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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가 꿈꾸는 정의로운 사회
창간 20주년 기념특집 | 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80호] 2019년 12월 01일 (일) 이도흠 ahurum@hanmail.net

1. 머리글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이 심화하고 공동체가 해체되고 각자도생이 만연하면서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갈망과 분노가 분출하고 있고, 한국사회는 그 최전선에 있다. 2016년의 촛불항쟁도, 최근에 들끓었던 ‘조국 사태’도 그 심층에는 정의에 대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부처님께서 지금 여기에 자리하신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당위적인 기술을 넘어서기 위하여 ‘지금 여기의’ 구체적 현실에서 출발하여 모순을 비판하고 불교의 대안을 모색하는 구성을 취한다. 정의를 평등, 공정성, 공동체 윤리로 나누고, 각각에 대하여 경전을 근거로 불교적 해석을 한 후에 이 논리에 따라 현재의 상황을 분석, 비판하면서 비전과 대안을 모색한다.

 

2. 여법하게 평등한 사회

지금 전 세계적으로 불평등은 사회를 해체할 임계점에 다가가고 있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지만, 상위 10%가 전체 소득의 3분의 1에서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 ‘슈퍼리치’ 8명이 보유한 부를 모두 더하면 4260억 달러(503조 원)에 이르는데, 이는 소득을 기준으로 세계 인구의 하위 절반인 36억 명의 재산과 맞먹는다.”

한국도 유사하다. “국세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17년 총급여 기준 근로소득 상위 10% 180만 553명이 전체 근로소득 633조 6117억 원의 32%에 해당하는 202조 9708억 원을 가져갔다. …… 특히, 상위 1% 18만 55명의 근로소득은 47조 5652억 원으로 전체의 7.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1인당 평균소득은 2억 6417만 원에 달했다. 이는 …… 하위 10% 근로소득자 1인당 평균소득 243만 원의 108.5배다.” “배당소득의 경우에는 상위 0.1%가 차지하는 비중이 45.7%, 상위 1%가 69%, 상위 10%는 무려 93.9%이다. …… 이자소득도 상위 0.1%가 차지하는 비중이 18.3%, 상위 1%가 45.9%, 상위 10%는 90.8%이다.”

불평등은 비단 빈부격차로 인한 부자와 빈자의 갈등과 대립, 투쟁으로 그치지 않는다. 불평등은 개인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해치고 사회불안을 증대한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람들은 협력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전략 대신 경쟁과 힘에 의해 해결하는 전략을 선호하게 된다.” “불평등이 심해지면,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고 사회통합이 줄어들며 사회적 관계의 질은 내려가고, 범죄와 폭력은 증가하고, 스트레스가 증가하여 건강은 나빠지고 평균 기대수명이 떨어지며, 사람들 사이의 신뢰수준은 내려간다.” “소득 불평등이 높을수록, 적대감, 인종적 편견이 심하고 여성의 지위도 낮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에 국민 대다수가 가슴을 설레며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통령의 리더십과 관계없이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결과의 평등 없이 기회나 과정의 평등과 정의, 공정도 불가능하다. 불평등을 완화하지 않으면 다른 개혁도 모두 공염불이 된다. 왜냐하면, 개혁은 법과 시스템에 이어 사람과 문화가 바뀌어야 안착하는데,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람들이 협력전략보다 지배전략을 선택하고, 반개혁적 성향과 행동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 심하면, 기득권은 자신과 자식들의 자본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유리창’을 강화하기 위하여 모든 권력과 자본, 정보를 동원하여 제도와 법을 바꾸고 편법을 구사하며, 서민 또한 탐욕을 키우고 살아남기 위하여 치열하게 경쟁한다. 불평등이 심화한 사회에서는 기득권층은 누구나 ‘나경원’과 ‘조국’이 될 수 있고, 하층은 누구나 ‘송파 세 모녀’가 될 수 있다.

그럼, 이런 불평등에 대해 붓다는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붓다는 “나의 제자는 종성(種姓)이 같지 않고 출신도 각각 다르지만, 나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출가하여 도를 닦고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종성(種姓)을 묻는다면, 그 사람에게 ‘나는 사문 석가모니 종성의 아들이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만민의 평등을 추구한다. 사람의 출신과 신분이 어떻든 중생은 모두 석가모니의 아들로 평등하다. 고귀한 사람은 신분이 아니라 마음과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삼독을 멸하고 약자들에게 자비심을 갖고 베푸는 이들은 가난해도 고귀한 자이고, 권력과 돈과 탐욕에 물들어 전전하는 이들은 부자라도 비천한 것이다.

장아함경에서 “때에 왕은 곧 좌우에 명령하여 그(도둑)를 묶게 하고 북을 치고 소리로 외쳐 모든 거리에 돌게 한 뒤에 그를 싣고 성을 나가 넓은 들에서 죽였다. ……이때부터 비로소 가난이 생기고 가난이 생긴 끝에 비로소 강도가 생기고, 강도가 생긴 뒤에 비로소 무기가 생기고 무기가 생긴 끝에 비로소 살해가 생기고, 살해가 생긴 끝에 곧 안색이 초췌해지고 (사람의) 수명이 짧아졌다.”라고 말한다. 전륜성왕은 도둑을 잡아 가난 때문에 생긴 것이라며 창고의 물품을 내주었지만 이를 이용한 도둑이 생기자 그를 죽여 경계로 삼는다. 그 후에 가난 때문에 절도와 살해가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전륜성왕수행경》은 이어서 말한다. “때에 성왕은 그 보당(寶幢)을 부수어 사문, 바라문과 온 나라 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하고, 그런 후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세 가지 법의(法衣)를 입고 집을 떠나 도를 닦고 위없는 행[無上行]을 닦아 현세에서 스스로 진리를 깨달아 살고 죽음을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을 이미 세우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갖추어 후생의 목숨[後有]을 받지 않을 것이다.”

물론, 경전의 전체 내용의 핵심은 ‘여등당근수선행(汝等當勤修善行)’, 곧 선행을 부지런히 닦으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난이 개인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구조적 문제이고 이로 인해 도둑, 살해 등이 일어난다는 인식이 깔려 있으며, 전륜성왕이 보당을 부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보시하고 수행을 하여 열반에 이르고 있다고 끝맺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증일아함경)에서는 “두 눈을 가진 이는 ……재산을 얻거나 늘리는 눈을 갖고 있다. 선한 방법과 악한 방법, 비난받고 칭찬받는 방법, 천하고 고상한 방법, 떳떳하고 어두운 방법을 잘 분별하는 눈도 갖고 있다.”라며 정당한 방법, 선하고 윤리에 부합하는 방법에 의하여 재산을 운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제덕복전경(諸德福田經)》을 비롯하여 여러 경전에서 공익사업과 보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부처님이 꿈꾸는 정의로운 사회의 실상을 신라 성덕왕(聖德王, 702~737)의 치세에서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필자는 동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실재한 왕 가운데 전륜성왕의 정법정치에 가장 근접한 왕이 바로 성덕왕이라 생각한다. “무기를 녹여서 보습으로!” 이 슬로건에 정치의 이상이 함축되어 있지만, 권력을 잡고서 이를 실천한 지도자는 인류 역사상 거의 드물다. 성덕왕은 36년 동안 오래 재위하면서 나중에 후대의 왕과 귀족들이 성군으로 칭송하고 경덕왕이 이를 기려 우리가 에밀레종으로 알고 있는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할 정도로 태평성대를 열었다.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은 “엎드려 생각건대 성덕대왕께서는 덕은 산하처럼 드높았고 명성은 해와 달처럼 높이 걸렸으며, 충성스럽고 어진 사람을 등용하여 풍속을 어루만지고 예절과 음악을 받들어 풍속을 관찰하셨다. 들에서는 근본이 되는 농사에 힘썼으며, 시장에서는 함부로 물건을 남용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재물을 싫어하고 문재(文才)를 숭상하였다. ……40여 년 동안 나라에 임하여 정사에 힘써서 한 해라도 전쟁으로 백성을 놀라게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방의 이웃 나라와 멀고 먼 나라가 오로지 왕의 교화를 사모하는 마음만 있었지 일찍이 전쟁을 엿보는 일은 없었다.”라고 평하고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성덕왕은 “4년(705년) 9월에 살생을 금하는 교서를 내렸고,” 이어서 10년 5월에는 “가축의 도살마저 금하였다.” 그는 불교 이상국가를 만들고자 불살생의 계율을 온 나라의 온 백성이 지켜야 할 국가의 규범으로 만들고 실천한 것이다. 역기능이나 부작용이 분명히 있었겠지만, 짐승마저 죽이지 못하게 한 당시에 신라인들의 마음은 인간과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자비심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더불어 현재의 상원사인 진여원(眞如院)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오대산에 거처하는 5만의 신격이 하나로 어우러진 화엄만다라를 조성하고, 친히 백관을 이끌고 이곳까지 와서 예배하며 신라의 성소(聖所)로 자리매김하였다.

성덕왕은 이에 머물지 않았다. “21년 가을 8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을 주었다.” 대신 귀족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직급에 따라 벼를 주는 소위 연봉제를 신문왕에 이어서 단행하였다. 왕이 되자마자 집사부를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로 “아찬 원훈을 중시(中侍)로 임명한다.” 집사부(執事部)란 위로는 왕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행정을 분장하는 여러 관부를 거느리는 최고행정기관이다. 이전에는 부족장이자 귀족들의 회의체인 대등(大等)이 국가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였고, 이 회의의 주재자인 상대등(上大等)은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가 없을 경우 그 후계자로 추대되고, 또 스스로 후계자를 요구할 정도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집사부와 중시의 설치는 귀족의 권력을 누르고 왕이 직접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제도적 개혁인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성덕왕은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강력한 사회복지책을 실시하였다. 집사부의 설치를 통한 왕권 강화의 목적이 독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민(安民)에 있었던 것이다. “신라시대의 연령체계를 보면 한 살부터 15세까지는 자(子), 16세부터 57세까지는 정(丁), 58세 이상은 공(公)으로 나누었고, 이 중 정에 해당하는 계층이 부역의 의무를 졌다.” 이로 이를 근거로 “필자는 정전(丁田)이 정전(井田)과 다른 것으로 16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양인(良人)들에게 토지를 지급한 것으로 본다. 이는 크게 네 가지 의미를 갖는다. 백성들이 지주에 소속된 농노나 소작인에서 자신의 생산수단을 소유한 토지의 주인으로 격상되었고 그만큼 삶이 윤택해졌으며, 귀족의 지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으며, 그 토지가 왕의 소유이므로 왕이 귀족을 제치고 백성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확보했으며, 왕 또한 백성들로부터 재정과 권력을 위임받았음을 뜻한다. 정전을 지급한 왕 21년 이후, 연례행사처럼 나타나던 흉년과 백성들의 굶주림 기사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 또한 우연은 아닐 것으로 보인다.”

또 성덕왕은 사회복지책을 실시한다. “왕 5년에 흉년이 들자 나라의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제하고,” “6년 봄 정월엔 백성 가운데 굶주리는 자가 많아지자, 한 사람에게 하루 조 3되를 7월까지 나누어 주었으며,” “17년 2월에는 왕이 서쪽 지방의 주와 군을 순행 위무하여, 나이 많은 사람 · 홀아비 · 과부 · 고아 · 자식 없는 노인들을 직접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였다.”

이처럼 성덕왕은 부처님의 법에 따라 정법정치를 구현하면서 오대산을 화엄만다라의 성소로 조영하고, 귀족 세력을 누르고 백성의 편에 서서 제도 개혁을 단행하고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고 살생을 금하고 사회복지책을 실시하며 사회문화적 통합을 하는 등 불교의 이상국가를 구현한 왕이다.

그럼, 이런 성덕왕 대의 치세나 불교 정의를 현재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불평등의 원인은 크게 네 가지다. 신자유주의 체제, 기술격차, 교육격차, 제도적 모순이다.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을 제한하던 거의 모든 제도를 규제혁파라는 이름으로 제거하였다. 가난한 서민과 노동자들의 탄압을 막던 법과 규정들이 풀리자 이들은 자본의 야만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이 체제는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비정규직을 양산하였다. 이로 인해 거의 절반의 노동자가 비정규직으로 전락하고, 이들은 같은 노동을 하면서도 절반가량의 임금을 받고 있다. 이 체제는 공동체 유지를 위하여 공공영역으로 유지하던 수도, 전기, 교통, 교육, 의료 등을 해제하여 사영화하였다. 가난한 서민과 노동자들은 공공의 혜택에서마저 소외되고 더 높은 비용으로 이를 이용하면서 생존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기술격차는 숙련기술을 쌓은 노동자나 전문가에게는 높은 임금을 부여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실업과 저임금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교육격차는 학력에 따라 소득을 차등지급하는 바탕을 형성한다. 문제는 산업화 초기에는 가난한 집안의 학생이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가능하여 교육이 계층 사다리와 사회통합의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했지만, 불평등이 심화하자 교육은 부의 대물림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자본-권력-보수언론-사법부-종교권력층으로 이루어진 기득권 동맹의 유착이 강화하고 유리창 효과마저 작동하면서, 법과 제도는 점점 더 서민과 노동자에게 불리해지고 상층 엘리트에는 유리한 구조로 전환한다.

앞부분의 진술과 뒷부분의 진술을 종합하면 현재 상황에서 불교가 꿈꾸는 정의로운 사회가 그려진다. 첫째, 여법(如法)이 곧 정의이므로 불법의 기치를 세우되 현재의 정치원리에 부합하지 못하거나 모자라는 점은 서양의 정의론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사성제와 팔정도에 따라 개인과 사회와 나라가 운영되도록 한다. 무엇보다도 개인적 고(苦)와 사회적 고(social duka)/환경적 고(environmental duka)를 종합하여, 내 안의 무명(無明)과 탐욕을 없애는 수행을 한다. 이와 동시에 사회적 고를 낳는 모순을 제거하고 자비심을 온생명으로 확대하여 환경파괴로 죽어가는 모든 동식물의 고통을 덜어주는 다양한 불교적 생명평화의 실천을 행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적 정의의 구현이자 다르마의 실현이다.

둘째, 부처님 가르침대로 인종, 계급, 소득, 권력, 젠더에 관계없이 만민이 평등한 세상이 되도록 제도를 개혁하고 모든 갑질을 해소하되, 절대 평등이 아니라 개성과 차이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차이의 평등’을 추구한다.

셋째, 신자유주의 체제를 점진적으로 해체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다. 이를 비현실적이라 생각하는데, “2011년 조사의 경우 30대 기업에서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드는 비용은 당기순이익 49조 7천억 원의 1.5%인 7천9백억 원에 지나지 않았다.” 의료, 교통, 교육, 주택은 점진적으로 공공화/무상화한다. 조세개혁을 한다. 소득세와 법인세율을 최고세율로 인상하고, 부동산과 금융소득 등 불로소득은 중과세하며, 사회복지세를 도입하고 사유재산은 최소한으로 인정하되 이의 상속은 불허한다. 보편복지를 점차적으로 모든 부문에 확대하며 기본소득을 실시한다.

넷째, 정의의 원칙에 따라 교육 개혁을 단행한다. “어떤 교육개혁도 대학 서열을 해체하고 입시를 철폐하지 않는 한 미봉책에 지나지 않으며, 금수저들의 대물림을 양산한다. 특성화와 재정지원, 지역의 문화와 산업을 연계하면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 국립대학을 네트워크화하는 것과 함께 지역의 문화와 산업과 연계하여 특성화하고 재정지원을 하면 된다. 예를 들어, 경북대 섬유산업학부를 경북지역 다른 대학의 섬유산업부 교수와 학생과 하나로 네트워크하고 1년에 1,000억 원 정도씩 재정지원을 하며, 대학을 졸업한 이들이 대구 지역의 섬유 관련 산업체에 취업하는 시스템을 만든다. 1970년대까지 홍대 미대, 건국대 축산학과 등은 서울대보다 낫다고 자부하였으며, 지방의 국립대 또한 연 · 고대 수준은 되었다. 세계 100대 대학의 서열과 재정은 비례한다. 재정은 별도의 세금을 들일 필요가 없다. 이명박 정권에서 행하였던 부자 감세를 원래대로 되돌리면 20조의 재정이 확보된다.”

다섯째, 신자유주의 체제와 세계화로 기술격차가 벌어졌지만, 앞으로 4차 산업혁명을 맞아 ‘숙련 편향적 기술 변화(skill-biased technical change)’가 나타날 것이다. 즉, 디지털시대의 하이테크놀로지는 노동의 자리를 컴퓨터, 로봇, 사물인터넷, 3D프린터 등으로 대체하여 자동화하고 숙련된 사람들에게만 편향적으로 부를 안겨줄 수 있다. 이에 노동자의 기술격차를 줄일 수 있도록 교육을 개편함과 아울러 국가가 원하는 노동자들에게 무료로 숙련기술을 교육하는 센터를 지역 단위로 설치하고 운영해야 한다.

여섯째, 종업원 지주제를 전면적으로 확대하여 기업을 협동조합형으로 전환하며, 스페인의 몬드라곤과 불교의 승가(僧伽)를 결합한 형태를 취하여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각자가 팔정도를 수행하도록 노력하면서 불교의 갈마제식 민주주의 체제를 통하여 협의하는 협동조합을 조성하며, 국가는 이런 기업과 협동조합에 세제 혜택, 공적 지원 등을 한다.

   
 

3. 여법하게 공정한 사회

아리스토텔레스는 “공정성은 옳고 한 종류의 정의보다는 우월하지만, 절대 정의보다 더 우월한 것은 아니며 단지 보편화로 인한 오류보다 더 우월할 뿐이다. 그리고 법의 보편성 때문에 법에 결함이 있는 곳에서 교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공정성의 본성이다.”라고 공정성과 정의의 관계에 대해 피력했다.

공정성에 대해서는 존 롤스(John Rawls)의 ‘무지의 베일(the veil of ignorance)’과 ‘원초적 입장(the original position)’이 가장 적절한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롤스는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인 동시에 이타심과 이기심, 선과 악을 겸비한 존재로 본다. 그러기에 개인들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이들만도 아니고 무한히 이타적인 이들도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행복과 미래를 위하여 필요한 것을 챙기며 이해타산적인 처신을 하는 자인 동시에 타인을 어느 정도 배려할 줄 아는 선한 이다. 이에 “원초적 입장에서 합의에 참가하는 구성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모든 우연적 사실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되어야 한다. 이러한 차단을 통해서만 공정한 합의의 절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 무지의 베일은 구성원들에게 모든 가능한 지식을 차단하는 기제이다. 이는 원초적 입장을 조성하여 공정한 절차를 가동하기 위함이다.”

무지의 베일은 사회계약에 참여한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무관심이나 무지를 뜻하는 것이다. 원초적 입장이란 사회계약을 하는 상황에만 한정한 것으로, 이때 계약을 체결한 이후에 이 계약에 참여한 사람들이 그 계약으로 인하여 어떤 사회적이고 신분적인 변화를 겪게 될지에 대해 모름을 뜻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특정 개인들이 누릴 수 있는 혜택과 주관적으로 자신들만이 가진 기호에 따라 편파적으로 선택한 원칙들을 배제할 수 있다. 이로 이기심과 이타심을 모두 갖고 있지만 합리적 인간들이 정의의 원리에 따라 계약을 하면 최소수혜자에게 최대의 혜택이 돌아간다는 것이다.

불자들아, 음식, 돈과 재물을 얻고 자기 몸의 이로움과 명예를 위하여 가까이 사귄 임금과 왕자, 대신, 벼슬아치들의 세력을 믿고서 남에게 구걸하고 그를 때리고 협박하면서 돈이나 재물을 취하고 일체의 이익을 구한다면, 이를 일러 악한 취득과 지나친 취득이라 한다. 남을 시켜서 구할 때도 자비로운 마음과 섬기고 따르는 마음이 없으면, 가벼운 죄를 범하는 것이다.

《범망경》에서는 왕이나 관료들의 권력에 기대어 사리사욕을 취하는 것을 악한 취득과 지나친 취득이라고 확실하게 규정하고 있다. 무엇을 구하고자 할 때는 자비로운 마음과 타인을 섬기고 따르는 마음을 가져야 함을, 그렇지 않으면 그 또한 죄를 범한다고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위 인용문으로부터 부처님께서는 권력이 작동할 때 불공정함이 벌어지고 불심을 잃어버림을 인식한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 불공정과 부당함이 만연하고 있다. 어느 한 분야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권력이 작동하고 자본이 영향을 미치면서, 갑질이 횡행하고 권력과 자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가치가 분배되고 혜택을 부여하고 선발을 하고 있다. 반면에, 미투운동과 촛불, 조국 사태에서 보듯 이에 대한 저항도 거세다.

롤스의 정의론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사회구성원 사이의 권력 관계다. 공정함을 세우려면 정의의 원리와 공정함에 대한 이성적 인식과 더불어 권력이 평등해야 한다. 검찰에서 입시, 사적인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불공정은 근본적으로 권력이 비대칭인 데서 기인한다. 권력이 대칭이면 반발을 두려워하여 불공정을 범하지 않고 설혹 이렇게 한다 하더라도 곧 저항을 맞아 공정으로 회귀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집단 사이에는 주권권력, 훈육권력, 생명권력으로 이루어진 거시권력과 사회적 지위와 신분, 나이, 학벌이나 지적 능력, 자본, 나이, 젠더 등이 미시권력으로 작동하면서 평등과 공정함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똑같은 두 사람 사이에서도 맥락과 대응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치하에서 재야인사, 운동권 학생, 야당 정치인, 전라도 사람들은 주권권력으로부터 불공정하게 차별을 받았고, 고문 등 국가폭력을 당하였고 사법부의 불공정한 심판에 의하여 투옥되거나 고문을 받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미시권력의 예로 젊은 남자와 그보다 나이든 여성 운전자 사이에서 접촉사고가 난 경우를 상정하면, 남성 운전자는 상대방이 여성임을 인지하자마자 목소리를 높여 “아줌마! 집에서 애나 보지, 왜 못하는 운전을 해서 사고를 내?”라는 식으로 말을 하면 여성 운전자는 잠시 기가 죽어 있다가 “아니, 나이도 어린 것이 누나뻘에게 왜 말꼬리를 잘라?”라는 식으로 대응한다. 앞에서는 젠더에서 우위인 남성성이 권력으로 작동하였고, 뒤에서는 나이가 권력을 형성한 것이다. 이처럼 사람 사이에서 권력이 작동하고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권력 요인은 내세우고 불리한 권력 요인은 숨긴다.

공정성에 대한 불교적 방편은 화쟁(和諍)이다. “화쟁은 개시개비(皆是皆非)를 넘어서서 ‘대립물이라 생각한 것 사이의 조건과 인과, 작용에 대한 연기적이고 대대적(待對的)인 관계를 깨우침을 통하여 하나로 아우름’이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한 신병이 너무도 춥고 손이 시려서 차마 세수를 하지 못한 채 세숫대야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던 소대장이 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식당에 가서 온수를 달라고 해라’라고 했다. 신병은 그렇게 했다가 선임병에게 군기가 빠졌다고 두들겨 맞았다. 다음 날 아침 인사계가 신병에게 ‘식당의 김 병장에게 내가 세수할 온수를 달래서 가지고 와라’라고 시키고는 그리하자 신병에게 그 물로 세수하라고 일렀다. 소대장과 인사계 모두 신병에 대한 자비심도 있었고 개시개비의 화쟁적 사고를 하였다. 하지만, 소대장이 여러 조건을 고려하지 못하고 신병의 실체만 보았다면, 인사계는 선임병과 신병, 자신과 신병 사이의 연기관계, 특히 거기에 스민 권력을 파악하였기에 소대장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한 것이다. 이처럼 대립물 사이에 놓인 조건과 인과관계, 거기에 작용하는 권력관계를 무시하고 실체만 바라보고 개시개비하면, 관념은 가능할지라도 현실의 장에서는 화쟁의 공정함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세월호에서부터 노동문제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를 공정하게 해결하려면, 양자가 놓인 조건 등 연기적 관계를 파악하고, 먼저 대화의 장만큼은 권력이 대칭이 되도록 만들어야 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면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바로 ‘공정한 화쟁’을 이루는 길이다. 조계종의 화쟁위원회가 4대강 사업, 쌍용자동차 노동자 대량해고, 세월호 문제 등에 대해 결과적으로 정부의 손을 들어주며 공정하지 못하게 처리한 것은 권력의 비대칭을 그대로 잔존시킨 채 개시개비의 화쟁적 방편을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대대(待對)란 자기를 비우고 그 자리에 대립자를 모심을 뜻한다. 나를 주장하고 같음을 요구하는 것을 멈추고,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다름을 포용하면서 차츰 그와 닮아가는 과정이다. 중도(中道)와 유사하며, A-or-not-A의 이분법적 모순율이 아니라 A-and-not-A의 퍼지(fuzzy)와도 통한다. 대한항공의 조현아가 단 한 번이라도 부하 직원을 자신의 가슴에 모시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였다면, 불공정의 표출인 갑질과 동일성의 발로인 배제와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가 꿈꾸는 여법하게 공정한 사회는 모든 관계에 대대의 화쟁을 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모든 미시권력을 해제하고 서로 눈부처를 바라보며 상대방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를 모시는 것이다. 사회관계에서는 모든 거시권력을 해체하고 모든 계약과 상거래의 공정성, 경제적 평등, 조세의 형평, 형벌의 공정성, 교육의 공정성, 모든 선정과 선발의 공정성, 모든 신상필벌과 혜택의 공정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전제는 갑의 위상에 있는 이들은 권력을 포기하고 을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을의 위상에 있는 이들은 부당한 권력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은 눈부처-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앞으로 눈부처 주체들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공론장으로서 광장을 만들고 거기서 모든 것에 대해 합리적으로 토론하면서 진리를 찾아가고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그들과 연대하여 모든 갑질과 불공정에 저항하는 것이 필요하다.

 

4. 타자에 대한 자비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서 승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를 타인과 관계에서 실현해야 할 사회적 도덕으로 보고 공동선이라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하였다. 벤담 등 공리주의자들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정의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사회관계 속에 있는 개인(individual in social relation)이 서로 상대방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정의라 보았으며, 이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로서 꼬뮨에서 구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현재 많은 대중과 생명들이 신자유주의 체제, 불평등, 개발, 환경위기, 폭력 등으로 위기에 있다. 약자들이 고통과 신음 속에 있는데 그에 침묵하거나 부귀영화의 쾌락에 탐닉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닐 것이다. 《유마경》의 〈문수사리의 병문안품〉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으로부터 저의 병이 생겼습니다. 모든 중생이 아프다면, 저 역시 아픕니다. …… 왜냐 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해 생사(生死)에 들어섰으니, 생사가 있는 곳에 병이 있기 마련입니다. …… 보살이 아픈 것은 큰 자비[大悲]로 인하여 생긴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아픔의 원인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 그리고 대비 때문이다. 중생은 어리석음과 집착과 탐심으로 인하여 병을 얻지만, 보살은 중생의 아픔에 대한 대비 때문에 병이 생긴다. 이 아픔 때문에 열반에 이르렀어도 이를 미루고 생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가 병이 나아야 자신도 모든 아픔에서 벗어난다.

무수한 대중들이 비정규직, 실업자, 난민, 이주노동자, 굶주림으로 고통을 당하고 38%의 생명이 멸종위기에 놓인 현 상황에서는 ‘가난한 생명을 위한 편애적 해석과 자비적 실천’을 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픈 곳이 내 몸의 중심이자 세상의 중심이다. 우리 몸의 중심은 배꼽도, 머리도, 심장도 아니다. 가장 아픈 곳이다. 손가락을 조금만 다쳐도 온 정신이 그리 쏠리고, 백혈구와 산소와 영양분과 복원 세포가 그리로 모여 세균을 퇴치하고 새살이 돋게 하고 결국 몸을 치유한다.” 그렇듯 난민, 굶주려 죽어가는 자, 해고 노동자, 참사의 유가족이 있는 곳이 바로 내 몸과 이 사회의 중심이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정부든 기업이든 자비심을 갖고 그들을 먼저 구제하는 것이 정의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생존 기계인 동시에 “사회를 형성하고 농경을 시작하면서 혈연 이타성만이 아니라 호혜적 이타성, 집단 이타성을 추구하기 시작했고,” “고도의 이성을 바탕으로 맹목적 진화에 도전하여 공평무사한 관점을 증진시키며,” 윤리적 이타성 또한 추구했다. 인간이 서로 이기심을 줄이면서 이타성을 증대하며 공동선을 추구하여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이루려면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

필자가 불교의 교리, 특히 화쟁사상, 승가(僧伽)의 전통을 현 상황에 맞게 적용하여 대안의 공동체로 제시하는 것이 눈부처 공동체다. “눈부처-공동체는 구성원 각자가 눈부처-주체로서 실존하고 실천한다. 개인은 자기 앞의 세계를 올바로 인식하고 자율적으로 해석하며 타자와 자연과 연기관계를 파악하며 이기적 욕망을 자발적으로 절제하며 온 생명과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면서 팔정도를 수행하며 더 나은 미래 세계를 만드는 눈부처-주체로 거듭난다.

눈부처 주체들이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으로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며, 필요한 것은 호혜적으로 보답하는 방식으로 교환한다. 개인의 자유와 행복이 타인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조건이 되고, 개인의 권리와 존엄이 동등하게 인정되고 작용하면서, 모든 이들의 합의에 의하여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상호성의 정의와 평등을 구현한다. 공동으로 생산하고 분배하되, 나와 타인,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생산한다. 능력이 아니라 필요에 따른 노동, 소외와 장애를 극복하는 자기실현으로서 노동, 철저히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 노동을 한다. 구성원은 욕망의 자발적 절제를 통한 소욕지족(少欲知足)의 삶으로 전환하며, 이를 수행하기 위한 청규를 둔다.

이렇게 운영하되, 확고하게 정의관을 확립하고 깨달음에 이른 자라도 언제든 무지와 탐욕, 성냄에 물들고, 이기심과 욕망에 기울어질 수 있기에 깨달음이 곧 집착이라는 명제 아래 매일 일정한 시간에 수행하고 참회한다. 그에도 갈등이 생길 경우 화쟁의 원리에 따라 서로 눈부처의 자세로 대화하고 성찰한다. 그러고도 범죄가 생기면, 응보적 정의(punitive Justice)가 아니라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에 입각하여 문제를 해결한다.”

 

5. 맺음말

정의로운 사회는 정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만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타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진정한 정의이듯 정의는 자유, 진리, 평등, 생명, 평화 등의 가치와 만날 때 참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또, 가치는 개인의 힘만으로 실현되지 않는다. 개인과 사회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다.

내가 깨달아야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만, 세상이 새롭게 변하여 나의 깨달음도 유지된다. 세친 보살이 《불성론(佛性論)》에서 한 말을 패러디하면, 우리는 지혜가 있기에 모든 무명과 탐욕을 일소하고 열반에 이르려 하지만, 자비가 있기에 설혹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미루고 중생구제에 나선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의 진술을 현재의 한국과 지구촌 사회에 맞게 적용하여 필자는 “양적 발전보다 삶의 질, GDP보다 국민의 행복지수, 경쟁보다 협력, 개발보다 공존, 권력과 자본보다 마음의 평안을 더 중시하는 사회; 많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가진 자보다 자비심이 많은 이들이 더 존경받는 사회; 머리나 가슴이 아니라 아픈 곳이 내 몸의 중심이듯, 가장 약한 자들이 고통받는 곳이 이 나라의 중심이라며 모든 국민과 지도자가 그 사람들에게 먼저 달려가는 사회;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자비심이 개인과 사회와 국가의 동력이 되는 사회;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작든 크든 자비심을 가지고 그들 모두가 행복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발원하는 사회;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을 걸으며 모든 것을 나누며 모두를 위한 밥을 추구하는 사회; 자신이 갑의 위상에 있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을을 주인으로 섬기는 사회; 정의가 불의를, 선이 악을, 이타심이 이기심을 늘 이기는 사회;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내 마음의 평안과 타인과 함께 열반에 이르는 것이며 이를 향하여 걷거나, 앉았거나, 누워 있을 때라도 졸지도 방일하지도 말며 깨어 있을 때는 언제나 자비심을 낼 뿐만 아니라 알아차림을 서로 키우는 사회”37)를 꿈꾼다. ■

 

이도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양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한국학연구소 소장, 민교협 상임의장 등 역임. 저서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읽는다》 《인류의 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 등이 있음. 현재 정의평화불교연대 상임대표,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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