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식 부천대 교양과 교수
백학명(1867~1929)은 일제하 선지식으로서 불교개혁을 주장하고, 불교개혁의 일환으로 선농불교를 실천한 승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생애, 불교사상, 불교개혁론, 선농불교 등의 개요와 성격은 전혀 논의되거나 탐구되지 않았다. 이는 우선 근현대 불교사에 대한 무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수 있다. 또 다른 요인은 그에 대한 자료를 집약하여 보여주는 기록의 불충분성을 지적할 수 있다.
전자의 문제를 다시 거론하면 지금껏 한국불교사에서 근현대불교 분야는 연구의 황무지로 남아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최근 근현대불교가 연구의 주제로 심화되고 있지만 이 시대 불교사는 아직도 해명할 주제와 대상이 산적해 있다. 그 대상중의 하나가 바로 백학명이 포함된다고 하겠다. 특히 백학명이 걸어온 길은 여타 승려와는 다른 특이성이 있는바 그것은 곧 선농불교인 것이다. 백학명의 선농불교가 주목받고, 관심을 불러 일으킬 요인이 현재 한국불교에는 부재한 것이 백학명 연구의 필요성을 촉발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선농불교라 함은 승려의 노동이 강조되고 실천되거나, 참선과 농사의 병행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작금의 불교계에서 승려가 노동을 한다는 말이 잊혀진지는 매우 오래되었다. 요컨대 선농불교의 부재가 백학명을 잊혀진 인물로 만들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백학명의 행적, 사상, 선농불교를 알려주는 관련 기록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생애와 활동의 전모를 파악에 난점을 주었던 것이다. 더욱이 관련 사찰, 문도들도 그의 행적을 조명하는 자료수집에 관한 별 뚜렷한 업적을 최근까지는 내놓지 못하였다. 이런 요인들이 중첩되어, 백학명은 잊혀진 승려로 남아 있었다.
최근 근현대 불교의 정리와 분석이 본격화되면서 백학명에 대한 관심은 진일보하고 있다.1) 그러나 그의 전모와 사상은 이제 걸음마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과 전제하에서 본고찰에서는 그의 불교개혁 및 선농불교에 중점을 두어 그 개요와 성격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자료의 부족, 필자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난점이 우려된다. 다만 필자가 수집한 관련 자료를 최대한 분석하고, 그를 그 시대 배경과 관련지워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백학명의 불교개혁 및 선농불교의 개요와 성격을 추출하고, 그를 통하여 백학명을 재조명하는데에 일조가 되었으면 다행이라 하겠다.
2. 백학명의 생애와 불교개혁
백학명은 1923년 경부터 불교개혁의 구도하에 내장사에서 선농불교를 실천에 옮겨, 그가 입적하는 1929년까지 지속하였다. 비록 그가 선농불교를 실천한 기간이 7년여에 불과하였으나 그의 의의는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선농불교가 당시 불교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는 현재로서는 그 대강을 짐작하기도 간단치 않다. 그런데 우리는 우선 백학명 그가 어떤 승려였으며, 당시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떠하였는가에 대한 이해가 우선 요청된다.
백학명은 1867년(고종 4년) 전남의 영광군 불갑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 경에 부친의 병고로 가업을 물려받아, 부모와 동생들을 책임졌던 정황과 빈한한 가정 형편으로 고생을 많이 하였다. 이에 그는 모필 제조하는 법을 배워 이로써 가정경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 20세 무렵 그의 부친이 별세한 직후에는 큰 뜻을 품고 국내명산을 돌아보리라는 계획으로 붓 상자를 메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마침내 그의 발길은 순창 구암사에 당도하였는데, 마침 그 강원에서 학인 40여명이 수학하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도 승려의 길을 가야겠다는 발심을 하여 일단은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고향 인근의 불갑사(佛甲寺)로 찾아가, 환송(幻松) 장로(長老)의 문하에서 출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당시 그의 수계명은 계종(啓宗)이었다.
그 이후 그는 은사를 자신의 계사였던 금화(錦華)에게로 옮기고, 그 문하에서 3년을 공부하였다. 그의 나이 24세되던 해인 1890년에 그는 순창 구암사로 가서 불교 내전 즉 교리 및 사상을 배우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지리산, 조계산 등지의 강백들에게 일대시교를 총괄적으로 수학하였다.2)
1900년 백학명은 그의 은사인 금화 선사에 의해 건당(建幢)을 하고, 구암사와 운문암에서 강회(講會)를 열어 수년간 학인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백파의 7대 법손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강회를 열던중, 교편을 집어 던지고 생사를 구하기 위해서는 단연코 선(禪)을 해야하겠다는 결의를 하고 1902년 즉시 선원을 찾아가서 선 수행을 시작하여 ‘습정균혜(習定均慧)’로 시종 일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대중들의 강력한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내소사, 월명사의 주지도 역임하였다. 월명암의 주지 시절에는 선실을 중건하여 대중 수좌들의 수행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1912년 월명암에서 정진중, 그는 불성의 참맛을 맛 본 깨달음의 경지에 다달았다. 그 이후에는 백양선원으로 이주하여 4년여를 머물렀다.
백양선원에 주석할 당시는 백양사 주지인 송만암의 백양사 재건을 지원하면서 함께 동거수선(同居修禪)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해외불교를 살펴보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중국의 총림과 일본 사찰을 1914년 봄부터 유력(遊歷)하였다. 1915년 귀국한 이후에는 내소사, 월명암 주지로 취임하였지만,3) 그보다는 월명 선원의 조실, 내장사 조실, 백양사 선원 조실로4) 있었다. 추측건대, 이때 본격적인 불교개혁의 구상에 주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그는 교와 선에 정통한 승려였으며,5) 해외 불교도 시찰한 식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불교계에서도 백학명에 대한 평가는 일정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불교학자로 이름을 떨친 이능화는 백학명을 선문(禪門)을 대표하는 선사로 평가하였다.
現今 敎門에 在하야는 朴漢永, 陳震應 等 師의 熱心 傳道를 보며 禪門에 在하야는 白龍城, 方寒岩, 白鶴鳴 諸師가 宗乘을 擧揚함을 보니 余는 朝鮮佛敎가 將來 有望함을 斷言키에 躊躇치 안는다.6)
즉, 백용성, 방한암에 버금가는 활동을 하는 선사로 자리매김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능화는 백학명이 어떤 연유로 그렇게 평가하였는가는 서술치 않았다.7) 또한 이능화는 백학명 입적후의 회고에서 1920년대 중반의 불교계에서 백학명을 ‘법중용상(法中龍象)’이라는 지칭을 하였다는 증언을 전하고 있다.8)
그러나 우리는 일제하 한국불교계의 선사로 명망을 떨친 백용성과 방한암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으면서 왜 백학명은 생소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연유를 설명해내야 한다. 현재로서는 이에 대한 만족할만한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9)
백학명이 수좌계에서 활동한 내용중에는 1922년 3월 30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선우공제회의 창립총회에 참여한 것이다. 선우공제회는 1921년 12월에 창건된 선학원에서 발기한 수좌들의 모임이다. 공제회는 일본불교의 침투로 인해 한국의 전통불교 정신이 희미해지는 것을 차단하고 고유의 선풍을 진작하기 위한 수좌들의 모임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당시 현실이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기가 어려우며, 진정한 발심 납자가 희소하며, 수행하는 승려가를 배척받고, 운수납자들의 생애를 보장받기가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였다. 이에 그들은 타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립자활하여 전통불법을 발흥하고 중생을 구제하자는 취지를 내세웠는데, 그 창립 모임의 내용을 전하는 선우공제회 회의록에는 참가 수좌 35명의 명단중 백학명의 이름이 서두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발기인 명단에서도 “오성월, 이설운, 백학명외 79명”으로 전하고 있다.10) 이러한 기록을 유의하면 백학명은 그 당시 수좌의 대표성을 띠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여기에서 필자의 시선을 집요하게 끄는 것은 그 취지서의 말미의 문장이다.
自立의 活路를 開拓하야 禪界를 勃興할 大道를 闡明하야 衆生을 苦海에 求하고 迷倫을 此岸에 度할지니 滿天下의 禪侶는 自立自愛할지어다.
후술하겠지만 이 취지서에 극명하게 나오는 자립의 활로, 선계의 발흥은 백학명의 불교개혁과 선원개혁의 성격과 동질적인 노선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백학명의 불교개혁과 선농불교가 선학원 및 선우공제회의 등장 이전부터 배태되었음을 파악할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백학명의 중앙불교계에서의 활동으로 주목할 내용은 현재의 조계사 전신인 각황사에서 주관한 선원 회주로의 초빙이다. 각황사는 1910년 10월 지금의 조계사 인근인 종로구 전동에 위치한 사찰로 당시 전불교계가 합의하여 만들었는데, 주로 중앙불교 차원의 포교의 거점이었다.11)
이에 그 명칭도 각황교당, 중앙포교당으로 불리웠다. 그런데 이 각황사는 당시로서는 서울 4대문 안에 있었던 유일한 사찰이었다. 때문에 각황사에는 30본산연합사무소, 불교계 출판사, 불교단체의 사무실 등이 입주해 있었다. 이에 각황사는 당시로서는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다. 이러한 각황사는 1927년 초에 약간의 변동이 있었다.
당시 불교계는 천도교가 운영하였던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였는데 그즈음 보성고보 교사를 새롭게 건축하고 그 보성고보 교사를 교단 사무실로 활용케 되었다.12) 구 보성고보 교사는 현재의 조계사 터(종로구, 수송동)에 위치하였기에 당시 교단에서는 서울의 중심부에 소재한 이점을 활용키 위해 교단 사무실과 불교계의 각종 단체의 사무실을 1927년 5월 경 보성고보 교사의 건물로 이전케 되었다. 이런 배경하에 각황사는 순수한 사찰로 남게 되었다.
이에 각황사는 포교 중심 사찰로 그 성격을 전환시키면서 그 내부에 선원을 두었는데 그 선원의 회주가 바로 백학명이었다.
京城府 壽松洞 八十二番地 覺皇布敎堂에 現 布敎師 白鶴鳴禪師는 朝鮮佛敎에 잇서 禪으로나 敎로나 모다 一指를 屈하게 됨은 一般이 捻志하는 바인데 더욱이 本 敎堂에 住錫하게 된 初志는 本 敎堂을 禪院으로 정하고 朝鮮內에 雲水 禪衲을 募集하야 安居를 하야 보랴는 希望이엇슴으로 今般 評議員 總會에서는 그 旨를 體悉하야 遂히 本 敎堂에 禪院 設立하기를 一般이 協議하엿으며 樂園洞에 居住하는 請信女 白賢淑氏는 禪衆의 糧道를 補助하기로 하야 今年의 夏安居부터는 決定志를 세우고 特達 懷를 품은 十方의 禪衆이 聚會하야 棒喝에 風이 生하고 問答에 可決하리라 하며 內規를 所聞에 依할 것 같으면
會主 白鶴鳴禪師
化主 李允根
檀信 白賢淑氏
禪衆 十五人 豫定
年齡 二十歲 以上 三十五歲까지
程道 四敎科 卒業 以上13)
즉 각황사 선원의 회주로 추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학명 그의 회주 취임은 당시 그가 敎와 禪의 분야에 있어서 명망이 뚜렷함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그가 각황사에 주석한 뜻은 각황사 선원에서 각처의 운수납자가 모여14) 안거할 수 있는 수행 및 풍토를 만들겠다는 것이 개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앙불교 차원에서 선풍을 재흥시키겠다는 것으로 볼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이러한 점은 그가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수행하는 선사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15) 즉 그는 당시 불교계에서 명망이 뚜렷한 선지식으로 초빙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가 선학원의 선우공제회라는 조직을 통하여 전통 선풍을 진작시키려는 의도가 무산된 것과 연결되었다고 하겠다. 즉 선우공제회는 재정난과 수좌들의 열의 부족으로 인하여 1925년 초반부터는 거의 간판을 내릴 정도로 그 존재 자체가 희미해졌으며, 선학원도 1926년 5월 1일부터는 범어사 포교당으로 전환되었다. 이는 곧 중앙 차원이 선풍 재흥이 무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백학명은 각황사를 거점으로 바로 그가 이전에 의도한 선학원 중심의 선풍 재현을 각황사에서 의도하였다는 추론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그는 각황사에 주석하면서 1927년 하안거 수행을 주관하면서, 13명의 수좌를 지도하였다.16)
그런데 그가 1927년의 동안거도 각황사 선원에서 회주로 있었는가는 확인하기 어렵다.17) 한편 위의 기록에는 백학명이 각황사 선원의 회주로 취임하기 이전에 이미 각황사의 포교사였음이 전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언제부터 그가 포교사로 활동하였음을 전하는 기록이 없어18) 그 전후 사정은 알 수 없다.
이처럼 백학명은 일제하 불교계에서 일정한 명망을 갖고 있는 선사였음이 분명하였다. 더욱이 그는 단순히 혼자만의 수행자는 아니었다. 선우공제회의 출범과 각황선원 회주로 활동하였음을 보면 그는 진보적인 노선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불교개혁적인 입장에 서 있었다 하겠다. 바로 이러한 점이 그가 선농불교를 통한 불교 개혁에 나설 수 있는 배경으로 이해할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그가 입적한 후에 그와의 인연이 있었던 안주봉이 《불교》지에 기고한 추모의 글에서도19) 재확인 된다.
師는 우리를 對할 때마다 朝鮮佛敎의 情勢를 慨嘆하고 改新 方策을 痛論하면서 말삼하시되 만일 諸方의 同志와 握手하면 禪門 規制부터 更正하는 것이 最急務라 내가 他方 殊域을 周觀한 後에 彼此를 參酌하야 此方에 實現하리라 하시더니 增年에 東瀛을 渡하야 東京 京都 等의 各 寺院 儀制를 撮採하고 中國에 入하야 上海 北京 等 各 叢林의 規制를 認悉하고 故山에 歸來하시와 一二 同志와 禪門 事業을 營新하려다가 時機의 不及으로 全般的 改新은 倉卒히 할 수 없어 不得已 一隅의 處所라도 新機關을 세우고 漸次 實行하려하여 湖南에 中點되는 內藏寺의 主務에 擔任하고 (중략)
唯一한 模範禪院을 計劃하시는데 나도 그때에 一月間 侍右服役을 하엿나이다. 師는 朝鮮 禪衆의 不覇放散하야 不規則 無秩序함을 歎惜하여 禪院의 規制를 嚴正히 制定하고 時間 勞動을 實行하니 禪衆의 來參이 적게 됨은 모다 勞動時間을 忌避함이라.
이 글에 의하면 백학명은 평상시에 불교의 모순을 개탄하고 그를 개혁할 방책을 강구하였음을 알수 있다. 이에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가 있으면 선문의 ‘규제’부터 바르게 고치겠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나아가서 그는 일본, 중국의 불교계를 돌아본 후에는 그 순방에서 얻어진 것을 참조하여 한국불교의 선문 규제 개혁에 나설 것임을 계획하고, 실제 그를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선농불교가 단순하고, 우연적으로 나온 것이 아님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의도한 것은 ‘선문 사업’의 전체를 개혁하려는 것도 동시에 알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뜻에 동참하는 승려를 만나지 못하여, 이에 그는 내장사에서부터 자신이 그리고 있는 모범선원을 만들겠다는 첫발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그는 평소 선중 즉 납자들이 불규칙, 무질서 함을 개탄하였거니와 바로 이점이 그가 선원 개혁의 초점이 선원의 규제라 칭하는 청규의 복원 혹은 재정비로 나간 단서이다. 즉 그는 우선 선원의 규제를 정비하는 차원에서 내장사 선원의 규칙을 제정하고, 그 규칙 안에 선농불교를 구현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백학명은 교와 선의 종장으로서의 선지식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궁벽한 사찰에 은거하였던 승려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 불교 현실을 직시하고, 고민하고, 개혁을 강구하였으며, 개혁을 추진하는 논리 및 타당성을 찾기 위하여 일본과 중국까지 다녀왔으며, 불교개혁의 구도하에서 선문사업을 개신을 강구하였다. 그의 선문 사업은 선원 규제의 재정비와 승려의 노동을 결합시킨 선농불교이었다. 이제 그는 1923년 초반경부터는 선농불교의 기치를 내장사에서 내걸고, 그를 그가 입적하였던 1929년 5월 6일까지20) 실행하였다.
3. 선농불교의 이론과 실제
백학명의 선농불교는 앞서 살펴본 바에서 나온 것처럼, 백학명이 평소부터 강구한 불교개혁의 구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우리는 그의 선농불교의 개요와 성격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생각하고 있었던 불교계의 모순과 분석을 이해할 필요성을 만난다. 그가 생각하였던 불교계의 모순과 그 대안과 관련하여서는 그의 입적 직후 《불교》지 71호(1930.5)에 게재된 <獨살림 法侶의게 勸함>이라는 글이 주목된다.
백학명은 위의 글의 내용에서 승려에 대한 정의를 ‘출가위법(出家爲法)’하는 자로 보고, 우선 승려는 일대사 인연으로 오직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우칠 뿐이라고 단언하였다. 때문에 이를 이행하지 않는 승려는 단지 ‘사마’, ‘외도’라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불교계에서는 승려 본분의 길을 가지 않는 부류가 많다고 이해하였다.
우리 朝鮮 近日에 중이 되는 者로 말하면 중이라는 것이 어떤 物件인지도 알지 못하고 佛祖의 本意가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하고 擧皆 出家 入山하는 날로 붙어 몸만 閑寂한 雲林에 집어 던지고 눈은 財利의 周旋에 붉어저서 一出一入이라도 憑公榮私하거나 損他利己하야 오즉 이런 일에만 從事하고 그 중에도 甚한 자는 寺刹의 常住物을 濫用 濫食하야 寺財敗亡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나니 이런 行動이 잇고 이런 知見이 잇으면 어느 때에나 넷날 賢哲들과 같은 높은 名譽가 그 몸에 도라가리오. 少時로 붙어 늙을 때까지 가드래도 다만 某甲이라는 중 名色만이 잇슬 뿐이로다.
이처럼 백학명은 당시 승려들을 가혹하게 비판하였다. 그들은 승려로서의 정체성을 망각한 부류이고, 부처의 근본 뜻도 모르고, 빙공영사(憑公營私)하고 손타리기(損他利己)하여 재물의 이익에만 혈안이 되고, 심지어는 사찰재산을 파산케 하는 이름만의 승려라는 것이다. 이에 그는 그 현실을 타개하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佛法의 盛衰와 寺刹의 存亡과 僧侶의 進退가 대개는 棄本逐末과 憑公榮私와 出正入邪의 惡風이며 弊習이며 魔行임을 由함으로서 임니다. 風潮이니, 解放이니, 改良이니, 通俗이니를 다 - 그만두시고 自家의 本面目 佛祖의 正知見 寺刹의 本淸規 僧侶의 正律儀를 寺寺히 歸正하고 個個히 如法하면 滿天下 人生이 모다 僧化 寺化 法化 佛化될줄로 생각하나이다.
즉 승려의 근본이 이탈된 것은 근본을 무시하고(棄本逐末), 공을 빙자하여 사리사욕을 챙기고(憑公營私), 바른 길에서 나가 사악한 길로 들어가는(出正入邪) 습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에 그는 그 원인을 개항이후 등장한 불교대중화라는 이름하에 나온 풍조, 해방, 개량, 통속 등을 단절하고 불교의 본면목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교의 근본(自家의 本面目), 부처의 견해(佛祖의 正知見), 사찰의 근본인 청규(本淸規), 승려의 바른 계율(正律儀)을 모든 사찰이 시행하면 저절로 모든 대중의 삶이 불교화(僧化, 寺化, 法化, 佛化)가 된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보듯 백학명 그의 불교 개혁에 대한 지향과 범위는 당시 불교계 전체의 흐름에 대한 강한 부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그 개혁 노선은 단순이 선원이나, 청규에만 머물렀던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전제와 구상하에서 백학명은 당시 불교 개혁을 위한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첫째로는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중심에 두자고 강조하였다. 즉 계정혜, 삼학은 불법의 근원이며, 승려 수학의 의무이기에 이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삼학에서 탈퇴한 자는 승려로 볼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실천한 대안까지도 제시하였다. 예컨대 사찰과 승려의 명칭을 고쳐서 이를 실행하고,21) 나아가서는 그에 관한 규정도 정하자고 주장하였다.
둘째로는 사부중의22) 위상을 강조하였다. 사부중을 여러 부처와 보살의 ‘본구대중(本具大家)’이라고 하면서, 이것 이외에 다른 대중은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그는 처자와 자식이 있는 대상자는 이 4부중에서 어느 대중에 속할지를 분명케 해야 한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당시 증대되고 있는 대처승을 승려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재가 신도로 둘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그런데 백학명 그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개진하지 않았다. 이는 승려의 대처가 그만큼 신속하게 증대되고 있음을 엿볼수 있는 단서가 아닐까 한다.
셋째로는 주지에 대한 권한과 의무를 분명케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지는 본래 불법과 정법을 ‘주지(住持)’케 하는 인물로, 타인에게 불법을 전해주는 것이 원래의 주지의 의무라고 보았다. 그런데 당시 주지들은 사찰을 점령하여, 사찰 재산을 농락하고, 사찰의 대소사를 임의 처리하고, 부정부패로 비판을 받아 축출되는 지경에 처하여 있다고 보았다. 요컨대 주지는 재권, 인권, 사견(邪見), 마행(魔行)을 좌지우지하는 승려라고 인식하면서, 이를 개선시켜야 함을 강조하였다.
넷째로는 재산으로부터 파생된 ‘유명간 죄악(幽明間 罪惡)’을 차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주지들이 불법의 포교에만 전념토록 하고 재산과 여타의 사무처리는 사찰 공동사무원의 운용과 근무로써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다섯째로는 승려의 근본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승려는 번뇌를 단절하고, 생사를 초월하여, 불법을 배우고, 중생을 구제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승려들은 본분사를 제쳐두고 영리매상, 이기주의, 잡행주의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에 그는 무상대도, 평등정로를 구하기 위해서는 승려 각자가 ‘자사자도(自思自度)’하고, 이기는 버리고, 이타에 힘쓰며, 불법에 헌신하여 일체를 ‘회소향대(回小向大)’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여섯째로는 사찰에 있는 위토(位土)와 전래의 법답(法畓)이 정상적으로 처리되도록23)하고, 승려들의 부정적인 행동은 외양으로부터 발생하니 필히 장삼을 입고 출입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지금까지 분석한 바에서 엿볼수 있듯이 백학명의 불교개혁은 불교 근본에 치중을 하고, 계정혜 삼학을 강조하며, 승려의 본본사와 의무를 다하는 방향에서, 승려의 나태와 몰지각의 요인인 사찰재산에서 나오기에 이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었음을 알수 있다. 요컨대 보수적인 개혁이었다. 그 보수는 불교의 근본과 한국전통을 회복하는 노선에 서 있었다고 하겠다.
이제부터는 백학명이 구체적, 실천적으로 전개한 선농불교에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겠다. 지금껏 우리는 백학명의 선농불교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배경, 개요를 점검한 것이다. 그러면 그가 언제부터 선농불교를 실행에 옮겼으며, 그 계기는 무엇인가? 선학의 연구에 의하면 1923년 만해 한용운이 백학명이 머물던 월명암의 인근의 양진암에서 3일을 지낸 것을 그 계기로 보고 있다.24) 이때 한용운과 백학명과 나눈 대화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용운이 그곳을 떠나면서 지은 게송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 게송은 백척간두에서 ‘경퇴일진(更退一進)’이라는 의미가 담긴, 양진암을 떠나면서 학명선사에게 주었던 제목의(養眞庵臨發 贈鶴鳴禪伯 二首) 시이다.25) 구전에 의하면 백학명은 한용운이 전한 그 시를 보고, 이틀 밤낮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에 1923년 봄에 내장사로 내려왔다고 한다.26) 그 하산은27) 그가 선농불교를 본격화 한 신호탄이었다.
원래 백학명은 그가 머물던 월명암에 10년 주석을 채우며 선수행을 하려고 하였으나 한용운이 지적한 백척간두 진일보의 심정으로 불교개혁에 나선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그가 당초 선우공제회에 동참한 수좌들과의 공동 개혁을 염두에 두었으나 선학원 및 선우공제회의 전반적인 운영이 부진을 면치 못한것과도 유관한 것이다.
즉 그는 안주봉이 표현한 것과 같이 그는 선문의 영신(營新)을 동지와 함께 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는 것은 바로 그 정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선문의 전반적인 개혁을 시도하려고 하였으나 시기의 ‘부급(不及)’으로 부득이 자신부터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우리가 참고할 내용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가 부득이, 갑자기, 혼자서 불교개혁의 구도에서 나온 선농불교에 나선 사정을 알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결단은 평소 그가 생각하고, 가다듬었던 불교개혁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개혁은 주로 선원의 규제 재정비였다. 이는 당시 선원이 무질서, 불규칙하게 운영된 사정을 강력 비판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선원의 규제인 청규의 상실 내지는 청규의 유명무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에 그는 청규의 복원의 의미를 갖고 있는 선원규제의 재정비와 함께 그 규제에 승려의 노동을 포함시켰다고 하겠다. 요컨대 불교개혁의 구도하에서 선원의 규제에 승려의 노동, 승려의 수행을 결합시킨 것이었다. 그는 선농불교가 구현되는 유일한 모범선원을 계획하고 그를 실천하였다. 당시 그는 승려들이 일하지 않는 것을 ‘통병(通病)’ 으로 보고
나는 禪院을 비롯하야 이런 弊風을 矯正하되 禪農을 兼行하여야 할 터이니 나부터 躬行하여야 하겟다고 손조 錨을 들고 道場에 來往하면서 廢園을 改治하고 荒田을 整理하야 自作實施하는데 매일 年少年보담 노력을 더하야28)
그 자신부터 그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이 사정은 박한영이 지은 <內藏山 鶴鳴禪師 舍利塔銘>에서,29) “학명선사가 자신의 몸을 계율로써 단속하여 말이 적고 욕심이 적었으며, 대중들에게 농사가 곧 참선이라는 안을 주창할 것을 약속하였기에 호미를 잡으면서 조사의 화두를 들었다”(禪師嚴身以律 寡言小欲 約于衆 而倡卽農卽禪之案把鋤頭 而鍛祖師)는 정황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학명은 이처럼 내장사 주지로 있으면서 선농불교를 실천하였지만, 그는 단순히 승려들의 농사만 짓도록 한 것은 아니었다.
禪師 - 赴任함으로부터 法堂과 禪室을 建築하며 道場을 擴張하고 蓮池를 濬하며 더욱이 理財에 能爛하야 山의 入口 荒蕪地에 良畓 數十 斗落을 開拓하니 그로부터 四十餘 石의 歲入 超過를 보게 하며 一般 僧侶로 半農半禪주의를 高調하야 體育과 智德을 竝行하고 山下 洞民에게는 布敎를 만이 하야 老小를 물론하고 千手心經 등은 히 讀訟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田畓으로 小作을 정해주고 森林으로 燃料를 當케 하야 그 一視仁澤이 家仁父子로 化하였습니다.30)
그는 내장사의 도량을 정비함과 아울러 황무지를 개간하고, 인근 촌락의 사람들을 포교하면서 경제적인 이익을 제공하였다. 즉 그는 단순히 사찰안에서만 선농불교를 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농사를 통한 승려의 수행, 사찰 재정비, 촌락공동체 건설의 성격이 합치된 것으로 볼수 있다. 이에 그의 선농불교가 구현된 새로운 선원은 당시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하겠다.
이에 한 古德이 잇서 內藏禪院을 內藏 勝界에 세우고 純眞한 少年을 모아 禪理를 보이고 敎學을 가르키며 農業을 힘쓰게 하되 歌舞까지 잇서 일하면서 글월을 읽으면서 禪을 硏究하면서 몸과 마음이 快活快活케 되얏스니 實로 斯界에 最新案 試業인 同時에 理想的 禪院이라 하겟다.31)
그러면 이러한 전제와 성격을 갖고 있었던 백학명의 선농불교의 구체적인 개요, 운영 준칙은 어떠하였는가. 이 내용을 전하는 것은 <내장선원 규칙>이 있다. 그 전모를 보면 다음과 같다.32)
-, 禪院의 目標는 半農半禪으로 變更함
-, 禪會의 主義는 自禪自修하며 自力自食하기로 함
-, 會員은 新發意나 新出家를 募集함
但 久參衲子도 勤性이 有하니 選入함
-, 略
-, 叢林의 正規를 依하야 衣食을 圓融으로 함
-, 日用은 午前 學問 午後 勞動 夜間 坐禪 三段으로 完定함
-, 冬安居는 坐禪爲主 夏安居는 學問과 勞動 爲主로 함
但 安居證은 三年후 授與함
-, 梵音은 時勢에 適合한 淸雅한 梵音을 學習하며 또 讚佛, 自讚, 回心, 還鄕曲 等을
新作하야 唱하기로 함
-, 破戒, 邪行, 懶習, 기타 弊習은 一切 嚴禁함
이와 같이 그 규칙은 9개조이나, 5조의 내용이 생략된 것은 알수 없다. 현전하는 위의 8조의 내용에는 백학명의 선농불교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그를 대별하여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의 선농불교는 반농반선으로 나타나듯 농업 즉 노동과 참선이 균형적으로 나오고 있다. 반농반선은 승려 생활이 단순하게 농사와 참선을 위주로 한다는 것보다는 농사가 곧 참선이라는 등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둘째, 그 실천 이념은 자선자수(自禪自修), 자력자식(自力自食)으로 표방되듯 주체적인 성격이 강하다. 수행과 의식주 해결을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강인한 정신이 배여 있었다.
셋째, 그 참가자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발심을 한 대상자와 처음으로 입산출가한 대상자로 한정하였다. 이는 기존 관행에 물들거나, 기존 인식을 탈피하지 못한 대상자는 제외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33) 그러나 기존 관념을 탈각한 대상자는 수용하는 탄력성을 보였다.
넷째, 일과의 내용이 학문, 노동, 좌선으로 구분되듯 그 운영의 틀을 분명히 하였다는 점에서 그 실천성이 뚜렷하였다고 보인다. 이는 동안거와 하안거의 운영의 개요가 다른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또한 3년을 수행해야 안거증을 준다는 것에서도 철저한 수행을 파악할수 있다.
다섯째, 노동과 수행의 생활에 범음을 이용해서 다양한 가사를 만들고 그를 활용하였다는 점이 매우 이채롭다.
여섯째, 파계, 나태 등을 단호히 거절함에서 선원의 청정성, 규정성이 확실하게 나온다. 총림의 청규를 응용하여 원융적인 삶을 살겠다는 것도 이 내용과 동질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점에서 백학명이 내장선원에서 수행한 선농불교는 당시 불교계 전반의 모순을 인식한 전제하에서 나온 것임을 더욱 알수 있다. 그리고 그 성격은 기존의 선원의 관행을 완전 부정하고 개혁 지향의 노선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에 그의 선농불교는 저절로 불교개혁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다만 여기에서는 전하는 기록이 미약하여 백학명이 추진한 그 활동의 전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는 미진할 수밖에 없었다.
4. 결어
이상으로 백학명의 선농불교의 배경, 전제, 성격, 개요 등을 살펴 보았다. 이제는 지금껏 살핀 내용을 재음미하면서 그 의의를 요악함과 동시에 추후 더욱 분석할 초점을 내용을 제시하는 것으로 맺는말에 대하고자 한다.
첫째, 백학명의 불교개혁과 선농불교를 이해함에 있어 우선 백학명 인물에 대한 기초정리와 분석의 필요성을 만난다. 지금껏 이 시대 불교사의 이해에 있어 백학명은 전혀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백학명의 최소한의 개요를 파악할수 없었다. 본고찰에서는 다만 그가 일제하 선지식의 일원으로서 방한암, 백용성에 버금가는 선사임을 제시하는 정도에서 만족하였을 뿐이다. 추후에는 그에 대한 생애와 사상을 더욱 분석할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둘째, 백학명의 불교개혁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을 함에서 당시 불교계 동향, 모순 등을 총제적으로 정리할 과제를 만난다. 백학명의 사고와 개혁도 시대적 산물이기에 당시의 불교 현실에 대한 비판속에 독자적인 행보를 갔던 여타 승려와의 비교 연구도 고찰해야 할 것이다. 즉 당시 불교계 동향에 대한 이해도 결코 배제할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백용성은 만일참선결사회를 시도하며 선율(禪律)을 균형적으로 내세웠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고 선농불교의 기치를 실행에 옮긴 것, 그리고 방한암은 계정혜 삼학의 원융을 시도하면서 경전읽기까지 이행한 행보와는 차별되었던 노선인 것이다.
셋째, 백학명은 기본적으로 선사이었고, 그의 개혁의 초점은 선원이었거니와 이에 우리는 당시 선원에 대한 전반적인 동향과 문제점을 분석해야 한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백학명이 선원 개혁, 선문의 규제에 대한 개혁을 그토록 강력하게 매달렸는가에 대한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넷째, 백학명의 선농불교가 갖고 있는 성격을 여타 선농불교와의 차별성과 동질성이라는 구도하에서 그려내야 한다. 지금껏, 당시 선농불교의 대명사로 지칭한 승려는 백용성이었으며, 아울러 그 당시에도 다양한 시각에서 선농불교에 대한 접근이 적지 않았다.34)
이러한 구도하에서 백학명의 선농불교가 갖고 있는 차별적인 특성을 그려내야 한다.
다섯째, 백학명은 일제하 선지식, 선사, 선농불교를 실천한 승려의 대표자이었는데 지금껏 그에 대한 정리, 분석, 연구가 황무지였다는 측면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밝혀내야 한다. 이는 그의 선농불교가 이 시점의 불교계에 던져줄 수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동시에 그의 생애와 고뇌가 이 시대 불교계에서 계승되어야 할 내용이 있다면 그는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과 연계되는 것이다.
지금껏 백학명의 불교개혁 및 선농불교의 개요와 성격을 그 관련 자료를 갖고 정리하여 보았다. 이 고찰에서는 그의 불교개혁의 노선과 그 배경하에 선농불교를 분석하는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근대 불교개혁, 선원의 비판, 선원의 개혁, 근대 선원 청규의 재조명이라는 지평에서 백학명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발굴하였음은 다행이라 하겠다. 추후 지속적인 자료 수집과 다양한 관점에서의 재조명, 여타 선농불교와의 비교 연구 등은 필자의 후일 연구로 남겨두고자 한다.
김광식
건국대 사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문학박사. 현재 부천대 교양과 교수, 백담사 만해마을 연구실장. 저서로 《한국근대불교사연구》 《한국근대불교의 현실인식》 《용성》 《근현대불교의 재조명》 《새불교운동의 전개》 《첫키스로 만해를 만난다》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