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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꿈꾸는 종교평화
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80호] 2019년 12월 01일 (일) 윤영해 yyh@dongguk.ac.kr

1. 깨어지는 황금분할

1) 종교의 백화점

한국 종교사회의 종교갈등과 관련한 지형적 특성은 대략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종교의 백화점, 둘째 기독교와 불교의 황금분할, 셋째 개인적 종교갈등 상태이다. 한국이 종교백화점이란 말은 한국 종교사회의 지형적 특성을 논할 때면 누구나 맨 먼저 거론한다. 종교백화점은 다종교사회의 비유다. 한국에서는 원하기만 하면 어떤 종교든 골라잡아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 없으면 세계에 없고 세계에 있으면 한국에도 있다고 할 만큼 한국 사람들의 종교를 향한 취향이 다양하다. 한국 사람들은 종교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지구촌에 새로운 종교가 생기면 대부분 1년 안에 수입하여 체험한다는 말도 있다.

한국사회는 학교, 직장 등 종교 목적의 공동체가 아니면 무조건 다종교사회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가정까지도 상당수가 다종교 상황이다.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의 종교가 다른 경우는 드물지 않다. 최근에는 부부의 종교가 달라서 주말에 각각 종교 생활을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한국에는 이름이 서로 다른 간판을 걸고 활동하는 종교단체가 수천 개에 이르는 명실상부한 다종교사회다.

한국사회의 다종교 현상은 심지어 한국 사람들 개인의 종교심 속에도 스며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불교적 인생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인생이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한바탕 일장춘몽에 불과하고, 지금 이 인생은 전생인연의 결과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의 인간관계의 가치관은 확실히 유교적이다. 젊은 대학생들이 반드시 학번을 확인하여 선배를 예우하거나, 생전 부모봉양과 사후 부모제사를 미덕으로 삼음은 연장자를 우선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와 양친효도의 유교적 가치관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합리적으로 풀기 어려운 인생의 어려운 문제에 당면하면 종교에 상관없이 ‘물으러’ 간다. 불치병을 앓거나 대학입시 때도 최고 수준의 병원이나 입시 컨설턴트가 아니라 ‘대나무 꽂힌 집’으로 물으러 간다. 최근 한국인들이 사회정의를 위해서는 불의를 과감하게 척결(剔抉)코자 하는 행동규범을 기독교로부터 배웠다고도 한다. 한마디로 한국은 종교 슈퍼마켓으로 불릴 만큼 지구촌에서 가장 전형적 다종교사회이다. 다종교사회로서의 이러한 종교지형의 전형적 특징은 국제학술계로부터도 주목을 받는다.

신앙은 이성보다 감정적 성격이 강하다. 종교 감정은 연애감정과 그 성격이 유사하여 소속 신자들로부터 전적인 충성을 요구한다. 연애 당사자들이 연애감정을 여러 사람과 나누어 갖기를 거부하듯이 모든 종교도 소속 신자들에게 독점적 충성, 배타적 헌신을 요청한다는 뜻이다.1) 따라서 다종교사회는 종교 간의 알력과 갈등이 필연적이다. 그렇기에 한국사회는 어느 곳보다 종교갈등의 가능성이 크다.

2) 종교의 황금분할

한국에서 다종교사회의 역사는 길다. 한국은 자연숭배와 샤머니즘의 토착 종교 환경에 유교와 불교가 들어왔던 CE 4세기부터 이미 다종교시대였다. 고구려 말기에 도교가 들어오고 1784년에 가톨릭, 1884년에는 개신교가 정착했다. 조선조가 해체되는 즈음부터 천도교, 대종교 등 다양한 한국 종교들이 창시되고, 개항 이후에는 다양한 서구형 현대 종교들도 수입되면서 한국 종교사회를 더욱 다채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조선조의 유교 이후 한국에서 독과점 지위를 누린 종교는 없었다. ‘국교는 인정하지 아니하며 정치와 종교는 분리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제2항이다. 국교가 있더라도 다종교사회가 있을 수 있는 만큼 국교가 없다면 당연히 다종교사회가 되기 쉽다.

그런데 한국은 수천 개의 이름이 다른 종교들이 동시에 공존하지만, 기독교와 불교가 대부분의 종교인구를 양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10년 주기로 시행하는 종교인구 조사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다음 페이지의 〈표 1〉에서 나타나듯이 한국의 종교지형은 기독교와 불교의 2자 과점 혹은 개신교, 불교, 가톨릭의 3자 과점상태다. 전자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개별 종교가 아닌 기독교의 하위범주로서 종파로 본 경우이고, 후자는 편의상 가톨릭과 개신교를 독자적으로 다루는 경우이다.

   
 

이 조사에 의하면, 한국 종교인구는 30년 동안 얼마간의 변동은 있지만, 불교와 기독교의 과점상태는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다. 많은 연구자가 개신교 신자가 불교 인구를 최근 10년 사이에 추월한 점을 도드라지게 부각시켜 분석한다. 최근 조기룡이 대표적이다. 그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별개의 범주로 택해 개신교와 불교가 1, 2위를 다투면서 각축하고 가톨릭이 가세하는 상태로 본다. 그러나 1980년대에 서로 엇비슷했던 불교와 기독교의 종교인구 점유율은 이미 1990년대부터 확연하게 기독교 우위로 전환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편이 한국사회의 종교지형에 대한 합리적 판단이다.

최근 한국사회는 전체인구의 감소와 종교인구의 감소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종교 수요는 급작스레 줄고 기독교와 불교의 시장각축은 더욱 첨예화할 전망이라는 견해에는 전적으로 공감이다. 대부분의 종교갈등은 종교 과점상태가 아니라 독과점상태에서 더욱 빈번하다. 즉, 종교탄압은 다종교사회에서 한 종교가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고 상대가 현저한 열세에 놓일 때 정도가 극심하다.

한국의 경우는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엇비슷한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는 종교 과점상태이다. 공간분할에서 가장 안정적인 상태를 황금분할이라 하는데, 그간 한국사회의 종교지형은 글자 그대로 황금분할을 이루어왔다. 이런 특징에 관해서는 외국 학자들까지도 주목하여 불교학자인 프랭크 테데스코는 불교와 기독교가 그렇게 동등하게 대표되는 나라는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종교인구의 황금분할 상태가 한국사회의 종교갈등을 억제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2015년 조사에서 보듯이 한국의 종교인구는 1985년 황금비율(48.5 : 46.9)을 이루다가, 2015년에 이르러 기독교는 종교의 인구의 3분의 2(62.9%) 가까이 차지하고 불교는 3분의 1(35.4%) 정도로 처지면서 지난 30여 년간 유지되던 황금분할이 무너지는 지점에 도달했다. 최근 종교인구 조사결과는 한국사회의 종교갈등이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악화할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

   
 

3) 개인적 종교갈등

지구마을의 종교갈등은 집단적, 조직적으로 진행되어 전쟁과 대량살상으로 치닫는다. 이런 지역의 공동체와 구성원들의 삶은 완전히 파괴된다. 지금 요즘도 하루 평균 대략 40여 명의 생명이 종교의 이름으로 죽어 나간다는 보도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한국의 종교갈등은 폄훼, 파괴, 방화, 살인 등 다양한 양상으로 일어나지만, 집단적 상황은 아니고 개인적 차원에 그치고 있다. 개인갈등은 집단갈등에 비해 그 파괴력이나 파급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대한민국 헌법 제2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갖는다.’이다. 대한민국 국민 개개인은 헌법으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고 이에 따라 종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향유(享有)한다.

이 점은 참으로 불행 중 다행이다. 종교의 백화점으로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전형적인 다종교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갈등의 정도가 전쟁과 대량살상으로 치닫지 않고 개인갈등 수준에서 머물러 있으니 말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집단 종교갈등은 분리감이 강할 수밖에 없는 인종, 지역, 언어, 문화 등이 종교와 겹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다행히도 한국은 전자들이 모두 단일한 사회다. 그래서 이런 요소들이 종교와 결합하여 강한 분리현상을 일으킬 여지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개인의 심성조차 다종교적이어서 종교갈등이 개인의 내면에서 원천적으로 해소되고 있다는 역설적 분석을 내놓기도 하지만, 이는 논리에 치우친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인갈등은 사소한 사건에 의해서 우발적으로 집단화하거나 혹은 종교정치학적 공학에 의해 의도적으로 집단화할 수도 있다. 개인갈등 사건에서 비롯하여 2만여 명이 거리로 뛰쳐나와 가두행진을 벌기도 하고 3만여 명이 모여 집단항의 사태를 벌인 예도 있다. 종교갈등은 단 한 번만이라도 집단으로 일어나면 그 악순환의 고리가 결코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점을 명심해야만 한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종교갈등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사실에 안심해서는 안 되며 주도면밀하고 줄기찬 예방 활동을 펼쳐 나아가야만 한다.

 

2. 한국 종교갈등의 실태와 원인

1) 종교갈등의 실태

한국사회의 종교갈등은 주로 개신교의 불교를 향한 공격이 주를 이룬다. 단군상 파괴나 무교[巫俗]를 향한 공격도 있으나 이는 상대적으로 소수이다. 개신교의 불교공격에 관한 연구로는 윤영해와 셔윈 존스(Sherwin Jones)의 논문이 최근의 연구이자 가장 광범위한 연구다. 이 논문은 한국 개신교 복음주의와 불교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실태를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국제저명학술지(A&HCI)와 국제사회에 최초로 알린 매우 유의미한 활동이다.

이 연구는 1982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의 언론에 보도된 불교 훼손, 즉 훼불사건을 전수조사했다. 그중에서 단순한 종교편향 행위나 불교폄훼 사건들은 제외하고 불교사찰 등 시설의 파괴와 방화, 불교사찰 내에서의 살인에 관한 120건이 넘는 사례들만 조사하여 분석했다. 이 기간 동안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정부, 학교, 군대 등 사회 곳곳에서 야기한 종교편향 활동과 공격적인 반불교 운동은 일일이 다 거론하기조차 힘들다. 부산에서 열린 한 기독교 복음주의 대중집회에서는 불교사찰의 파괴를 요구하는 대중기도를 공개적으로 벌이기까지 했다. 1998년 6월 26일, 제주 원명선원에서 벌어진 훼불사건은 한국사회 전체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 제주 삼양교회 열심교인 김수진은 대웅전에 안치된 천불상 중 750기를 무참하게 파손했다. 놀랍게도 범인은 도주하지 않고 현장에서 붙잡혔는데, 자신은 정신병자가 아니라 신앙적 신념에 따라 정당한 의무를 실천했다고 당당하게 자부했다. KNCC 대외협력위원회는 사건 전말을 조사하여 김수진 신도가 이 사건을 저질렀음을 공식 확인하였다.

앞의 윤영해와 셔윈의 논문은 35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훼불사건들의 빈도를 조사하고 그 일반적인 특징들을 요약한 후, 한국의 불교, 복음주의 기독교 공동체, 정부기관들의 반응과 그 반응의 영향도 분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종교적 배타주의, 지배주의, 영적 전쟁, 복음주의 교리와 관계, 한국의 종교시장 상황, 한국 밖의 종교 간 갈등 등과 관계되어 있음을 논구한다.

이 연구에 따르면 한국의 복음주의 개신교가 초래하는 갈등 혹은 일방적인 훼불행위는 역사적 유물의 파괴와 소실, 헤아리기 힘든 경제적 손실, 그리고 살인까지 초래하고 있다. 기독교 복음주의 극단주의자들이 불교를 주목표로 자행하는 이런 행위들은 한국사회의 종교 간 긴장과 갈등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또한 두 공동저자는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이런 활동이 앞으로 한 공간에서 공존할 수밖에 없는 불교와 기독교의 앞날에 미칠 영향을 깊이 우려한다.

한국사회의 종교갈등은 개인갈등과 집단갈등의 경계지점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기독교는 불교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의 국가예산 집행은 분명한 특정종교 편향지원이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불교는 이런 공격에 맞서 그것은 종교지원이 아니라 문화지원일 뿐이라고 방어한다. 반면 불교는 300여 개에 이르는 기독교 종립 사립중 · 고등학교들이 수천억 국가예산으로 운영되고, 수많은 기독교 복지시설과 운영지원이야말로 특정종교 편향지원이라고 역공한다. 기독교는 이에 대해 교육과 복지지원일 뿐이라고 방어한다. 한국 종교갈등의 실태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집단갈등으로 비화한다면 참으로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2) 종교갈등의 원인

목사이면서 개신교 신학자로서 매우 진보적이고 개방적이었던 김경재는 한국기독교가 이웃종교에 배타적이거나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총괄적으로 지금까지 이야기를 정리하면, 한국 개신교가 이웃종교에 대하여 배타적이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성향을 지니게 된 핵심원인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개신교가 개화 물결을 타고 전래되면서 전통문화와 전통문화의 핵심인 전통종교들을 극복대상으로 보았다는 점, 둘째로, 미국에서 파송된 개신교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이 보수적 근본주의 신학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고 근본주의 신학의 핵심은 ‘성경무오설’이므로 성경을 많이 읽고 사랑하는 개신교 교인들은 ‘성경문자주의자’로 훈련되어 타 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는 점, 셋째로 1960년대 이후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사회의 시장경쟁 상황을 밑바닥에 깐 보수적 선교신학자들의 ‘교회성장론’ 신학 자체가 종교 간의 대화나 협력을 용납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다.

한국사회 종교갈등의 원인은 첫째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성격, 둘째 종교 시장환경의 변화, 셋째 종교지형의 변화로 분석할 수 있다. 종교갈등은 한 종교가 다른 이웃종교를 대하는 태도에서 전적으로 기인한다. 한 종교가 이웃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대략 4가지로 압축 요약된다. 첫째는 배타주의다. 배타주의는 자신의 종교만이 절대적 진리이며 다른 종교들은 모두 사설(邪說)이거나 오류일 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는 전부 척결(剔抉)의 대상이다. 둘째, 포괄주의는 자신의 신앙이 최고이고 다른 종교들은 단지 일부의 진리만 담지(擔持)하는 열등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다른 종교는 결국 모두 자신의 종교로 포용되어야 한다. 셋째, 상대주의는 자신의 종교와 이웃종교가 서로 동등한 수준으로 완전한 진리를 담지한다는 태도다. 그러니 각 종교는 서로를 상관할 필요 없이 각자의 길만 가면 된다. 물론 상대주의는 이웃종교를 척결하거나 포섭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넷째, 다원주의는 모든 종교는 예외 없이 진리를 담지한다는 점에서 상대주의와 같다. 그러나 모든 종교의 진리는 궁극적으로 완결된 진리가 아니라 잠재적 진리여서 발전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상대주의와 다르다. 따라서 다원주의는 이웃종교의 진리 주장에 귀를 열어 대화를 시도한다.

김경재의 지적대로, 한국에 들어온 개신교의 주류는 근본주의, 즉 배타주의적 성향이 강한 신학으로 무장한 종파였다. 이는 한국사회와 한국의 모든 종교 그리고 한국기독교 자신 모두에 불행한 일이었다. 한국 개신교의 배타주의는 한국사회 종교갈등의 최우선 원인이다. 근본주의나 배타주의는 자신들의 가르침만이 유일하다는 진리 독점주의적 자세, 그리고 진리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진리 절대주의 의식을 지닌다. 이는 같은 기독교 종파인 한국가톨릭은 배타주의적 색채가 덜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종교갈등을 적극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분명해진다. 이찬수는 종교갈등의 원인을 근본주의 개신교와 원리주의 이슬람에서 찾으면서 그들이 종교의 외적 표현과 내적 신앙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역사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는 외적 표현을 절대시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조직, 제도, 교리, 의례 등 실재를 가리키는 상징은 개인과 경우에 따라 다양하며 절대적 존재가 아니다. 이를 모르고 상징을 절대시하는 사람들에 의해 근본주의와 배타주의가 성립하고 종교갈등이 빚어진다는 것이다.

한국사회 종교갈등의 둘째 원인은 종교시장 환경의 변화이다. 잘 알려진 대로 한국은 인구감소의 급박한 요즘 현실을 절벽에 빗대어 진술하고 있다. 한국의 인구변화는 절벽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절벽에서 추락 중이다. 전체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표-1〉에서 나타난 대로 종교인구의 급감으로 직결되고 있다. 종교인구의 새로운 공급이 끊어지고 기성 신자들마저 전통종교를 떠나는 세속화 현상의 가속화 속에서 종교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다급해지고 있다. 이제 한국의 기독교와 불교는 교세확장이 아니라 교세유지를 위한 경쟁과 충돌로 내몰리고 있다. 새로운 신자 공급이 불가능한 한국의 기독교와 불교는 교세유지를 위해서는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빼앗아와야 하는 현실에 내몰렸다. 종교갈등 사례가 늘고 있는 이유는 이런 종교시장의 환경변화 때문이다.

한국의 종교갈등의 세 번째 원인은 종교지형의 변화다. 앞서 지적한 대로 불교와 기독교가 1980년대부터 황금분할을 이뤄 안정감을 가졌으나, 불교 인구는 최근 10여 년간 급격하게 줄었고 기독교 인구도 2000년대 들어 성장세가 정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종교 간의 경쟁과 충돌을 격화시킬 것이 틀림없다. 한국에서 종교갈등은 심각해질 전망이다.

 

3. 종교평화를 위한 조건과 실천

결혼생활을 시작할 때 전혀 다른 남녀가 서로 이해하기 어려움을 두고 하는 흔한 말 중에 결혼생활은 화성인과 금성인이 만나 지구인 되기라는 말이 있다. 불자와 기독자가 만나 종교인으로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일은 이보다 오히려 더 어렵다. 종교 간에는 결혼생활에 있는 사랑이 없다. 신체적 생리와 문화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하는 비율이 요즘 점차 높아지고 있듯이 종교적 갈등과 분쟁은 더욱 악화될 수도 있다.

그 어려운 종교평화가 구호나 선언만으로 성취될 리는 없다. 서로 다른 종교들이 한 시공간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협력하고, 배워가는 일은 간절하고 꾸준한 실천이 필요하다.

1) 목적으로서의 평화인식

기독교의 궁극적 목적 혹은 사회적 이상은 하느님 나라이고 불교의 그것은 부처님 나라이다. 두 종교의 개인적 목적 혹은 인격적 이상은 거듭난 사람이고 깨달은 사람, 혹은 구원이고 해탈이다. 양 종교의 목적에는 구체적이고 고유한 내용과 다양한 표현이 있다. 그러나 양자의 모든 다양한 내용을 한꺼번에 내포하는 하나의 언술을 찾는다면 행복과 평화이다. 행복은 개인적 맥락이고 평화는 사회적 맥락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의 행복, 마음의 평화라는 말이 있듯이 두 단어 다 전체를 포괄하는 용어로 대체 가능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평화는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고, 본질이며, 이상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평화가 없는 곳에는 종교도 없다. 평화를 등지는 종교는 허위이고 평화와 함께하는 종교야말로 진정한 종교이다. 만일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이 세상의 평화를 꿈꾼다면 그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이고 어불성설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교든 기독교든 그의 목적과 세계평화는 정확히 일치한다.

종교 간 평화 없이 세계평화는 없다. 가톨릭 사제로서 진보적 신학 활동 탓에 교회로부터 가톨릭계 대학에서 강의할 자격마저 박탈당하고 간신히 사제직을 유지한 가톨릭 신학계의 거장의 외로운 외침이다.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아직까지도 기독교 진영에서는 종교평화보다는 선교가 더 우선인 느낌이다. 종교 간의 평화는 참으로 절실하다. 왜냐하면 지구촌 지역분쟁의 약 70% 정도가 종교분쟁이며 이 탓에 날마다 수십 명의 인명이 살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평화 없이는 결코 세상의 평화는 없다.

만일 모든 종교의 목적이 개인과 사회의 평화구축에 있음을 확인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종교는 세계의 평화구축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종교가 세상의 평화구축에 공헌하기는커녕 자기들끼리의 평화조차도 유지하지 못한 채 도리어 종교갈등이 세계분쟁의 도화선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복합적 이유가 있겠으나 그 근저에는 종교의 목적이 평화임을 알지 못하고 선교를 목적으로 알거나 알고도 외면하는 데에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종교평화나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종교의 목적이 평화임을 확인하고 공감해야만 한다. 이는 평화구축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2) 체험 교류

불교와 기독교는 2천여 년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전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화성인과 금성인이 만나 지구인이 되기보다 더 어려운 것이 이웃종교 이해다. 종교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쉽게 할 수 있는 일부터 먼저 해야 한다. 추상적이거나 난해한 개념들을 따지거나 비교하는 일은 중도에 실패하기 십상이다. 아니면 우열비교로 진행되기 쉽다. 우열비교는 종교평화를 위해서 잠정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

이웃종교인들끼리 체험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불자들이 기독교의 미사, 예배, 세례식, 추도식 같은 성사(聖事)나 의례에 참여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기독자들이 예불, 발우공양, 사시불공, 수계식, 다비식 등에 참여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만일 참여가 바로 내키지 않는다면 처음에는 참관만 해도 좋다. 부처님오신날 봉불식에 신부와 목사가 참여하고 예수님오신날의 예배에 스님이 참여하는 활동은 두 종교의 신자들에게 평화적 공존을 향한 엄청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론적 이해가 아니라 체험적 참여나 참관은 서로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이 될 수 있다. 외국의 가톨릭 수도자들이 단체로 해인사나 통도사의 예불참여를 요청하여 안내한 적이 몇 번 있다. 그들의 반응은 상상 이상으로 긍정적이었다. 필자도 수도원의 미사나 교회의 예배에 참여한 적이 있고 그 경험은 기독교의 이해뿐만 아니라 불교의 이해에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

신학대학과 승가대학의 학생들이, 스님과 신부님들이, 목사님들과 스님들이 축구, 탁구, 배구 등 스포츠 교류 체험을 하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다. 정치적 적대국끼리도 스포츠 교류를 하는 마당에 이웃종교인들끼리 함께 운동도 하지 못한다면 참 속 좁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상 혹은 기도 같은 수행 기회를 함께하는 것도 가능하다. 종종 신부나 목사가 사찰의 명상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심지어 시민선방에서 한 철 안거를 난 수도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반대로 피정기도에 참여한 스님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종교평화는 종교인 개인의 내면의 평화에서 시작된다. 내적 평화 없이 외적 평화를 이룰 수는 없다. 이런 명상이나 기도 활동은 말없이 할 수 있는 실천이어서 자연스럽게 평화 분위기를 만들고 느낄 수 있다.

3) 실천적 협력

불교는 자비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불자가 자비롭지 않다면 진정한 불자이기 어렵고 기독자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참된 기독자이기 어렵다. 왜 자비로워야 하는지 왜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 그 교리적 근거는 아주 다르다. 그래서 어떤 이론주의자는 아무리 겉모습이 같아도 이념이 다르다면 완전히 다른 행위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비와 사랑의 같음과 다름을 따지는 일은 중요치 않다. 그 둘 자체가 모두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이다.

자비행과 사랑의 실천은 우선 겉모습에서 다르지 않다. 자비든 사랑이든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베풀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나눈다. 지진과 태풍에 살림살이와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마련해 주는 활동도 자비이고, 이념으로 북한을 탈출한 새터민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실천도 사랑이다. 돈을 찾아 일터를 찾고 가정을 찾아온 다문화가족을 돕는 일도 사랑이고, 순식간에 참혹한 범죄를 저지르고 긴 세월 갇힌 몸이 된 이들을 깨우쳐 인도하는 봉사도 자비다. 이런 실천들은 얼마든지 불교와 기독교가 함께할 수 있다. 함께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복지, 노동, 인권, 교육, 문화, 환경, 여성, 통일 등 어떤 분야에서건 함께할 수 있다. 단독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이유도 찾기 어렵고, 함께한다고 해서 고유한 신념이 훼손될 리도 없다.

삼소회처럼 여러 종교의 수도자들이 함께 문화활동을 하거나 단순히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기만 하더라도 종교평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셈이다. 민족이 일본제국주의의 폭압에 시달릴 때 당시의 주류 종교였던 천도교, 기독교, 불교는 서로 힘을 합쳐 독립운동을 했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명은 모두 이 세 종교의 지도자들이었다. 만일 이 시대의 시대적 과제가 통일이거나 혹은 빈부격차 해소라면 불교와 기독교가 힘을 합쳐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실천적 협력을 할 수 있다.

환경운동을 위한 오체투지 행진에 신부와 목사와 스님이 함께 참여하여 동반한 일은 비록 그것이 종교적 목적이 아니었을지라도 한국 종교의 역사나 종교평화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한 사건이다. 이론과 교의와 신념은 괄호로 묶어두고, 실천부터 함께하는 이런 협력들은 함께할수록 더 효과적이고, 함께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함께하는 순간 종교평화의 장으로 나아갈 것이다.

4) 교육과정의 설치

필자의 경험상 이웃종교의 이해도가 높을수록 종교평화의 지향성은 높고 이해가 부족할수록 갈등지수가 높다. 이웃종교에 대해 깊이 있게 그리고 제대로 알면서 적대적인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종교갈등은 이웃종교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 불교를 전혀 모르는 기독교 성직자나 신자, 기독교를 모르는 스님이나 불교신자는 거의 무조건적 거부감, 적대감을 갖고 있다. 반면에 이웃종교에 대한 일정한 지식만이라도 가진 사람들은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은 있어도 거부감이나 적대감은 확연히 줄어든다. 따라서 종교평화를 위해서는 이웃종교를 알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해야 한다.

먼저 각 종교의 엘리트 양성기관, 즉 신학교나 신학대학의 신학과 혹은 종교관련 학과에 이웃종교를 공부할 커리큘럼을 설치하는 일이다. 불교의 경우 동국대학교의 불교학과, 중앙승가대학과 지방승가대학의 교육과정에 기독교 관련 과목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 사실, 기독교 학교들은 상당한 수준의 불교교과를 이미 설치하고 있다. 기독교 종립대학의 학부 과목으로 대승불교의 이해나 선불교 강독 같은 과목을 가르친 적도 있다. 설치 목적이 선교수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알아가는 과정에서 거부감은 확연히 줄어든다.

이웃종교 교육과정은 엘리트 교육뿐만 아니라 평신자 교육에도 필요하다. 기독교의 예비신자 교육과정이나 불교의 불교대학 커리큘럼에 이웃종교 이해 과목이 반드시 필요하다. 내 종교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는 판에 남의 종교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냐는 반응도 있다. 그러나 이웃종교 공부는 반드시 이웃종교 알기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이웃종교를 알아가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이웃종교를 공부하면 그동안 전혀 보이지 않던 자기 종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것이 비교라는 인간의 인식 과정이 가져오는 효율성이다. 이웃종교 공부는 종교평화를 위한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다.

대부분의 종교단체는 방송 등 대중매체를 소유하고 있다. 천편일률적인 프로그램에 식상한 소속 신자들의 시청취율은 낮은 편이다. 여기에 이웃종교의 지도자나 신자들을 초대해서 그들이 갖는 이웃종교에 대한 인식을 그저 소박하게 털어놓거나 아니면 간단한 에피소드만 들려주더라도 매우 신선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작은 활동들이 종교평화를 위한 물꼬가 되고 결국에는 큰 강을 이룰 수 있다.

5) 종교 간 대화의 필연성

다종교사회는 필연적으로 종교 간의 갈등과 알력을 낳는다.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는 종교의 본질적 속성 때문에 종교평화는 어렵고 갈등과 알력은 일어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냉정한 성찰을 한다면 모든 종교인은 종교평화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종교평화는 모든 종교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불교를 자비의 종교,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비를 성실하게 실천해야 온전한 불자이고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해야 온전한 기독자일 것이다. 가장 차원 높은 자비는 “세상 모든 존재를 자신과 한 몸으로 여기라.”고 한다. 이는 헌신이라는 타동사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주객의 이론적 분리마저 거부함으로써 오히려 타자에의 헌신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말이다. 복음서의 가르침 그대로 사랑은 “자신이 해 받고 싶은 그대로 남에게 먼저 해주라.”이다. 사랑이란 타자에 대한 헌신적 희생이다.

자비나 사랑은 누구보다도 먼저 위험하고 불행한 사람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즉,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불행한 타자를 향한 헌신은 필연적이다. 사실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다행이다. 아직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위험하고 불행하다. 그러므로 성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에게 이웃종교인은 누구보다도 우선적인 헌신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실하고 온전한 불자나 기독자는 타 종교인을 위해 반드시 헌신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 모든 불행한 사람을 향해 아낌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풀면서도 유독 타 종교인에게는 자비나 사랑을 베풀 수 없다면 이는 분명 자기 종교의 정수(精髓)를 모르거나 불성실한 불자이거나 기독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모든 성실한 기독자와 불자는 이웃종교를 알아가는 종교 간의 대화를 필연으로 여길 수밖에 없다. 진정한 종교인은 자신의 신앙에 성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6) 종교평화를 위한 대화의 조건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평화는 있을 수 없다. 대화는 종교평화의 필수 전제조건이다. 종교평화를 위한 종교 간 대화의 기본요건은 대략 다음 몇 가지로 간추려 볼 수 있다. 첫째, 자기 신앙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필요하다. 대화의 당사자는 해당 종교 전통 안에서 인정을 받는 대표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신앙이 없는 비신자가 종교 간의 대화 상대로 나서는 것은 대화의 본질을 흐려놓을 우려가 크다.

둘째, 그와 동시에 철저한 개방정신이 필요하다. 종교 간 대화에 정직하게 임하는 사람은 필요하다고 생각될 경우 스스로 자기 신앙을 버리고 개종을 결단할 수 있을 만큼 열려 있어야 한다.

셋째, 대화의 목적을 자신의 변혁과 쇄신, 즉 배움에 두어야 한다. 상대를 설득하여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갖는다면 기만이다. 그런 목적이라면 차라리 정직하게 개종주의를 표방하는 편이 낫다. 잠재적 자기부정이 없다면 정직한 대화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넷째, 상대의 신앙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드라마 한 편도 공감적 이해 없이는 온전한 감상이 불가능하다. 공감적 이해 없이 이웃종교 이해는 전혀 불가능하다.

다섯째, 진리 추구에 끝까지 성실해야 한다. 대화의 궁극적 목적은 공유할 수 있는 진리의 추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손쉬운 절충주의나 방관주의는 궁극적 목적의 포기를 의미한다. 모든 종교는 추구하는 바나 도착지점이 같다고 자신이나 상대를 너무 쉽게 인정하는 편의주의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여섯째, 교리적인 간격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교육, 문화, 복지, 인권, 정의, 평화, 환경 등 인류 공통의 이상적 현안들을 위해 다 같이 실천에 참여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교리적 간격은 동일한 목적의 실천 안에서 무기력하게 와해될 수 있다.

일곱째, 대화 당사자 간의 인간적 신뢰와 유대감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신앙을 포함한 모든 요소는 인격 안에 융해(融解)되어 있다. 대화 상대의 인격에 대한 감동은 모든 관계를 긍정으로 이끈다.

다종교사회에서 종교평화는 공존의 필수요소이고 대화는 종교평화의 절대 전제이다. 다종교사회에서 종교 간 대화의 추구가 없다면 이미 잠정적 갈등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심도 있는 학술적 대화든 스포츠 교류처럼 가벼운 일상적 교류든 종교 간의 대화가 있다면 종교평화의 희망은 있다.

 

4. 불교가 꿈꾸는 종교평화

평화는 종교의 목적이다. 불교의 목적 역시 그렇다. 깨달음은 개인의 내적 평화이고 부처님 나라는 공동체의 사회적 평화다. 기독교의 구원이나 하느님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평화를 등지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종교와 전혀 다른 범주의 무엇과도 평화로워야 한다. 그런데 하물며 같은 범주 안의 종교끼리 불화한다면, 평화를 등지고도 종교로 불리고 있다면, 그것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욕망의 가명일 뿐이다.

불교가 꿈꾸는 종교평화는 다채로운 꽃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자태와 향기로 벌과 나비를 유혹하면서도 다른 꽃들을 전혀 시샘하지 않는 그런 꽃밭의 평화다. 불교가 꿈꾸는 종교평화의 꽃밭은 이웃한 꽃들의 자태와 향기를 배워 자신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나아가는 그런 곳이다. 그곳의 꽃들은 다른 꽃들이 모두 자기처럼 되기를 바라지 않으며, 각자의 아름다움을 지키면서도 서로 어울린 조화를 이룸으로써 더욱 큰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곳이다.

불교는 구체적 역사 속에서도 평화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현대의 스리랑카나 최근 미얀마의 불교는 이러한 평가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게 한다. 다종교사회는 기회인 동시에 위기이다. 다종교사회를 기회로 삼을 것이냐 위기로 만들 것이냐는 순전히 종교인들의 손에 달려 있다. 기회로 삼는다면 종교평화를 이룰 것이고 위기로 삼는다면 종교갈등에 이은 공동체 전체의 완전한 괴멸로 이끌 것이다.

나아가 만일 다종교사회를 기회로 삼는다면 그것은 종교만을 위한 기회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종교평화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정치적, 경제적, 민족적, 국가적 반목 세력들에게 화해와 일치, 공존과 공영의 모범이 될 것이다. 한국 종교사회의 갈등과 평화의 운명은 불자들의 손에 있다. 종교평화뿐만 아니라 세계평화를 이끌어 갈 자산이 불교에 있기 때문이다. ■

 

윤영해
동국대학교 교수. 서강대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종교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Young-Hae Yoon, Sherwin Jones(2017), ‘Broken Buddhas and Burning Temples: A Re-examination of Anti-Buddhist Violence and Harassment in South Korea’, Buddhist Studies Revi-ew(A&HCI). vol.34. no.2, London, 〈예수의 성령체험과 붓다의 깨달음체험의 내용과 구조〉 〈포스트모더니티와 생태불교학〉 〈중심주의의 해체와 불교의 생태윤리구조〉 등이 있다. 불교평론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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