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원사에 오른 일이 있었다. 30년쯤 전의 일이다. 글쎄 무슨 인연으로 내가 그 절에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나 관광차 오대산에 가고 그러면 월정사, 상원사, 적멸보궁 등은 으레 들리기 마련이다.

나는 상원사와 좀 색다른 의미의 추억거리가 있다. 거기서 〈비천〉이란 시를 얻은 것도 그중의 하나다.

상원사에는 국보급 혹은 보물급의 문화재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상원사동종’과의 인연은 나로서는 매우 흥미롭고 자별하다.

 

여기서 내 이야기는 더 거슬러 올라가 유년 시절의 꿈 이야기로 이어진다.

나를 무척 예뻐해 주시는 증조할머니가 계셨다. 여름 어느 저녁에 할머니와 나는 고향 집 마루에 앉아 참외를 깎아 먹고 있었다. 마당 위 중천에는 노랗게 밝은 둥근달이 어둠을 꽤나 많이 물리치고 있었다. 할머니와 나는 오순도순 재미있고 평화로운 밤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마당 위 달에서 커다란 통이 동아줄에 달려서 내려왔다. 통에는 아주 고운 여인이 타고 있었다. 통이 착지하자 그 여인은 우리가 있는 마루로 걸어왔다. 비단옷의 와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가온 여인은 나를 안고 다시 통에 올라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무서웠다. 허공에 오르면서 가위눌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이 무서운 꿈을 잊을 수 있었다. 학교에도 들어가고 또 6 · 25 전쟁 속에서 살기도 하면서 그 꿈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면서 사춘기를 맞게 되었다. 중학교 2, 3학년 때쯤 망각 속으로 던져져 있던 이 꿈이 그대로 의식 속에 재생되었다. 사춘기가 되어 막연하지만 여자를 그리워하면서 가슴이 더워질 때 이 꿈을 생각하니 너무나 멋있는 꿈이었다. 나는 이 꿈속의 여인을 동경하고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여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이 그리움 자체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속 골짜기 골짜기마다 그 여자를 들여놓고 기다리면서 나이를 먹어갔다.

시도 여러 번 썼다, 아니 문학 지망생인 나로서는 꼭 써야만 할 것 같았다. 중 · 고등학교 문예반 활동을 할 때 썼다가 찢고 썼다가 찢곤 했다. 대학 시절에도, 문단에 등단한 뒤에도 여러 번 썼다가 찢어버리곤 했다.

내가 쓴 시가 나는 불만족스러웠다. 아마도 자꾸만 서사구조의 글이 되었던 것이 맘에 안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내 오랜 숙제였다.

 

1990년대 초면 내가 등단한 지 20년도 훨씬 넘는 시기였다. 나는 상원사동종 앞에 서 있었다. 이 종에 대해서 최순우가 쓴 글 한 구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웅장한 소리 같으면서 맑은 울림, 어쩌면 슬픈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간절한 마음 같기도 하다.”는 그 소리를 연상했다. 나는 종의 표면을 눈으로 핥으며 감각하고 있었다. 종의 몸 가운데 새겨진 비천(飛天)이 눈에 들어왔다. 비천은 천의 자락을 휘날리며 구름 위에 앉아 공후와 생을 연주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저 쇳덩이에서 빠져나와 나에게 날아올 것만 같았다.

이러한 순간이었다. 저 비천이 어쩌면 유년의 내 꿈에 왔던 그 여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시를 다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증조할머니, 참외, 동아줄이 달린 통 등을 제외하고 오직 여자에게만 맞춰서 생각을 정리했다.

 

어젯밤 내 꿈속에 들어오신/

그 여인이 아니신가요//

안개가 장막처럼 드리워 있는/ 내 꿈의 문을 살며시 열고서/ 황새의 날개 밑에 고여 있는/ 따뜻한 바람 같은 고운 옷을 입고//

비어 있는 방 같은 내 꿈속에/ 스며들어 오신 그분이 아니신가요//

달빛 한 가닥 잘라 피리를 만들고/ 하늘 한 자락 도려 현금을 만들던//

그리하여 금빛 선율로 가득 채우면서//

돌아보고 웃고 또 보고 웃고 하던/ 그 여인이 아니신가요

— 졸시 〈비천〉

              

비천과 꿈속의 여인을 포개놓으면서 영혼 가득 따듯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담고 있는 여인, 열정을 품위로 승화시킬 줄 아는 여인으로 형상화해보았다.

이 시가 잘된 시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래도 이 시를 쓰고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상원사동종과의 만남은 6 · 25 전쟁 중에 이 종을 지켜준 방한암 스님과 우리 국군 장교의 용기와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 후퇴하던 국군이 월정사를 태우고 상원사까지 태우기 위해 들이닥쳤는데 방한암 스님이 가로막으며 나까지 태우라고 하자 장교가 상징적으로 절의 문짝만 태우고 철수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불타버릴 뻔한 절집과 문화재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 수십 년 후, 나는 살아남은 동종의 비천을 만나게 되었고 졸작이나마 유년시절부터 품고 있었던 시의 씨앗을 움트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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