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향 동네 뒷산에 정토사(淨土寺)라는 절이 있다. 어린 시절에는 자주 정토사에 올라가 정우 들판을 바라보곤 했다. 정토사가 있는 정토산은 높이가 백이십 미터 정도 되는데, 일곱 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어 정토칠봉(淨土七峰)이라고도 부른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봉우리가 일곱 개나 되어 낮은 산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또한 산 앞으로는 광활한 평야가 있고 그 사이로 동진강이 흐른다. 무엇보다 산 중턱에 있는 정토사에서 바라보는 들녘의 낙조가 장관이다. 그리고 대웅전 옆 샘은 물맛이 으뜸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읍내에서도 물을 길으러 올 정도였다.

어린 시절에 나는 정토사에 올라 들녘을 바라보며 서울에 가서 출세하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였다. 출세해서 우리 식구들에게, 그리고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정토사에서 바라보는 들판을 모두 사 나눠주는 꿈에 부풀곤 하였다. 그때는 출세해서 돈을 벌면 고향에 내려와 들판을 사서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들판을 나눠주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나뿐만 아니라 동네 아이들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그것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대처로 나간 형들도 마찬가지여서, 우리 동네 남자라면 젊을 때 대처에 나가 돈을 벌면 나이가 들어 고향에 내려와 뒷짐을 지고 들녘을 어슬렁거리다가 생을 마쳐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시인 체사레 파베세가 〈선조들〉이란 시에서 자신의 고향 언덕을 가리켜 “우리는 여자도 없이, 등 뒤로 뒷짐을 진 채,/ 저 언덕들을 어슬렁거리기 위해 태어났다”라고 말한 시구가 내게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는지 모른다.

김제에서 사는 교회 장로이던 외삼촌이 중병에 걸려 누나를 전도해야 병이 나을 수 있겠다는 말을 듣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지만, 어머니는 초파일이면 매년 시주를 하셨다. 정토사가 범종 불사를 할 때 어머니는 꽤나 많은 쌀을 시주하여, 범종 안쪽에 내 이름과 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셨다. 아침저녁으로 절에서 범종을 치는 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범종 안쪽에서 댕그렁 댕그렁 울리고 있을 내 이름을 생각했고, 어머니의 말씀처럼 나는 부처님께 복 받은 아이라는 자부심에 마당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절에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정토사는 작은 절이지만 고려시대 때 담운 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칠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마을 아이들에겐 놀이터와 같은 곳이었다. 절 옆으로 감나무가 많아, 여름에 감이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아이들과 땡감을 따서 접시에 담아 뒤란 장독대에 올려놓고 소금물로 우려먹곤 했다.

나이가 들어 막상 도시로 나와 살게 되면서 출세하겠다는 결심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고 점차 우울한 청년이 되고 말았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정토사에서 들녘에 지는 낙조를 바라보던 기억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한자로 풀면 ‘맑은 비’를 뜻하는 고향 정우(淨雨)라는 지명도 그러하거니와 정토사와 정토산이 주는 밝은 어감은 들녘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져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끈질기게 염원하게 해주었다. 맑은 비의 기운을 타고난 들녘의 자식이란 자부심이 어렵게 사는 가운데에서도 삶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나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나는 종교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권정생 선생이 〈우리들의 하느님〉이라는 글에서 한 말씀에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글에서 권정생 선생은 1960년대의 농촌 교회에 대해 회상하며 “새벽 기도가 끝나 모두 돌아가고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비칠 때, 교회 안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마룻바닥에 눈물 자국이 얼룩져 있고, 그 눈물은 모두가 얼어 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 글을 읽을 때 “가난한 사람의 행복은 겨울 아침에 욕심 없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과 새벽 기도를 하며 흘린 눈물이 마룻바닥에 얼어 햇살에 반짝인다는 선명한 이미지가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토끼의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 굶주린 호랑이에게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내던 《본생경》의 수도승처럼, 불교의 종교성 또한 길 잃고 세상에 버려진 것들을 위한 욕심 없는 기도와 희생에서 비롯된다.

내가 어린 시절 정토사에 올라 들판을 바라보며 출세하면 고향 사람들을 위해 들판을 사주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어쩌면 동네를 든든하게 지켜주던 절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마을에 은은하게 퍼지던 범종 소리와 불경 소리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불교가 뭔지 모르면서도 나도 모르게 불교적인 마음가짐을 가졌던 것은 아닐지. 나는 시를 쓸 때 오현 큰스님의 법문 중에 “선은 나무의 ‘곧은 결’이고 시는 나무의 옹이 ‘점박이결’이다”라는 말씀을 자주 되뇌어본다. 나는 시가 세속을 떠나 존재할 수 없는 때가 묻어 있는 것이지만 내 안의 소중한 것들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간절함과 안간힘이 그런 ‘마음에 박힌 옹이’로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고향 정토사를 떠올려보면 범종 안에 새겨진 내 이름이 그대로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리고 범종이 울릴 때마다 범종 소리를 따라 내 이름이 은은히 고향 마을에 퍼져나가는 상상을 하면, 출세하여 돌아와 마을을 구원하고 싶었던 한 소년의 진실한 소망이 지금의 나를 지켜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믿음이 생긴다.                 

agbai@naver.com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