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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꿈꾸는 좋은 노동
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80호] 2019년 12월 01일 (일) 유승무 smlew691@hanmail.net

1. 들어가는 말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일자리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폭되고 있다. 대통령의 공약 때문이 아니다. 일자리 수의 경향적 감소 현상은 자본주의사회의 본질이다. 주지하듯이 자본주의사회의 생산성 경쟁 및 이윤추구 경쟁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도를 높이는 대신 노동의 경향적 축소라는 사회적 압력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미 대부분의 선진자본주의사회는 이른바 ‘노동 없는 자본주의’(울리히 벡) 사회가 되었다. 실제로 미국 기업이 내는 이윤의 반 이상이 돈으로 돈을 만들어 내는 금융거래로부터 나올 정도로(앙드레 고르), ‘고용 없는 성장’이 일반화되어 있다. 문제는 이러한 추세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한 대가로서, 정규직 일자리는 경향적으로 축소되고 실업은 증가하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오직 노동하는 자만이 존재한다. 그것도 인간으로’라는 식으로 인간 존재의 근거를 제공하던 노동(울리히 벡)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제러미 리프킨).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은 기존의 노동 개념인 고용노동에 집착하여 변화된 현실에 부합하는 현실인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앙드레 고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잠재적 실업자, 잠재적 불완전고용자, 부분 시간(파트타임) 노동자, 삯꾼, 불안정한 피고용자임을 알고 느끼고 파악한다. 그러나 우리가 각자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직도 우리 사이에 공통된 새로운 현실인식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앙드레 고르는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대고 호소하든 만인을 위한 완전고용이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임금노동이란 더 이상 인생의 중점이 아니라는 점, 아니 결코 단 한 번도 각 개인의 중요한 활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런 정치는 사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어쩌면 과감하게 임노동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이 이제는 더 정직하다. 우리가 ‘발상의 전환’을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좋은’ 노동인가? 그것은 앙드레 고르의 말처럼 임금노동 이외에도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생산적인 노동이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러한 노동의 대부분이 오히려 ‘좋은’ 노동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또한 미래사회가 산업사회에서 서비스사회로 이행하고 있다고 진단하는 기아리니와 리트케에 따르면, ‘고용 개념 즉 지불노동은 단지 생산노동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현실과 더 잘 부합할 것인데, 그럴 경우 산업사회에서는 취업노동이 아니라는 이유도 무시되었던 ‘좋은’ 노동들이 대다수 사회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생산적 가치로 인정되는 계기가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이 글의 목적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다양한 ‘좋은’ 노동의 사회적 인정 투쟁 및 복권 투쟁을 시도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우선 소외된 노동과 ‘좋은’ 노동의 대비를 통해 ‘좋은’ 노동에 대한 작업적 정의를 시도한 다음, ‘좋은’ 노동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은 물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인정투쟁 전략을 논의한다. 그러고 나서 ‘좋은’ 노동의 성공사례로서 붓다의 실험을 검토해봄으로써 ‘좋은’ 노동의 실현 가능성을 경험적 차원에서 실증해 보고자 한다. 

   
 

2. ‘소외된’ 노동과 ‘좋은’ 노동

1) ‘소외된’ 노동

헤겔은 중세까지의 부정적 노동 개념을 벗어나 인간의 삶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를 본질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한 철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헤겔에 따르면, 동물과 달리 인간은 단순한 생존의 물질적 욕구를 넘어서서 사회적 인정이란 비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존재인데, 주인은 노예로부터 이러한 비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킨 존재이다. 그러나 주인은 노예가 생산한 물(物)의 종속성에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반면에 노예는 물에 부정적으로 관계하기 때문에, 즉 자연을 지배하고 변화시키는 노동의 주체이기 때문에 주인의 주인이 된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노예는 주인에 대한 봉사 속에서 노동하면서 그의 개별적 의지와 아집을 제거하고, 욕구의 내적인 직접성을 지양하는 가운데 …… 일반적인 자기의식으로 이행한다. …… 따라서 노예는 그의 자연적이라고 하는 의지의 이기적 개별성을 넘어서 자신을 고양하는바 바로 이러한 그의 가치에 의하여 이제 그는 주인보다도, 다시 말하면 이기심에 사로잡힌 채 노예에게서 단지 자기의 직접적인 의지밖에는 직관하지 못하는, 즉 부자유스러운 의식에 의해 형식적으로 인정된 주인보다도 더 높은 위치를 점하게 된다. 노예에 의한 이러한 이기심의 극복은 인간의 진정한 자유의 시초를 형성한다. 

 

결국 인정투쟁의 형식적 패자인 노예가 자연의 지배, 주인의 지배,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이기적 욕망의 지배에서 해방(자유)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가 사회적 노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헤겔의 논의에 따르면 “노동은 어떤 특정한 인간 ‘활동’이 아니다. …… 노동은 오히려, 그 안에서 각기 개별적인 활동들이 정초되고 다시금 반작용을 일으키는 그러한 하나의 행위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노동이란, 그것을 통하여 인간이 비로소 ‘즉자적으로’ 자기 고유의 본질로, 즉 자각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귀환하며, 자기 현존재의 형식 내지 ‘존속’의 형식을 획득함과 동시에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게 되는 것인바, 결국 노동이란 인간의 세계내존재 방식으로서의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자리매김과는 달리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노동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 한편으로는 고용노동에 대해서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태도를 지니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를 쓰고 취업전쟁을 벌이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고 또 지속되고 있는가? 

우리는 노동력상품에서 그 비밀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주지하듯이 이중의 자유를 획득한 오늘날의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반드시 팔아야 하고, 그 상품을 구매하는 자본가는 노동력상품을 통해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동력상품을 구매한다. 여기에서 노동력을 판매하고 구매하기로(상품) 공모한 당사자 간에는 사회적 합의(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승인)도 존재하지만 동시에 이해관계의 모순도 존재한다. 바로 이러한 이해관계의 모순 때문에(특히 자본가의 이해관계 때문에) 노동시장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직업노동의 비인간화가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유효한 한 노동자는 취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과학기술 수준과 그 생산력을 고려하면 노동시장의 현실은 완전고용 이데올로기와는 달리 그 진입 자체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우며, 그럴수록 직업노동이야말로 유일한 노동인 동시에 유일한 가치생산의 원천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강화된다. 때문에 그 직업노동이 아무리 소외된 노동이어도 선택의 여지 없이 취업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말 다른 선택지는 없는가? 직업노동이 생계의 유일한 원천인 한 그렇다. 마르크스도 말한다. “삶을 포기해 버리지 않는 한, 노동자는 구매자계급 즉 자본가계급을 외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팔아야만 수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직업노동이 소외된 노동이란 점이다. 다시 마르크스의 말을 들어보자. “그렇다면 노동의 소외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우선 노동이 노동자와는 무관하다는 점, 다시 말해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점, 그래서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고, 스스로 편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다고 느끼며,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자유 활동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괴롭히고 정신을 파괴시킨다는 점에 있다. 결국 노동자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을 되찾는 느낌을 받게 되고, 노동을 할 때는 스스로 자기로부터 소외된다고 느끼게 된다. 그는 노동을 하지 않을 때는 마치 집에 있는 듯 편안해하고, 노동을 할 때는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노동은 이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되는 것이다. 그것은 ‘강제노동’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욕구의 충족은 없고, 단지 노동 밖에서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수단’만이 존재한다.”

이렇게 볼 때,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임금노동은 ‘소외된’ 노동일 뿐 절대로 ‘좋은’ 노동이 될 수 없다. 게다가 소외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는 사회적 인정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의 인정도 획득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유의 영역은 필연성과 외부적인 목적성에 의해 결정된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만 시작한다. 그래서 그 영역은 속성상 물질생산의 저편에 위치한다.” 그렇다면 물질생산의 저편에는 어떤 노동이 있는가? 

2) ‘좋은’ 노동을 찾아서

최근 사회과학계에서는 일자리 축소에 대응하려는 다양한 시나리오들이 제출되고 있다. ‘좋은’ 노동 개념도 그 시나리오의 일부를 구성한다. 그러나 ‘좋은’이란 형용사의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통상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고 높은 직업위계를 가진 이른바 ‘좋은 직업(good job)’을 ‘좋은 노동’과 동의어로 사용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만 확장하면 그러한 직업이 반드시 ‘좋다’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러한 직업은 소외된 노동이기도 하거니와 노동의 결과가 개인에게는 이익을 주더라도 사회적으로 유익하고 건강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그간 많은 진보적인 학자들은 노동과정의 비인간화를 극복한 노동, 즉 노동의 인간화를 실현한 노동을 ‘좋은’ 노동으로 간주해 왔다. 최근 ILO의 ‘괜찮은’ 일자리(decent work) 개념도 이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도 정규직 임노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소외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일제 정규직 노동이 급격히 축소되는 현실에 대한 해결책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좋은’ 노동이란?

일찍이 앙드레 고르는 노동사회 혹은 직업노동이란 필연성의 영역 이외에도 자유의 공간의 필요함을 다음과 같이 역설한 바 있다: ‘여러 기관의 복합체 옆이나 위에서 좀 더 큰 자율성 공간을 확충하는 것이다. 이런 자율성 공간들은 사회적 논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그것에 저항하고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실존을 극히 무제약적으로 전개하도록 허용하는 데 핵심이 있다’. 때문에 ‘좋은’ 노동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존의 노동 개념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노동 개념, 즉 소외를 수반하지 않는 노동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직업노동을 벗어나 자율에 기초한 다양한 노동 개념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임금노동의 울타리를 벗어날 때, 그 노동은 노동자에게 표출적 의미를 제공하는 ‘좋은’이 되고, ‘내재적 부’를 산출하는 모든 활동이 된다. 여기에서 ‘내재적 부란, 예를 들자면 생활환경의 질, 교육의 질, 연대 관계, 상부상조 조직, 공통의 상식과 실제적 지식의 확산, 일상의 상호작용 속에 반영되고 펼쳐지는 문화 등으로, 이 모든 것은 상품형식을 띨 수 없고, 다른 그 무엇과 교환될 수 없으며, 가격은 없지만 각각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삶의 질과 삶의 의미, 어떤 사회나 문명의 질은 바로 이러한 내재적 부에 달린 것이다. 이러한 부는 주문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운동 그 자체에 의해서 그리고 일상의 관계에 의해서만 생산될 수 있다. 이러한 부의 생산은 시간의 제약이 없기를 요구한다.’

또한 기아리니와 리트케는 산업사회에서 서비스사회로 이행한 미래사회의 생산적인 활동을 고용(영리활동), 교환영역에 속하지 않는 자급자족 활동(여가생활과 같은 자발적 노동 포함), 교환영역에 속하지만 화폐로 환산되지 않는 공동의 이익을 위한 활동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유형론에 따르면 고용 개념 즉 지불노동은 단지 생산노동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머지 두 유형의 생산적인 활동은 ‘좋은’ 노동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실제로 독서, 자가 제품의 수리, 자가 치병에서부터 셀프서비스나 은행 자동인출기 이용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급자족 활동은 자기 자신에게는 매우 소중하고 생산적인 ‘좋은’ 노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활동은 아무런 교환가치는 지니지 않는 활동이기 때문에 결코 상품화될 수 없다. 또한 공동의 이익을 위한 노동은 무엇보다도 화폐로 환산될 수 있는 내재적 가치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시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생산적인 활동이다. 가사노동을 비롯하여 수백만 명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자/손녀를 양육하는 활동과 같은 봉사활동이나 자원노동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노동은 자리이타의 효과를 낳는 ‘좋은’ 노동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활동은 자기 자신은 물론 공동체의 이익에 생산적으로 기여하는 ‘좋은’ 노동이다.

결국 자본주의사회의 임금노동은 노동과정으로부터의 소외는 물론 유적 본성으로부터의 소외를 결과하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자신에게나 사회에게도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좋은’ 노동이 아니었다. 이는 ‘좋은’ 노동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첫째, 주체적 노동으로서 자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그래서 창조적이어야 한다. 둘째, 사회적 노동으로서 그 동기와 결과가 개인의 이기심을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좋은’ 노동은 노동 주체의 능력 향상 및 인간관계의 성숙(건강한 가족 및 친구 관계, 그리고 건강한 사회)에 기여하는 노동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문제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좋은’ 노동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어떻게 복원하고 나아가 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도록 할 것인가? 

 

3. ‘좋은’ 노동의 조건과 인정투쟁

1) ‘좋은’ 노동의 조건

‘좋은’ 노동의 정의에 대한 합의가 부족한 만큼 아직까지도 그 실현 조건에 대한 논의도 충분하지 않다. 특히 좋은 노동을 위한 구체적이고 세세한 조건에 대한 논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로마클럽보고서로 제출된 기아리니와 리트케의 연구나 홀거 하이데의 연구는 대표적인 성과이다. 

먼저, 기아리니와 리트케는, 1970년대 로마클럽보고서가 환경위기에 대한 인식하에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을 제시한 것처럼, 현대사회가 노동위기에 처해 있다는 전제하에 그 구체적인 대안으로 다층노동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 모델은 복지에 대한 정의를 국민총생산이란 척도와 대립적으로 설정하고 있고, 취업노동을 생산적 노동의 일부로 바라봄으로써 ‘좋은’ 노동의 여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노동을 인격과 존엄의 표현으로 정의하고 있어서 ‘좋은’ 노동의 조건을 논의하기에 적합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모델은 기존의 취업노동인 영리노동, 공동의 이익을 위한 생산활동, 그리고 자급적 활동 등 세 가지 단층들을 결합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영리노동은 모든 인간에게 최소한도의 지불생산 활동이 제공될 필요가 있다는 가정하에 그 불가피성이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층은 첫 번째 단층을 넘어서는 모든 지불노동을 포괄하거나 대체하는 것으로서 국가의 모든 개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세 번째 단층은 자급적인 활동이나 자발적인 비지불 활동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세 가지 단층의 노동을 결합한 이 모델이 잘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 첫째 조건으로 국가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동시에 첫 번째 단층에만 개입해야 한다. 둘째, 첫 번째 단층을 넘어선 모든 활동에서는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셋째, 청소년의 경우 학업을 지속하면서 노동 경험을 축적할 수 있게 하고 노년층의 경우 점진적인 은퇴를 가능하게 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노동시간의 유연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이렇듯 이 모델은 언뜻 보기에 ‘좋은’ 노동의 조건을 갖춘 듯이 보인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이 모델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첫째 이 모델은 자본주의사회의 임금노동을 수용하고 있어서 ‘좋은’ 노동에 대한 정의와 부합하지 않는다. 둘째 이 모델은 미래의 노동위기 해결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그 가능성 여부와는 무관하게 제시하고 있어서 그러한 조건이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면 홀거 하이데의 연구를 검토해 보자. 홀거 하이데의 〈노동사회로부터의 탈출구: 노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조건〉은, 제목이나 부제가 시사하듯이 지금까지 노동사회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하는 다양한 대안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후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홀거 하이데 자신의 대안은 무엇인가? 그는 교환가치에 지배되고 있는 기존의 사용가치를 다시 재점유해야 한다는 정통 마르크시즘의 주장은 자본주의사회 속에서는 결코 대안이 아니라고 전제한다. 그런 다음, 자신이 주장하는 ‘재정신화’ 과정을 통해 ‘창조적인 새로운 활동의 새로운 내용과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태는 완전히 새롭게 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재정신화’ 과정이란 우선 ‘대안들에 대한 실험과 실천을 결행하고 그에 대한 성찰적 분석을 시도한 다음 실천 프로그램으로 피드백’의 연쇄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홀거 하이데에게 ‘좋은’ 노동은 만들어지는 그 무엇이며 그 조건도 자본주의적 규정을 벗어날 수 있는 일련의 연쇄적인 성찰적 과정에 다름 아니다. 이는 홀거 하이데가 소외된 노동에 대한 완벽한 대안은 물론 ‘좋은’ 노동에 대한 완전한 조건도 사전에 단념하였음을 의미한다. 오히려 홀거 하이데에게는 대안을 만들어 가는 실천 즉 ‘좋은’ 노동과 그 조건을 만들려는 실천만이 유의미한 것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홀거 하이데의 주장은 ‘좋은’ 노동의 정의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논의라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그 구체적인 조건에 대답을 유보하고 있는데, 이는 ‘좋은’ 노동뿐만 아니라 그 조건조차도 실천을 통해 만들어지는 일종의 과정임을 암시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두 논의는 모두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양자는 상반된 주장이다. 이 때문에 어쩌면 한나 아렌트가 예견했듯이 ‘우리는 생산적 노예와 비생산적 자유 사이에서 대안을 찾아야 하는 매우 고통스러운 처지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두 가지 대안을 배타적으로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차원에서 단계적으로 사고하는 순간 고통은 의외로 쉽게 해결된다. 다시 말하면 우선 다층노동 모델에서 ‘좋은’ 노동의 실현 조건을 확보한 다음 그러한 조건 위에서 홀거 하이데의 실천을 현실화하는 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우선 좋은 노동은 임노동이 아니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홀거 하이데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그렇게 노동하는 주체는 극히 소수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사실이 그러한 소수가 사회적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소수야말로 ‘좋은’ 노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문제는 그 소수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현대사회의 현실 속에서 대안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미래사회가 탈산업사회(서비스사회 및 지식기반 정보사회)로 이행한다면 정신노동, 자가노동, 창의적인 노동 등 다양한 노동에 대한 수요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다층노동 모델도 설득력을 지닌다. 비록 전자가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는 조건 속에서 실천 가능한 논의라면 후자는 자본주의적 환경 속에서 실천 가능한 논의이지만, 결국 ‘좋은’ 노동이 현실적으로 실천되기 위해서는 두 논의의 실천적 함의를 종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양자가 ‘좋은’ 노동의 현실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합이 결코 끝이 아니다. ‘좋은’ 노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의 범주를 넘어서서 사회적 인정을 위한 정치적 투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 ‘좋은’ 노동을 위한 주체의 인정투쟁

앞에서 우리는 ‘좋은’ 노동의 조건에 대해 논의했는데, 이는 아직도 ‘좋은’ 노동의 내적 조건이란 측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 현실이 전체사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때, ‘좋은’ 노동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노동 밖의 조건이 오늘날의 현실과는 확연히 달라져야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보편적 사회보장과 같은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어져야 하지만, ‘좋은’ 노동이 우리의 삶 속에서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물론이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바라보는 자본주의적 관점이 근본적으로 바뀌어 이른바 ‘이중적 연관’이 더 이상 잉여생산으로만 환원되지 않고 보다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내용을 풍부하게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삶의 사회적 양식이 달라져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삶의 양식은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변화란 주체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삶 방식을 인정받기 위해 사회적 압력에 저항하면서 실천해 나가는 투쟁의 산물이다.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그 자신을 잘 확신하고 있지만, 타인을 잘 확신하고 있지 않다. 이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자신의 확실성은 아직도 어떠한 진실도 갖고 있지 않다. (……) 그래서, 두 자기의식이 사생결단의 싸움으로 자신들을 서로에게 ‘증명하기’ 위해서 두 자기의식은 결정된다. 왜냐하면 두 자기의식은 타인과 자기 자신들 속에 ‘대자(對自)’라는 그들의 확실성을 확실히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생명을 걸어야만 인간은 자유를 가지며, 그리고 자기의식의 본질이 ‘존재’가 아니며, 자기의식이 맨 처음 나타나는 직접적 양태도 아니고, 생명의 확장에 대한 자기의식의 몰두도 아님을 증명한다. (……) 자기의식이 오직 순전히 ‘대자존재’임을 증명한다.

 

위의 인용문은 헤겔이 자신의 저서 《정신현상학》에서 인정 개념을 인간의 본질적 차원으로 간주하고 있는 내용이다. 악셀 호네트는 이러한 인정 개념을 경험적 차원으로, 즉 미드(G. H. Mead)의 사회화 개념을 구성하는 ‘I’와 ‘Me’ 사이의 정치성 싸움의 차원으로 구체화함으로써, 행위 주체 혹은 노동 주체의 주관적 의미투쟁이야말로 현실을 변화하는 결정적인 요인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좋은’ 노동을 실현함에 있어서는 주체의 인정투쟁은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좋은’ 노동의 주체는 누구이며, 그들은 어떻게 인정투쟁을 벌여 나가야 하는가? 

앞에서 충분히 논의한 바와 같이 ‘좋은’ 노동이 자본주의사회의 임금노동이 아니어야 한다면, ‘좋은’ 노동의 주체는 자본에 포섭되지 않는 상태에 놓여 있거나 혹은 그로부터 배제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물질적 급부만이 아니라 비물질적 급부를 기대한다. 이들은 ‘좋은’ 노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기대에 대한 집착 자체를 버리고 ‘좋은’ 노동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들의 활동을 물질적 반대급부와 교환하려고 강제하는 순간, 이들의 활동은 중단되거나 그 자체로 좋은 노동의 범주를 벗어날 위험성도 수반된다. 오히려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유형의 ‘좋은’ 노동들은 그 자체로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다.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좋은’ 노동을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속으로 포섭하거나 자본의 이해관계가 ‘좋은’ 노동 속으로 침투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만큼이나 주체가 스스로 자신의 ‘좋은’ 노동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려는 투쟁 역시도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예컨대 그 혹은 그녀는 자신의 가사노동이나 요양노동의 물질적 반대급부를 제공받는 것 이외에도 그것을 넘어선 ‘좋은’ 노동 본래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투쟁을 벌여 나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공공봉사나 손자 손녀를 돌보는 노인들의 노동 역시도 그러한 인정투쟁을 통해 그 정당한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인정투쟁을 개별 주체의 주관적 의미투쟁을 넘어 전체사회의 일종의 윤리투쟁 혹은 도덕적 정당성 투쟁으로 승화시켜 나가느냐이다. 필자가 보기에 ‘붓다의 실험’은 이 문제의 해답을 가리키는 손가락들 중의 하나로서 손색이 없다.

 

4. 붓다의 실험: ‘좋은’ 노동의 사례 

이 논의에 들어가기에 전에 뜬금없이 붓다의 실험을 살펴보는 이유를 간략하게나마 밝혀야 할 것 같다. 주지하듯이 불교의 경전에는 노동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있는 것조차도 오늘날의 노동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 경전의 노동 관련 자료 속에서 우리는 ‘좋은’ 노동과 관련하여, 특히 ‘좋은’ 노동의 개념 및 그 실현 조건과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몇 가지 발상을 발견할 수 있다. 게다가 붓다는 출가자의 정신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투쟁에서도 승리한 바 있다. 이것이 첫째 이유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또 하나, 붓다의 실험은 성공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어서 실증 가능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먼저 ‘좋은’ 노동의 정의와 관련하여 불교의 노동 개념이 지닌 함의를 살펴보자. 주지하듯이 불교는 노동을 업의 개념으로 파악한다. 불교에서 업의 개념은 일단 발생하면 절대로 그냥 소멸하지 않고 반드시 그 결과를 낳는다는 인과응보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업의 논리를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해석하면, 업의 결과는 행위자 자신은 물론 그가 포함된 전체사회에도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 바로 이러한 업의 논리 때문에 불교인은 한편으로는 스스로 번뇌를 소멸시키는 수행을 실천해야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악업을 줄이고 선업을 증장하는 노력을 해야 할 당위(계율 준수 및 자비행의 의무)를 갖는다. 

이렇게 볼 때, 논리적으로 보면 불교의 노동은 한편으로는 보상 따위의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무주상(無住相) 활동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선한 결과를 낳는 행위여야 한다. 때문에 이러한 노동은 교환의 가치를 지니는 생산적 노동이지만 화폐로 측정할 수는 없는 노동이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좋은’ 노동이다. 또한 불교의 노동 개념에는 정신성과 물질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바로 그러한 총체성이 담보된 노동이 ‘좋은’ 노동이다. 반면에 불교의 경전에는 가능한 한 선택하지 말아야 할 직업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해서는 안 될 노동들을 구체적으로 들어 보면 고기잡이, 사냥, 도살업, 무기판매, 술장사, 독약 판매, 생물의 판매, 육류 판매 등과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윤 동기가 아니라 사회적 영향력 즉 업의 결과로 파생되는 선악 여부 때문이다. 결국 붓다는 노동의 결과가 미칠 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여 ‘좋은’ 노동만 할 것을 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좋은’ 노동을 어떻게 현실 사회 속에서 실현해 나갈 것인가? 여기에서 붓다가 채택한 방법은 노동의 주체를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으로 양분한 다음 그 두 주체가 불가피하게 결합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다시 말하면 붓다는 출가자에게는 주로 정신노동을 전담하게 하고 재가자에게는 육체노동을 담당하게 한 다음 법시와 재시를 교환하도록 의무화함으로써, 양측이 모두 자신의 결핍을 상대에게서 충족하도록 하는 방안을 실천할 수 있도록 기획하였다. 때문에 양측의 관계는 이해대립이라는 갈등의 관계가 보은의 관계를 가진다. 게다가 붓다에게 있어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은 모두 동등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동등하게 교환될 수 있었다. 심지어 붓다는 출가자가 하는 수행 생활을 일종의 노동으로 생각했다. 붓다는 자신을 농부로 자처하고 있기까지 하다. 물론 이때 농부는 농부되 토전(土田)을 가꾸는 농부가 아니고 심전(心田)을 가꾸는 농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출가자의 수행을 일종의 노동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붓다의 인정투쟁이 필요했는데, 붓다는 이러한 인정투쟁에서 승리하였다. 다음의 일화를 보자. 

어느 날 걸식을 나간 붓다에게 한 바라문은 자기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가 노동해서 얻지 않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비난했다. 이에 붓다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내 멍에와 호미, 뉘우침은 괭이자루, 의지는 잡아매는 줄, 생각은 내 호미 날과 작대기, 몸은 근신하고 말은 조심하며 음식을 절제하며 과식을 하지 않소. 나는 진실을 김매는 것으로 삼고 관용이 내 멍에를 떼어 놓소. 전진은 내 황소, 나를 열반의 경지로 실어다 주오. 물러남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곳에 이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지오. 내 밭갈이는 이렇게 이루어지고 단 이슬(열반)의 과보를 가져오는 것이오. 이런 농사를 지으면 온갖 고뇌에서 풀려나게 되지요.” 이 게송을 들은 그 바라문은 “밭을 잘 가십니다. 고타마시여.”라고 하면서 붓다 역시 자기와 같은 농부라는 것을 인정했다. 

이렇듯 인정투쟁을 통하여 붓다는 출가자의 수행조차 ‘좋은’ 노동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하였다. 육체적 노동만이 가치창출의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시대에 수행이나 정신노동도 동등하게 가치창출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결코 사소한 변화가 아니라 사회혁명적 변화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이는 ‘좋은’ 노동의 범위를 인간 자신의 심성 수련이라는 범위까지 매우 넓게 확장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정에 기초하여 출가자의 정신노동 산물은 법시(法施)의 형태로 그리고 재가자의 육체노동 산물은 재시(財施)의 형태로 서로에게 동등하게 교환할 수 있었다. 나아가 여기에서 출가자는 세속(자본)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움을 상징하고 재가자는 세속적 조건 속에서의 삶을 상징하고 있는데, 양자의 관계 즉 출가자의 육체노동과 재가자의 정신노동 관계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 상호 보은의 공생관계를 형성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붓다가 ‘좋은’ 노동을 현실 속에서 실현하는 방법은, 노동의 생산물이 일방에 의한 타방의 착취 혹은 타방의 희생 위의 일방의 이익과 같은 자본주의적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관계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벗어난다면 착취관계를 벗어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뒤집어서 말하면 오늘날 노동분업에 기초한 사회관계가 소외로 귀결되는 것은 그 관계가 생산성을 추구하는 생산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임을 시사한다. 노동과정에 대한 연구는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브레이버만은 노동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테일러주의적 노동분업에 기초한 착취의 비밀을 밝혔는데, 그 요체가 바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관계였다. 그렇다면 왜 이 관계는 붓다의 경우와 달리 잉여착취로 귀결되는가? 그것은 양자의 관계가 이윤추구를 목표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자의 노동과정은 자율성을 박탈당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물론 마이클 부라보이가 노동과정을 생산의 정치로 해석하더라도 노동 주체의 자율성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작업장체제의 생산관계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붓다의 실험은 ‘좋은’ 노동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과 관련해서도 상당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사회의 각 세력이 각자의 이익추구를 배제하고 ‘좋은’ 노동을 실현하려는 공통의 목표를 가진다면 얼마든지 공생의 관계나 협력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치는, 붓다의 실험이 약 2,500년 전에 성공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꿋꿋하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좋은’ 노동의 최초 성공 사례이자 최장의 경험적 사례로서 붓다의 실험은 ‘좋은’ 노동의 실현 가능성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

 

유승무
중앙승가대학교 불교사회학부 교수. 한양대학교 사회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석사), 한양대 대학원 사회학과(박사) 졸업. 저서로 《불교사회학》이 있으며, 공저로 《오늘의 사회이론가들》 《사회학적 관심의 동양사상적 지평》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유교적 사회질서와 문화, 민주주의》 등이 있다. 불교평론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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