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제가 써야 할 글의 제목이 ‘불교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입니다. 예, 압니다. 많은 분들이 ‘뭐, 이미 다 알고 있는 건데. 빤한 이야기 새삼 다시 읽을 게 있을까?’라고 생각하리라는 걸 말이지요.

사실 맞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데에는 특별한 이론이나 엄숙하고 진지한 수행 같은 건 필요하지 않습니다. 가정의 구성원인 부모와 자식이 서로 마음을 잘 맞춰서 살면 되는 겁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자식이 잘되라고 헌신해야 하고, 자식은 그런 부모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고 할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서 효도해야 합니다. 부부간에는 서로를 존중하고 더러 양보하고 희생도 하며 살면 되는 것이고요.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이런 일을 하면 된다는 것, 이거 모를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경전을 읽다 보니 가정생활과 관련해서 혹은 가족 구성원 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내용 가운데 뉘앙스가 좀 다른 경들을 만나게 됩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부부간에 사랑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 그 말고도 또 다른 내용들이 경전에서 툭툭 나타나고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 이번 글은 그런 관점에서 한번 풀어보려 합니다. 부부는 어떻게 해야 하고,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부모는 자식에게 무엇을 해줘야 하고, 자식은 부모를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가족 구성원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엄마만 기도하면 끝?

“당신 이름으로 등 달았어.”

“네 이름으로 엄마가 보시했어.”

이런 말들 많이 듣고 또 많이들 합니다. 가족 모두가 절에 다닐 필요 뭐 있냐며, 가족 대표로 딱 한 사람만 절에 나가서 기도하고 축원하고 시주하면 된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 맞을까요?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엄마가 아이들 대신해서 기도하고 선업 짓고 수행했나요? 그럼 엄마가 선업을 지었으니 엄마가 복을 받습니다. 자식이 복을 받을 일을 직접 해야 복을 받지요.

바쁜 남편, 일요일이니 낚시라도 가서 기분전환하고, 아내가 대신 방생 가서 물고기를 사서 남편 이름으로 강물에 풀어줬다면? 이것도 간단합니다. 남편이 낚시하러 가서 물고기를 잡고 또 그 고기를 회를 치거나 찌개를 끓여서 먹었다면 살생의 악업을 지은 것이요, 아내는 선업을 지은 것입니다.

업이란 누구를 대신해서 지어주고 또 누구 덕분에 과보를 받는 그런 게 아닙니다. 《법구경》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게송을 한번 음미해보지요.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서 가고, 마음은 가장 중요하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나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그로 인해 괴로움이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나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한다는 것은 몸과 입으로 짓는 악업을 말합니다. 그로 인해 괴로움이 따른다는 것은 악업에 따른 괴로운 과보를 말합니다.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르니, 마치 소가 수레를 끌고 갈 때 수레바퀴는 소의 발자국을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지요. 괴로운 과보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 원인인 행위(악업)를 따릅니다. 그러니 악업을 짓고서 괴로운 과보를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어리석음이요, 자기는 선업 짓지 않고 악업을 지으면서 다른 이의 선업에 따른 즐거운 과보를 함께 누리리라고 생각한다면 이 역시 어리석음입니다. 업을 지으면 과보가 따르니, 과보가 이 사람 저 사람 알아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그저 그 행위(업)에 결과가 무르익어 과보가 따를 뿐이지요. 남편이나 자식이 즐거운 과보를 누리기를 원한다면, 선업은 남편이 혹은 자식이 지어야 합니다. 엄마가 아내가 대표로 선업을 지었다고 해서 우리 집은 잘 될 것으로 생각하는 건 정말 불교식 사고방식이 아닙니다.

저 유명한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누이의 대화도 있잖습니까?

큰스님인 지눌 스님을 찾아온 누이, 그런데 누이에게 수행하고 선업도 지으라고 지눌 스님이 아무리 말해도 누이는 이렇게 대답하며 가뿐하게 넘겨버리지요.

“동기가 큰스님인데 뭐 나까지 수행하고 복 지을 필요 있나요? 난 스님 바짓가랑이만 붙잡을 테요. 스님 극락 가면 나도 가겠죠.”

그때 행자가 밥상을 들여왔습니다. 밥때가 되었으니 배도 슬슬 고팠는데, 밥상에는 달랑 스님 밥 한 그릇만 놓여 있었지요. 그런데 지눌 스님, 모처럼 자신을 찾아온 누이에게 ‘밥 먹었냐?’ ‘한 입 들어봐라’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혼자서만 냠냠 맛나게 먹고 그릇을 싹 비웠지요. 설마설마하며 지켜보던 누이는 화가 발칵 나서 말했다지요.

“어찌 밥 한 숟가락 먹어보란 말도 없이 혼자서 다 먹습니까?”

지눌 스님, 태연하게 되물었다지요?

“아니, 누이는 배가 안 부릅니까? 난 한 그릇 다 먹었더니 배가 부릅니다. 내 배가 부르니 누이도 배불러야 하지 않나요?”

배가 고프면 자기가 밥을 먹어야 합니다. 남이 아무리 먹어도 내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복을 짓는 일도 그렇습니다. 행복하게 살고 싶으면 선업을 지어야 하지요. 내 자식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면 내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식’이 선업을 지어야 합니다.

아내가 혹은 남편이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고 시주했다고요? 남이 대신 해주는 법은 없습니다. 아내는 자신의 복을 짓고 자신의 수행을 하고, 남편은 자신의 복을 짓고 자신의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 따로 아내 따로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이런 내용을 봤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 언젠가 길가 어느 나무 아래 앉아 휴식을 취하고 계실 때 일입니다. 마침 지나가던 장자들과 그의 아내들이 부처님에게 다가와 절을 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지요. 그 부부들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장자들이여, 결혼생활에 네 종류가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남자와 보잘것없는 여자의 결혼생활, 보잘것없는 남자와 가치 있는 여자의 결혼생활, 가치 있는 남자와 보잘것없는 여자의 결혼생활, 가치 있는 남자와 가치 있는 여자의 결혼생활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을 가치 있거나 보잘것없다고 나누는 기준은 분명합니다.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빼앗으며, 그릇된 성관계를 맺고, 거짓말하고, 술을 마셔 취하고, 계를 지키지 않고, 성품이 악하며, 인색한 마음을 지녔고, 수행자를 비난하고 비방한다면’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와 정반대로 행동하면 그는 가치 있는 사람이겠지요.

이 내용에서 남다르게 느껴지는 점은 남편과 아내에게 각각 기준을 들이대고 있다는 점입니다. 남편이 훌륭하면 아내가 덤으로 복을 받는다거나, 반대로 아내가 훌륭해서 그 덕을 남편이 본다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남편이 고결한 성품을 지녔다고 해서 아내까지 덩달아 그리되는 것도 아니고, 아내가 그렇다고 해서 남편까지 ‘부부니까’ 하며 넘어가지는 않는 것이 부처님이 바라보는 부부의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설령 부부 중에 누구 한 사람이 선업을 지어서 즐거운 과보를 받을 때 부부니까 그 즐거운 환경에서 함께 살아갈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즐거움은 선업을 지은 당사자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부부의 연은 어떻게 맺어지는가

불교는 사실 세속을 벗어나 구도자의 길을 걷기를 권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일들, 세상 사람들과의 인연을 부정하는 편입니다. 진정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집을 떠나야 하고, 배우자와 관계를 청산해야 하는 것이 초기불교 입장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인 가족관계를 깨어야 한다는 점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경전들을 조금 더 살펴보면, 수행을 하는 데에 ‘나 홀로’는 쉽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의 도움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내용을 만나게 됩니다. 게다가 그 누군가가 이성(異性)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어찌 그리 자신하느냐고요?

당장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주 오래전 전생 이야기(증일아함경 제11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술(超術)이라는 청년 바라문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스승 정광부처님에게 나아갈 때 자신의 간절하고 환희에 찬 구도심을 표할 공양물을 구하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인 선미(善美)가 다섯 송이 연꽃을 건네줄 테니 그 대신 장차 자신과 세세생생 부부의 연을 맺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됩니다. 청년은 ‘나는 어느 생에 태어나더라도 음욕을 여의고 수행을 할 신분이므로 그 약속을 지켜줄 수 없다’며 난색을 표합니다. 그러자 여인은 ‘그런 구도심도 충분히 이해하고 도울 테니 염려하지 말라’며 꽃을 건네줍니다. 이렇게 해서 이 여인과 청년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을 부부로 인연을 맺게 됩니다. 아주 조금씩 내용을 달리하지만 수메다와 수미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하는 이 전생담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야소다라의 인연 이야기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팔천송반야경》에서는 살타파륜 보살과 장자의 딸이 거의 비슷한 이야기로 등장합니다. 스승인 담무갈 보살에게 공양을 올리고 싶은데 가진 것이 하나도 없어 슬픔에 빠진 살타파륜 보살에게 장자의 딸이 다가와 자기 재산을 기꺼이 넘겨주면서 함께 스승에게 나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하게 되지요.

이 두 이야기를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부부의 인연이 새삼스럽습니다. 흔히들 말하지요. “어휴, 전생에 웬수가 부부로 만난다더니…….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사람을 남편으로(혹은 아내로) 맞았을까?”라고요.

하지만 불교에서의 부부 인연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의 경전 내용을 보자면 오히려 한 사람의 구도행을 아름답게 완성시켜 줄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배우자라는 말이 됩니다. 또한 세간에서 부부 인연은 전생에 5백 겁(혹은 5백 생)의 연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야소다라가 그렇게 연꽃으로 처음 인연을 맺어 그 후로 5백 생을 부부로 살았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무튼 부부는 이런 지극한 인연으로 맺어진 ‘도반’입니다. 그러니 내 수행을 도와줄 배우자가 어찌 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행여 배우자가 너무나 실망스럽다고 해도 그 속에서 내가 바르고 선량하고 이로운 업(선업)을 짓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그저 참고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나와 배우자와 자식들이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현실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망스럽고 원망스러운 배우자가 뜻밖에도 내 마음공부를 돕고 지혜를 키우도록 도와주는 아주 고마운 도반인 셈이 됩니다. 불교는 부부 인연을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부모 따로 자식 따로

소제목이 너무 삭막하고 각박한가요? 하지만 경전에서는 이런 뉘앙스의 내용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번에는 부모와 자식을 얼마나 개별적인 인격체로 보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경입니다.

옛날 어떤 남자가 나이 60이 되어 늦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하나를 두었지요. 그런데 이 아들이 참 사랑스러웠습니다. 아주 잘생겼을 뿐만 아니라 영특하고 말솜씨도 빼어났지요. 늘그막에 얻은 외아들이 이러하니 그 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그런데 이 소중한 외아들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병에 걸리더니 하룻밤 사이에 목숨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자식을 잃은 늙은 아버지는 제정신을 잃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더니 기어코 저승의 염라대왕에게까지 찾아가고 말았지요. 산 넘고 물 건너 물어물어 간신히 염라대왕을 만나게 된 늙은 아버지는 엎드려 애원했습니다.

“다 늙어 자식 하나를 두었고, 그 자식 크는 걸 보는 낙으로 이때껏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일곱 살이 되자 느닷없이 제 곁을 떠나서 지금 저는 살아도 산 게 아닙니다. 염라대왕이시여, 모쪼록 은혜를 베푸셔서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죽은 이를 이승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늙은 아버지가 하도 간청하니 염라대왕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그대 마음 참으로 갸륵하오. 그대의 어린 아들이 지금 동쪽 동산에서 놀고 있으니 직접 가서 데리고 가시오.”

늙은 아비는 허겁지겁 아들 있는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린 아들은 슬픔에 휩싸인 아버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또래 아이들과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 달려가서 아들을 와락 껴안으며 아버지가 흐느끼면서 말했습니다.

“아들아, 내 아들아. 나는 밤낮으로 너만 생각하느라 밥도 먹지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다. 그런데 너는 이런 아비의 슬픔과 고통을 생각이나 하고 있니?”

그런데 뜻밖에 그 어린 아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품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 말했습니다.

“미련한 이 노인은 아무 이치도 모르는구려. 잠깐 동안 몸을 의탁한 나를 아들이라 부르는구려. 부질없는 잔소리하지 말고 빨리 떠나시오. 나는 지금 이 세간에 내 부모가 따로 있거늘 황당하게 만나자마자 왜 껴안는 것이오.”

저승까지 찾아가 염라대왕에게 죽은 아들을 도로 이승으로 데려가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사정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늙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문전박대를 받고 더 서럽게 흐느끼며 결국 부처님을 찾았고 부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떠나 곧 다른 곳에서 몸을 받는다. 부모와 처자의 인연으로 모여 사는 것은 마치 여관의 나그네가 아침에 일어나면 이내 흩어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거늘 어리석고 미혹하여 얽매어 집착하고 있구나. 그것을 자기 소유라 생각하고 근심하고 슬퍼하며 괴로워하고 번민하면서도 근본을 알지 못하고 있구나. 그러면 생사에 빠져 끝없이 헤매고 말 뿐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은정(恩情)과 애욕에 탐착하지 않고 그 괴로움을 깨달아 그 원인[習]을 버리며 부지런히 법과 계율을 닦아 마침내 생사를 끝내게 된다.”(《법구비유경》 제3권)

가족을 가리켜서 여인숙에 모였다가 아침이면 뿔뿔이 흩어지는 객에 비유한 이 내용, 어떠신가요? 자식은 부모 소유가 아니라고 이렇게나 딱 잘라 말하는 부처님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 부처님 맞아?’ 싶을 정도입니다. 너무 냉정한 게 아닌가 싶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요? 낳았으니 온 정성을 다해서 길러야겠지만 자식은 자식의 삶이 있고 부모는 부모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법이라는 말이겠지요.

《담마빠다》에서는 아예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어리석은 자는/ ‘내 아들이다’ ‘내 재산이다’라고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자기 자신조차도 제 것이 아닌데/ 어찌 아들을, 재산을 제 것이라 여기는가.”

‘자식을 위해 내 인생을 다 바쳤다’고 말하는 부모를 많이 봅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자식을 위한 일이었는지, 아니면 자식을 통해서 내 욕심을, 내 소망을, 내 성공과 성취를 바라며 한 일이었는지는 냉정하게 따져보아야 할 일입니다. ‘내’ 자식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부처님은 여러 경전에서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말씀하십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그렇다고 ‘넌 네 삶을 살아라. 난 내 길을 가련다.’라며 자기 자식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습니다. 내 품 안에 있는 동안은 최선을 다해서 가르쳐야 하겠지요. 디가 니까야에 들어 있는 저 유명한 《싱갈라까에게 주는 가르침의 경》에는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다섯 가지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악함에서 지켜준다. 둘째, 선(善)에 들어가게 한다. 셋째, 기술을 가르쳐준다. 넷째, 어울리는 짝을 찾아준다. 다섯째, 적당한 때에 재산을 물려준다.”

‘사악함에서 지켜준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부적 같은 것을 써준다는 게 아닙니다. 자식이 악한 일 즉 악업을 짓지 않도록 일러주고 일깨우는 것을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선업을 짓도록 일러줍니다. 이 내용을 볼 때마다 놀랍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줘야 할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바로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하는 일’과 ‘선업을 짓도록 인도하는 일’입니다.

간혹 학교에서 그릇된 일을 한 아이 때문에 교사의 호출을 받은 부모 중에서 자기 자식만큼은 구김살 없이 자라게 하고 싶다며 오히려 자식을 적극 변호한다는 말을 간간이 듣습니다. 자식이 잘못된 행위를 한 것이 분명하고 피해를 입은 남의 자식이 버젓이 있음에도 ‘너는 공부만 해. 엄마 아빠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라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악업을 지은 자식을 이렇게 감싸는 것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의 앞날과 다음 생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생각만 해도 아찔합니다. 과연 그 부모는 정말 자식을 사랑하고 있기는 한 걸까요?

부모가 자식을 선업으로 인도하고 악업을 짓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이 내용은 수행자들이 재가 신자에게 해야 할 의무에도 들어 있습니다. 법답게 수행하는 이들은 재가자들에게 늘 악업을 멈추고 선업을 짓도록 권해야 한다는데, 부모가 자식에게 해줘야 할 의무사항과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세상을 먼저 살아봤고 살아가고 있는 어른으로서 자식에게는 정신적 스승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여겨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수행자가 재가자에게 정신적 스승으로 살아가니까요. 결국 부모는 자식으로 하여금 남에게 꿀리지 말고 떵떵거리며 살도록 해주는 것보다 먼저 자식이 자신과 세상을 위해 악업을 짓지 않고 선업을 짓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밤낮으로 자식 잘되기를 빌고 또 비는 우리의 부모님들이시여, 당신들은 정녕 무엇을 빌고 계십니까? 자식이 험한 일 당하지 않고 그저 꽃길만 걷기를 불보살님에게 비셨나요? 하지만 설령 부모님의 그 간절한 기도에 감응하여 불보살님이 그 자식에게 가피를 내리신다 하더라도 자식이 그 가피를 받을 그릇이 되지 못한다면 어쩌시렵니까? 정말 자식이 행복하게 살길 바란다면 자식이 그럴 자격을 갖추도록 비는 것이 더 맞는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자식의 행복을 바란다면

자식을 위해 눈물을 흘린 어떤 어머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인도 땅, 신분제도가 아주 엄격한 그 땅에서 죄인의 목을 베는 일은 천한 신분인 찬달라 출신들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해야 했지요. 어느 날, 큰 죄를 지은 죄수의 목을 베어야 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망나니인 찬달라 한 사람이 죄수의 목 치는 일을 거부했습니다.

“비록 신분이 낮아 임금의 명을 따르고 있지만, 내 마음은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제 사람의 목을 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벌레 한 마리도 해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왕은 귀를 의심했습니다. 감히 자신의 명을 어기다니요. 그것도 천민 주제에 말입니다. 왕은 그 망나니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만약 저 죄인의 목을 치지 않으면 네 목을 치겠다”고 소리쳤습니다. 망나니는 기꺼이 자신의 목을 내놓았습니다. 왕은 그를 죽인 후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의 동생을 불러냈습니다. 인도 사회에서는 직업도 세습인지라 동생 역시 망나니 일을 해야 할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 역시 형과 똑같은 말을 하며 스스로 죽음을 자초했습니다. 다시 그의 동생을 불렀고, 또 그의 동생을 불렀고…….

애초 죽임을 당한 망나니에게는 동생이 여섯 명 있었는데 다섯 명의 동생이 이렇게 처참하게 최후를 맞았고 급기야 어린 막냇동생이 왕에게 끌려왔습니다. 그런데 역시나, 어린 그 역시 형들처럼 차라리 자신의 목을 내놓겠다고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은 소리쳤지요.

“저 어린 망나니 녀석의 목을 쳐라!”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한 여인이 울부짖으며 뛰어들었습니다. 바로 이런 비극을 맞은 형제들의 어머니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사색이 되어 막내아들을 감싸 안으며 제발 목숨을 살려달라고 소리쳤습니다. 어머니가 하도 간절하게 애원하자 왕은 오히려 그 모습이 의아했습니다.

“그대는 앞의 여섯 자식이 처형을 당할 때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 아들들은 남의 자식이라도 된단 말인가? 새삼스럽게 막내아들 일에는 왜 그리 호들갑을 떨며 살리려고 애쓰는가?”

그러자 어머니가 울면서 말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앞서 목숨을 잃은 아들 여섯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착실하게 따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으면서 나쁜 짓을 저지른 적이 없으니 죽는다 한들 제 마음에 거리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내아들만은 그렇지 못합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범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생명이 위태롭다고 느끼면 나쁜 생각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처럼 간절히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 범부는 목숨에 애착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나쁜 생각에 쉽게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이 아들의 목숨만은 구해주십시오.”(《대장엄론경》)

왕은 어머니의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고, 이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경에서는 말합니다.

이 어머니의 모습에 전적으로 공감하기가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의 입장을 파악하기에 아주 좋은 경이라 생각합니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 마음이야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식의 무엇을 걱정해야 하겠느냐고 경전에서 묻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자식을 대신해서 아플 수도 없고 자식을 대신해서 늙어갈 수도 없고 자식을 대신해서 죽어줄 수도 없는 것이 세상입니다.

‘내가 이만큼 희생해서 너를 행복하게 살게 해줬다’라고 말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부모의 희생으로 마련해준 그 행복을 자식은 정말 ‘행복하다!’라고 여길까요? 고맙게 여겨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겠지만, 그게 자식이 바라는 행복인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이 행복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부모 차원의 행복 수준이겠지요. 그렇다면 부모는 자식의 무엇을 걱정해야 할까요? 잘 먹고 잘사는 걸 걱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식이 어떤 순간에라도 그릇된 생각을 품을까 그걸 염려하고 걱정해야 한다는 걸 이 경에서 암시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식과 부모는 어떤 관계인가

어떤 부모를 만나는가는 한 사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었다면야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금수저 집안에 태어나는 바람에 사람으로서 느껴야 할 행복과 보람을 오히려 느끼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면 너무나도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고생을 하며 자랐어도 알차게 자기 인생을 꾸려가는 젊은이도 많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하고 세상에 선한 힘을 미치는 경우도 우리는 자주 봅니다. 그렇다면 금수저 집안이든 흙수저 집안이든 그것도 부모 탓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환경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정말 중요하겠지요.

다음 이야기는 그런 면에서 생각할 거리를 많이 안겨줍니다.

부처님께서 코살라국 사위성에서 탁발을 하시다가 어느 공터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발가벗겨진 채로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하고 품에 안았습니다. 아이는 비록 비참한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전생에 수없이 수행을 이어온 터라 그 몸에서는 상서로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아이를 안아 들자 하늘의 제석천이 천상의 옷 한 벌을 아이에게 내주었지요. 이 아이는 부처님을 따라 사위성에 탁발을 나갔다가 어느 가정집에 들어갑니다. 그 가정집의 안주인은 아이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바로 자신이 낳아서 버린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어머니에게는 허물이 없습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내가 전생에 지은 악업으로 금생에 어머니 배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나의 복전이시니, 나를 가엾게 여겨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니 어머니! 부끄러워 마시고 서둘러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십시오. 어머니는 커다란 이익을 얻으실 것이니, 나를 회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진리의 안내자이신 부처님께 나아가 어떤 공덕이 있을 것인지를 여쭈십시오.”

아이는 자기를 버린 어머니에게 이런 뜻밖의 노래를 부를 뿐만 아니라, 제석천에게 부탁해서 천상의 꽃이나 옷가지 등 뭐든 달라고 합니다. 그걸 어머니에게 주어서 부처님에게 나아갈 때 공양 올리도록 하려는 마음입니다. 이 경은 아이의 이름을 따서 《부사의광보살소설경(不思議光菩薩所說經)》이라 합니다.

경의 내용이 너무나 종교적이라서 현실의 모자관계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참으로 부담스럽습니다. 주인공인 버려진 아이는 예사 사람이 아니라 수도 없이 수행을 많이 해와 금생에 부처님 제자가 되어 큰 깨달음을 얻게 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현실에서 부모에게 버림받아 불행하게 인생을 시작하고 끝까지 불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많은 사례와는 너무나도 거리감이 있습니다. 자칫 자식을 무책임하게 내팽개친 부모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만 같고, 자식에게는 모든 불행은 다 네 탓이니 부모 원망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습니다.

이 경에서는 부모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불교적 입장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부모는 한 생명을 세상으로 불러내어 이웃과 세상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게 했고, 나아가 그 아이가 부처님을 만나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어떤 절망적이고 극악한 환경에서라도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한 부모는 큰 공덕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린 자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부모도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경에서 보듯이 자식은 자식의 인생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부모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가 아닌 것이지요. 자식은 제 몫의 삶을 살려고 태어났고, 부모는 그 한 생명에게 삶의 단초를 제공한 존재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아서 자식이 자기 몫의 삶을 힘차고 보람차게 살도록 하기 위해 바르게 교육하고 살뜰하게 챙겨주는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자식은 자식 나름으로, ‘이 모든 게 엄마 아빠 탓이야!’라며 부모 탓을 하지 않고, 낳아주셔서 그저 고마울 뿐이고, 제 몫의 삶을 살아갈 책임은 자신에게 있음을 주지해야 하겠지요. 사회의 불합리한 시스템 탓에 노력하는 데도 제대로 된 결과가 따르지 않는다면 잘못된 시스템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그 잘못된 시스템을 바꾸는 일을 부모나 기성세대에게만 미루지 말고 스스로가 두 팔을 걷고 나서야겠지요. 그래야 나는 내 몸을 빌려 태어나는 내 자식에게 정의로운 세상을 펼쳐 보여줄 수가 있으니까요.

부사의광보살 이야기는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가 장차 부처가 될 가능성을 지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존재는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어떤 환경에 놓여 있더라도 그것은 내가 보살행을 실천해서 장차 부처가 될 바탕을 마련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말이 됩니다. 내 삶을 그렇게 가꿔가고 주변의  힘든 이들에게 든든한 의지처가 되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보살의 삶입니다. 그리고 부모는 그런 보살을 이 세상에 낳은 또 한 사람의 보살입니다.

 

다음 생에도 한 가족으로 만나려면

초기 경전에 등장하는 부부로 아주 유명한 두 사람이 있습니다. 나꿀라 아버지(나꿀라삐따)와 나꿀라 어머니(나꿀라마따)입니다. 이 부부는 금실 좋기로 소문났습니다. 늘그막엔 부처님 계신 절에 와서 온종일을 머물다 갈 정도로 독실한 불자 부부입니다. 어느 날 이 노부부가 부처님에게 묻습니다.

“우리 부부는 아주 어려서 부부의 연을 맺어 이날까지 이르렀습니다. 앞으로 남은 생도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고 다음 생에도 부부로 맺어지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아직 해탈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니, 반드시 번뇌를 다 털어버리고 윤회를 끊는 것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초기불교 입장으로서는 대답하기가 곤혹스러울 질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질문도 그대로 받아들이십니다. 행복한 가정을 꿈꾸고 다음 생에도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고 싶은 범부의 소망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부부가 이번 생에도 죽을 때까지 함께 행복하게 살고, 다음 생에도 그렇게 되고 싶다면 네 가지를 함께해야 합니다. 첫째는 믿음이 같아야 합니다. 둘째는 함께 계를 지켜야 합니다. 셋째는 함께 보시해야 합니다. 넷째는 함께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같은 믿음과 같은 지계, 같은 보시와 같은 지혜를 지니면 부부는 이번 생에도 해로하고 다음 생에도 부부로서 함께 지내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앙굿따라 니까야 제4권)

네 가지 항목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는 여기에서 ‘함께’라는 말에 더 끌립니다. 부부 중에 어느 한쪽만이 이 네 가지를 실천한다면 부부로서의 인연은 이번 생으로 끝입니다. 만약 지금 여러분의 배우자와 이번 생도 해로하고 다음 생에도 그렇게 부부로서의 인연을 맺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이 네 가지를 지금부터라도 실천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단, 두 사람이 꼭 함께해야 한다는 것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부부뿐이겠습니까. 사랑하는 내 자식들과 다음 생에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자식들 역시 부모와 똑같이 이 네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 되겠지요. 그런데 이 경을 음미해보면 좀 엉뚱한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결국 가족은 끼리끼리 같은 업을 짓고 같은 습을 익힌 자들끼리 어울리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번 생에 한 가족으로 만났겠지요.

 

불교는 어떤 가정을 꿈꾸는가

‘불교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을 주제로 이야기를 펼쳐보려니 어렵습니다. 가정이야말로 낱낱 개개인의 현실 삶이 출발하는 터전이고, 개개인의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가 시작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본능이 민낯을 드러내는 곳이 가정일 수 있습니다. 내 가족을 챙기기 위해 악업도 망설이지 않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단 내 가족부터 살아야 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이제 압니다. 나만, 내 가족만 잘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사는 세상이 행복해야 내 가족도 행복하고, 내 가족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합니다. 그러자면 나의 행복은 곧 세상의 행복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너무 논리가 비약한 것 아니냐고 힐난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내 가족의 행복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행복하지 말라는 것도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우리에게 행복하라고 권하고, 행복해지는 길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행복하도록 노력하라고 일러주고, 우리가 행복하면 함께 기뻐해주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이왕이면 진짜 행복을 찾아 나서야겠지요. 하지만 쉽지는 않습니다. 돈 많이 벌어서 남 보란 듯 떵떵거리는 행복은 어쩌면 쉬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누군가의 몫에서 가져온 것이고, 누군가의 양보와 손해를 부릅니다. 그건 진짜 행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불교는 그렇게 말합니다. 누군가의 손해와 불행으로 내가 행복해지는 그런 행복 말고, 오롯하게 흠 없는 행복이 진짜 행복이라 하겠지요. 세속에서는 선업에 따른 즐거운 과보가 진짜 행복이요, 출세간의 길에서는 해탈열반이 바로 그 진짜 행복입니다. 그 진짜 행복을 찾아 나서고 진짜 행복을 이루는 데 혼자 힘으로 부족하니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진짜 행복해지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는 곳이 바로 가정입니다.

가정을 떠나 어디에서 이만큼 마음이 잘 맞는 도반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순도순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고,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고 누리고 좋은 일도 하게 해주는 곳이 가정입니다. 나아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아주 오래전 전생에 야소다라를 만나 성불의 수기를 받은 것처럼, 그리고 이번 생에 싯다르타가 성을 나와 수행하여 성불했을 때 야소다라와 라훌라가 더불어 출가 수행하여 도를 이룬 것처럼 가정은 그런 곳이라고 불교는 보고 있습니다.

가족은 내 업장이자 애물단지이자 빚쟁이나 원수 덩어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장차의 부처님들이 수행을 완성하기 위해 아내로 남편으로 자식으로 한 울타리 안에서 깃들어 살고 있는 곳이지요. 이렇게 가족에 대한 관점을 바꿔보면 뜻밖에 쉬워집니다. 불교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을 가꿔갈 수 있는지 자명해집니다.  ■

 

이미령
경전 이야기꾼, 불교 칼럼니스트. 동국역경원 작업에 동참하고, 사찰에서 다양한 경전 강의와 불교입문 강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붓다 한 말씀》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간경수행입문》 《타인의 슬픔을 마주할 때 내 슬픔도 끝난다》 등과, 공저로 《불교입문》 《붓다의 길을 걷는 여성들》 등이 있고, 번역서로는 《행복의 발견-에세이로 읽는 반야심경》 《경전의 성립과 전개》 등이 있다. 불교평론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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