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를 때에는 산에 의지하여 오르고 계단을 오를 때에는 계단에 의지하여 오른다. 물론 내려올 때도 그에 의지하여 내려와야 한다. 내 행동이 나의 위치를 옮긴다고 생각하던 것이 그 대상에 의지하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모든 사물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경사면을 오르내릴 때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안전장치로 받침을 만든 것이 계단의 시작이라고 본다. 계단은 발이 밟고 가는 실물의 단도 있고 마음이 밟고 가는 계단도 있다. 그러고 보니 계단은 이동의 안전과 편리를 목적으로 만들었지만, 계단에 앉아 잠시 마음이 쉬어가는 의자로 쓰이기도 한다.

오래전 로마에 갔을 때 스페인 계단에 앉아 여행의 피로를 잠시 내려놓은 적이 있다. 매끈한 계단 모서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녀갔는지 말해주었다. 그곳은 계단이라기보다 오히려 야외에 조성된 계단식 의자였다.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영화의 한 장면을 추억하며 즐긴다.

이 스페인 계단은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를 먹어서 유명한 장소이며, 관광객들이 시내 관광을 하다가 잠시 앉아서 쉬어가느라 붐비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탈리아 법이 개정되어 스페인 계단에 앉을 수 없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스페인 계단과 주변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관광객을 엄격히 통제한다. 계단을 본래 사용가치로 되돌려준 셈일까?

우리 생활에서 산, 건축물, 길 등의 오르막을 오르내리기 위해 낸 것이 계단이다. 계단은 삶의 편리와 안전을 위해 놓이지만, 나름의 멋과 품격을 갖추고 있다. 가파른 산등성이나 산마루로 가기 위해 좁고 길게 이어지는 나무계단이 있는가 하면, 높은 건축물에 공간을 덜 차지하며 안전하게 오르내리는 나선형 계단, 어슷하고 완만한 오르막에 드문드문 놓인 ‘생각의 계단’ 등 각양각색의 계단을 만난다.

나는 계단 앞에 서면 계단이 끝나는 곳에 무엇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들뜬다. 대부분 마당이나 그곳의 정상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한라산 등반길 평탄한 오르막길을 두 시간여 걷다 나무계단 끝에서 앞이 확 트이며 느닷없이 나타난 산정호수처럼 뜻밖의 절경을 만나거나, 골목에 구불구불 난 계단을 다 올라가 뒤돌아봤을 때 들어오는 뜻밖의 소박한 풍경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한가을 아름다운 계단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얼마 전에 다녀온 해남 미황사 돌계단을 다시 맨발로 걸어보고 싶다.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계단은 부드럽게 구부러진 오르막에 서너 단씩 혹은 여남은 단씩 설치미술처럼 조성되었다. 이 단을 맨발로 걷는 즐거움은 나름대로 붙인 ‘생각의 계단’이란 이름에 참 잘 어울린다. 야트막하나 질서정연하고 느긋하게 펼쳐진 계단을 느슨하게 올라가는 여유가 좋다. 자연석을 하나하나 손으로 쪼고 다듬은 돌단을 발바닥이 온전히 느끼는 기쁨도 크다. 계단 가장자리에 나란히 늘어선 동백나무도 멋스러움을 더한다.

미황사 계단의 매력은 올라갈 때도 있지만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도 있다. 계단을 계단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 ‘생각의 계단’이 주는 매력이다. 올라갈 때 서너 단을 올라가고 대여섯 걸음 걷기를 반복하던 단은 어디로 가고 부드러운 내리막을 걸었을 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다 내려오고 나서 뒤돌아보았을 때 비로소 계단을 딛고 내려왔다는 걸 알게 된다.

계단과 계단으로 이어진 미황사 가람을 둘러보다 대웅전 옆으로 난 조그만 돌계단에 한참 걸터앉아 있었다. 담쟁이 푸른 그늘에서 절 마당의 고즈넉함으로 시간이 흐르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즈음 마음이 고요해지며 한동안 나를 뒤흔들던 욕심이 날 버리고 스멀스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욕심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제 길을 갔다. 나도 어떤 미련에 부르거나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때로 헤어진다는 것은 다시 안부를 묻지 않는 것이므로.

맨발바닥이 그늘에 덮인 돌을 만지면 그 시원함이 마음으로 파고든다. 그림자가 깃든 그늘의 맛은 아무 데서나 오지 않는다. 자갈처럼 울퉁불퉁하지도 않고 대리석 바닥처럼 매끈하지도 않은 돌계단이 건네주는 맛이다. 돌과 발바닥은 서로 의지하며 발은 돌의 시원함을 돌은 발의 체온을 마음에 옮겨 적는다.

계단을 오를 때는 몸을 살짝 앞으로 구부리게 된다. 계단에 의지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 경사를 거스르지 않고 의지하며 한 단 한 단 차곡차곡 조심스럽게 올라가고 내려온다. 그러면 계단은 민들레, 제비꽃, 사마귀, 달팽이 미소를 돌 틈에 여유로 놓아둔다.

오늘도 끝을 알 수 없는 삶의 계단을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차근차근 오른다.

hope-hi@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