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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꿈꾸는 우리 교육
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80호] 2019년 12월 01일 (일) 박병기 bkpak15@knue.ac.kr

1. 시작하며

우리 사회에서 교육을 말하는 일은 늘 곤혹스러움을 동반한다. 누구나 한마디 할 수 있는 주제라는 인식과, 어떤 이야기를 해도 문제의 한 부분조차 정확하게 조준하기 어려운 복잡성과 복합성이 동시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교육전문가’로 분류되는 필자와 같은 사람들은 말하기를 삼갈 수밖에 없고, 그 자리를 기자나 일반 학부모, 사교육 시장의 주인공들이 차지하기 일쑤다.

이런 현상을 꼭 부정적으로 볼 일만은 아니다. 일제 강점기와 미군 점령기를 거치면서, 주로 일본과 미국의 교육학과 교육계를 일방적인 모방과 흠모의 대상으로 삼아 온갖 수입정책을 검토도 없이 이식시키고자 했던 우리 교육학자들에 대한 비판과 불신이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신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높은 학력을 갖게 된 이 땅의 시민들에게 자신만의 교육관을 가져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부여했고, 인터넷 정보망의 구축으로 시민들이 쉽게 전문적인 교육지식에도 접근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일정한 전문성 확보도 가능해지고 있다.

시민교육의 주요 목표 중 하나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인식하고 그 해결방안을 모색해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시민 양성임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는 시민사회의 정립과 함께 시민교육에서도 일정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셈이다. 어느 누구의 전문성도 이제는 시민들의 검증 대상이 되고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의 관심인 교육의 전문성은 거의 투명한 검증 대상이 되었다. 한국 시민사회와 시민교육을 위해 일단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받아들일 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백가쟁명(百家爭鳴)의 논의들이 현실 교육문제를 해결하거나 해소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생긴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직후 대학입학 정책에 관한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고자 시도했던 국민 공론화 과정이 어떤 정책도 선택할 수 없을 만큼 팽팽한 의견 대립으로 끝난 사례가 그런 판단의 현실 속 근거다. 그 정도의 관심을 받지는 못하지만, 우리 사회의 공론장에 등장하는 다양한 교육 관련 주제들에 관한 의견 대립이 점차 심화되고 있음을 쉽게 확인하곤 한다.

어떤 사안에 대한 의견 대립 자체는 ‘공적 토론을 통한 정치’로서 민주주의에서 당연하고도 바람직하지만, 어떤 시점에서 결정을 내리지 못할 정도의 대립 또는 의견 대립 자체의 수준을 넘어서 상대방을 적대적인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현실은 결코 바람직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각자의 주장이 지니는 진리의 일면[一理]을 정확하게 내세우면서도 상대방의 주장 속에 담긴 일리에도 충분히 주목하면서 보다 나은 진리로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는 진정한 화쟁(和諍)의 윤리가, 우리 시민사회의 담론윤리로 수용되어야만 한다는 당위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지점이다.

   
 

2. 교육으로 인한 고통들

통계를 중심으로 인간과 사회에 관한 진리를 찾는 방법인 양적 연구법이 비판을 받게 된 계기는 그 연구 과정에서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제거해버릴 가능성에서 마련되었다. 이미 서양 윤리학의 공리주의 윤리, 즉 사회 다수의 이익과 쾌락을 보장할 수 있으면 소수의 희생은 감수할 수도 있다는 윤리설이 비판받는 지점과 닮아 있다. 물론 공리주의 윤리는 대면사회의 직접성을 넘어서 익명의 관계를 중심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근대 이후 시민사회의 윤리로서 상당한 정당성을 지닌다. 그럼에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전제될 수 있을 때라야 제대로 된 자유사회일 수 있다는 주장이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삼는 정의론에서 나온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수의 목소리는 때로 무심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통계로 잡히지 않는 고통의 소리나 진리의 일면을 보기 위한 학계의 노력은 연구자 자신을 포함하는 소수의 목소리에 깊이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질적 연구방법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한계를 가진 실존적 연구자임을 밝히면서, 그 한계 안에서 사람들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과정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연구방법이다. 이 방법은 자칫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같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에도 유념하면서, 가능하면 쉽게 판단 내리지 않고 특정한 결론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도도 배제하는 방법론으로 자리를 잡아 가는 중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상황과 한계를 먼저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사범대학 출신으로 서울 변두리 한 중학교에서 3년 정도의 교사 생활을 경험했고, 그 후 대학원을 마친 후에는 초등교사 양성기관인 교육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 유치원에서 초등, 중등 교사를 함께 양성하고자 하는 목표로 세워진 대학의 교수이자 전국의 교사들을 주요 대상으로 삼는 대학원의 장을 맡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부 민주시민교육자문위원회나 교육청 사학정책자문위원회 같은 이런저런 형식의 교육 관련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고, 때로는 위원장 역할을 감당해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자신이 부정하고 싶어도 박사학위 명칭에 ‘교육학’까지 들어가다 보니 우리 사회의 교육전문가라는 호칭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느낀다. 그리고 그 느낌이 불편하고 버거울 때가 더 많다. 물론 교육전문가로 초대해놓고도 내 말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일반 시민들을 만나는 불편함도 있다. 거기에 필자는 가산지관 스님이 설립한 5년제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三學院)에 1996년 3월 입학해 불교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불교윤리학자라는 무거운 칭호 하나를 더 부여받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문제를 떠올릴 때는 내가 자주 만날 수밖에 없는 대학원에 파견 나와 있거나 방학을 이용해 대학원 공부를 하는 현장 교사들의 고통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비교적 안정된 직업으로 인정받는 교직에 있는 그들의 고통스러운 눈빛과 호소들은 곧바로 그들이 만나는 학생들의 그것으로 이어지고, 그 학생들의 부모까지로 연쇄이동하면서 답답해지곤 하는 경험이 일상화되어 있다. 어떻게 해야 이 고통들을 줄이거나 없앨 수 있을까?

필자는 불교의 핵심을 ‘삶의 고통과 마주하라’는 고타마 붓다의 명제라고 생각한다. 누구의 삶에도 자리할 수밖에 없는 고통은 바로 고통스럽다는 그 사실 자체 때문에 피하고자 하는 대상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좇고자 한다는, 서양 윤리학사의 에피쿠로스나 벤담의 주장은 인간의 삶에 대한 객관적 관찰에서 나온 것으로 주목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그 둘은 각각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고통은 피하고자 해야 하고 가능하면 정신적이든 아니면 육체적이든 쾌락의 양과 질을 늘려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충고를 하고 있다. 고타마 붓다는 그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라고 말한다. 그 마주함은 또 다른 두려움을 가져올 수도 있고 더 큰 고통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배경을 들여다보라는 것이 붓다의 일관된 충고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교육으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교육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고, 이 두 가지 일 모두 본래는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일들이었다. 공자가 말했던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중에는 널리 제자를 얻어 가르치는 보람이 포함되어 있고, 알지 못했던 것들을 배우는 즐거움 역시 누구라도 삶의 어느 단계에서 한 번쯤은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배우는 것 말고도 일정한 강제성이 더해지며 배워야만 하는 것들이 추가되었고, 산업사회에 접어들면서 일꾼으로 길러져야 하는 공교육이 추가되며 그 고통은 모든 시민의 몫으로 확장되었다.

교육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사람은 학생이다. 잘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려 없이 짜이는 학교 교육과정과, 불필요한 수준의 경쟁을 강요하면서 시험을 위한 지식 습득으로 내몰리는 상황이 우리 아이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가져다주고 있다.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의 자식을 먼저 챙길 수밖에 없는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학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이 인간답게 사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경쟁에서 앞서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들로 아이들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있다.

그들과 만나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하는 교사들 또한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대학입시에 매몰된 학교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교육을 실천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시험문제 풀이나 단선적인 진학지도에 몰두하다 보면 자기가 왜 여기에 이렇게 있는지가 의심스러워지는 정체성 위기로 내몰린다. 이런 현실 속에서 역시 고통스러워하는 학생들과 충돌하기라도 하면, 이 땅에 교사의 권위라는 게 과연 남아 있는지 의심스러워진다는 교사가 적지 않다.

공교육 체제의 교사들 외에도 우리 사회에는 사교육 시장에서 일하는 교사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다. 이들 중 소수는 큰돈을 벌어 재벌급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교사로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하루하루 밥벌이를 위한 교육의 장으로 내몰리며 고통받고 있다. 교사로서 가르치는 보람도, 직장인으로서 돈을 제대로 버는 재미도 누리기 쉽지 않은 사교육 체제의 교사들은 교육으로 인한 고통의 또 다른 측면을 경험하는 사람들이다.

지금까지는 개인적 차원에서 교육으로 인해 겪는 고통을 생각해본 것이라면, 이것과 다른 사회적 차원의 고통 또한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불필요한 경쟁으로 인해 낭비되는 비용은 단순히 돈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 아이들과 교사, 학부모들이 만나는 장에서 경험해야 하는 고통 또한 사회적 차원의 고통으로 볼 수 있고, 대학입학 제도를 놓고 벌이는 대립과 그로 인한 극심한 갈등 또한 사회적 고통이자 값비싼 비용이다.

수학능력시험 성적만으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정시전형과, 학생부에 적힌 성적과 기록을 가지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수시전형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에서 우리는 그런 사회적 고통을 잘 읽어낼 수 있다. 교육문제를 판단하는 두 기준으로서 공정성(公正性)과 공평성(公平性)은 각각의 정당화 논리와 경험적 근거를 갖는다. 정시전형은 한 가지 시험성적의 줄 세우기를 통한 투명한 공정성 확보에 유리하고, 수시전형은 학생이 선 출발점까지 고려하여 더 많은 배려를 해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님으로써 공평성 확보에 유리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공평성을 더 중시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도입한 수시전형이 ‘엄마의 치맛바람과 아빠의 인맥, 할아버지의 재력’ 등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나돌기 시작했고, 그중 일부는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거기에 수능시험 경쟁으로 인한 사교육비를 절감할 수 있다던 수시전형이 그에 맞는 준비를 해주는 사교육 시장의 등장과 함께 그렇지 않은 것으로까지 드러나게 됨으로써, 마치 정시전형으로만 돌아가면 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정말 그럴까?

 

3. 교육으로 인한 고통의 원인 분석: 불교적 접근

가. 원인의 중첩성

모든 문제는 연기적 인과(因果)의 고리를 지닌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그러는 것처럼, 모든 문제 또한 그 문제를 생겨나게 하는 여러 인연의 결과물이다. 그 연기의 연결 양상 또한 지속적으로 변해가는 것이어서 어떤 문제도 독자적인 자성(自性)을 지니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문제가 다가올 때 고정된 실체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고, 그 배후에 숨어 있는 연기적 그물망과 그로 인한 공성(空性)을 볼 수 있을 때라야 온전한 해소책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이 붓다가 발견한 진리의 핵심이다.

교육문제 또한 같은 맥락을 지닌다. 교육문제는 우선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관련된 사회문제다. 교육문제는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젊은 엄마를 향해 그렇게 해주겠노라고 말한 후에, 다만 아랫마을에 가서 한 사람이라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온다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씀하신 석가의 예화에 나오는 죽음의 문제와 유사하다. 어느 누구도 교육을 피해 살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고, 그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따라서 교육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를 함께 볼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 시대의 모든 사건은 높은 곳에서 이루어지며 먼 곳으로 뻗어나간다. ……아테네의 시민이 아니라 세계시민인 그대는 아테네에서 요구되는 견해, 그대가 행하는 일에 대한 확고한 느낌, 그대가 이루어낸 일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며 미래의 세계도 아니요, 어디까지나 현재의 세계다.

 

오늘의 세계는 현재의 세계일 뿐이므로 그 현재를 관조하는 일이 모든 문제 인식의 출발점이지만, 바로 그 오늘의 세계는 소크라테스의 아테네도 아니고 율곡의 조선도 아닌 21세기 초반 한국이라는 시 ·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세계다. 이 시간과 공간은 다시 세계화라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 있고, 이 세계화는 개인으로서 삶은 물론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삶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화의 흐름 또한 다른 측면에서 보면 연기적 그물망의 한 코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 교육문제는 그런 맥락에서 한 개인의 문제이면서 가족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 한국 시민사회 전체의 문제이며 세계화된 맥락을 지닌 문제이다. 이미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이민이나 유학을 간 학생들을 중심으로 부모의 강력한 교육열이 ‘헬리콥터 엄마’라는 말을 만들어낼 만큼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역으로 미국이나 유럽 같은 이른바 선진국에서 유행한다고 소개되는 교육방법이나 방향을 무조건적으로 따라가고자 하는 학부모와 교육정책가들 또한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우리 교육문제가 사회문제임을 일깨우는 통로 중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선진국 담론’이다. 식민지를 거쳐 모방의 근대를 비교적 성공적으로 건너온 우리는, 그 대가로 일본과 미국, 유럽 등 이른바 ‘선진국’을 무조건 따라가야만 한다는 강박증 같은 열등감을 지니게 되었다. 교육문제 또한 마찬가지여서 일본이나 미국의 교육정책이나 이론을 재빨리 도입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될 것이라는 환상을 지금까지도 온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배울 만한 것은 배워야 한다는 교육학적 명제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선진국병’은 오히려 배워야 할 것은 배우지 못하고 껍데기만 배우거나,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려고 열망하는 일그러진 모습을 지속적으로 양산해내는 요인이 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게 하는 요인이 있다. 바로 교육전문가로 자처하고 교육권력의 중심에 섰던 사람들이 이 선진국 담론에 더 많이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거나, 현재도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주로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기를 거치면서 일본이나 미국 유학을 다녀와야 출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지식인 군상들이 교육계의 권력을 장악해온 역사가, 광복 이후로만 따져도 80여 년의 시간을 축적하고 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교육학 분야의 타자 의존적 지향성은 심각한 수준을 넘어 거의 구제불능이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이런 요인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무명(無明)의 배경을 이룬다. 모든 문제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붓다의 깨달음은 교육문제가 지니는 연기적 중첩성, 즉 우리 역사와 현실에서 비롯된 문제들이 오랜 시간 동안 얽히면서 노출하고 있는 사회문제로서의 교육문제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만 비로소 해소책을 찾을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나. 교육목표에서 만나는 난관: 과장된 생존능력

교육의 목표 설정은 교육이 출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목표가 설정되지 않은 교육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고, 그 과정과 결과 또한 제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형태의 교육과정에는 그것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필수요소로 제시되어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새끼들에 대한 교육을 주로 본능에 의존하는 짐승과는 달리, 우리 인간은 상당 부분을 의도적인 계획과 통제를 포함하여 실시하고자 한다. 물론 그 의도와 계획, 통제 속에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자식이 좀 더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본능적 열망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안정되고 편안한 삶’은 여러 가지로 묘사될 수 있지만, 크게 보면 먹고사는 문제와 인간답게 사는 문제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짐승과도 공유하는 ‘먹고사는 문제’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지니는 문제이고, 우리 인간들에게도 먹을 것과 입을 것, 자고 쉴 수 있는 곳 같은 필수적인 요소들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로 주어진다. 자연과의 접촉과정에서 몸과 마음을 움직여 획득하는 노동이 일차적인 통로이고, 부모가 축적한 재산을 물려받는 등의 통로는 이차적이다. 교육 또한 이 문제, 즉 ‘혼자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한다,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과 숫자를 헤아리고 계산할 수 있는 능력, 몸을 적절히 움직여 과일을 가꾸고 따거나 농작물을 가꿀 수 있는 능력 등이 모든 교육과정의 첫 부분을 이루는 이유이다.

그런데 인간의 생존능력은 그가 사회적 존재라는 점에서 이런 요소들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신의 생존 욕구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주변의 의미 있는 타자들과 깊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전혀 모르는 다른 시민들과의 관계도 시민윤리에 근거해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때라야 온전한 시민으로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다양한 형태의 소외를 경험하거나,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상황으로 내몰릴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이런 능력들을 통칭하여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 또는 역량’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우리는 인간 교육의 목표를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생존력 기르기’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역량 기르기’라는 두 요소로 설정할 수 있다. 이 목표에 대해 원론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자식들이 이 두 목표를 달성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안전하고 안정된 기반 위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고, 이 바람 속에 교육목표의 두 요소가 반영되어 있다.

전통사회에서 교육의 주체는 부모였다. 부모가 이 두 목표를 염두에 두고 아이들을 서당에 보내거나 여유가 있으면 자신의 집에 독서당을 차려 훈장을 모셔왔다. 아니면 부 또는 조부 등 가족 구성원 중에서 누군가가 직접 교육자로 나서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아이로 자라나기를 목표로 삼기도 했다. 이렇게 부모와 가족 중심의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선택된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부모와 함께하면서 밭 갈기를 배우거나 소 잡는 법을 배우면서 나름의 생존력과 사회성을 키워가야 했다.

그런데 시민사회에 오면 교육의 주체는 더 이상 부모나 가족이 아닌 학교와 교사가 되었다. 학교는 부모의 요구와 함께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내용들을 교육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설정해서 교육함으로써, 삶의 현장에 있는 부모들을 대신에 아이를 맡아주는 역할과 산업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일꾼을 길러내는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도 19세기 말부터 이런 흐름을 받아들이고자 했고,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의 이름으로 모든 국민을 학교교육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혁명적 선언’을 하고, 소학교와 함께 그 학교에서 일할 수 있는 교사를 길러내는 ‘한성사범학교’를 세우는 것으로 출발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런 계획들이 20세기에 들어와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비교적 순조로운 시민교육 체제를 갖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맞아 식민지주의자들의 목표에 맞게 변질된 공교육 체제를 갖게 됨으로써 군부독재가 끝나는 20세기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시민교육을 실시할 수 없는 역사적 불행과 만나야만 했다. 다행히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과 1987년 6월 항쟁, 2016년 촛불항쟁으로 이어진 처절한 저항을 통해, 21세기 접어들어서는 자신 삶의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율적인 시민’을 교육목표로 설정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다른 한편 우리의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는 민주화 과정은 1997년 구제금융사태와 2008년 세계금융위기라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위기와 만나면서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속절없이 생업을 잃고 방황하고 좌절하다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가장들이나, 노후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굶다가 고독하게 죽어가는 노인들이 우리 주변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런 외적 상황들은 교육에 직격탄이 되었다. 교육은 이제 극단화되고 왜곡된 생존능력 기르기 이외의 목표를 가지기 어렵게 되었고, 그 외의 목표들은 교육과정 문서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 특히 부모와 교사, 학생이라는 세 주인공들이 모두 이런 극단화된 교육목표 몰입으로 인한 고통에 지속적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직접 · 간접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을 찾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땅의 거의 모든 사람이 교육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필요 이상으로 극단화된 경쟁과 그 경쟁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는 학생들을 향한 멸시의 시선,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우울증에 빠져드는 아이들…… 이런 모습들이 우리 사회의 교육 주변을 배회하는 유령처럼 자리한 지 오래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생존이라는 목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고, 우리 아이들이 생존능력을 제대로 갖출 수 있게 하는 교육의 역할에 대해서도 정당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의 생존은 경쟁과 함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경쟁 또한 필요한 범위 안에서 제한된 형태로 진행되고 공정성을 전제로 이루어질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인간다운 생존능력 함양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충분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제영역에서도 공유경제의 영역이 급속도로 확장되고 있고, 정치 영역으로 오면 자신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것 못지않게 다른 사람의 주장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자세와 역량을 갖추는 일이 그 사람의 가치를 높여주는 지름길임이 확인되고 있다.

교육목표 설정의 잘못으로 인한 이런 고통은 불필요한 것이고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불교적 관점에서 이 고통을 바라보자면, 모두 교육의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의 결여로 인한 무명(無明)의 그림자들이다. 생존능력의 함양은 우리 교육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목표이지만, 그 생존능력은 다른 사람과의 경쟁뿐만 아니라 협력도 잘 해낼 수 있는 ‘더불어 살 수 있는 능력’을 함께 갖추고 있을 때라야 비로소 쓸모 있는 것이 된다. 꼭 필요한 영역에서는 경쟁도 해야 하지만, 그 경쟁의 과정은 공정성과 공평성의 윤리를 전제로 해야 하고 더 나아가 한 번의 실패가 평생의 실패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게 하는 지속적인 경쟁의 기회 보장 등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주로 대학입학을 향한 경쟁에만 과도하게 몰두하면서 생기는 우리 교육의 고통 대부분은 상당 부분 완화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

다. 교육을 둘러싼 사회적 고통의 원인들: 교육문화의 왜곡

‘우리 교육문제는 사회문제다.’라는 명제는 이 글을 통해 일관되게 전제된 중요한 명제다. 어떤 문제든지 우리가 알 수 있는 원인들과 알 수 없는 원인들이 겹쳐 일어나는 것이라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은 그 원인들 사이의 관계를 중첩성과 복잡성, 복합성 등의 말로 규정함으로써만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전제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교육문제이고, 그런 점에서 교육문제는 곧 사회문제라는 명제는 정당화 기반을 지닌다.

 

세상만사가 흥하고 쇠퇴하는 원인은 으레 안과 밖의 인연들이 만나는 데서 빚어지기 마련이거늘 위의 논평들은 하나같이 외연(外延)의 소치로만 돌리고 있다. 어째서 안에서 움트고 있는 원인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일까?

안에서의 허물은 이미 여조(麗朝) 시대로부터 치유하기 어려운 병의 뿌리가 유전되어 왔다고 하겠다. 그것은 교단 내의 교육이 참되지 못하고 일그러져 이해(理海)와 복전(福田)을 민족사회에 마련하여 발휘하지 못하고, 단지 겉치레로 궁전을 드나드는 사치와 집권자들을 만나고 그 혜택을 입고자 하는 데만 정신을 쏟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 결과 나라는 이미 기울어지고 불교도 따라서 쇠퇴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불교가 쇠퇴한 현상을 두고 그 핵심 원인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석전 박한영의 생각은 불교의 바람직한 현실인식 태도의 한 전형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주요 원인을 교육이 참되지 못한 데서 찾고자 했고, 이러한 관점은 현재 우리의 주제인 한국교육의 문제를 분석하고 불교적 대안을 찾고자 하는 데서도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 한 사회나 단체 등이 제대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참된 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는 조선사회는 조선에 맞는 참된 교육이 있어야 하고, 21세기 초반 한국사회는 한국에 걸맞은 참된 교육이 가능한 교육체제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사회의 교육체제는 그 사회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목표를 구현해낼 수 있는 개인과 공동체를 향한 설계와 교육과정, 지원체제, 문화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우리 사회의 교육체제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그러면서도 분단의 극복이라는 특별한 과제를 안고 있는 사회를 전제로 교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내면적 요소와 외형적 요소를 동시에 포함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육체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을까? 기본적으로는 시민교육 체제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고, 이것은 20세기 들어 일제 강점기와 미 군정기를 통해 지속되어온 식민교육, 즉 식민지 백성 또는 신탁통치를 받는 국가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극복한 결과이다. 이것에 더해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을 동시에 성공적으로 달성함으로써 가질 수 있게 된 정치 및 경제 자산과 기반의 토대 위에서, 이상적인 한국 시민사회와 시민을 목표로 삼아 펼쳐지는 교육의 목표와 내용, 방법, 평가, 지원체제 등을 의미하는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이 교육체제가 외형적 성공에 비해 내실을 갖추지 못해 투입과 산출 모두에서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 체제가 제대로 유지될 수 있으려면 그 체제에 유입되는 투입의 측면과 그 체제를 통해 배출되는 산출의 측면이라는 두 차원의 요소가 모두 건강해야 한다는 것이 체계이론의 기본 전제다. 그것은 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잘 먹고 나서는 적절한 시기에 화장실에 갈 수 있어야 건강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른바 ‘먹고 소화시켜 배설하는 문제’가 각각 인간의 생존에서 투입과 산출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 교육체제는 과장되고 왜곡된 구성원들의 생존력 지향으로 말미암은 잘못된 투입과, 그 결과 진정한 경쟁력을 포함하는 시민으로서의 역량과 교양이라는 산출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교양과 윤리라는 정신적 영역의 목표에서는 심각한 산출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2016년 촛불 이후 지겹게 마주해야만 했던, 이른바 이 땅 엘리트들은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교양은 평균 수준에도 미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체제의 한 구성요소로서 교육체제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그로 인한 잘못된 투입, 당연한 결과인 산출의 빈곤 등으로 이어진다. 문제만 생기면 교육 탓을 하고, 주로 대학입학시험 제도와 같은 것을 바꾸면 사회의 문제들이 쉽게 해결된다고 보는, 이 땅의 어설픈 교육전문가들의 존재 자체가 잘못된 투입의 배경이다. 교육이 우리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작지 않지만, 교육이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의 열쇠라는 생각은 한참 잘못된 것이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장기적인 안목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그 성과를 측정하는 일 또한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과업이다. 그런데 정치가 교육을 좌지우지하면서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단기적인 수단으로 교육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고, 그런 교육은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번 정권도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이런 문제들이 누적되면서 우리 사회의 교육문화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 교육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와, 교육을 결과만으로 측정하고 평가하고자 하는 잘못된 평가문화가 모두 왜곡된 교육문화의 표상이자 우리 교육의 일그러진 얼굴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우리 교육을 보고자 할 경우에는, 가장 먼저 이런 일그러진 얼굴과 고통스럽게 마주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지금까지 노출시키고자 한 우리 교육의 민얼굴 자체가 불교적 관점의 교육 분석 과정에서 나오는 것들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다면, 우리가 꿈꾸는 교육은 그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이면서, 동시에 이상적인 목표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 붓다 가르침에 따른 올바른 해석이다.

 

4. 맺음말: 우리 불교가 꿈꾸는 교육

우리 불교가 꿈꾸는 교육은 교육으로 인한 고통이 해소될 수 있는 개인적 차원의 교육과 사회적 차원의 교육체제이다. 교육으로 인해 우리 모두 겪고 있는 개인적인 고통과 사회적인 고통은 충분히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그 결과는 젊은 부부들로 하여금 아이 낳는 일을 꺼리게 하거나 시험에 대한 압박감으로 자살하는 학생들이 끊이지 않는 비극으로 나타나고 있다. 삶의 실존적 국면에서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그 안에 포함된 해소방안을 찾을 수 있다는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 사회에서 특히 교육문제에 적용되어야 할 절박성을 지닌다.

이 작은 글에서는 우리 교육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그 고통의 원인으로 각각 과도하게 생존력으로 집중된 교육목표의 문제와 그런 목표를 포함해서 내용과 방법, 평가 등을 왜곡시켜버리면서 굳어진 왜곡된 교육문화를 꼽고자 했다. 이런 원인들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하나씩 극복하고자 하는 지점에 우리가 꿈꾸는 바람직한 교육이 자리한다.

보다 구체적 방안으로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만남의 장이 교사와 학생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시 · 공간이 될 수 있게 하는 노력을 먼저 꼽을 수 있다. 모든 교육은 과정이면서 동시에 결과를 지향하지만, 우리 교육은 지나치게 협소하게 정의되는 결과에만 집중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모든 존재성이 현재의 찰나에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과정으로서 교육은 당연히 충분히 주목받아야 하는 요소이다. 학생과 교사가 만나는 교실이라는 공간과 학교에서의 모든 시간이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아야만 바람직한 교육도 가능해진다.

동시에 교육은 우리 사회체제의 핵심요소를 이루기 때문에, 21세기 초반 한국사회 속에서 교육이 차지하는 위상과 그것을 둘러싼 문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극복 노력이 더해질 수 있어야만 더욱 바람직한 방향성을 잡아갈 수 있다. 교사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 문화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성을 지닐 수 없고, 실제로도 같은 이유로 지쳐서 절망하거나 포기하는 교사를 보는 일이 필자의 일상 속에서 드물지 않다.

교육체제가 지니는 특수성, 즉 과정 지향성과 장기성 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교육정책을 만들어갈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해야만 우리 교육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고, 이 일은 단순히 대통령 같은 특정 정치인이 감당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다. 모든 시민이 그런 안목과 실천의지를 가진 사람을 선출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동시에 지속적으로 감시하면서 압박할 수 있는 실천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불교가 꿈꾸는 우리 교육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함께 확인하면서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전제로, 우리에게 실천을 요구하는 시급한 과제로 이미 다가와 있는 셈이다. ■

 

박병기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와 같은 대학원에서 윤리학과 도덕교육학을 전공했고,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철학과 계율을 공부했다. 전주교육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장으로서 2015 초 · 중 · 고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총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현재 한국교원대 대학원장. 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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