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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꿈꾸는 건강한 인간관계
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80호] 2019년 12월 01일 (일) 이혜숙 yangh@korea.ac.kr

시작하는 말

이번 호 특집 기획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불교로 꿈꾸기’라는 목표를 정했기 때문에, 필자들은 서로의 꿈자리가 될 수 있으면 겹치지 않을 만한 터를 골라야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의 ‘인간관계’는 정치 · 경제· 고용 · 교육 · 종교 · 문화 등에서의 거시적[macro] · 집단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라, 대인관계의 미시적 측면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역량으로서는 타 영역과 중복되지 않을 논의 대상과 범위를 정하기가 쉽지는 않다. 사회생활 영역을 향해서 넓게 보든, 가족 · 친지와의 관계를 향해서 좁게 보든, 우리 삶의 현장에서는 ‘인간관계’가 그 시작이고 끝이기 때문이다.

‘꿈을 꾼다’는 말은 아직 현실이 아니라는 의미가 있고, 대개 요원(遙遠)한 목표라는 뉘앙스를 가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건강한 인간관계를 달성하는 것이 요원할까, 혹은 불교적으로 볼 때 건강한 인간관계라는 것이 요원할까. 평소 ‘행복’이라는 말을 쓰기가 왠지 망설여지듯이, 여기서 ‘건강’이라는 좋은 말도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 요즘에는 건강염려증이라고 할 만큼, 마치 무쇠팔과 무쇠다리를 가진 로봇처럼 인생도 변함없이 강건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불교는 생주이멸(生住異滅) · 성주괴공(成住壞空)을 가리키며 변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알리고 있다. 생로병사라는 물리적 변고 외에도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 등 삶에서 기대 불만족인 상황들을 자세히 통찰하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라고 한다. 불교가 인간사에 대해서 갖는 보편적 정향이 이와 같으니, 과연 무엇이 건강한 인간관계라고 볼 것인가.

이론적으로 이 글을 엮어내기 전에 우선 필자 자신의 경험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의 인간관계는 어떤 경향을 가졌는가. 그동안 만나온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그들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생각해보았다. 본인이 학연(學緣) · 지연(地緣)과 같은 내집단의식을 별로 갖지는 않았다고 느껴진다. 그런데도 혹시 친구가 돈을 빌려달라고 할 때 거절하면 그 관계가 멀어질까 걱정되거나, 빌려간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면 친구가 멀어질까 싶어서 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필자도 내집단에서의 친밀한 관계유지를 중시하고 그것이 신의(信義)라고 생각하는 측면이 있다. 선행연구들이 그런 점을 한국인의 인간관계 문화의 특성이라고 말한 것처럼, 필자의 경우도 순수한 개인적 취향을 내세우기에 앞서서, 집단구성원의 책임과 역할에 대한 부담감이 나름대로 큰 작용을 해왔던 것 같다.

우리 문화라고 짐작되는 인간관계의 속성을 비롯해서 행복감을 부르는 인간관계라고 언급되는 것들이 불교적으로 보더라도 건강한 인간관계가 되겠는지, 여기서는 주로 그 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실제로는 인간관계의 조건이나 유형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을 잘 알지만, 이번에 그 다양성을 가리지는 못하고 포괄적인 문제의식 몇 가지로 접근해본다. 대체로 관계자 쌍방이 평소에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의 조건이 변수가 될 것이고, 일대일의 관계인지 다수자 가운데서의 관계인지도 변수가 될 것이다. 인간관계의 동기에서도, 피차간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 · 만나야 하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 · 만나거나 만나지 않거나 상관이 없으면서도 만나게 되는 사람들 등등으로 다양한 차이가 있다. 이해(利害)에 상관이 있는 관계인지 없는 관계인지는 차치하더라도, 관계자들 각각의 현실적 여건 자체가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는 등으로 관계 외적인 조건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알고 보면 이처럼 다양한 요인들 때문에 변화무쌍한 현실에서, 인간관계의 건강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사적인 경험과 선행연구들이 입증하였듯이, 인간관계란 그대로 삶의 터전을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원인적 행위이면서 결과적으로 삶의 만족도나 행복감에 작용하는 중대(重大) 변수가 된다. 따라서 국가 차원의 정책들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만큼 의미가 있는 지표인 것이다. 불교에서 보는 인간 현실은 원래 불만족스러운 법이고, 게다가 작금의 여러 가지 시대적 변수들로 말미암아서 더욱 불안정한 현실이기는 하지만, 그런 조건을 감안하고 인간관계의 만족도를 비교적 건강하게 높일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궁리해보기로 한다.

 

1. 상호의존성 통찰하기

흔히 대인관계가 유연하고 좋은 사람들이 스스로 삶의 만족도나 행복감을 더 느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으로, 자신의 삶에 만족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대인관계가 좋다는 관점이라도 마찬가지다. 대인관계의 범주에는 친구나 가족관계는 물론이고 사회생활에서의 동료 관계도 포함이 되고, 그러한 인간관계에서 상호 지지나 친밀함의 정도가 개인의 주관적 안녕(well-being)과 행복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삶의 만족감이나 행복감이란 개개인의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평가인데, 왜 우리는 좋은 대인관계를 맺으면 행복감을 느끼게 될까. 또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 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일까. 잘 알다시피 본래 인간의 성장이나 안녕은 자기 혼자서 이룰 수가 없고 혼자서 누릴 수도 없으며, 인간관계 속에서만 달성할 수가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누구든지 혼자서 돈을 벌거나, 혼자서 출세할 도리는 없다. 혹시 누군가 성공을 해서 많은 돈을 갖게 되고 높은 지위를 얻게 되더라도, 자기 혼자서는 그 성공을 누릴 도리가 없는 것이다. 돈을 벌거나 출세하고 싶은 욕구와 마찬가지로 그 돈과 지위를 사용하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도외시된다면, 결코 행복하다고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성공해서 과시하고 싶을 때 그 성공에 박수 쳐줄 사람만 필요로 한다는 뜻이 아니다. 간혹 우리가 실패했을 때에도 그 좌절을 깊이 위로받고 싶고, 재기(再起)의 힘을 실어줄 누군가가 더욱더 필요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보통의 인간이 사회적 관계에 소속되기 바라면서 자신의 안전(安全)을 도모하려는 ‘관계욕구’의 맥락이다. 그러므로 관계욕구에 대한 만족의 정도가 행복감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가설을 어렵지 않게 채택할 수가 있다.

소위 인간의 관계욕구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입증하는 작업이 사계(斯界)의 연구가 되겠지만, 불교의 관점으로 보면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살피고 그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일상적 인간관계를 포함하는 세상만사가 상의상관(相依相關)하는 연기법(緣起法)으로 해석된다는 것은, 현대의 자연과학 · 사회과학에서도 일반체계이론(General Systems Theory) 등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그 분야의 설명들을 인용하지 않겠지만, 언제든지 과학자들의 사유(思惟)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불교 나름의 과학적인 설명체계에 대해서 자세히 듣지도 않고, ‘종교’이기 때문에 무턱대고 믿으려는 불교인들을 보면 가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혹은, 불교 교리를 이해하기 전에 ‘믿기’를 강요당할 줄로 예단하고 무조건 도외시하려는 일반인들의 인식이 있다는 것도 애석하기는 마찬가지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일반 연구들은 인간관계가 어떠한 조건에서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지가 중요하겠지만, 불교는 우리의 행복만큼 불행도 공평하게 중요한 관심사라는 점에서 매우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불교는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이라는 것이 서로가 서로를 말미암는 원리[相互緣]에 따라서 조건부로 발생하고 일시적으로 생겨나는 현상 혹은 그 현상의 ‘이름’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 각양각색의 고통과 번뇌를 설명하고 나서, 그 어리석음과 괴로움이 오히려 깨달음의 성품이라고 하는 비상(非常)한 관점이 있다. 얼핏 보면 논리 초월적인 이 개념도 불교인들에게는 다소간 친숙함이 있겠지만, 오직 중요한 것은 논리나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불교인의 일상생활에서 그 의미가 잘 반영되는지의 여부라고 생각한다. 아래는 《유마경》에 실린 지혜제일 문수보살의 설명이다.

 

일체의 거짓된 몸[僞身]의 종성(種性)이 여래의 종성입니다. 일체의 무명과 삶에 대한 애착이 여래의 종성이며, 탐냄 · 성냄 · 어리석음의 종성이 여래의 종성이며, 네 가지의 허망한 뒤바뀜[顚倒]의 종성이 여래의 종성이며, 다섯 가지 덮개 …… 요약하면, 육십이견 등의 온갖 견해와 악하고 착하지 못한 법이 갖고 있는 종성이 여래의 종성입니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어느 때 우리가 인간관계의 행복한 경지에 놓였다고 하더라도 그 경지가 변함없이 지속될 것으로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우리의 관계가 여차여차 불행한 지경에 놓였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고정불변할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인위적 현실은 인간 공동의 작업력(作業力)이 마치 그물[網]처럼 엮여 서로를 당기기도 하고 밀기도 한다. 그래서 얼핏 보면 우리 세상이 운명적 조합인 듯 공고(鞏固)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유동적이고 변화 가능한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간관계에서의 애석한 상실[愛別離苦] · 불편한 대면[怨憎會苦] · 아쉬운 욕구 불만족[求不得苦] 등을 넘어설 수 있다. 우리가 서로 간의 의존관계를 근본적으로 깊이 인정하고, 여럿이서 함께 지어가는 조건부의 공동운명체임을 제대로 알아차리는 지점이 건강한 인간관계의 출발선이라고 생각된다.

 

2. 경계 너머 신뢰하기

불교로 보나 일반이론으로 보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관되는 사회적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은 누구나 사회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하는 기대가 있을 것이다. 그 좋은 인간관계가 자신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유익한 결과를 보태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좋은 관계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 그런 결과적 차이에는 무슨 사정이 있을까.

알다시피 우리는 사람들을 매우 다양한 ‘이름’으로 구별하여 부른다. 지인(知人)과 타인(他人) · 부모와 자식 · 남편과 아내 · 청년과 노인 · 부자와 빈자 · 상사와 부하 · 여자와 남자 · 호인(好人)과 불호인(不好人) 등등. 그러나 여러 가지로 상대적인 명칭이 있을 뿐, 어떤 명칭의 사람도 개체로서의 고유성(固有性)을 갖지 않는다. 즉, 부모(A)가 있어서 자식(B)이 있고 자식(B)이 생겨서 부모(A)가 되었다. 그 부모(A)는 또 누군가의 자식이고 자식(B)은 누군가의 부모가 되기도 한다. 그러면 과연 A는 누구이고, B는 누구인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유능한 사람과 무능한 사람 등등으로 차별하는 일도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 원리이다.

이와 같이 불교적 인간관을 따르자면, 피차(彼此)의 상대적인 조건 관계가 어떻게 생겨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보다 넓은 시야에서 통찰하려는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세상사의 상호적인 인간관계를 조망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어느 한 국면의 경계[相]에 빠져서, 인연화합의 원리를 거슬러가며 고집을 부리거나 갈등을 불러일으키지는 말아야 할 일이다. 평소 우리가 인간관계의 명색(名色)과 양상(樣相)에 편파적인 집착을 일으키지 않도록 세상사의 전개원리를 잘 설명해주는 불교 교설이 많은데,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아함경 구절을 통해서 상의상관성[緣起法]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멸한다.

 

그래서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위와 같은 만법(萬法)의 연기적 원리를 통찰하고 그런 통찰력을 자신의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의 장에서 잘 반영하고 있는가. 애석하게도 필자가 그런 방면의 실증적 연구물을 찾지 못한 까닭에, 아직은 ‘모르겠다’고 자문자답을 한다. 그 대신에 필자 자신을 반성하자면, 수십 년 강의하는 동안 수강생이 있음으로써 나의 강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지 못했다. 이런 글을 쓸 때도 매체(媒體)가 있음으로써 나의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나[우리]의 ‘할 일’이라는 명목상 틀에 갇혀서 일방적이고 관념적인 경계를 세우고, 그 경계선 밖의 사람과 사물이 마치 나의 목적인 ‘할 일’에 쓰일 도구라도 되는 듯이, 모든 인간관계의 상대방들을 향하여 너무 불손한 것은 아니었던가. 불교인으로서 솔직한 반성이 깊어진다.

만약에 그처럼 우리 스스로 각자 만들어 놓은 경계 안에 갇혀 있지 않고, 관계된 상대방[counterpart]들을 자세히 살펴서 상호의존하는 원리[현상]를 보고 평등함을 깨우쳤더라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예를 들어, 내 직업은 상대방들[수강생 등]의 덕택임을 제대로 알고서 더욱 존중하는 마음으로 임했더라면, 쌍방 간의 일이 더 즐겁고 더 가치가 있었을 것 같다. 사회운동에서 도반들과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공동의 과업을 추진하게 되었을 때 도반들의 이견(異見)에 타당성이 있음을 더욱 깊이 신뢰하였더라면, 더 유연한 사회운동이 되었을 것 같다. “누구나 존중받고 싶은 욕구와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싶지 않은 배려 때문에 의사결정과 인간관계를 뒤섞는다.”고 하는데, 회의석상에서 애매모호하던 상대방들의 그런 심리적 배경을 미리 알아차렸더라면, 더욱 유용하고도 따뜻한 소통이 되었을 것 같다. 불교인이면서, 말로는 해야 할 바를 알고 제대로 실천하지 않은 부끄러움이 너무 크다.

한편, 선행연구들에 의하면 좋은 인간관계와 행복감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대인신뢰(對人信賴)를 강조하고 있다. 가족이라든가 연인 사이와 같이 특수한 신뢰관계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타인을 호의적으로 평가하고 신뢰를 잘하는 성향은 행복감과 긍정적인(positive) 상관성을 나타낸다고 한다.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 자신을 잘 개방하며 대인관계를 수월하게 형성한다. 또한 사람들은 상대방을 신뢰할 때 비로소 그 인간관계에 대해서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고 한다. 좋은 인간관계가 우리의 행복에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러한 인간관계의 질(質)이 사람들에 대한 신뢰도에 따라 좌우될 수 있다고 하면, 이제 우리가 주목할 문제가 명백해진다. 즉, 사람에 대한 신뢰가 어디서 오는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박윤 등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관계의 특성으로 우호적 태도 · 정(情) · 조화 · 관계유지를 중시하는 요인들이 있다. 그 심리 기저에 상호 간 친밀감이나 ‘우리’ 의식이 전제되어 신뢰와 유대감이 깊은 온정적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때로는 관계자들 내부에서조차 지나친 참견으로 보이기도 한다. 학연(學緣) · 지연(地緣)과 같은 내집단의 강한 유대와 신뢰성이 집단외부자들에 대해서는 배타성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간혹 외국인의 시각에서 한국인은 내 · 외집단 구성원에 대한 경계가 명확하여 집단외부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불친절하다는 것이다. 아마도 내집단과 외집단의 구별은 각각의 구성원에 대한 신뢰도의 경계를 표시하는 일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것은 집단외부 구성원을 차별하려는 목적보다도, 집단내부 구성원끼리 적극적으로 신뢰를 표시하고 보호하려는 동기가 더 우선했을 것이지만, 한국문화의 내부자 신뢰와 개방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차별적인 태도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자칫 내집단 관계자들의 자기중심적이고 폐쇄적인 신뢰성이, 그 상대방들에게는 상호교류를 막고 배제하려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을 우리가 충분히 알아야 한다. 한국사회에 문화적으로 낯선 외국인이 많아져서 생기는 염려이기도 하지만, 한국인 사이에서도 지역개발이나 취업, 학업 등으로 잦은 이주를 하면서 상호 간에 공동체적 신뢰도가 낮아지고 경계심이 늘어난 측면이 있다. 또한, 근래 우리 사회에서 동맹과 분리를 경쟁적으로 하게 된 영역으로 사이버 공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개방-참여-공유-파급으로 이해되던 정보교환은 이전의 포탈에서도 가능했지만, SNS의 경우 신뢰도 높은 공동체 안에서의 개방-일상적 차원에서 진행되는 충성도 높은 참여-동조를 통한 공유방식의 관계성-순식간에 파급되는 정보전달의 신속성이라는 효과가 가세하면서 소통방식이 도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순간 공유한 사안이 신속히 확산되는 결과로, 그 사회적 파장이 매우 크다.

이제 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인간관계를 훨씬 더 넓힐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얼핏 그것은 관계자들을 연결하여 더 넓은 세상으로 통합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집단 신뢰성의 확증이 어려워서인지, 인간관계는 더 일방적이고 불안정해진 것 같다. 온라인과 같은 형식적 관계망을 신속하게 공유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소속감과 안전감을 담보하는 사회적 연대(social connection)로 이어지지 않고, 가면을 쓴 수많은 인간관계들이 더욱 경계심을 갖고 경직되게 하는 것 같다. 마치 온라인의 가상세계처럼 손에 잡히지는 않아도 작동 중인 환영(幻影)과 같은 분열과 차폐(遮蔽)가 있다. 시대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회구성원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사람에 대한 신뢰’는 과연 어디서 나오겠는가.

여기서 필자의 입장은 원론적이다. 처음에도 합당하고 중간에도 합당하고 끝에도 합당한, 세간을 통찰하는 지혜를 가질 때, 시대적 상황이나 특수한 인간관계에 치우치지 않고 평등한 신뢰가 생긴다고 본다. 불교의 통찰지혜는 이 사람 저 사람을 선별해서 얻어지는 신뢰가 아니라, 모든 사람과 세간사의 연기하는 원리를 아우르는 법성(法性) 자체를 신뢰하게 한다. 그것은 눈앞의 허깨비와 같은 여러 가지 경계들[相]을 넘어서고, 공동운명체로 확장되는 화엄(華嚴)의 인간관계에서 우러나는 신뢰라고 본다. 그러므로 불교인이 좋은 말씀을 옮기고 공유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선지식(善知識)들 사이에서 신뢰가 전승되고 더불어 인연 지은 사람들도 함께 안락해질 것이다. 요컨대, 세간에서 행복을 부르는 ‘사람에 대한 신뢰’는 세상사의 상관성 원리를 자신의 일상생활에 인증하는 사람들의 실천지혜로부터 나올 것이라고 생각된다.

 

3. 신뢰하고 관여하기

지금까지 논의를 정리하자면,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좋은 인간관계가 필요하고, 좋은 인간관계를 위해서 사람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필요한데, 불교적으로 봤을 때 세상 사람들이 서로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살게 되는 삶의 태생적 조건을 확연하게 믿음으로써 결국 사람에 대한 신뢰가 생긴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와 같은 논조를 글 앞부분에서부터 써왔지만, 모두에게 진정으로 수긍이 잘되는 내용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가끔 우리는 누군가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든지, 결코 믿고 싶지 않다든지 할 때가 있을 것이다. 아무리 부처님과 하나님을 동원하더라도, 막무가내로 그 누군가를 도저히 믿지 못하겠는데, 과연 어떻게 해서 믿을 수가 있게 된다는 말인가.

예전에 필자가 차를 운전할 때는 가끔 불안한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만약 저 앞에서 달리는 운전자가 신호를 못 보거나 신호를 어기고 주행을 잘못하면 어떻게 되나……’ 얼마나 여러 번 그런 상상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나, 그때마다 알지도 못하는 그 운전자들과 우리의 교통시스템을 믿지 않고서는 달리 걱정을 덜어낼 방도가 없었던 것 같다. 당장 믿을 수밖에 없었고, 믿음으로써 의심하여 생기는 걱정은 떨칠 수 있는 일이 되었다. 어찌 보면 사람에게 신뢰감이란 저절로 생기는 자연적인 덕목인 것 같지만, 실은 각자의 생활경험과 함께 인위적으로 형성되는 정서이다. 심리상담가들이 맡은 임상적 역할의 대부분은 클라이언트가 스스로 현실에서 구성한 신뢰감 문제에 관여하고, 적당한 수준으로 건강한 신뢰관계를 갖도록 돕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인신뢰를 포함한 사회적 신뢰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조사한 선행연구에 의하면 직업, 계층, 소득수준 등 경제적 요인은 별로 상관이 없고, 스스로 올바른 행동을 중시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을 신뢰할 가능성이 더 크게 나타났다. 또, 삶의 만족도가 높고 사회가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타인을 신뢰할 가능성이 더 크며, 자발적으로 종교단체나 자선단체 등에서 활동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타인을 신뢰할 가능성이 더 크게 나타났다. 요컨대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을 신뢰하는지 여부의 문제는, 전적으로 상대방들의 덕성(德性) 여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태도 및 지향성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는 이 사람을 신뢰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할 때 그 사람을 믿지 못하는 의심 자체가, 그 사람과는 상관없이 이미 내 안에서 생겨난 것일 수 있음을 돌아보게 하는 연구결과이다.

이타(利他)를 강조하는 종교라서, 혹은 사람들이 들으면 서로 좋아할 말이라서 무조건 사람을 믿으라 권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매우 엄격하고 논리적인 설명체계를 갖춘 가르침이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이 상호의존하는 관계를 자세히 적극적으로 들여다보고, 그렇게 삶을 통찰할 때만 드러나는 사람들 사이의 수평적 관계와 그 상호주체성을 믿으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人, being]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人間, inter-being]의 존재원리를 믿으라는 뜻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인간관계에서도 쌍방이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그렇게 지은 과보를 예외 없이 수용하게 된다는 점에서 평등하다. 업설(業說)도 그러한 상호주체성을 설명하는데, 만약 내가 상대방을 해롭게 하면 해악(害惡)이 다시 내게 돌아오고, 상대방이 나를 해롭게 하면 해악이 다시 상대방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선함과 유익함을 주고받는 행위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불교 신자 여부를 떠나서 인간의 상호작용 과정을 자세히 이해한다면, 인과법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과응보의 과정에서는 어느 절대자에 의한 특별구제나 면죄부와 같은 것이 없다.

한편으로 또 다른 조사결과를 보면, 애당초 어떻게 시작된 신뢰였든지 간에, 타인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 경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행복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공정하게 대우한다고 인식할수록 더 높은 수준의 행복감을 나타냈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신뢰가 상대적으로 더 크고, 타인이 자신을 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으로 느낀다고 한다. 낮은 수준의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삶의 여러 영역에서 중요성을 낮게 평가하고 열의를 갖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신뢰도는 ‘좋은’ 인간관계만을 위해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전반적 삶의 행복과 사회적 신뢰로 연결되기 때문에 개별적 · 사적인 이슈(issue)로 끝나지 않는다.

국제적 조사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경제력에 비해서 국민의 행복은 증진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2017년 OECD가 보고한 ‘더 나은 삶의 지수(Better Life Index)’에서 주관적 안녕(subje-ctive well-being), 사회적 연대(social connections),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 등의 지표가 30여 개 국가의 평균인 6.5점(10점 만점)에 비해서 우리나라는 5.6점으로 평균선 이하 수준으로 나타났다. 특히 ‘도움이 필요할 때 주위에 의지할(rely on) 사람이 있다고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OECD 국민의 평균 89%가 긍정한 반면에, 한국인은 78%만이 긍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처럼 사회적 연대가 약하면, 국민의 경제활동이 제한될 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접촉이 부족하여 소외감을 갖게 한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개인적 목적달성이나 기여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통합되는 것이 어렵다. 2019년 UN이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에서도 우리나라는 156개국 중 54위를 차지했지만, 특히 상대적으로 취약한 분야가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와 관용(generosity: 기부 · 봉사) 등 사회적 관계인 것으로 나타났다.

위에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조사결과나 국제적인 비교를 보더라도 결국, 우리 각자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좋은 인간관계를 맺고 사회적 신뢰가 늘어나야 하다는 점을 거듭거듭 확인하였다. 이제까지 주목해온 우리 삶의 구조와 역동을 볼 때, 좋은 인간관계란 피차간에 상대방들을 신뢰하고 출발하는 것이 유익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럴 때 나의 신뢰가 먼저인지, 나의 상대방이 보여줄 신뢰가 먼저인지 그 둘의 선후(先後) 관계를 분간하기는 마치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논하는 것처럼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실은 분간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누구라도 먼저 상대방에게 선의(善意)를 표시하고 먼저 신뢰를 보임으로써, 상호의존하는 세상살이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4. 명상으로 대처하기

평소 우리는 건강한 심신을 유지 관리하기에 좋은 방법들을 사방팔방에서 접하고, 좋은 영양제들도 챙겨 먹는다. 그렇게 하는데도 감기에 걸리는 경우가 생기기는 하지만, 당장 낙심할 일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서 모쪼록 피차 관계자들에게 도움이 될 길이라고 여기는 선택들을 하겠지만, 그 선택이 기대만큼 좋은 결과를 초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섣불리 후회하거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 앞서 인용한 《유마경》의 법문을 잘 수긍한다면, 인간관계의 성공이나 실패나, 만족이나 불만족이나, 매사는 질적으로 전환[transformation]될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관계를 통해서 생겨난 나의 불만족과 불편함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우리 중생의 습관이 대개 그러한 경향에 있음을 가장 잘 알기 때문에, 불교는 우리 몸과 마음의 건강하지 못한 버릇을 다스리는 데 특별하고 전문적인 지침들을 갖고 있다. 명상수행이 바로 그것이다.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겪는 모든 사람이 가장 먼저 의지할 만한 처방이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에 의한 불교명상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서양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도 불교명상을 잘 수련해서 치료적으로 효과를 얻었다는 사실은 이미 심리상담이나 정신치료 등의 분야에서 보고가 되었다.

사마타는 삼매(samādhi)와 동의어로서 ‘모든 해로운 상태가 고요하게 가라앉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중국에서는 ‘그칠 지(止)’나 ‘마음집중의 심일경(心一境)’으로 번역이 되었다. 위빠사나는 ‘분리해서 더 깊이 본다’는 의미에서 한역으로 ‘볼 관(觀)’ 혹은 ‘내관(內觀, insight)’이다. 위빠사나는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심신 · 물심의 모든 현상에 대하여 무상(無常) · 무아(無我) · 고(苦)의 세 가지 특상을 꿰뚫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인간관계의 지난 실패 경험에 몰두하여 그 고통을 연장하기도 하고, ‘오늘 여기서’의 새로운 관계를 놓치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우쳐서 평정[捨]을 유지하고 지혜를 얻게 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목적이다.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사라졌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현상을 매 순간 바로 거기서 통찰하라.

 

그런데 서양에서 일찍이 불교명상을 실용적으로 쓰기 시작하였고 그것이 역수입되어서 국내의 다른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응용하는데, 정작 불교인들은 명상수행에 매우 소극적이라는 조사보고가 있었다. 심지어 개신교인과 천주교인보다도 불교인의 명상수행 참여율이 훨씬 더 낮게 나타났다는 것이 놀라웠다. 종종 절에 가는 불교인이거나 혼자서 공부하는 불교인이거나, 불교의 핵심은 실천수행이 아니던가. 여러 가지의 수행방법들이 있고 그중에는 반드시 명상이 포함된다는 점을 불교인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바람직한 인간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며 몇 가지 개념과 논리를 제시하였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천수행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 불교철학의 심오한 체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일상생활에 반영되지 않는 알음알이로 끝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굳이 말하자면, 불교는 철저한 경험주의라고 볼 수 있다.

 

마무리하는 말

오늘날 사회현상은 가히 번개나 소나기처럼 성급하고 불안정하며, 그 속에서 우리의 인간관계는 새로운 국면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하고 불편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어느 시대나 ‘변화무쌍하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니 괴로움’이라는 소식을 일찍이 듣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놓쳤던 들숨 날숨을 가다듬고, 지금 여기서 우리의 인간관계를 통찰하기로 한다. 습관적으로 분주하고 산란하던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면, 그 안에서 상호의존하는 관계를 재발견할 것이다. 모든 관계자의 본래 평등성을 인정하게 될 것이고, 그런 관계망에 대한 신뢰를 느끼며 허망한 집착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현실의 인간관계를 수용하고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건강한 인간관계에 대한 불교적 전망이라고, 필자는 꿈을 꾸어본다. ■

 

이혜숙
금강대 초빙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사회복지사협회 국제교류위원 등 역임. 저서로 《종교사회복지(편저)》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운동(공저)》 역서로 《불교사회복지학》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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