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1. 서언

행복(幸福, happiness)은 매우 추상적이고 관념적이어서 말하는 사람에 따라 개념과 기준, 유형이 다양다기하다. 또한 종교와 문화의 차이에 따라서 개념 정의도 다르다. 행복은 감정이나 욕구 등이 반영된 즐거운 마음 상태로서 만족감, 안정감, 평온감, 의욕과 미래에 대한 희망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중첩되어 나타나는 매우 복잡한 심리상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행복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동일한 상황이나 조건하에서도 사람들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헌법에서는 기본적 인권으로서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고 있고 그것은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부여된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해지려면 물질적, 정신적 기반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양한 조건이 뒷받침될 때 사람들은 행복을 느끼거나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인간들은 아무리 발버둥질해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상황에 직면했을 때 종교에 의지해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정토, 극락, 천국 등의 개념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부처님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궁극적 상태인 열반의 행복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열반을 체득하는 방법으로 계정혜의 삼학을 공부함으로써 모든 족쇄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행복은 세간에서 추구하는 행복과는 차원이 다른 면이 있다. 세속의 일상적 삶에서 추구하는 행복은 감각적 쾌락과 물질적 조건, 그리고 정신적 요소들이 결합해서 느껴진다. 반면에 열반은 세속의 모든 조건들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의 인지적 요소와 정신적 요인들을 넘어선 대자유를 향유하면서 느껴지는 행복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행복이 일상의 삶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속의 삶이 곧 열반의 행복과 다르지 않을 때 불교적인 행복이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는 행복에 관한 설법 등을 통해 불교가 꿈꾸는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가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본 연구는 초기 경전인 니까야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1. 행복의 불교적 의미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행복(幸福)’이라는 표현은 대승 경전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복된 좋은 운수’ 혹은 ‘욕구가 충족되어 충분한 기쁨과 만족을 느끼는 상태’를 뜻하는데, 경전에서는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한 용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복(福)’ 혹은 ‘복덕(福德)’이라는 용어는 대승 경전뿐만 아니라 초기 경전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사용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복덕은 ‘선행의 과보로 받는 복스러운 공덕’을 의미하는데, 이 표현에는 ‘모든 선행 및 선행에 의해 얻는 복리(福利)’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인도에서는 신에게 올리는 공물을 ‘복(bhog)’이라고 한다. 그리고 신의 축복을 받아 잘 사는 사람을 ‘복비라스(bhogbilash)’라고 하여 한자어 복(福)과 발음이 유사하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제사에 올리는 고기와 술을 복(福)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는데, 인도에서도 칼리 신에게 술을 올리는 것도 복(bhog)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힌디어와 한자어의 발음과 의미가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복(幸福)이라는 의미의 힌디어로 ‘망갈라(mangala)’라는 단어가 있다. 이 말은 ‘상서로움, 길조, 행운, 길상, 축복’ 등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숫타니파타》의 《고귀한 축복의 경(Mahāmangalasutta)》에서 ‘망갈라’는 ‘축복’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는 ‘행복’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빨리어 수카(sukha)라는 단어에도 행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수카는 주로 세간의 즐거움을 의미하는 낙(樂)으로 번역하는데 세속적 행복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상윳따 니까야에서는 《행복의 경(Sukhitasutta)》을 두 군데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경전에서는 수카(sukha)를 행복(幸福)으로 번역하고 있다.

불교적 용어로 사용되는 복(福)은 세 가지 의미가 있는데 도덕상의 선행을 실천하는 세복(世福), 계율을 실천하는 계복(戒福), 보살행을 실천하는 행복(行福) 등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스스로 실천하고 지어가는 작복(作福)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불교가 꿈꾸는 참다운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경전에서 행복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3. 초기 경전에 나타난 행복

초기 경전에서 행복(幸福)은 범부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표현하는 용어이면서 동시에 수행자들이 실천하는 작복(作福)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또한 행복의 조건을 말하기도 하고, 열반의 행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경전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가지 행복에 대한 가르침은 세간적 행복과 출세간적 행복 등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세간적 행복은 불자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즐거움과 행복감을 말하는 데 비하여 출세간적 행복은 수행자가 체득하는 열반의 삶을 의미한다.

1) 세간의 행복

(1) 《빚 없음의 경》에서의 행복

앙굿따라 니까야 《빚 없음의 경》(A4:62)에서는 네 가지 유형의 행복을 설하고 있다. 네 가지란 소유의 행복, 향유의 행복, 빚 없는 행복, 허물 없는 행복 등이다. 소유의 행복이란 스스로 근면하게 노력하여 얻은 재물을 소유할 때 느끼는 행복을 말한다. 향유의 행복은 정당하게 얻은 재물을 향유하며 공덕을 베풀 때 느끼는 행복이며 기쁨을 말한다. 빚 없는 행복은 누구에게도 많건 적건 어떠한 빚도 지지 않을 때 느끼는 행복이다. 허물이 없는 행복은 신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어떠한 허물도 없을 때 느끼는 행복을 말한다.

빚 없음의 행복을 이루고 소유의 행복을 새기리. 향유의 행복을 누리며 인간은 그것에 대해 지혜로써 통찰한다. 현명한 자라면 통찰하면서 양자를 모두 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물없는 행복의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경전에서 말하는 행복은 행복을 성취하는 조건이다. 즉 행복감과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은 재물을 소유하고, 이를 향유하여 나눌 때, 빚이 없고, 허물을 짓지 않을 때라는 의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요소들을 통찰함으로써 허물을 짓지 않는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꿰뚫어 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허물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신체적 행동, 언어적 표현, 정신적 사유의 과정에서 악행을 하지 않고 동시에 허물이 없음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을 뜻한다.

세간에서의 행복은 결핍으로부터 벗어나야 하기 때문에 소유하는 것이 일차적인 행복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결핍으로부터 벗어나면 다음 단계로는 소유한 것을 누리는 기회가 주어질 때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에게 빚을 지게 되면 갚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고 독촉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독촉에서 벗어날 때 사람은 편안함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다음으로 악행으로 인한 허물의 족쇄를 벗어날 때 자유로운 행복감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빚 없음의 경》(A4:62)에서는 세간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행복의 조건과 그에 상응하는 행복감을 설명하고 있다.

(2) 《빚 없음의 경》에서 말하는 최상의 행복

사전적 의미로 축복(祝福)은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대해 행복을 기원하는 행위 또는 그러한 복’을 의미한다. 《숫타니파타》의 《고귀한 축복의 경》에서는 ‘최상의 축복(祝福, mahāmangala)’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하는 내용이 있다. 이 경에서는 축복은 행위의 조건으로 형성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공경, 서원, 절제, 부끄러움, 비난받지 않는 행동, 방일하지 않음, 감사, 논의, 열반의 실천, 안온함, 번영 등이 이루어지는 행위가 축복임을 밝히고 있다.

이 경은 부처님 재세 시의 인도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것이 축복인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에 대한 부처님의 설법 내용을 제시한 것이다. 논쟁에서는 축복에 대하여 보는 것, 듣는 것, 인식된 것 등 세 가지의 행복이 제시되었다.

첫째, ‘상서로운 것이라고 인정되는 형상을 보는 것’이 축복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상서로운 형상은 아침에 독수리나 빌와 나무의 싹이나 임신부, 잘 차려입은 소년, 가득 찬 항아리, 신선한 물고기, 준마나 준마가 끄는 수레, 황소나 암소 등이다.

둘째, ‘듣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은 상서로운 소리라고 인정된 것을 듣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이다. 행복, 번영, 충만, 아름다운 밤, 좋은 날 등과 같이 긍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소리를 듣는 것이 축복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인식된 것이 축복’이라는 것은 아침에 일어나 연꽃의 향기를 맡는 것과 같이 향기, 맛, 감촉 등을 접하는 것이 축복이라는 주장이다. 즉, 좋은 향기를 맡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축복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지속되자 사람들은 부처님을 찾아가 축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설법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부처님은 《고귀한 축복의 경》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더 없는 축복을 가져다주는 조건을 10가지로 제시하였다.

최상의 축복을 가져오는 첫째 조건은 “어리석은 자와 사귀지 않으며, 슬기로운 임을 섬기고 존경할 만한 임을 공경하는 것”이다. 즉, 자신을 이익되고, 향상되고 행복하게 해주는 지혜롭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나고 공경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축복이라는 의미이다. 공경할 만한 사람이란 곧 선지식을 의미한다.

둘째 축복의 조건은 바른 서원이 행복의 근원임을 강조하고 있다. “분수에 맞는 곳에서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아서 스스로 바르게 서원하는 것”인데, 자신의 분수에 맞는 장소의 선택, 공덕의 축적, 바른 서원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셋째 축복의 조건은 “많이 배우고 익히며, 절제하고 훈련하여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배우고 그것을 삶 속에서 체득하고, 반복하여 일상화하고 이와 관련된 법담(法談)을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최상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조건임을 강조하고 있다.

넷째 축복의 조건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 일을 함에 혼란스럽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원만한 가정생활,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는 것, 아내와 자식과 함께 살 수 있는 것, 자신의 직업에 장애가 없는 것 등 일상생활을 잘 영위하는 것이 축복의 조건임을 제시하고 있다.

다섯째 축복의 조건은 “나누어 주고 정의롭게 살고, 친지를 보호하며, 비난받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에서 보시를 실천하고, 부정부패에 휩쓸리지 않고, 친지와 화목하게 지내고, 포살법회에 참여하여 비난받을 일이 있을 때 참회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의 조건임을 밝힌 것이다.

여섯째 축복의 조건은 “악한 행위를 싫어하며 멀리하고, 술 마시는 것을 절제하고, 가르침에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하는 십선계를 실천하고, 불음주계를 실천하면서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이를 실천하는 데 나태하고 게으르지 않은 것이 축복이라는 의미이다.

일곱째 축복의 조건은 “존경하고 겸손할 줄 알고,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으로 때맞추어 가르침을 듣는 것”이다. 선지식을 존경하고, 자신을 하심하고 겸손하며, 소욕지족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은 축복의 조건이고, 이와 더불어 진리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는 의미이다.

여덟째 축복의 조건은 “감관을 제어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涅槃)을 실현하는 것”이다. 감관을 제어한다는 말은 안이비설신의 감각기관을 제어할 줄 알아서 인식된 대상에 끄달리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거룩한 경지는 아라한에 도달하는 것을 말하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기 위해서는 사성제의 지혜를 체득해야 한다. 그리고 불교적이고 궁극적인 행복은 열반의 실현이다.

아홉째 축복의 조건은 “세상살이 많은 일에 부딪혀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슬픔 없이 티끌 없이 안온한 것”이다. 세상살이 많은 일은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는 것, 명예와 치욕, 비난과 칭찬, 행복과 불행 등”을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안온하다는 것은 슬픔이나 번뇌가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열 번째 축복의 조건은 “어디서든 실패하지 않고 모든 곳에서 번영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것에도 정복당하지 않고 육체적 움직임이 있는 현세에서 번영과 발전을 성취하는 것이 최상의 축복임을 설하고 있다.

이 가르침은 인간이나 천상의 중생들이 행복한 존재로 살아가려면 성취해야 할 조건을 중심으로 설하고 있다. 또한 세간적 행복, 금생의 행복을 말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열반을 통한 행복을 강조함으로써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향상과 발전의 길로 나아갈 것을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수레바퀴의 경》에서 말하는 행복의 조건

앙굿따라 니까야 《수레바퀴의 경》(A4:31)에서는 세속적인 행복을 성취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조건을 설하고 있다. 네 가지 조건은 알맞은 지역, 참사람과 사귐, 바른 서원, 과거의 공덕 등이다. 이러한 조건을 성취하면 곡식, 재물, 명예, 행복 등과 같은 세속의 재화와 명예, 행복이 생겨난다는 것이 《수레바퀴의 경》에서 설하는 핵심 가르침이다.

수행승들이여, 네 가지 수레바퀴가 있는데, 그것을 갖춘 천신들과 인간들이 그 네 가지 수레바퀴를 갖추고, 천신들과 인간들이 그것을 굴리면 오래지 않아 크고 많은 재물을 얻게 된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알맞은 지역에 사는 것, 참사람과 사귀는 것, 자신의 바른 서원, 예전에 지은 공덕이다. (중략) 알맞은 지역에 살고 고귀한 임과 사귀며, 바른 서원을 세우고, 예전에 공덕을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곡식과 재물과 명예와 행복이 생겨난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다른 번역서에서는 네 가지 번영의 바퀴를 “적당한 지역에 사는 것, 참된 사람을 사귀는 것, 자신을 바르게 하는 것, 전생에 지은 공덕”으로 번역하였다. 이 가르침을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한다면 ‘알맞은 지역에 사는 것’이란 거주하는 장소를 잘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참된 사람과 사귀는 것은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식이란 나를 이익되고, 향상하고,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바른 서원은 올바른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고, 예전에 지은 공덕은 선업을 통해 선근공덕을 축적하는 것을 말한다.

이 가르침을 분석해 보면 세간의 삶은 먹고살 수 있는 장소를 잘 선택해야 곡식을 얻을 수 있고, 재물은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좋은 사람, 지혜로운 선지식을 만날 때 형성될 수 있고, 명예는 바른 서원을 세우고 이를 실천할 때 저절로 이루어지고, 행복은 전생에 지은 공덕이 축적될 때 저절로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열반의 행복

(1) 《보배의 경》의 진실로 인한 행복

《숫타니파타》 《보배의 경》은 “이러한 진실로 인해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라는 반복된 표현으로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경의 배경은 베살리 지역에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을 때 부처님이 이 지역을 방문하여 위무하고 지혜롭게 고통을 극복하도록 이끌어주는 과정에서 설해진 것이다. 당시 베살리 지역은 기근과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시신으로 악취가 가득 차고, 유리걸식하는 사람들이 넘쳐남으로써 사회적 고통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이때 지역 주민들이 부처님을 초청하여 설법을 듣고 그 공덕으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보배의 경》을 설하고 난 뒤 아난 존자와 리차비 왕자들이 각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발우에 물을 담아 쇄수(灑水)의식을 봉행하면서 이 경을 설하도록 가르쳐주었다. 그 결과 베살리 주민들은 이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일상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 경에서는 세간의 보배와 출세간의 삼보를 비교하면서 삼보에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세간의 어떤 보배를 갖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이는 불법승 삼보가 확고한 의지처가 되기 때문에 세간에서의 조건에 휘둘리면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강조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이 경에서는 첫째, 현세와 내세의 어떤 재물이나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해도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는 점을 진실로 받아들일 때 행복하다고 설하고 있다. 둘째, 번뇌의 지멸(止滅)과 소멸(消滅), 열반의 불사(不死)와 수승하고 현묘한 가르침과 견줄 만한 것이 없다는 진실을 받아들일 때 행복하다고 설하고 있다. 셋째, 청정한 삼매의 가르침과 견줄 것이 없는 진실로 인해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넷째, 참모임인 승가가 예류, 일래, 불환, 아라한 등의 사쌍팔배에 해당하는 수행자들의 집단인 승보(僧寶)이기 때문에 의지할 만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다섯째, 승가가 감각적 욕망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잘 적응하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적멸을 즐길 수 있는 승보이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여섯째, 사방에서 부는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룩한 진리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승보가 있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밖에도 승가는 악업을 짓지 않고, 작은 허물이라도 감추지 않고, 열반에 이르는 묘법을 가르치고, 위없는 열반을 체득하고, 과거의 업에서 벗어날 수 있고, 미래의 생존에 집착함이 없이 번뇌의 종자를 모두 파괴하고, 예경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 경에서는 “여래에 견줄 만한 것, 사실과 견줄 만한 것, 삼매에 견줄 만한 것, 희열과 적멸, 사성제의 거룩한 진리를 분명히 보는 것,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 계율과 서원, 궁극적인 길을 본 사람, 열반에 이르는 위없는 묘법” 등에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진실로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세상과 내세의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 행복하여지이다.

《보배의 경》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불법승(佛法僧) 삼보라는 세 가지 훌륭한 보배가 있기 때문에, 그리고 진실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의 행복은 두 가지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의지할 수 있는 보배가 있을 때 행복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전에서는 행복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의지처를 갖고,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 《행복한 삶의 경》

앙굿따라 니까야 《행복한 삶의 경》(A1:602)은 사념처 중에서 신념처 수행법을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신념처(信念處)는 몸을 관찰하는 명상법으로 ‘신지념(身至念, 신체에 대한 새김)’ 혹은 ‘신수관(身隨觀, 몸에 대한 관찰)’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하나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현세에서의 행복한 삶으로 이끈다. 그 하나의 원리란 무엇인가? 신체에 대한 새김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하나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현세에서의 행복한 삶으로 이끈다.

이 경전에서는 신념처 수행을 닦고 익히면 현세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을 설하고 있다. 이것은 수행하는 삶이 행복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3) 《행복하고 유쾌하게 지냄의 경》의 행복

《행복하고 유쾌하게 지냄의 경》(A6:78)에서는 수행자들이 현세에서 행복하고 유쾌하게 지내고, 번뇌를 부술 수 있는 여섯 가지의 완전한 수단을 갖추는 방법을 설하고 있다. 이 가르침은 수행자가 열반의 행복을 체득할 수 있는 수행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원리를 갖춘 수행승은 현세에서 행복하고 유쾌하게 지내고 번뇌의 부숨을 위한 완전한 수단을 갖춘다. 여섯 가지란 무엇인가? 세상에 수행승이 가르침을 좋아하고, 수행을 좋아하고, 버림을 좋아하고, 멀리 여읨을 좋아하고, 분노의 여읨을 좋아하고, 희론의 여읨을 좋아한다.

첫째, 가르침을 좋아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설법 내용인 진리, 법에 대한 가르침을 수용하고 좋아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수행을 좋아한다는 것은 《대념처경》을 바탕으로 한 37조도품의 수행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닦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수행자의 행복이라는 가르침이다. 셋째, 버림을 좋아한다는 것은 탐진치 삼독심과 교만 및 의심을 버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의미이다. 넷째, 멀리 여읨을 좋아한다는 것은 번뇌를 일으키는 요인들을 멀리한다는 것이다. 다섯째, 분노의 여읨을 좋아한다는 것은 분노를 여읜 사유를 하고, 분노를 여읜 지각을 함으로써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여섯째, 희론의 여읨을 좋아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말이나 결론을 낼 수 없는 논쟁을 즐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행복하고 유쾌하게 지냄의 경》(A6:78)에서는 수행자가 현세에서 번뇌에서 벗어나 행복하고 유쾌하게 지낼 수 있는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 방법은 가르침에 안주하여 안락함을 누리고, 수행을 통해서 번뇌의 요인들을 제거하고 부질없는 희론을 벗어남으로써 성취될 수 있다.

(4) 《행복의 경》에서 말하는 행복

《행복의 경(sukhasutta)》은 상윳따 니까야 〈목갈라나의 품〉에서 목갈라나 존자가 설한 가르침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경은 “선정에 들어가는 행복”을 주로 설하고 있다. 선정에서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세속적 쾌락이나 계행을 어기는 것 등과 같은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이는 세속적 삶의 조건들을 벗어나야 첫 번째 선정을 체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벗들이여, 마침내 나는 감각적 쾌락을 버리고 불건전한 상태를 버리고 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들었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수반하는 지각과 사념은 다섯 가지 장애인 탐애, 분노, 어리석음, 교만, 의심 등을 일으켜 선정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에 선정을 체험하는 희열과 행복을 방해하게 된다는 것이 목갈라나 존자의 가르침이다. 목갈라나 존자의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설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가르침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동시에 열반의 행복은 사선정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서 경험하는 핵심적 교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선정에서는 “사유와 숙고가 멈추어진 뒤 내적인 평온, 마음의 통일, 사유와 숙고를 여읜 상태의 희열과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두 번째 선정 상태에서도 사유와 숙고를 수반하는 지각과 사념이 존재한다. 세 번째 선정은 “희열이 사라지고,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신체적으로 행복을 느끼며 고귀한 임들이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선정”이다. 이 단계에서는 지각으로 인식되는 희열은 사라지고 정념의 상태에서 사티를 통한 새김과 알아차림이 남아 있다. 여기서 세 번째 선정에 들어간 행복감을 알아차릴 수 있다.

네 번째 선정 상태는 열반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갈라나 존자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네 번째 선정은 “행복과 고통이 버려지고 만족과 불만도 사라진 뒤 괴로움과 즐거움도 없는 평정하고 새김이 있고 청정한 선정”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선정은 색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색계 사전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무한 공간, 무한 의식, 아무것도 없는 세계,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의 선정을 말하는 무색계 사선정도 설명하고 있다.

(5) 《열반의 행복에 대한 경》의 가르침

앙굿따라 니까야 《열반의 행복에 대한 경》(A9:34)에서 사리불 존자는 “이 열반은 행복입니다.”라고 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우다인 존자는 “어떻게 거기에 느낌이 없는데 행복이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사리불 존자는 “안이비설신으로 인식되는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 등은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이 대상을 조건으로 유쾌한 행복이 생겨난다.”라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감각적 쾌락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세간의 행복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어서 사리불 존자는 “수행자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수반하는 지각의 정신활동에 묶인다면 그것은 그의 질병이 된다.”라고 설하였다. 그리고 “질병은 불행이기 때문에 열반은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다”라고 설하였다. “행복한 자에게 질병에 해당하는 불행이 나타나듯 질병에서 벗어난 수행자는 열반을 행복으로 자각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지각하는 것도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비상비비상처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들어도, 그것을 지혜로 봄으로써 모든 번뇌가 부서져 없어지면 열반을 행복으로 자각할 수 있다고 설하였다.

맛지마 니까야 《마간디야경》(M76)에서 부처님은 “열반은 최상의 행복”이라고 설한 바 있다. 이 경전에서는 열반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감각적 욕망의 일어남과 소멸과 달콤함과 재난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를 제거하고, 열병을 없애고, 갈증이 사라져 안으로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마간디야경》에서는 “최상의 이득은 병이 없는 것이고, 최상의 행복은 열반이며, 도 가운데 불사로 인도하는 팔정도가 최고로 안전하다.”라고 설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열반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열병, 갈증이 제거된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이 가르침에서는 열반이라는 최상의 행복은 세속적 행복이나 조건을 벗어난 마음 상태로 설명하고 있다.

 

4. 결어: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부처님께서 알라위 지역에 있는 상사빠 동산에 머물 때 핫타까 알라바까가 산책하다가 부처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이때 핫타까 장자는 부처님께 “잠은 잘 주무십니까?” 혹은 “행복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진정한 수행자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였다.

핫타까 장자가 ‘한겨울 밤, 눈이 쏟아지는 추운 날씨에 낙엽을 깔고 자는 것이 힘들지 않은가?’라고 질문하자 부처님은 ‘세속의 집에서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며, 네 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 삶인가?’ 반문하였다. 핫타까 장자는 ‘그것이 바로 세간의 행복한 삶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그런 삶이라고 해서 육신의 고통이 생기지 않고, 괴로움이 없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수행의 삶이 가져다주는 행복에 대해 설하였다.

아무리 화려한 집에서 잘 먹고 잘 산다고 해도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괴로움이 있다면 행복하게 산다고 할 수 없겠지. 하지만 나는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뿌리째 뽑아버려 다시는 욕망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오. 그래서 내가 행복하게 산다고 말하는 것이오. 정말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일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함과 편안함을 누리는 사람이라오.

이 가르침에서 부처님은 “정말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일체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마음의 고요함과 편안함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세속의 삶을 벗어나 수행의 삶이 가져다주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열반의 행복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꿈꾸는 행복은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 출세간의 삶에서 누리는 열반의 행복이다. 그렇지만 《화엄경》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세간과 출세간이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경지를 체득하면 세간의 행복이 곧 출세간의 행복의 토대임을 알게 된다. 〈십지품(十地品)〉에서는 보살이 체득하는 첫 번째 깨달음의 지위로 ‘환희지(歡喜地)’를 설하고 있다. 여기서는 보살이 환희지에 들어가는 것은 “위없는 자리이타의 행을 성취해서 처음 성인의 처소를 증득하여 많은 환희심을 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환희지의 마음이 바로 보살이 느끼는 가장 이상적인 행복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살이 처음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면 곧 범부의 지위를 벗어남을 얻어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 여래의 집에 태어나서 그 종족의 과실을 설할 수 없고, 세간의 취를 떠나 출세간의 도에 들어가며, 보살의 법을 얻고 보살의 처소에 머물며, 삼세의 평등에 들어가서 여래 종성 중에서 결정코 장차 무상보리를 얻는다.

《화엄경》 〈십지품〉에서 설하고 있는 보살의 환희지에 들어가는 행복감은 “여래의 집에 태어나 보살의 법을 얻고, 보살의 처소에 머물고, 삼세의 평등에 들어가 무상보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불교가 꿈꾸는 참다운 행복은 보살행의 실천에 있음을 의미한다. 보살이 자리이타의 바라밀행을 실천하면서도 고요함과 편안함을 누릴 때 그것이 참다운 행복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에서 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여러 가지 행복한 모습들에 대하여 찾아보았는데 이러한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행복은 정해져 있는 고정불변의 마음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하면서 얻어가는 만족감과 그 속에서 느끼는 고요함과 편안함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불교가 꿈꾸는 참다운 행복(幸福)은 보살행을 실천하는 행복(行福)이며, 이고득락과 발고여락이 실천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조건과 취착이 사라진 ‘열반의 행복’이다. ■

 

 

김응철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 경기대학교 행정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행정학 박사). 주요 저술로 《재가불자가 되는 길》 《둥근 깨달음 천수경》 《부처님 직제자들의 수행과 포교 이야기》 등과 논문 다수. 현재 불교신문 논설위원, 문화치유명상단체 동명 이사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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