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평론 창간 20주년 기념특집-불교, 이상사회를 꿈꾸다

-민족주의와 ‘석가의 정신’ 사이에서 

 

들어가며

세계평화는 방대한 주제다. 하나의 민족이 100년 동안 겪은 전쟁과 평화의 이야기를 쓰는 데도 책 한 권이 부족할 수 있다. 쿠르드족을 보라. 그들은 인구 4천만 명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나라 없는 유랑민족으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자치권을 위해 처절하게 투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용운의 3 · 1운동을 금방 상기시킨다. 쿠르드족이 지난 1세기 동안 서구와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에 휘둘리며 이들로부터 협력과 배신을 경험한 것을 보면서 현재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쿠르드족은 오늘날 1천만 명 이상이 사는 터키를 비롯하여 시리아, 이란, 이라크 등으로 흩어진 뒤, 생존투쟁을 계속해 오고 있다.

쿠르드족은 이슬람국가(IS) 전쟁에 미군을 돕기 위해 병력 15만 명을 동원했고 그중 1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 그런데도 트럼프 미 대통령이 시리아 주둔 미군을 갑자기 철수시키자, 터키는 2019년 10월 9일부터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공격했다. 국익 앞에 비정한 강대국의 이런 배신은 과거에도 있었다. 쿠르드족은 배신의 첫 사례를 1920년대에 경험했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1919년 파리강화회담에서 내세운 민족자결주의를 믿고, 쿠르드족은 민족 독립의 꿈을 꾸었다. 하지만 터키 군부가 영국과 미국 등 승전국과 협상해서 쿠르디스탄 건국을 위해 남겨둔 땅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를 차지했다. 윌슨 대통령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가 종잇조각이 되는 순간이었다. 터키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쿠르드족이 터키에서 설립된 정치 · 군사 조직인 쿠르드 노동자당(PPK)과 손잡고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한다고 비난한다. 터키에게 이 조직체는 테러 단체이고, 산재되어 있는 쿠르드족은 최대 위협세력이다.

이런 쿠르드족에게, 그리고 쿠르드족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차별, 말살, 동화정책을 강제하는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들려줄 불교적인 평화의 꿈이나 이상이 있을까? 혹시 그런 것이 있다면 전해줄 방법은 있을까?

평화라는 말 때문에 ‘불교가 꿈꾸는 세계평화’라는 주제를 선뜻 맡았지만, 최소 두 개의 난관이 가로놓여 있다. 세계평화를 꿈꾸자면 다른 세기는 그만두고라도 지난 20세기의 극단적인 폭력의 원인을 분석한 뒤 이에 대처해야 한다. 전문가들의 전쟁론도 다양해 보인다.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 1964~  )은 《증오의 세기: 20세기는 왜 피로 물들었는가》에서 20세기의 극단적인 폭력은 다양한 모습을 띠었다고 하고, 폭력의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한다. 인종과 민족 갈등, 경제적 변동성, 제국의 쇠퇴가 그것들이다.경제 변동은 사회적 갈등 즉 인종 갈등을 악화시킨다고 한다. 그리고 20세기 충돌의 대부분은 세계를 지배했던 다민족 거대 제국의 쇠퇴와 몰락에서 왔다는 것이다.

위의 책은 1,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까지를 다루면서 악, 증오, 살인, 살해 본능, 성폭력, 민족주의, 대량학살, 인종주의, 인종청소 등의 용어로 여러 전쟁을 설명하고 있다. 2천여 년 전 인도의 중생이 범했다는 《소연경》의 십악(十惡)에도 살인과 음란, 거짓말이 있지만, 현대의 살인과 성폭력 방식은 더 잔혹하고, 거짓선동은 교묘해졌으며 그 규모는 더욱 커졌다. 퍼거슨에 따르면, 한국전쟁 역시 앞선 전쟁의 파괴력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3년간의 전쟁에서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18개국이 참전했다. 1953년 7월 27일의 휴전이 20세기 세계전쟁의 종지부라고 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앞서 언급한 극단적 폭력의 세 가지 이유는 21세기에도 지속된다고 말한 다음, 퍼거슨은 이렇게 끝맺는다. “우리는 지난 세기의 전쟁을 야기했던 저 힘들-즉 경제 위기의 와중에서 인종 갈등과 제국들 간의 경쟁을 불러내고, 그 과정에서 공통의 인간성을 부정한 저 어두운 힘들(dark forces)-을 이해할 경우에만 다음 세기의 갈등을 피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 안에 꿈틀거리고 있는 저 힘들을.” 어두운 힘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 폭력과 전쟁을 낳는 일체의 힘일 것이다. 같은 인종이나 민족의 이익만 챙기는 것은 탐욕이고, 상대를 죽이는 것은 증오나 분노[瞋]인데, 탐욕과 분노는 결국 공통의 인간성에 대한 무지일 것이니, 이 힘들은 불교의 삼독, 개인적 집단적 삼독에 포함될 수 있다.

문명 간의 충돌에서 전쟁이 일어난다고 주장한 학자도 있다. 새뮤얼 헌팅턴(1927~2008)이 대표적이다. 그는 《문명의 충돌》(1993)에서, 냉전 시대의 세계가 이데올로기로 나뉘었다면 냉전 이후의 세계정치는 문화 내지 문명을 단층선으로 해서 대립할 것이라고 한다. 그는 “국민 국가가 국제 정치 무대에서 가장 강력한 행위자로 남을 것이지만, 지구 정치의 주요 갈등은 다른 문명에 속하는 나라 간에, 그룹 간에 일어날 것이고, 문명들의 충돌이 지구 정치를 지배할 것이다. 문명 사이의 단층선들이 미래 전쟁선이 될 것”이라고 했다. IS의 수장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이라크에서 IS를 선포한 일과 시리아의 어느 동굴에서 자폭한 일,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이론이 ‘냉전 이론의 재판’이라는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의 비판까지도 논해야 하지만, 모두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남북한의 평화도 간단치가 않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 최소한 다음 사항은 알아야 한다. 김정은이 과연 핵무기를 포기할 것인지, 아베 정권의 정책 방향은 무엇인지, 트럼프 미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가 어디까지 갈지, 중국과 러시아의 동북아 전략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전체의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적, 감성적 능력이 우리 국민에게 있는지, 대통령에게 적대정치를 끝낼 의지가 있는지, 그리고 진영에서 독립된 정확한 실증적 지식의 존재 여부도 알아야 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누가 알까? 이렇게 한반도 평화조차 논하기가 어렵다.

세계평화라는 주제의 방대함 이외에 또 하나의 난관은 불교는 꿈도 꾸지 않고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기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가 꿈꾸는 세계평화’를 다음과 같이 이해해보자. 폭력이나 전쟁에서 고통을 느낀 불교도가 평화에 대한 꿈을 품고 다수와 공유한 다음, 실현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 정도로. 따라서 이 글은 평화에 대한 소박한 산견(散見)에 불과하다.

필자는 세 인물을 선택했다. 고타마 붓다, 한용운과 제14대 달라이 라마다. 개인마다 꿈은 다르다. 그들의 현실 인식이 달라서다. 먼저 붓다의 평화론을 논하고, 세계평화에 대한 만해의 꿈과 달라이 라마의 꿈을 기술해본다.

 

세 개의 평화론

1) 초기불교의 평화론: 정치제도의 수립과 불교 승단의 성립

붓다가 제시한 평화의 내용을 알기 위해 장아함부 경전의 《소연경(小緣經)》에 주목해보자. 《소연경》에 허구적인 신화와 역사가 섞여 있지만 화자는 붓다다. 이 경은 인도 중생들이 여러 악의 문제로 싸웠다고 하고, 고통이 너무 커지자 반성하여 예방책으로서 두 길을 제시한다. 왕을 세우는 길과, 선 수행의 전통을 회복하는 길이었다. 전자는 정치제도의 수립이고 후자는 불교 승단의 성립이다.

《소연경》은 2천 수백 년 전, 아니 훨씬 이전부터 중생들이 십악 중 하나 이상을 범했다고 한다. 십악은 살생, 절도, 음란, 거짓말, 이간질[兩舌], 욕설[惡口], 꾸민 말[기어(綺語)], 인색과 탐욕[간탐(慳貪)], 질투, 사견(邪見)이다. 살생, 절도, 간탐 등의 십악을 보면, 그 안에는 반드시 탐진치가 있다. 불교도라면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음(不淫)이나 불사음(不邪淫), 불망어(不妄語), 불음주(不飮酒)의 오계를 지켜야 한다. 탐진치의 삼독을 지멸하고 오계를 준수하면 십악을 없앨 수 있다. 그것이 평화일 것이다.

《소연경》에서 중생은 본래 처음 생겼을 때는 생각[思]을 먹고 신족(神足)으로 허공을 날며 몸의 광명을 스스로 비추면서 세상에 오래 살았다. 그 뒤에는 땅에 단샘[甘泉]이 솟아나 향기롭고 맛이 있어서 먹을 만했다. 그것을 과식한 자는 얼굴빛이 누추하고 적게 먹은 자는 얼굴빛이 오히려 즐겁고 윤이 났다. 그런데 후자 곧 단정자는 교만한 마음으로 누추한 자를 업신여기고, 누추한 자는 질투하는 마음으로 단정한 자를 미워했다. 중생들은 서로 다투었고 단샘은 나지 않게 되었다. 그 다음에 향기로운 지비(地肥)와 추한 지비가 차례로 나타났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인간 세상에 단정과 추루(醜陋)라는 차별, 교만, 멸시, 증오, 쟁송(諍訟)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단샘이, 이어서 추한 지비조차 사라졌다.

그러자 멥쌀이 생겨났다. 멥쌀이 농업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1만 년 전의 일이다. 멥쌀의 등장과 함께 중생은 정욕을 누렸고 자식도 낳았다. 게으른 자들은 축적하고 서로 다투었다. 멥쌀은 거칠어지고 겨를 내었다. 후에는 멥쌀도 나지 않았다. 이것을 장차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반성하며 의논했다. 각자 사유지인 전지(田地)를 갖기로 했다. 그러자 절도가 생기고 분쟁과 폭력이 일어났다. 또 반성했다. ‘중생은 갈수록 악해져서 이 세상에는 착하지 않은 것과 부정(不淨)이 생겼다. 이것이 생로병사의 원인이면서 고통을 낳았다. 이제 차라리 한 사람을 세워 왕으로 삼아 이것을 다스리게 해야 하겠다. 보호해야 할 자는 보호하고 꾸짖어야 할 자는 꾸짖게 하자(可護者護可責者責).’고. 그래서 단정한 사람을 골라 왕으로 삼아서, 그로 하여금 다툼을 판결하며 다스리게 했다(使理諍訟). 이 임무를 맡은 자가 크샤트리아였다. 보호와 질책을 위해 정치제도를 수립한 것이다.

정치제도만으로 십악을 근절할 수 없다고 자각한 사람이 나타나 이렇게 생각했다. ‘집이란 큰 걱정거리다. 집이란 독한 가시다(家爲大患家爲毒刺). 나는 이제 사는 집을 버리고 혼자 산림에 들어가 고요히 도를 닦으리라.’ 하고. 주변인이 칭찬했다. “착하다. 이들은 능히 사는 집을 버리고 혼자 산중에 살면서 고요히 도를 닦아 모든 악을 버리어 여읜다. 여기에 비로소 브라만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시간이 흐르자 브라만은 청정행을 잊고 속세로 내려가 글을 익히는 것을 업으로 삼고 ‘참선하지 않는 브라만(不禪婆羅門)’이 되었다. 그런 브라만 이외에도 살림을 즐겁게 경영해 많은 재보를 모은 바이샤도 있었고, 기교가 많아서 물건을 많이 만들어 내는 수드라도 있었다. 이것이 사성의 기원이다. 이들은 쉽게 십악을 범한다.

다섯 번째가 사문중(沙門衆)이다. 크샤트리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기의 법[己法]을 싫어해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옷을 입고 도를 닦았다. 여기서 비로소 사문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사문이란 망각된 브라만의 도를 회복한 자이다. 브라만, 바이샤, 수드라 중에서도 자기의 법을 싫어해서 사문이 되는 자가 있었다. 붓다는 작은 공동체를 설립하고 계율, 선정과 지혜로써 출가자를 지도하여 삼독을 제거하고 십악을 멀리함으로써 열반을 이루도록 했다.

《소연경》에 따르면, 인류는 도덕적으로 타락해 왔다. 선을 닦는 브라만은 정욕과 집, 소유, 그리고 십악 사이에는 거의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고, 다르게 살기로 한 창조적 소수였다. 고타마 붓다와 같은 사문이 나타나 잊힌 브라만 정신을 회복했다. 《소연경》은 살인, 음란, 절도 등 악을 다스려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정치제도를 수립하고, 청정행의 승단을 성립시키는 길을 제시했다.

자비명상은 청정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 명상은 상응부 경전(SN 4, 13)의 《파편경》에 나온다. 붓다는 발이 돌조각에 찔려서 신체적 고통(sārīrikā dukkhā)을 느끼면서도 “나는 누워 있으면서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다(sayām aham sabbabh-ūānukampī).”고 했다. 붓다는 통증에서 모든 생명에 대한 자비심을 느꼈다. 이 명상법은 2천 수백 년 뒤에 달라이 라마에게도 계승된다.

 

2) 한용운의 평화론

(1) 민족주의

만해 한용운(1879~1944)은 독립운동가로도 소개되듯 정치 성향이 아주 강했다. 특히 1919년 무렵이 그랬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것을 계기로, 만해는 독립의 꿈을 공유한 동지들과 함께 3 · 1운동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감옥에서 〈조선독립의 서〉(1919)를 지어서 일본인 검사에게 제출한다. 그 첫 부분에 자유와 평화가 나온다.

자유는 만물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다.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그러나 참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을 한계로 삼는 것으로서 약탈적 자유는 평화를 깨뜨리는 야만적 자유가 되는 것이다. 또한 평화의 정신은 평등에 있으므로 평등은 자유의 상대가 된다. 따라서 위압적인 평화는 굴욕이 될 뿐이니 참된 자유는 반드시 평화를 동반하고, 참된 평화는 반드시 자유를 함께 해야 한다. 실로 자유와 평화는 전 인류의 요구라 할 것이다.(1: 346)

만해가 나의 자유를 위해 남의 자유를 약탈하거나 쟁탈하면 약탈적 자유를 낳고, 약탈적 자유는 평화를 깨뜨리는 것이라 하고, 평화의 정신은 평등에 있다고 하니, 만해에게 자유와 평화, 평등은 함께 가는 것이다. 만해는 자유를 얻고 평화를 지키는 것이 인생의 권리이고 의무이며, 전 인류의 요구라고 보았다.

만해는 인류의 역사는 몽매에서 문명으로, 쟁탈에서 평화로 진화하거나 발전하고, 그 진화의 범위가 개인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우주로 확장된다고 보았다(1: 346 참조). 세계보다 더 넓은 우주가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만해는 진보를 방해하는 세력으로 국가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 그리고 우승열패와 약육강식의 논리를 지적하고, 군국주의의 대표로 서양의 독일과 동양의 일본을 지목했다.

(2) 본능, 피, 감정, 본성

민족에게 왜 자존, 자결, 독립이 중요한가? 그것이 본능, 피, 감정, 본성의 요구여서다. “민족의 독립 자결은 자존성(自存性)의 본능”(1: 348)이고, 피의 요구다(1: 347). 인간과 동물은 모두 “저희끼리 사랑하여 자존을 누리는” 감정이 있다고도 했다(1: 350). 자존성이 배타적이긴 하지만 남의 간섭을 받기 싫다는 정도이지, 자존과 자결의 범위를 넘어 남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자존성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이라고도 했다(1: 350).

만해는 자존성의 관점에서 당시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즉 중국은 티베트와 몽골족을, 영국은 아일랜드와 인도를, 러시아는 폴란드를, 일본 제국은 조선을 각각 침략해서 동화정책을 강요하고 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갔는데, 다 자존성 때문이라고 했다. “이 자존성은 항상 탄력성을 가져 팽창의 한도 즉 독립자존의 길에 이르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것이니 조선의 독립을 감히 침해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1: 351). 만해는 자존성에 자체 추진력이 있어서 독립자존이 될 때까지 움직인다고 보았다.

이렇게도 말한다. “민족자결은 세계평화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 왜냐하면 민족자결이 이룩되지 않으면 언제라도 싸움이 잇달아 일어나 전쟁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1: 351) 만해에게 민족자결과 독립은 세계평화와 동양평화를 위한 열쇠이고(1: 351), 세계평화의 꿈을 이루는 길이며,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

일본의 강제 합방이라는 흉포한 일로 인해, 자존성에 상처 입은 조선 민족은 무엇을 했는가? “부끄러움[羞]을 안고 치욕[恥]을 참는 동시에 분노[忿]를 터뜨리며 뜻을 길러 정신을 쇄신하고 기운을 함양하는 한편, 어제의 잘못을 고쳐 새로운 길을 찾아왔다.”(1: 349, 번역 일부 수정) 수치와 분노가 폭력으로 가지 않고 자기 교육으로 갔다고 한다.

1935년 무렵 〈반성〉이라는 짧은 글에서 망국에 대해 자기 책임론을 논했다. 사람이 망국 등의 불행을 만나게 되면 흔히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한다(怨天尤人). 만해는 이를 잘못이라고 보았다. 그는 사람의 가난과 약함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듯이, 망국의 책임도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보았다. 그는 “만고를 돌아보건대, 어느 국가가 자멸하지 아니하고 타국의 침략을 받았는가…… 망국의 한이 크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정복국만을 원망하는 자는 언제든지 그 한을 풀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한 다음(1: 210), 망국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또다시 정복당한다고 했다. 침략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멸한 다음 침략을 당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이를 인정하는 것이 반성의 첫걸음이다. 이것은 강자의 논리가 아니다. 망국을 당해 피눈물을 흘려보고 그 한을 뼈저리게 느낀 만해는, 하늘을 원망하고 침략자를 탓할 수만 없었다. 망국의 원인을 제거하여 다시는 당하지 않게 대비하는 것, 그것이 한을 제대로 푸는 길로 보았다. 만해는 〈한용운공소공판기〉(1920)에서도 자멸론을 말한 다음, 망국의 원인으로 조선의 부패한 정치와 조선 민중이 현대문명에서 낙후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1: 373, 〈동아일보〉 1920.9.25). 결국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자기책임론에서라면, 약해서 당한 것이 악이고 선을 지키기 위해 일정한 세력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면 타당하다. 만해는 실제로 《조선불교유신론》(1910)에서, 세력이 진리를 이기는 문명을 “야만적 문명”이라고 하면서도(2: 60), 필수적인 세력을 “자유를 보호하는 신장(神將)”이라고 불렀다(2: 63). 그런데도 만해는 무장투쟁보다는 3 · 1운동과 말과 글을 통해 조선독립이라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만해는 평생 비폭력주의자였을까? 앞서 치욕과 분노가 폭력이 아니라 자기 교육으로 간 것을 보았다. 하지만 만해는 〈안해주(安海州)〉라는 한시에서는 안중근의 행위를 칭송했다(1: 163). 〈조선독립의 서〉의 만해는 비폭력 원리 자체보다는 민족자결에 대한 피와 감정의 요구를 더 경청했던 것 같다.

 

(3) ‘석가의 정신’

그런데 1931년에 《삼천리》의 〈석가의 정신-기자와의 문답〉에 나오는 만해는 민족주의를 넘어선다. 기자는 불교사회주의의 입장에서 불교가 사회의 가난이나 침략 등에 대응할 수 있는 혁명사상이어야 한다고 보고, 석가를 행동가나 혁명가로 보려고 한다. 기자의 집요한 유도 질문에도 불구하고, 만해는 끝까지 말려들지 않았다.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문답 내용이다.

문: “석가 철학의 진리는 어떠하였건 좌우간 그분이 오늘 이 시간에 조선 서울 종로 부근에 사신다면 조선인의 모든 현실 생활을 바라보고 또 만주에서 일어나는 일 · 중 관계와 국제연맹 등, 열국 간의 정치관계를 바라보고 손을 싸매고 앉았을 것이겠습니까? 이러한 정경 속에서도 …… 인생의 死나 生을 悠閑하게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까? 백의 족속이란 관념도, 가난하니까 어떻게 하면 살까 하는 의식도 모두 그 머리엔 없을 것이겠습니까?”

답: “…… 그러니까 잘 살기 위한 행위를 누가 부인하리까마는 다만 부처님은 전 세계 인류 중 유독 조선 사람만을 구제하여야 하겠다는 사상을 가지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조그마한 국경이나 혈족에 구분을 지으실 이가 아닙니다. 천하의 모든 인류는 모두 평등하고 자유로운 이상이 있었을 따름이었겠습니다.”(2: 292)

문: “석가께서 오늘 조선에 나셨더라면 ……조선말을 하시면서 …… 역시 민족 사상이 그 머리에 없었다고 할 수 없을 줄 압니다.”

답: “생활이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마는 우주의 혁명을 日夜 염두에 두시는 분에게 무슨 지역적으로 국한한 특수 운동이 있었겠습니까?(2: 292-293)

3 · 1운동 시기의 만해는 민족자결을 세계평화와 동양평화를 위한 열쇠로 보았다. 하지만 〈석가의 정신〉에서 그는 부처님을 ‘조그마한 국경이나 혈족’을 넘어서 우주 혁명으로 나가신 분으로 보았다. 이는 변화일까? 아니면 두 가지 생각이 항상 함께 있었을까? 〈석가의 정신〉은 비폭력을 의미할까?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주의인가 아니면 ‘석가의 정신’인가?

3) 달라이 라마의 비폭력 평화론

(1) 점령과 탄압의 역사

달라이 라마(1935~  )는 서양에서 온 여러 정치적 가치, 즉 자유민주주의, 언론과 결사의 자유, 인권, 민족자결 등을 적극 수용하면서, 이것들이 티베트와 중국에서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불교와 어긋나지 않는다고 본 것 같다.

그런데 티베트의 현대사는 참으로 비극적이다. 1950년부터 1983년까지 감옥과 전투에서 그리고 기아로 120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1백 수십 명의 티베트인이 독립을 외치며 분신자살한 것도 기록하고 있다.

1950년에 시작된 중국의 티베트 점령과 탄압은 희생자의 수로만 보아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탄압보다 훨씬 무자비해 보인다. 1958년 캄(Kham)과 암도(Amdo) 지역에서 티베트의 자유투사들과 중국 군인들 사이에 전투가 일어났다. 달라이 라마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잔혹한 행위를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다. “십자가형, 생체해부, 희생자들의 창자를 들어내거나 손발을 자르는 일은 보통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머리를 베거나 태워 죽이고, 죽을 때까지 때리거나 산 채로 매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희생자들이 ‘달라이 라마 만세!’를 외치는 것을 막기 위해 형장으로 가는 도중에 그들의 혀를 손으로 찢었다.” 당시 저항군에 가담하고 있던 자들의 아내와 자식들에게 무자비한 고문과 처형이 뒤따랐다. 비구니 승려에 대한 성적 고문도 언급했다.

(2) 현실 노선: ‘유의미한 자치’

중국 정부의 점령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는 독립을 주장하지 않고 ‘유의미한 자치’를 요구한다. 현실을 고려해서다. 그의 현실 노선은 2012년 7월 《힌두》지와의 인터뷰에 잘 나와 있다. 중국 헌법 내에서의 유의미한 자치가 티베트 이슈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냐는 취지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그것이 유일한 길, 유일하게 현실적인 길입니다. 첫째, 티베트 내의 많은 티베트인이 독립을 원하지만, 나는 상황을 고려해서 중도(the Middle-way Approach)를 지지합니다. ……두 번째로, 티베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자면 중국의 지지(支持)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티베트인들은 민주주의의 경험을 한 적이 없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티베트는 물질적으로 후진적이라는 점입니다. ……티베트를 현대화하기 위해서는 중국인민공화국 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 자신의 이익입니다. 중국인들이 유의미한 자치를 허용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 문화를 보존하고, 우리말을 향상시키고, 환경을 완전히 보존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말입니다. 이것은 상호이익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이 순간 분리된 티베트(Separate Tibet)는 우리에게 실제로 이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중국 헌법 자체도 티베트 지역 즉 티베트 자치구, 省과 郡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중국 헌법이 티베트 지역으로 인정하고 있는 모든 지역에 유의미한 자치라는 동일한 권리를 허용하라고 중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원하는 자치의 핵심은 티베트 문화의 보존, 티베트어의 향상, 그리고 완전한 환경보호이다.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상당수의 티베트 지식인들이 자신의 입장을 지지한다고 했다. 그에게는 만해가 자존성의 근거로 삼은 본능, 피, 감정, 본성의 요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자비명상으로 극복된 것일까?

(3) 비폭력주의

달라이 라마 자서전에 티베트 망명 역사에서 ‘가장 슬픈 사건’이 나온다. 티베트의 자유를 되찾기 위해 폭력도 불사하는 게릴라 단체가 있었는데, 달라이 라마는 이를 해산하라고 호소했고, 이 호소를 무시하고 끝까지 저항하려다가 네팔군의 추적을 받아서 참혹한 죽음을 당한 사건이다. 1960년 망명민 중에서 뽑힌 수천 명의 게릴라가 티베트와 네팔 북부 접경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게릴라들은 수차례 중국군들을 괴롭혔다. 중국 정부는 네팔 정부에 게릴라 군대를 무장해제시키라고 요구해 왔다. 자칫 티베트 게릴라들과 네팔 군대 사이의 싸움이 벌어질 것을 염려한 달라이 라마는 중재에 나서기로 결정하고 개인적으로 호소했다. 그의 근위대장인 타클라(p.T. Takla)로 하여금 그의 말이 녹음된 테이프를 그들의 지도자에게 전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네팔과 싸우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며, 그들이 네팔과 싸울 경우 네팔에 정착한 수천 명의 티베트 난민들이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했다. 대신 네팔 정부에 감사하고, 무기를 버리고 평화롭게 살기를 당부했다. 티베트 게릴라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타클라의 전언에 따르면, 그들은 배신감을 느낀 것 같았다고 했다. 지도자 몇 사람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목을 잘라서 자살했다. 달라이 라마는 그들의 용기, 티베트에 대한 용기, 충성심과 사랑을 자신이 의심한 것은 잘못으로 보이지만, 자신이 한 일은 옳다고 생각했다고 하고, 실제로 대다수의 게릴라는 무기를 내려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2008년 3월 라싸 봉기 때 중국 군인들이 잔혹하게 진압하자, 티베트 청년들이 조직적인 약탈, 방화, 적대적 행위를 한 적이 있었다. 달라이 라마는 그 폭력이 티베트 내에서 2등 국민 취급을 받는 절망감에서 나온 것은 인정하면서도 “만약 티베트 국민이 비폭력의 길에서 이탈한다면 자신은 더 이상 티베트인들의 대변인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다.”

(4) 받고 주기 명상법

달라이 라마의 유의미한 자치, 중도론, 비폭력은 그의 수행법과도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감정에 대한 분석적인 명상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은 줄이거나 없애고, 대신 긍정적인 감정을 키울 것을 수시로 권유한다. 대표적인 명상법이 똥렌 명상법이다. 달라이 라마는 앞서 언급한 붓다의 자비명상이 산스크리트 경전 전통 내의 ‘받고 주기 명상(Tib. 똥렌, tonglen, གཏོང་ལེན)’-즉, 남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대신 자신의 행복을 준다는 명상-으로 계승되었다고 본다.

2008년 3월 라싸와 다른 도시에서 항의하는 티베트인들에게 중국 군인은 시위대에게 발포했고 수많은 사람을 체포했다. 특히 승려들이 많았다. 그때 달라이 라마는 중국 관리들을 명상의 대상으로 삼아서 “그들의 분노, 의심,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 나의 사랑, 나의 자비, 나의 용서를 주었다.”고 한다. 그에게 용서는 가해자들의 사죄 이후에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는 것이다.

〈간디에 대한 헌사〉라는 노벨상 수락 연설(1989)에서도, 그는 분노나 원한을 부추기지도 않았고 무장봉기와 테러리즘을 선동하지도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기도로 연설을 마쳤다. “나는 억압자와 친구를 포함한 우리 모두를 위해, 인간적인 이해와 사랑을 통해 보다 나은 세계를 건설하는 데, 우리 함께 성공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생명의 고통과 괴로움을 줄일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PPDL: 155)라고. 여기 ‘우리’에는 중국인이 들어 있다. 베이징 당국이 자치를 허용하지 않지만, 여전히 함께해야 할 일을 찾고 있다.

달라이 라마에게 불교와 티베트 민족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나의 주된 관심은 티베트라는 국가나 민족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주요 관심은 불교와 논리학과 철학이 어우러진 티베트의 전통입니다. ……인간의 감정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어떻게 하면 그 감정을 탈바꿈시키는가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티베트의 영적 전통을 보호하는 것은 단지 6백만 티베트 인들을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인류 공동체를 위한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형제자매인 중국인들을 위해 필요합니다.

위의 인용문만 보면, 달라이 라마에게 티베트 민족보다는 불교에서 오는 티베트의 영적 전통, 즉 분노를 자비심으로 바꿀 수 있게 하는 영적 전통이 중요했다.

(5) 기후변화와 세계평화의 문제

지구온난화로 인류가 사라지면 세계평화는 의미가 없다.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는 작년 15세의 나이로 학교를 거부하고 스웨덴 의회 앞에 시위를 했다. 그는 탄소 배출을 계속한다면 기후변화로 지구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고 주창하고 즉각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국내에서는 조인원 경희학원 이사장이 오랫동안 이 문제를 두고 씨름해왔다. 그는 기후변화든 북핵이든 모두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하고, “지금이야말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의 실존과 인류의 실존이 하나가 되는 시기인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시민사회의 의식변화가 현실정치에 전달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쿠르드족에게는 여전히 민족의 생존이 더 절실하지 않을까? 기후변화와 인류의 실존 문제를 생각하면 이 글은 더욱 불완전해지지만 여기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나오면서

세계평화라는 방대한 주제에 세 인물의 개별 평화론으로 대응했다. 이들이 처한 현실이 달라 꿈도 달랐다. 《소연경》의 붓다는 십악의 부재라는 평화를 꿈꾸었다. 만해는 세계평화의 열쇠로 조선인의 민족자결을 꿈꾸었고,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으로 자치를 얻는 꿈을 꾸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소연경》이 제시한 두 해법은 여전히 유효하다. 첫째는 “공통의 인간성을 부정한 저 어두운 힘들”을 정치적으로 조정하거나 억제하는 길이었다. 국제연맹 등의 국제기구 출현, 민족자결의 인정이 바로 그것이다. 만해도 문명이 그런 방향으로 진보한다고 보았다. 둘째는 청정 공동체를 수립, 계승하는 일이었다. 이는 어두운 힘을 더 높은 수준에서 다스리는 길이다.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과 같은 분이 모범이다. 하지만 청정행은 고상한 만큼 성취하기는 어렵다.

쿠르드족에게도 자치 없는 평화는 없다. 달라이 라마의 ‘유의미한 자치’라도 터키 정부가 허용하면 쿠르드족은 수용할 것이다. 불교도가 쿠르드족의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터키 정부나 강대국을 설득하는 일이다. 그런데 누가 할 수 있을까?

달라이 라마의 꿈은 티베트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공유되는 것 같다. 자비심은 한국의 불교문화에서보다 티베트의 불교문화에 더 깊이 뿌리내린 것 같다. 달라이 라마가 중국인에 대해 그랬듯이, 한국인이 북한 사람과 일본을 향해 ‘받고주기 명상’을 할 수 있을까? ‘조그마한 국경이나 혈족’을 초월한 부처님을 배우는 것이 내부 문제든, 남북문제든 한일문제든 평화 실현에 더 유리해 보인다. 다만 북한 정권이 소위 민족이익을 앞세워 북한 주민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것을 넘어 핵미사일로 남한까지 위협하는 야만적 문명으로 남아 있다면, 남한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세력’이 필수다.

자유와 평화의 세계 공동체가 한시바삐 도래하여 인류 개개인이 느끼는 고통이 줄어들고, 기후변화의 위기를 돌볼 여유도 생기기를 기대해보자. 현실을 고려하면서 두 해법을 적절하게 활용해야 할 것 같다. 개인 수행이 완성되어 청정행의 공동체를 수립하고, 그것이 국내외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면 좋다. 그것이 불교식 평화추구법이 아닐까? ■

 

허우성
경희대 철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미국 하와이대 철학박사. 저서로 《근대 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과 역서로 데이비드 로이의 《돈, 섹스, 전쟁 그리고 카르마》 《문명 정치 종교(마하트마 간디의 도덕 정치사상)》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 비폭력연구소 소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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