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고대 인도에서 현대 한국까지

1. 고타마 붓다 시대, 인도의 성평등

여성과 남성. 그 두 성 간의 불평등 문제는 가부장제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성을 갖는다. 가족 내의 지배권을 누가 갖는가? 여성 쪽에서 후손의 출산과 양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자신의 성 역할로 인식한 이래로, 여성은 사회적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에서의 양성 불평등 문제는 불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여름 8월의 일이다.

인도에서 자이나 성지로 유명한 삼메다(Sammeda) 산에 갔을 때였다. 점심때, 식당에서 인도인 가족 일행이 말을 걸어왔다. 그들도 당연히 성지 순례를 위해 그곳에 왔다. 인도르(Indore)에 오면 들러달라는 둥, 이런저런 얘기 끝에 헤어지면서 서로 연락처를 교환했다. 그런데 나와 얘기했던 부인이 써주는 주소의 성명이 좀 이상했다. 나란히 두 사람의 이름을 써주었다. 그중 어느 것이 당신 이름이냐고 물었더니, 위는 남편, 아래는 자기 아버지 이름이란다. 그 순간 좀 놀랐다. 순식간에 내 머릿속에는, 자기 이름 없이 남편과 아버지 이름만으로 사는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다시 내가 본인 이름을 써달라고 말해서 받아낸 그녀의 이름은 수비 자인(Subhi Jain). 그녀가 먼저 썼던 남편 이름은 슈리 비말 지(Shri Vimal Ji), 아버지는 라제쉬 지 자인(Rajesh Ji Jain)이었다. 하지만 그 두 사람은 함께 오지도 않았다.

《마누 법전》 이래로 인도에는 독립된 여성이 없다는 말, 즉 “여성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자라다가, 결혼 뒤에는 남편의 보호를 받고, 그리고 늙어서는 아들의 보호를 받는 존재”일 따름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자이나교에서는 제1대 조사 리샤바의 딸 브라미(Brāhmī)가 출가하여 사드위(sādhvī)가 되었고, 여성 출가자 교단의 제1대 수장이었다고 전한다. 전승에 따르면, 리샤바 당대의 여성 수행자, 사드위 수가 3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한 전승에 따라, 필자는 평소 자이나 교단에서는 여성 출가자를 교단의 성립 초기부터 허용했으며, 자이나 교단 내부의 남녀평등 지수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높다고 말해왔다. 실제로 여러 연구 결과에 근거하여 말하자면, 전 인도의 종교 집단 가운데, 남녀평등 지수가 매우 높기 때문에 특히 미망인이 된 경우에 자이나 교단으로 출가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통계가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방문을 계기로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교리, 문헌, 제도 등으로 인정되는 평등의 정도와 실제로 현실에서 구현되는 정도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은 말한다. 고타마 붓다의 시대, 즉 기원전 5세기경 전후의 고대 인도에서 불교는 매우 혁명적으로 평등을 주장하였고 실제로 구현시켰다고! 물론 그 시대에 만연했던 출신 신분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교단 내의 평등을 실천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미나 칸델왈(Meena Khandelwal)은 산야시니(sanyāsīnī)라는 힌두 여성 고행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산야시니는 온 생을 다 바쳐서 모크샤, 즉 정신의 해방(liberation)을 추구하는 여성으로서 혼인, 가족, 가사(家事), 세속적인 쾌락 등을 즐기는 일상적인 삶을 포기한 수행자이다.”

해탈(mokṣa)을 추구하는 것은 권리와 지위의 평등을 추구하는 해방론자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모크샤를 추구하는 수행자에게 성의 분별은 없다. 더구나 남녀 양성만을 전제로 하는 분별은 더욱 적절치 않다.

예부터 인도 전통에서는 자이나교뿐 아니라 힌두교에서도 여성(bhāvastrī), 남성(bhāvapuruṣa)이라는 두 성 외에도 양성체(herm-aphrodite)라고 하여 두 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자[兩性具有者], 또는 중성이라는 개념을 매우 자연스럽게 수용해 왔다. 이러한 관념은 그들의 언어 속에도 중성 격이라는 구분을 통해 뚜렷이 자리하고 있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인도에서 출가자는 양성 내지 제3의 성조차도 초월한 존재이다. 특히 여성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남성의 경우도 가부장이라는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여성의 경우에는 출산과 육아, 가사의 책무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포함하여 인도 종교사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경지의 해탈을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은 수없이 거듭되어 왔다. 자이나 교단 내부에서도 예외 없이 논쟁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여성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세부적인 내용 모두 남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들어서 반박하고 있다.

예컨대 그와 같은 논쟁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공의파(空衣派)에서는 이렇게 추론하여 말한다.

“여성에게 모크샤는 없다. 왜냐하면 유효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백의파(白衣派)의 대론은 다음과 같다.

“네가 말하는 이유도 결국 무효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논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도 해탈한다. 왜냐하면, 남성의 경우처럼 우리도 해탈에 이르는 조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편에서 위와 같은 논쟁을 똑같이 무한 반복하고 있다. 출가자에게 또는 각 종교의 교도들에게 해탈의 문제에서 남녀 성차별은 없다. 절대 명제가 그렇고 현실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불교 안에 성차별적인 요소는 전혀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비구니 교단이 성립할 당시의 정황을 보여주는 경전 문헌에는 붓다를 비롯한 교단 내의 여성관을 또렷이 알게 해 주는 내용이 적잖이 들어 있다.

특히 여성이 출가하면 불법의 지속 기간이 반감할 것이라고 말했던 붓다의 태도는 오래도록 자이나교와 비교되었고, 현대에도 불교가 성차별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데 큰 몫을 했다. 그리고 그러한 맥락에서, 라다크(Ladakh), 태국, 스리랑카 등에서 여성 교단은 온전히 전승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지역에서 여성 출가자는 대개 농사일에 전념하거나 음식과 관련된 식당 일을 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 남성 출가자와 동등한 이력을 쌓거나 교단 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위에 근접할 기회조차 없다.

후대의 학자들은 자이나교의 공의파와 불교의 교조 붓다의 여성에 대한 태도, 욕망에 대한 관점은 일맥상통하며 그 배경에는 고대부터 인도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관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2. 경전 문헌과 불교 교단의 성평등 의식

붓다의 생애를 담고 있는 경전에서도 출가 이전의 삶에 대해서 상세히 전하는 문헌은 그리 많지 않다. 출가한 성인(聖人)의 일생에서 출가 전 속인 시절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던 관습 탓이 클 것이다. 더구나 음욕을 악업의 뿌리로 여겼던 불교의 전통에서, 붓다와 여자 사이에 생겨난 이야기는, 만약 있었다고 하더라도 후대에 전할 목적으로 경전에 포함하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와 직접 삶을 나누었던 세 여인, 생모와 양모, 아내였던 야소다라와 관련된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양모와 관련된 이야기는 비구니 교단의 시작점과 맞물려서 회자되고 있다.

생모를 일찍 여읜 붓다의 속마음은 지금 우리가 속속들이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출가자였을지라도, 또 온 세상 모든 존재의 스승일지라도 친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없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한 정감을 배경으로 하여 성립된 문헌이 《마하마야경》이다. 후대의 우리는 그 경전을 통해서 붓다 또는 불교의 여성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그 바탕에 대해서 단편적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양어머니 대애도와 야소다라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특히 대애도는 불교 교단에서 허락한 최초의 비구니로 알려져 있고, 그 출가에 얽힌 이야기는 《대애도비구니경(大愛道比丘尼經)》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전하고 있다.

 

붓다는 대애도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는 아난다의 간청을 또 거절하셨다.

“아난다, 그만해. 여자의 몸으로 집도 없이 떠돌며 수행하는 것을 적당치 않아.”

그렇게 세 번이나 간청하고, 세 차례 다 거절당한 뒤에도 아난다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난다는 기억나는 대로 붓다의 양모, 대애도가 그동안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는지 다 말씀드렸다. 대애도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교단에 들어와서 충분히 수행할 만하다고……. 거듭 간청하는 아난다의 말을 듣고 나서, 곰곰이 생각한 뒤 말씀하셨다.

“여덟 가지를 죽을 때까지 추호도 어김없이 지킨다면, 출가를 허락한다.

첫째, 비구니는 비구에게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

둘째, 비구니는 보름 간격으로 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셋째, 비구니는 만약 머무는 곳에 비구가 없다면, 여름 안거를 지낼 수 없다. 반드시 비구가 있는 곳에서 여름 안거를 지내야 한다.

넷째, 비구니는 여름 안거를 마친 뒤에, 비구와 비구니가 모인 데서, 안거 동안 보고 들은 것과 의심나는 것에 대해서 반성해야 한다.

다섯째, 비구니는 비구가 허락할 때에만 경 · 율 · 논, 3장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 만약 비구가 허락하지 않으면, 비구니는 물어볼 수 없다.

여섯째, 비구니는 비구의 잘못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비구는 비구니의 잘못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일곱째, 비구니가 만약 승잔(僧殘, saṃghāvaśeṣa), 즉 죄의 내용이 승단 밖으로 추방되는 것은 면하고 잔류를 허용하는 경우에는, 비구와 비구니, 2부 대중에게 보름 동안 속죄해야 한다.

여덟째, 비구니가 구족계를 받고 나서 비록 백 살이 되었더라도, 이제 방금 구족계를 받은 비구에게 마땅히 머리 숙여 인사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다해야 한다.

이 여덟 가지는 마치 흐르는 물을 막아 주는 둑과 같은 거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철저하게 지킬 수 있다면 좋다, 출가해도 좋다.”

이러한 내용은 중아함경과 상응부 경전의 《고타미경》을 비롯하여 율장에 나온다. 내용과 순서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큰 차이는 없다.

이와 같이 붓다는 여덟 가지를 조건부로 하여 대애도와 그 일행들의 출가를 허락했다. 그 후로 대애도는 불교 교단 최초의 비구니로서 이름을 남겼고, 그때 제시된 여덟 가지 조건은 훗날 8중법(八重法)으로 불렸다. 이에 대해서 조은수는 현대 학자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둘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는, 그것은 부처님 자신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고, 그의 보수적인 제자들(의 사상)에 의해 후대에 만들어진 계율이라는 것, 둘째는 부처님이 말했을 수도 있고 당신의 제자들이 만든 것일 수 있지만, 당시 인도 사회의 반발을 감안하여 하신 방편적 발언이라는 것. 하지만 어느 쪽으로 해석되건, 불교는 그 교단이 여성과 남성 성직자, 그리고 여성과 남성 신자의 4부 대중으로 이루어진다고 성문화되어 평등성과 민주성이 오랫동안 불교의 사회적 정치적 이념의 지표가 되어왔다. 그러나 평등 사상을 실천한 부처님과는 달리 그 후 불교는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가부장적 사회와 문화 속에 침식당하면서 당시의 정신을 잃게 되었다.

 

필자로서는 여성 출가를 허락하는 당시의 정황상, 인도 사회의 반발을 고려하여 방편적으로 8중법을 설했다거나 경전에 편입된 과정이 붓다의 직설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논거는 미약하다고 본다. 경전의 내용을 2천 년도 더 지난 뒤에 임의로 취사선택해서 불설, 비불설을 가늠 보아 판단하는 것은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단순히 현대의 잣대에 따른 변용 또는 취사선택이 가능할 따름이라고 본다.

사실, 붓다 당시 교단에 입문하는 것은 매우 쉬웠다. 붓다를 만나서 잠깐 동안 얘기를 듣고 나서, 마음을 내어 출가를 원하면 거의 예외 없이 입문이 허락되었다. 그때마다 붓다는 간단한 인사말을 건넬 뿐, 까다롭게 문턱을 높이지 않았다.

“환영하네, 비구!”라든지, “잘 왔네, 비구!”라고 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뿐이었다. 비구가 되겠다고 찾아온 남자들에게는 단 한 마디의 환영사로 허락했던 붓다였다. 남자의 경우에 노소(老少)와 신분을 차별하지 않았고, 선선히 출가를 반겼던 붓다였다. 그런데 왜 비구니의 입문은 상당한 고심 끝에야 겨우 허락했을까? 물론 붓다는 위와 같은 여덟 가지 단서를 내걸고서, 대애도 일행의 입문을 허락한 이후에는 비구와 똑같이 비구니를 대했다.

“잘 왔네, 비구니!”

이렇게 반기는 말 한마디로 여성의 출가와 교단 입문이 허락되었다.

붓다 시대에 출가자의 입문 수계는 복잡한 의례가 필요하지도 않았고, 그 당시 다른 교단에서 요구받았던 신체 일부의 포기라든가 다른 어떤 대가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발적인 출가 의지,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출가한 사람을 가리켜, 경전에서는 “선래(善來) 비구(ehi-bhikkhu)” “선래 비구니”라고 부르기도 하고, 율장에서는 선래 구족자(善來 具足者)라고 분류한다.

인도 종교사에서 4부 대중은 교단을 이루는 네 개의 기둥으로 여겨졌고, 교단 발달의 토대로서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이제 막 발흥한 교단이었던 불교의 경우에 최초에는 여성 출가자가 없는 상태로 지냈다가, 대애도와 그 일행의 출가를 허용함으로써 비로소 비구니라는 나머지 한 기둥이 생긴 것이다. 이로써 불교에도 4부 대중이 갖추어졌고 교단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율장의 내용을 분석하건대, 교단 내 4부 대중의 위계는 어느 정도 용인한 듯이 보인다.

불전 문헌 속에 비교적 많이 등장하는 ‘평등’이라는 말은 성평등을 위한 용법으로 쓰이기보다는 평등해야 할 논리적인 문구에서 등장한다. 예컨대 법성에 차별이 없다거나, 자성(自性)에는 차별 없다고 할 때, 평등이라는 말로 수식하고 있다. 설법도 평등하다고 표현한다. 이른바 평등 설법(平等 說法). 이처럼 불전 속에서 평등이라는 말은 주로 설법, 업, 마음, 해탈, 사성(四姓) 등을 수식하는 용어로 등장한다.

물론 일체 법성에 차별이 없기에, 당연히 “법무남녀 평등일체(法無男女 平等一體)”이고, 남녀도 평등하다. 여기에는 승속을 가리지 않는다. 결국 승속남녀(僧俗男女)가 모두 평등하다. 이와 같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출간된 여러 편의 글과 책에서, 붓다는 평등을 설했고 당대에 교단 내에서 평등을 실천했지만 그 이후에 차별과 불평등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한 관점은 이미 완성된 성인(聖人)으로서 고타마 붓다에게는 어떠한 오류나 흠결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맹목적인 추종 심리에서 비롯된 표현이 아닐까?

예를 들어 보자. 다음 구절은 일반적으로 불교 교단이 평등하다는 근거로서 삼고 있는 대표적인 구절이다.

붓다는 “신분 차별성이나 남녀 차별성도 보이지 않으며, 여러 율전에서 전하는 바와 같이 교단 내 서열은 오직 법랍 순에 따르고” 있다고 한다.

필자는 율장 속의 차별은 구별이라고 보고 불평등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견해라고 본다. 법랍 순 서열만 가지고 평등하다는 지표 내지 기준을 삼는다면, 너무나 소박한 잣대로 평등을 판단하는 것이다.

경전에 나타난 붓다의 교설 가운데, 일반적인 여성관을 표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경전으로 증지부 《결혼경》(no.4. 53.)이 있다. 베란지(verañji) 인근의 길가 나무 아래서, 붓다가 재가 남녀를 상대로 설법하는 중에 나오는 내용이다.

 

“장자들, 결혼 생활에는 네 가지가 있어요.

비천한 남자와 비천한 여자가 함께 사는 경우, 비천한 남자와 고귀한 여자가 함께 사는 경우, 고귀한 남자와 비천한 여자, 또 고귀한 남자와 고귀한 여자가 함께 사는, 이 네 경우가 있어요.

먼저 비천한 남자와 비천한 여자가 함께 사는 경우란, 두 부부가 모두 살생하고, 주지 않는 데도 취하고, 삿된 음행을 즐기고, 거짓말을 하고, 술을 마시고, 성품이 나쁘고, 인색하고, 출가자들에게 욕하고 비방하는 이들이에요.

비천한 남자와 고귀한 여자가 함께 사는 경우란, 남자는 계를 지키지 않고 천하게 행동하지만, 여자는 계를 잘 지키고 출가자에게 욕하지 않고 비방도 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고귀한 남자와 비천한 여자의 결혼이란 위와 반대로, 남자는 계를 잘 지키고 출가자에게 욕하지 않는 고귀한 사람이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입니다.

부부가 모두 고귀한 경우는 두 사람 모두 계를 잘 지키고 선하게 행동하며 인색하지 않고 출가자에게 욕을 하거나 비방하는 일이 없는 이들을 말합니다.

부부 두 사람이 서로 믿고 사랑스러운 말을 나누고 착하게 살면, 이로운 일이 많고 평화로운 가정을 이룰 수 있답니다.”

 

이와 같거나 유사한 내용의 경이 여러 편 전하는 것으로 보아, 붓다가 재가자를 위해서 동일한 취지의 설법을 여러 장소에서 수차례 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위의 경에서 말하는 귀천의 기준은 인도의 사회적 윤리 기준으로 흔히 말하는 청정과 부정(不淨)이라는 이원적 관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윤리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는 계행이 바르다면, 당연히 행복이 뒤따르지만, 계를 어기고 착하지 못하면 불행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불교 교단의 윤리적인 판단 기준은 5계이기 때문에 재가자에게도 5계를 잘 지키고 선행을 실천하면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는 정언(定言)!

그리고 붓다는 부부 관계에 대해서도, 여성에게는 의무를 다하고, 양쪽 친척에게 정중해야 하고, 물건을 잘 보관하고, 부지런하고, 믿음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남편 또한 아내를 존경하고 순결을 지키고, 권한을 주고, 장식품을 주고, 믿음을 지녀야 한다고 권했다.

불교의 부부관은 그 시대의 힌두 전통과는 확실히 달랐다. 남편을 신처럼 믿고 따르라는 둥, 일방적인 복종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무조건적인 헌신을 종용하거나 부당하게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남아를 출산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이혼당하는 일을 용납한 적도 없다.

붓다는 출가자에게 그러했듯이, 재가자에게도 한쪽이 다른 쪽을 지나치게 강제하거나 강압적인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경사진 위계질서를 상정하여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고 본다. 경전 어디에서도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에게만 강제된 윤리 준칙을 강요하지는 않았던 공동체가 불교 교단이었다.

 

3. 현대 한국불교와 성평등

고대 인류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남녀 성평등의 방향을 취한 듯, 발전적인 이념을 고취시켜 왔다. 하지만 그 실상은 양성평등과 매우 동떨어져 있는 상태이다. 이와 동일한 관점에서 하춘생도 “한국 근 · 현대 비구니의 세계 형성과 문중 성립, 그를 통한 사자상승의 인연 관계를” 살핀 뒤에, “불교 교단사의 흐름이 비구 중심으로 내려오면서 비구니들의 행적을 의도적으로 방치해온 바 없지 않으며, 더욱이 사자상승의 법맥 계통에서는 비구니를 아예 소외시킨 편파적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 결론 내렸다.16)

고대부터 현대까지 여성의 사회적 지위, 즉 경제, 정치, 가정 내 지위는 억압 상태에서 불공평과 불평등이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고, 불교만의 문제도 아니다. 생물학적 차이를 기반으로 하여 우열과 열등을 가르는 가부장제적 관념, 특히 남근 중심주의적(phallogocentric) 관념과 주의 주장은 아직도 여전히, 그나마 마련된 제도적 미봉책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그와 무관하게 사회 구성원의 의식을 길들이고 있다.

한국 근대불교사에 일 획을 그었다고 평하는 대표적인 비구니 일엽 스님에 대한 연구의 서두에서 진 와이 박은 “불교의(다른 종교에서도) 여성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학자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교단 구성원으로서 여성이 관심사로 떠오른 지는 겨우 반세기가 지난 셈이다.

현대 한국불교 교단 내 성평등 문제에 대해서, 단지 바람직한 비교의 관점에서 대만의 유사 사례를 언급해 보자.

한 비구가 성운 스님께 비구니의 무례를 고하였다.

 

어느 날 한 비구가 “비구를 봐도 정례(頂禮)하지 않으니 팔경법이라는 것도 모른단 말입니까?”라고 말하자, 성운 스님이 말씀하셨다. “출가한 지 이제 겨우 2, 3년 되어 머리 위 계인(戒印)의 표시조차 마르지 않은 당신에게 남성이라고 정례를 하라니…….” “8경법은 누가 정한 것입니까? 부처님이 정한 것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지요? 앞으로 8경법을 말하지 마십시오. 스님은 인간 세상과 당신에게 도움을 주고 이로움을 주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감사하고 그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님이 해야 할 사람의 도리입니다. 게다가 공경은 타인이 스스로 우러나 우리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지, 우리가 사람들에게 공경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운 스님의 불광산사 개산 이야기는 이미 전설적이다. 그 바탕에는 남녀 성평등에 대한 투철한 자각과 사상이 있었다. 성운 스님은 자신의 여성관을 이렇게 밝힌다.

“성별에는 남녀 구별이 있지만, 불성에는 이른바 남녀의 구분이 없으며 그 사이에는 격차도 없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불광산의 양성 관리는, 법당에 서거나 식당에 들거나 줄을 설 때는 언제나 남성 대중은 동쪽에, 여성 대중은 서쪽에 각기 동서를 반씩 나눠서 서며, 누가 앞이고 누가 뒤라는 것도 없이 비구와 비구니가 함께 동등한 권리와 지위를 누립니다. …… 불교계에서 여성 대중의 지위를 높임으로써 여성 대중의 새로운 이미지를 수립했습니다.”라고. 그는 “세상에서 강약, 대소, 빈부, 남녀 등 수많은 고르지 못한 문제는 바로 불평등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여권 신장의 시대에 남녀평등, 양성 권리 평등은 시대적 추세입니다. 불광산의 여러 양성평등 관리 방법은 비구니에게 비구와 같은 동등하고 공평한 지위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남자도 좋고 여자도 좋지만, 남녀 간에 반드시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돕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며, 이렇게 해야 진정으로 평등하고 평화롭고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습니다.”라고 확고한 여성관을 피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실천하고 있다.

언제나 입증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불광산사의 성공에는 분명히 남녀 성평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진보적인 사상이 큰 몫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만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불교의 신도 대다수는 여성이다. 불광산사는 단 한 사람이 탁월한 혜안을 통해서 선구자적인 안목과 진취적인 실천력을 가질 때 어떠한 결과를 낳는지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꿈꾸는 미래의 불교를 향해 전 세계를 상대로 전교(傳敎)를 진행하는 중이다.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예나 지금이나 불교를 믿고 따르는 까닭은, 해탈하는 방도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묻고 답한다.

 

묻는다.

“누가 나를 해탈시킬 수 있습니까?”

답한다.

“법성(=진여=불성)이 나를 해탈시켜 준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상(相)을 취하는 까닭에 지옥에 떨어지며, 법(진리, 법성, 진여)을 보는 까닭에 해탈한다.”

“만약 법계 열반성을 보게 되면 생각하고 분별함이 없게 된다. 바로 이것이 법계성(法界性)이다.”

 

개조 고타마 붓다 시대부터 불교라는 대목(大木) 아래서 가르치고 믿고 따르는 진리에 의거하자면, 차별은 곧 지옥행이다. 물론 남녀 성을 위시하여 부당하고 불합리한 모든 차별상은 해탈의 대극에 있다. 이 절대 진리를 누가 부인하겠는가?

불평등감은 자극의 정도가 매우 예리한 자의식이다. 그만큼 기억 속에 장기간 각인되는 고통 요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한번 깨어난 평등 의식은 후퇴를 모르는 법이다.

 

4. 평등 세계라는 꿈과 이상

여성주의의 물결 탓인지, 뜻밖에도 한국 비구니 승가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았다. 저마다 연구와 주장 내용에서는 모두 괄목할 만한 그리고 꿈만 같은 이상향을 말하고 있었다.

출가 양중, 즉 비구와 비구니 간의 차별상이 뚜렷한 대한불교 조계종의 〈종헌〉 내용은 차치해 두더라도, 비구니 승가의 현실적인 문제들과 위상 정립을 위해서 긴급하면서도 효과가 클 것이라고 생각되는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총림, 본사, 총무원 등 조직 체계상 비구니에게도 비구와 동등한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 점은 매우 시급하다고 본다. 현재 비구니가 종단 운영에 참여하는 비율은 너무 낮다. 대중 구성 비율과 비례하도록 시급히 조정해야 한다. 근년에 대두된 문제로 점차 심각해져 가는 불교의 위기설을 타개할 제일 묘책이라고 본다. 아름다운 나비의 날갯짓 한 번에 태풍으로 되돌아오는 신바람을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무욕(無慾)의 결단이 필요하다.

둘째, 수계 의식에서 현재, 비구니만 차별적으로 이중으로 받고 있다. 비구니 계단에서 일단 수계한 후에 다시 또 비구와 비구니 계사(戒師)가 한데 모인 곳에서 수계를 받는다. 분명한 차별이 아닌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누구나 인정하는 대표적인 차별이다. 수계는 그야말로 출가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직면하는 현실적인 차별감은 더 이상 유구무언이다. 비구니로서의 생애는 시작부터 차별적이다. 만약 단 한 차례 비구, 비구니 공동 수계를 결정한다면 어떨까? 아니면 각각 따로 하되 동일하게 1회에 그치던가. 분명히 세계 불교사에서 한국 교단이 선도적 지위를 점하는 핫 이슈가 되지 않을까? 이것은 너무 소박한 꿈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현되기는 요원한 샹그릴라(Shangri-La), 평등 정토(淨土) 이야기일 터!

그렇다고 내가 “여성이 세상을 지배하는 후천곤운 시대”를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역할 평등, 성비에 따른 기회의 평등을 꿈꿀 뿐.

최근 뉴스. 영국 국립방송 BBC에서 선정하는 ‘2019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 가운데 태국 출신 비구니 담마난다 스님이 선정되었다고 한다. 잘 알다시피, 태국은 대표적인 남방 불교의 나라이다. 그런데 1928년 제정된 승가법에 따라 태국 내에서는 여성이 수계를 받을 수 없다. 담마난다 스님은 스리랑카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귀국하여 비구니 승원을 열었다. 현재 태국의 비구 스님들은 30만 명을 헤아리지만, 그들은 비구니의 수계를 허락하는 데 요지부동 상태이다. 그리고 담마난다 스님의 진취적인 팔중법 해석은 이렇다.

비구니 수계를 부정하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조심스럽게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4부 대중의 승가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비구니 승가 없이 승가 공동체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 부처님이 여성을 승가에 받아들인 것은 단지 아난다가 요청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여성들이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남성 출가자와 동등한 수계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 승가법 제정 이후 90년이 흘렀으며 사회는 많이 달라졌지만 비구 스님들은 여전히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이것은 옳지 못하므로 우리는 불의에 대항해야 합니다.24)

 

자각한 뒤에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어디에도 쓸모없는 자각이 될 것이다. 세월은 흘러 사회는 급격히 변천하고 있다. 과연 사회 구성원의 의식은 그만큼 진보했는가? 불교 구성원으로서 4부 대중이 붓다의 진리 안에서 상호 평등한 공동 구성원이라는 의식을 갖추도록 교육하고 교육받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출 필요가 있다. ■

 

김미숙
동국대학교 다르마칼리지 조교수.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인도 불교사》 《불교 문화》 《인도 불교와 자이나교》 《자이나 수행론》 등이 있다. 불교평론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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