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1. 지구 생태계의 탄생과 생명의 역할

반짝이는 가을 햇살 아래 구절초 향기가 그윽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황량한 땅이지만 해마다 가을이 오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구절초가 눈부시게 피어난다. 돌아보면 눈앞에서 펼쳐지는 생명과 그 생명들 간에 일어나는 작용은 온통 신비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크게는 계절의 변화와 같은 우주의 질서에서 작게는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생명들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매 순간 창조의 순간들을 연출해 내고 있다.

생명현상이 연출하는 기적이 너무 신비롭기에 자연은 전지전능한 초월적 존재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존재의 실상을 왜곡하는 전도몽상(轉倒夢想)에 불과하다. 사실 그런 사유의 초점은 초월자가 아니라 생명현상에 대한 경외이자 인간존재에 대한 겸손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무수한 생명과 그 생명들이 깃들어 살아가는 생태계는 어떤 초월자의 창조적 행위에 의한 것도 아니고, 인간이 일군 문명에 의한 것도 아니다. 자연은 노자(老子)의 표현처럼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며, 그 어떤 의도와 작위도 개입되지 않은 무위(無爲)의 산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의 신비와 그 터전이 되는 지구생태가 처음부터 현재와 같이 풍요로운 것은 아니었다. 지구 역시 생성 초기에는 수천억 개에 달하는 은하계의 무수한 별들과 다를 바 없었다. 40억 년 전 지구의 토양은 황량한 돌덩이들로 뒤덮여 있었고, 대기는 이산화탄소로 가득해 생명이 살 수 없는 환경이었다.

그와 같은 죽은 별 지구를 현재와 같이 활력이 넘치는 생명의 낙원으로 변화시킨 것은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도 아니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그 주역은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수한 생명체들이었다. 광활한 바다의 열수 분출구 근처에서 처음 생명이 탄생한 이래 거친 들판에도 생명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에 걸친 생명활동이 반복되면서 지구는 점차 생명이 살기 좋은 생태계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무수한 생명들이 에너지를 얻고 삶의 터전으로 삼는 토양은 수많은 생명들이 삶과 죽음을 거듭하며 만들어낸 거대한 무덤이다. 생과 사의 순환을 통해 만들어진 죽음의 무덤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모태가 되었다. 수많은 생명들이 참여하여 더 많은 생명이 탄생하고, 그 생명은 죽음을 낳고, 그 죽음을 딛고 다시 생명이 탄생하는 연기적(緣起的) 순환을 거듭하면서 지구는 오늘처럼 생명력 넘치는 풍요로운 별이 되었다.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생태환경은 무수한 생명들의 활동과 그들의 삶과 죽음이라는 순환으로 창조된 것이다. 기적은 하늘에 있는 유일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지에 있는 무수한 작은 존재들에 의해서 일어났다. 이처럼 생태환경을 창조한 주체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무수한 생명들이다. 따라서 생명체들은 스스로 환경의 주체이기도 하면서 다른 생명체들을 살아가게 해주는 객체로 아득한 세월 동안 헌신해왔다.

오랜 진화과정을 통해 지구상에 살았던 생명체는 무려 40억 종에 이른다고 한다. 그 많은 생명체가 이렇게 아름답고 특별한 지구생태계를 일구어왔다. 그리고 그런 생명들의 순환은 현재에도 쉼 없이 계속되고 있다. 학자들은 현재 지구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참여하고 있는 생물종은 대략 1,400여만 종 이상 될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그중에서 과학적으로 탐구되고 이름이 붙여진 생물종은 175만 종에 불과하다.

겉보기에 죽어 있는 것 같은 한 줌의 흙에도 아득한 과거부터 명멸한 무수한 생명활동의 흔적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는 생명활동이 펼쳐지고 있으며, 아득한 미래에도 그들의 생명활동은 지속될 것이다. 바로 그들의 삶과 죽음이 눈부신 생태환경을 만들어왔기에 서로 연결된 그들이 곧 창조주이고 그들이 지구생태계의 주인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서 생태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도 레오폴드는 “인간은 진화의 오디세이에서 다른 생명체들과 더불어 여행하는 존재”라고 했다.

지구는 고등동물이나 인간만을 위한 행성도 아니고, 인간이 자의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청지기의 권리를 부여받은 곳도 아니다. 자연생태계에서 인간의 역할이나 긍정적 기여는 아주 미미하다. 그럼에도 부정적 영향은 전적으로 인간에 의해 초래되고 있다. 산업화 이후 지난 100여 년간 인간은 마치 이 별의 유일한 주인처럼 행동했다. 그 결과 수십억 년에 걸친 생명의 진화와 무수한 생명들의 삶과 죽음이라는 순환을 통해 창조해온 지구생태계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2. 가치관의 위기와 생명의 위기

위기에 처한 생명

인간이 생태환경의 창조에는 미미했지만 파괴에는 독점적 역할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과 그것을 실현하려는 파괴적인 삶의 양식이다. 자원의 남용과 생명에 대한 남획은 지구자원을 고갈시켜왔으며, 망망대해에서조차 생명들이 사라지는 생명의 절멸로 진행되고 있다.

인구증가와 물질적 풍요를 위한 인간의 탐욕적 활동은 서식지의 파괴로 나타난다. 개발과 성장을 이유로 날마다 울창한 열대림이 벌목되고, 그 자리에 경작지가 만들어지거나 공장이 건설됨에 따라 생명들이 살아갈 서식지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나아가 다양한 유기화합물과 독성물질은 토양과 바다 그리고 대기에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있다. 중금속을 비롯해 독성물질에 의한 대기오염과 초미세먼지는 인간과 생명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특히 최근 부각되고 있는 플라스틱의 유해성 문제는 인류문명이 자연생태계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태평양에는 한반도 면적의 7배나 되는 거대한 쓰레기 섬이 형성되고, 매년 백만 마리가 넘는 바닷새들이 대양에 떠도는 플라스틱을 삼킨 탓에 죽고 있다. 연구에 따르면 문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태평양의 해양에서조차 미세플라스틱에 의해 오염이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세플라스틱은 해조류나 플랑크톤의 생존을 위협하고, 물고기들은 미세플라스틱을 먹이로 삼킴으로써 기형을 낳거나 죽어가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온실가스에 의한 기후변화로 인해 지구생태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는 현실이다. 46억 년이라는 장구한 지구의 역사에서 보면 인간은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우월적 존재로 활동했다. 특히 생태계를 파괴하고 공멸적 상황으로 치닫게 한 현대문명은 길어야 100년 남짓한 기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펼쳐진 인간 활동에 의해 초래된 기후변화는 예상치 못한 수준의 재앙으로 치닫고 있다. 평균기온 상승으로 인한 해수면 상승, 갈수록 심해지는 폭염과 혹한, 홍수와 가뭄 등 생명은 물론 인간의 삶마저 위협받고 있다. 사찰에서는 날마다 조석예불을 통해 ‘비는 온화하고 바람은 적당하여 사람이 안락하기(雨順風調民安樂)’를 빌지만 그런 소박한 꿈은 갈수록 멀어지고 있다.

이처럼 서식지 파괴, 오염의 축적, 남획과 고갈, 급격한 기상이변에 따른 자연재앙으로 지구에는 6번째 대량멸종이 진행되고 있다. 물론 지구에는 자연적 원인에 의해 5차례의 대량멸종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멸종은 인간의 활동이 초래한 멸종이라는 점에서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학자들에 따르면 6번째 대량멸종은 광범위한 규모와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매년 1%의 종이 멸종하여 20~30년 뒤면 지구 생물종의 4분의 1이 멸종할 것으로 전망한다.

생물종의 다양성은 무려 30억 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최근 나타나고 있는 멸종은 1년에 1,000여 종에 달하고 있어, 자연적 멸종률보다 1,000배나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100년 이내에 지구상의 생물종 중 절반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한다.

가치관과 삶의 양식이 초래한 위기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기후변화와 멸종이라는 생명의 위기에 대한 원인은 각 영역마다 다양하게 진단된다. 하지만 그런 개별적 원인의 근저에 있는 근원적 원인은 인간의 활동으로 귀결된다. 생명의 위기를 초래한 인간의 사유와 삶의 양식은 크게 보면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축약할 수 있다.

첫째, 이분법적 사유와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이다. 전통적이고 지배적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간주했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구분은 인간 이외의 존재들을 경제적 이익으로 평가하는 가치관을 낳았다. 모든 존재는 물질적 가치로 환산될 때에만 가치를 인정받는 도구적 가치관에 의해 자연파괴는 가속화되었다. 자연적 존재 중에 인간이 가장 뛰어나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중심주의는 자연과 생태계에 대한 배려와 절제를 방기했다.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인간의 풍요와 이익에 맞추어졌기 때문이다.

둘째,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곧 행복한 삶이라는 왜곡된 인생관이다. 이런 가치관이 파괴적 삶의 양식과 문화를 잉태하면서 무한생산과 무한소비가 미덕으로 찬양되었다. 왜곡된 가치관은 지구의 자원을 무한한 것으로 보고 개발과 생산을 장려했다. 하지만 끝없이 확장되는 도시, 팽창하는 인구를 감당할 만큼 지구는 광대하지도 않았고 자원이 무한하지도 않았다.

산업화 이후 지난 100년간 전 세계의 경제 규모는 50배나 성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좁히면 인구는 20억에서 80억을 향해 달려가고, 경제 규모는 15배, 화석연료 사용량은 25배, 공업생산성은 40배나 폭증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지만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는 개인이나 국가는 없다. 이처럼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의 욕망과 과도한 활동에 기반해 있다. 위기의 열쇠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은 위기를 극복하는 길도 인간에게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3. 인간중심주의와 생명의 위계

앞서 고찰한 바와 같이 현대문명을 잉태한 세계관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중심주의였다. 인간관 생명에 대한 전통적 철학은 인간은 언어, 마음, 자유의지, 영혼 등을 지녔기 때문에 여타의 생명체들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보았다. 언어와 사유를 통해 인간은 제2의 탄생, 종교와 도덕적 세계, 영적 세계를 향유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사유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사상적 전통에 기초하고 있다. 일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이 언어능력을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인간은 언어능력으로 인해 도덕, 정의, 불의, 선악을 사유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고 보았다. 이렇게 인간만을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는 인식에서 자연히 생명에 대한 위계가 설정되기 시작했다. 식물은 초식동물을 위해, 초식동물은 고등동물을 위해, 고등동물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명의 위계가 그것이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생명의 정점에 위치하고, 식물이나 동물 같은 자연을 자신의 의도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배타적 권리를 부여받는다.

이와 같은 인간중심주의적 사유와 전통은 서구의 기독교적 전통을 만나면서 더욱 공고화된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모두 너희의 양식이 되리라. 내가 전에 풀과 곡식을 양식으로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라며 인간에게 자연과 생명에 대한 배타적 권리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 역시 인간만이 언어와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자연히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은 생명으로서의 목적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생명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야수를 죽이는 것이 죄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태도에서 여실히 볼 수 있다. 신의 섭리에 의해 동물은 인간들이 사용하도록 운명 지워져 있기 때문에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역사학자 린 화이트 주니어는 생명에 대한 이와 같은 인간중심주의적 태도가 생명의 소외와 자연 파괴의 뿌리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인간중심적 사유는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해 영혼도 없고 이성적이지도 못한 피조물로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을 윤리적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자애롭게 대할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지니게 된다.

생명에 대한 이런 사유는 데카르트에 이르면 더욱 공고화된다. 그도 동물은 불멸의 영혼을 갖지 않는다는 기독교의 입장을 수용한다. 동물은 의식이 없다는 내용에 따라 동물은 순전한 기계, 자동인형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동물들은 쾌락이나 고통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동물은 마치 시계와 같은 기계적 원리에 의해 지배된다는 동물기계론이 나온다. 이처럼 지배적 가치관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종교와 철학에서는 오로지 인간만이 도덕적 지위를 갖고 있다는 인간중심주의적 가치관을 견지해왔다.

이런 사유는 설사 인간이 다른 생명을 파괴하는 것일지라도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용인되는 근거가 되었다. 근대산업사회에서 진행된 대규모 개발과 이에 따른 환경파괴 등은 모두 이 같은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잘못된 형이상학적 전통에 뿌리를 둔 근대산업사회의 가치관이 환경위기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생명의 위기와 자연생태계의 위기가 왜곡된 사상에 근거한다면 그와 같은 인식의 전환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연과 생명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우리의 태도가 달라지고, 삶의 양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유마경》에서는 “마음이 맑아야 국토가 깨끗해진다(心淸淨 國土淸淨).”고 했다. 마음이 깨끗해야 국토가 청정해질 수 있다는 것은 생각의 중요성, 가치관의 중요성을 의미한다. 대량멸종과 생태위기 상황에서 필요한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서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불교사상을 살펴보면 초기불교에서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생명의 평등과 존중에 대한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불교사상에 나타난 생명평등과 존중

불교를 자비(慈悲)의 종교라고 한다. 불교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실천의 핵심으로 삼기 때문이다. 불교의 자비정신은 “삼계의 고통을 내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붓다의 탄생게에서부터 시작한다. 모든 생명의 고통을 편안케 하는 것이 붓다가 탄생한 이유이므로 자비심은 불교사상의 근간으로 자리 잡아 왔다.

생명에 대한 자비는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수록된 《자애경》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자애경》에는 ‘모든 존재가 안락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살아 있는 생명이면 그 어떤 것이든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거나, 길거나 크거나 중간이거나, 짧거나 작거나 비대하거나,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이미 있거나 앞으로 태어날 모든 존재가 행복하기를 바라야 합니다.”라고 설하고 있다.

인간만이 소중한 생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면 어떤 것이든’ 안락하고 평화롭도록 기원하고 실천하는 것이 자비라는 것이다. 자비의 대상은 언어적 능력이나 지적 능력이라는 기준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기준으로 확장되고 있다.

존중해야 할 생명에 대해 혹자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벤담 같은 공리주의 철학자들은 생명에 대한 도덕적 근거에 대해 ‘고통을 느끼는 능력(Capacity for suffering)’에 주목했다. 벤담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가가 아니다. 또한 그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가도 아니다. 문제는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보았다. 대부분의 생명은 고통을 느낄 수 있으므로 존중해야 할 영역이 엄청나게 확장된다.

동물해방론자인 피터 싱어 역시 벤담의 입장을 수용하여 동물권(Animal Rights)과 동물해방의 사상적 근거로 삼고 있다. 싱어 역시 인지적 능력이 아니라 고통을 느끼는 유정성(有情性)이 존재의 도덕적 근거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페이니즘(Painism)은 생명의 범주를 확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지만 분명한 한계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어느 정도의 고통을 느껴야 하는지, 그 고통을 어떻게 측정하는가 등의 문제가 존재한다.

이런 한계에 한발 더 나아간 논의가 ‘살아 있음(being alive)’이라는 기준이다. 윤리학자 K. 굿패스터는 합리성이나 쾌락 또는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도덕적 고려의 필요조건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생명에 대한 도덕적 기준은 ‘살아 있음’이라는 조건을 제외한 것은 모두 자의적 기준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자애경》에서 말하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과 합치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생자부와 생명평등

생명에 대한 태도가 ‘살아 있는 모든 것’으로 확장된다면 그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 《자애경》에는 그런 태도에 대한 내용도 담고 있다. 즉,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해 “마치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목숨을 다해 보호하듯이 모든 존재를 향해 가없는 자애를 닦아야 한다.”라고 했다.

초기 경전에 나타난 이런 자비정신은 대승불교로 계승되면서 시대를 관통하는 불교정신이 된다. 《현우경》에서도 중생에 대해 “자비로운 마음으로 어린 아기를 보듯 불쌍히 여기라.”라고 했다. 나아가 선종 사원의 수행규율을 담고 있는 《선원청규》에서도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강보에 싸인 아기처럼 생각하라.”며 생명존중을 강조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에 대해 갓난아기를 대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연민하고 보살피는 것이 자비라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는 인간만의 종교, 인간만의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함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생(衆生)은 인간중심적 개념이 아니다. 이는 《금강경》에서 말하는 생명에 대한 아홉 가지 분류인 구류중생이라는 개념만 보아도 명확해진다. 구류중생이란 “난생(卵生), 태생(胎生), 화생(化生), 습생(濕生),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이라는 분류를 말한다.

이렇게 다양한 생명을 평등하게 인식하고, 자비와 보살핌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생명평등 사상이다. 따라서 부처님도 인간만의 의지처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의 의지처가 된다. 《선원청규》에 따르면 “여래는 온 삼계(三界)를 집으로 삼고, 사생(四生)의 중생들을 자식으로 삼는다.”고 했다. 삼계의 가정에서 태란습화로 태어나는 무수한 생명을 모두 자식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는 모든 생명을 종교적 구원과 보살핌의 대상으로 삼는다.

부처님은 사생의 자비로운 아버지[四生慈父]라는 관념에는 종 차별주의나, 인간중심주의 같은 사유를 찾아볼 수 없다.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생명평등이 생명에 대한 불교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수한 생명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중생은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태어나든 가족이라는 윤리를 담고 있다.

이처럼 생명이 평등하므로 《화엄경》에서는 그와 같은 무수한 생명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것이 부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다. 보살은 “무수한 중생들의 뜻에 따라 살며, 갖가지로 받들어 섬기고, 갖가지로 공양하고, 어버이를 공경하듯이 하며, 마치 스승과 아라한을 섬기듯 하며, 모든 중생을 부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이 하라.”는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부처님처럼 섬기는 것이 보살행이라는 사상은 중생을 섬기는 것이 곧 부처님을 섬김이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보살이 중생의 뜻에 따르게 되면 이것이 곧 여러 부처님을 공양함이며, 중생을 존중히 받들어 섬기면 곧 여래를 존중히 받들어 섬김이 되며, 중생들을 기쁘게 하면 곧 일체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라고 보기 때문이다.

 

육도윤회와 생명평등

불교의 육도윤회설 역시 대표적인 생명평등 사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서구의 형이상학에서는 인간만이 영혼을 지녔으며, 다른 생명은 불멸의 영혼이 없으므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보았다. 하지만 육도윤회설은 그와 같은 생명의 위계적 질서를 해체한다. 윤회를 통해 모든 생명은 종(種)을 번갈아가며 모습이 전환되기 때문이다.

윤회설에 따르면 모든 생명은 육도(六道)를 여행하는 존재들이다. 인간계는 삼선취라는 비교적 좋은 곳에 해당한다. 하지만 생명은 끊임없이 소멸하고 재생하므로 인간계는 긴 여정 중의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인간은 동물이 될 수도 있고, 동물은 인간이 될 수 있으므로 생명에는 위계가 성립될 수 없다. 심지어 《본생담》에는 부처님의 전생이 수많은 동물의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지고한 부처님도 동물이었다는 사유 속에서 인간과 동물의 위계적 차별성은 해체된다.

윤회설의 사실 부여를 떠나 윤회전생설은 불교적 사유와 윤리적 근간을 이루어 왔다. 윤회전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만 특별한 종이 될 수 없다. 비록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미물에서 동물 나아가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은 윤회를 통해 종을 교차한다. 따라서 중생은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이며, 형상이 고착되지 않았기에 무상(無相)이다.

따라서 《금강경》에서는 “외형적 특징을 통해 부처를 보고자 하거나 음성으로 부처의 목소리를 듣고자 한다면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므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했다. 생명이 가진 외형은 일시적 현상일 뿐 중생이라는 본질에서는 동일하다. 따라서 생명의 외형적 특징으로 귀천과 생명의 등급을 매기는 것은 불교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처럼 모든 생명이 평등하기 때문에 모든 생명은 구원의 대상이 되고, 생명평화에 대한 이상은 그런 모든 생명이 구제되는 종교적 이상을 통해 공유된다. 《금강경》에 따르면 “온갖 중생들, 곧 난생, 태생, 습생, 화생,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상이 있는 것, 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닌 것,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그 모두를 나는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멸도하게 하리라.”라고 되어 있다. 외양도 다르고, 생각의 유무도 다르고, 탄생의 방식도 다르지만, 그 모든 생명을 평등하게 구제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모든 생명이 함께 평화를 누리는 것이 생명평화에 대한 불교의 이상임을 알 수 있다.

 

5. 생명평화와 공존을 위한 사유와 실천

생명평화와 연기공동체

본지 80호 특집의 대주제는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이다. 통상적으로 이상과 꿈을 말할 때 그 대상은 인간의 영역으로 국한된다. 종교든 철학이든 형이상학적 주제는 인간만의 영역이고,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찰한 바와 같이 불교사상과 교리에 의하면 생명평화라는 이상은 꿈꿀 수 있고, 마땅히 꿈꾸어야 할 이상이 된다.

《화엄경》은 7곳에서 8회에 걸쳐 열린 법회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그 법회의 회상(會上)은 인간만을 대상으로 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생명들이 함께하고 있다. 그 법석에는 19종의 잡류제신중, 8종의 천용팔부, 7종의 욕계천중, 5종의 색계천중의 무수한 신들과 중생들이 함께하는 우주적 법석이었다.

나아가 《화엄경》에서는 중생세간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다양성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즉, 중생세간에는 “갖가지 몸[色身]과 갖가지 형상[形狀]과 갖가지 얼굴[相貌]과 갖가지 수명[壽量]과 갖가지 종족[族類]과 갖가지 이름[名號]과 갖가지 심성[心性]과 갖가지 알음알이[知見]와 갖가지 욕락[欲樂]과 갖가지 하고 싶어 함[意行]으로, 갖가지 몸가짐[威儀]과 갖가지 옷[衣服]과 갖가지 음식[飲食]으로 갖가지 마을과 성읍, 궁전에 살고 있다.”고 했다. 말할 수 없이 다양한 생류들이 어우러져 조화롭게 살고 있는 곳이 중생세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는 인간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평화를 꿈꾸는 생명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좀 더 심층적으로 보면 생명과 생명 아닌 존재들은 서로 연기적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생명평화는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가 더불어 평화로운 연기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가 꿈꾸는 이와 같은 생명평화의 세상은 교리적 내용과 사상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불교는 그런 세상을 위해 자비를 바탕으로 한 불살생과 생명존중의 실천을 제시하고 있다. 지구생태계의 위기와 생명의 위기 앞에 불교의 신행도 생태적 가치와 실천으로 깊어져야 한다. 결론을 대신해 생명평화를 위한 실천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본다.

 

생명평화를 위한 실천과 자비의 구현

상술한 바와 같이 무수한 생명들이 만들어 온 지구생태계와 생명들이 위기에 처했다. 생명의 터전을 만드는 데 가장 기여도가 낮은 인간의 번영과 문명 때문이다. 불교는 모든 생명을 자비로 보살피는 것을 최고의 윤리로 삼기에 불자는 이 문제에 응답해야 한다. 《유마경》에서는 “일체중생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나 또한 병이 들었습니다.”라고 했다. 중생이 위험에 처하면 그것에 대해 응답하고 실천하는 것이 불교의 당위임을 보여주고 있다.

중생이 아프면 보살이 아픈 이유에 대해 유마 거사는 “보살의 병은 큰 연민의 마음으로 생긴 것(以大悲起)”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살은 중생을 향한 큰 연민의 마음 때문에 중생이 아프면 보살도 함께 아프다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자비는 중생의 아픔에 대해 함께 연민하고 그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삼아 자비로써 보살피는 것이다.

불자는 불살생과 자비를 신행의 근간으로 하므로 마땅히 생명살림의 신행으로 나서야 한다. 탈종교화 시대를 맞아 종교에 그럴 도덕적 권위와 힘이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교, 교육, 기업, 정부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 중요한 사회적 원동력으로 손꼽힌다. 여전히 종교는 사회변화에 큰 힘을 미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는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인구의 80% 이상이 종교인이기 때문에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 종교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적 자원을 바탕으로 지역사회를 통합하고 올바른 실천을 제시할 힘도 갖고 있다. 불교 역시 이런 범주에 있다. 불자는 불교가 가진 이런 자원과 역량을 통해 위기에 빠진 생명을 구하는 실천에 나서야 한다. 그것은 생명을 살리는 길인 동시에 위기에 직면한 인류를 살리는 길이기도 하다.

 

정토구현과 지구 생태계

생태위기 시대에서 자비의 완전한 실천은 우리가 사는 땅을 정토로 만드는 것이다. 모든 생명이 번영과 평화를 누리는 것이 생명평화이며, 그것이 곧 정토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정토가 이 땅과 별개로 서방(西方)에 존재한다면 오염된 예토(穢土)는 버리고 떠나면 그만이다. 하지만 모든 생명에게 지구를 버리고 찾아갈 또 다른 공간이란 없다. 우리 은하계에는 작게는 2천억 개에서 많게는 4천억 개의 별들이 있다. 하지만 인류는 아직 지구와 같이 생명이 살고 있는 별을 찾지 못했다. 지구는 생명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지닌 매우 특별한 별이기에 지구야말로 모든 생명들의 정토이고 구원의 땅이다.

도신 선사는 “만약 자기의 마음이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궁극적으로 맑고 깨끗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대로가 극락정토요 부처님 나라이니 굳이 서쪽으로 향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현실의 삶 그대로가 극락정토임을 안다면 굳이 서방정토로 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정토는 버리고 떠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국토에서 생명평화를 통해 완성하는 것이다. 틱낫한 스님도 “정토는 바로 지금 이곳이며, 딴 곳에 없다(The Pure Land is Now or Never).”라고 했다. 종교적으로 정토는 현생의 공간을 버리고 타방정토에 가서 태어나는 것을 지향한다. 하지만 생명평화의 정토는 바로 이곳이다. 따라서 이곳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정토임을 자각하고 여기서 생명평화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정토행이다.

혜능 선사는 “마음에 깨끗하지 못함만 사라지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다.”고 했다. 인간중심의 욕망을 버리고 현재의 공간을 정토로 바꾸는 것이 선의 정신이다. 그래서 “우매한 사람은 염불하여 극락으로 가려 하고,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고 했다. 마음을 깨끗이 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정토로 구현하는 것이 생명평화를 위한 실천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생명의 낙원으로 지켜가는 것이 정토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낡은 가치관의 전환

생명평화를 위한 실천을 위해서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가치관의 전환이 중요하다. 그동안 종교와 철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부인함으로써 인간의 자연지배를 옹호해왔다. 린 화이트 주니어는 “현대의 과학기술은 자연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거만함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는 생태계 위기에 대한 어떠한 해결책도 기대할 수 없다.”고 했다. 근본생태 철학자들도 생태계 파괴는 인간의 욕망이라는 내면적 문제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지배적인 세계관의 오류는 자연의 다른 생명을 이용하고 인간중심적으로 통제하려는 전통에 근거해 있다. 생명평화를 위해서는 인간의 행동과 삶의 근간이 되는 이런 인식의 전환이 우선되어야 한다. 생태위기의 본질은 삶을 지배하는 낡은 세계관과 삶의 양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와 같은 낡은 가치관과 인식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과 가치관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해야 한다. 노르웨이의 생태철학자 네스는 현재의 위기는 철학적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꿀 때만 가능하다고 했다.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구조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자들도 인간중심의 인식에서 생명중심의 인식으로, 생태중심의 인식으로 가치관을 확장하는 각성과 실천이 요구된다.

 

불살생과 생명살림의 실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외아들처럼, 갓난아기처럼 연민의 마음으로 돌보는 것이 자비이고, 생명평등 사상이다. 《정념처경》에는 “제일가는 보시는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베풀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소중한 베풂은 생명을 존중하고 살리는 것이다.

이런 자비사상에서 불자의 첫 번째 실천윤리인 불살생이 도출된다. 불살생은 모든 계율의 첫 번째 조항으로 제시된다. 생명존중이 불교적 실천의 핵심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모든 생명을 자비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입능가경》에서는 철저한 식육의 금지를 실천윤리로 제시한다.

불교에서 생명존중은 공리주의 학자들처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고등동물에 국한되지 않는다. 《선원청규》에서는 ‘한 방울의 물속에 있는 생명도 해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녹수낭(漉水囊)을 들고 다니며 한 방울의 물을 마실 때도 걸러 마시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청규에 따르면 “한 방울의 물속에도 팔만 사천의 생명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비정신을 삶에서 실천하는 길은 가능하면 육식을 줄이는 것이다. 나아가 동물의 학대와 희생을 통해 얻은 가죽옷이나 신발, 모피 등의 사용을 가능한 줄이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다른 생명의 희생을 딛고 서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소욕지족의 정신과 소박한 삶

생명평화는 눈에 보이는 개체 생명을 존중하는 것만으로 달성될 수 없다. 우리가 소비하는 커피 한 잔 때문에 밀림이 사라지고 생명은 서식지를 잃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평화와 과도한 물질적 소비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최후의 승자는 소비주의(consumerism)라고 할 만큼 현대인의 삶은 끝없는 소비에 지배당하고 있다.

따라서 소박한 삶의 실천은 인류의 보편적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소비주의가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는 가장 근본적 실천이다. 생명평화를 위해서는 작게는 개인적 차원에서 크게는 사회와 국가적 차원에서 저소비경제를 추구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불교의 소욕지족(少欲知足) 정신은 생명평화를 위한 정신적 자산이 될 수 있다. 《자애경》에는 “만족할 줄 알고 공양하기 쉬우며 분주하지 않고 생활이 간소하며 고요하고 현명하며 거만하거나 탐착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달마대사는 수행자는 물질적 대상을 구하지 않는 ‘무구(無求)’가 곧 진실한 도행(道行)이라고 강조했다. “구함이 있으면 모두 괴로움이지만 구함이 없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有求皆苦 無求卽樂)”23)이라는 것이다. 이런 전통을 물려받아 혜능 선사도 “욕심을 줄이고 만족을 알면 재물과 색(色)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24)고 했다. 무한한 욕망과 소비를 줄이는 소요지족은 이제 개인의 수행을 넘어 생태계의 파괴를 막고 지구를 보전하는 정신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불교와 선에서 말하는 이와 같은 가치관은 근본생태철학자들이 제시하는 대안과도 일치한다. 일례로 아느 네스는 “수단은 소박하되 목적은 풍요로운 삶(Simple in Means, Rich in Ends)”25)을 실천 방향으로 제시한 바 있다. 소박한 삶이 생명의 평화와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나만의 욕심을 채우는 삶이 아니라 더불어 모든 생명이 행복해지는 생명의 평화와 공존을 위한 삶이 진정 풍요로운 삶이고 위대한 삶이다. 따라서 소박한 삶은 단지 종교적 청빈을 넘어 지구를 살리는 위대한 실천이 될 수 있다.

물론 현재의 생태적 위기는 개인들의 작은 실천만으로는 회복 불능의 상태에 처해 있다. 따라서 생태위기를 자각하고 생명살림의 정책이 국가적 차원, 나아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시행될 수 있도록 공공정책에 관심을 갖는 정치적 실천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천도 결국은 나의 작은 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서재영
성균관대 초빙교수.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선(禪)의 생태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불교텔레비전 PD, 불교신문 논설위원, 한국선학회 운영위원장, 동국대 연구교수,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 등을 지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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