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듣고 가장 많이 입에 올렸던 말은 ‘엄마’ 그리고 ‘관세음보살’이다. 내게 있어 이 두 단어는 부르고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로가 되는 말이다.

내 어머니는 이십 대에 혼자되어 우리 오누이를 키우면서 힘든 순간마다 주문처럼 외는 말이 ‘관세음보살’이었다. 어린 자식의 아픈 배를 쓸어주면서도 그랬고, 화를 참아낼 때도 그랬고, 슬픈 일을 겪으면서도 그랬다. 내 어머니에게 관세음보살은 일생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며 나 역시 힘든 순간마다 관세음보살을 찾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는 법을 배웠다.

특히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우리 곁에 힘센 남자가 없다는 불안감이 어린 나를 많이 힘들게 하던 때였다. 어쩌다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 본 관음상은 자애로운 여성 이미지를 하고 있어 어머니처럼 친근하게 생각되었고, 거기에다 초능력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고 하니 그만으로도 충분히 믿고 의지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내 어린 시절은 어머니의 특별했던 자식 사랑과 관세음보살에 대한 믿음으로 비교적 평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

사춘기가 되면서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의심을 품기 시작했고,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관세음보살에 대한 의문도 함께 생겨났다. 또한 절에 가면 그 많은 부처는 다 무엇이며, 불교라는 종교는 어떤 종교인지 매우 궁금했다. 그 무렵 우연히 경허 스님의 일화가 담긴 산문집을 접하게 되었고, 경허 스님과 문둥병 여자 얘기는 고등학교 일학년 여자아이의 영혼을 흔들 만큼 감동적이었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불교에 대한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나도 마음 수행을 해서 이런 스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 길로 불교학생회에 가입해서 주말마다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먼저 불교에 대해 알아보고 스님이 되는 길을 찾겠다는 수순이었다. 그런 계기로 인해 불교학생회에 이어서 대한불교청년회를 거치게 되었다.

애초에 스님이 되어보겠다던 내 생각은, 청춘에 홀로 되어 자식을 신앙처럼 받들며 살아온 내 어머니의 삶 앞에서 쉽게 무너져버렸다. 자기 자식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아주었으면 하는 게 내 어머니의 바람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스님이 되어보겠다던 꿈은 사춘기 소녀가 잠깐 호기를 부린 것으로 끝이 났고, 이후 불교청년회에서 만난 한 남자의 끈질긴 구애로 인해 결혼이라는 것을 하면서 스님의 길은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당시 유일한 형제인 내 오빠는 나와는 달랐다. 직장과 가까운 절에 다니며 나처럼 불교청년회에 가입해 불교 공부도 하고 결혼도 하면서 여느 사람들처럼 속세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인해 가까운 사람에 대한 실망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뒤늦은 나이에 어머니 몰래 출가를 감행했다.

천성적으로 너무 착하게 태어난 오빠는 이런 속세의 삶을 살기에는 너무 힘들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성품이 남달라서 어머니가 도시락을 싸주면 길거리에 앉아서 구걸하는 사람한테 줘버리기 일쑤였고, 어쩌다 내가 생일선물로 사준 옷까지도 아까운 줄 모르고 다 벗어주고 오던 사람이었다.

자식이라면 무조건 품에 안고 솜털 하나라도 끔찍하게 여겼던 내 어머니는 이런 오빠의 출가를 뒤늦게 알고는 한동안 절망감에 빠져 가슴 아파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자신의 아들이 그나마 부처님 품으로 가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는 듯했다.

어머니와 나는 그동안 부처님을 의지하며 살아온 대가로 오빠를 부처님 곁으로 떠나보내게 된 것이라 믿었다. 나 또한 스님은 되지 못했지만 문학을 하면서 불교문인협회에 가입해, 지금까지 자질구레한 일들을 해오고 있는 것도 어쩌면 그런 업이 아닐까 한다.

그렇게 오빠는 스님이 되어 우리 곁을 떠났고, 평생 내 곁에 있어 줄 것만 같았던 어머니마저도 삼 년 전에 갑자기 돌아가셨다. 나를 목숨처럼 아껴주던 존재들이 다 사라져버렸다는 상실감과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또한 일생을 자식만을 위해 특별히 희생적인 삶을 살다간 내 어머니께 자식으로서 해드린 게 너무 없었다는 미안함으로 한동안 자책감에 시달리며 우울증을 앓아야 했다. 어떻게 내가 뻔히 후회할 그런 어리석은 삶을 살 수가 있었나 싶어 더욱 괴로웠다.

어머니 없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것도 의미 있는 게 없었고 만사가 싫었다. 그리하여 또다시 출가에 대한 생각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수행하는 오빠에게 밥이나 해주면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살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나를 엄마라 부르며 아직도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식들을 보니 또다시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 극복하기 힘든 인간의 어리석음을 실감하게 되었고, 속세인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대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이렇듯 필자는 그동안 불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오긴 했지만 불법 공부는 1도 되지 않은 탓에, 아직도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의지해야만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미성숙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채 살고 있다. 하여 이번 생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다 갈 수밖에 없겠구나 싶은 생각에 또다시 관세음보살을 찾게 된다.

bosalm@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