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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속불이의 양상과 60년대 불교소설
특별기획 - 현대소설에 나타난 불교 ③
[79호] 2019년 09월 01일 (일) 유한근 yhkpoet@hanmail.net

-김동리와 김정한의 경우

 

1960년대의 한국은 4 · 19와 5 · 16이라는 역사적 전환을 기점으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정치적으로는 유신체제라는 분수령으로, 1960년대는 경제적인 도약 준비기로, 70년대는 고도성장의 산업사회로 이양된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이 문학의 흐름에 결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소설이 허구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위한 이야기로서 사회적 흐름의 일면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시대적 상황의 전개를 간과할 수는 없다. 

루시앵 골드만은 소설과 현대사회적 현상의 진행에 따른 문학사적 규정을 인정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소설이란 타락된 사회에서 타락한 형태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야기로 규정지을 수 있으며, 주인공에 있어서 이 타락은 주로 매개화 현상, 즉 진정한 가치가 내재적인 차원으로 끌려 들어감으로써 자명한 현실로서는 사라져 버리는 현상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구조는 작가가 속한 집단의 사회생활 속에서 어떤 토대도 없이 순전히 개인적인 창안만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또는 일반적으로 현대문학사를 일별할 때, 1960년대의 소설을 ‘엄숙주의’로 지칭한다. 최인훈의 〈광장〉(1960)이 그러하고 박경리의 〈시장과 광장〉(1964)이 그러하다. 또한 위의 소설과는 다른 양상이지만 불교소설로서 김동리의 〈등신불〉(1961)과 〈극락조〉(1968), 〈눈 오는 오후〉(1969), 그리고 김정한의 〈수라도〉(1969)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1970년대 소설인 김동리의 〈저승새〉(1977)는 상업주의로 지칭되는 당대의 문학 경향과는 달리 60년대의 엄숙주의 경향을 고수하고 있다. 

김동리와 김정한의 소설은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불교적 모티프의 소설이라 해도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는 없다. 김동리의 경우가 순수문학적 입장이라면, 김정한의 경우는 현실비판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1960년대 김동리의 불교소설 4편은 불교의 본질적인 사상에 입각하여 승속불이(僧俗不二)의 세계와 설산선인의 깨달음의 세계, 이적과 환생의 신비주의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반면,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는 승속불이가 아닌 현실적으로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불교에 접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이 글에서는 1960년대에 발표된 김동리의 〈등신불〉(1961)과 〈극락조〉(1968), 〈눈 오는 오후〉(1969), 같은 맥락에서 1970년대에 발표한 〈저승새〉와, 김정한의 〈수라도〉(1969)를 분석하려 한다.

   
 

1. 김동리 불교소설 4편의 위상

김동리는 한국문학의 민족문학 성취를 위하여 세 가지를 제시했다. 그 첫째는 “한국의 신문학(현대문학)은 그 정신적 기조를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새로운 휴머니즘에 둔다.”이고, 두 번째는 “어떤 문학상(혹은 사조상)의 주의나 유파 또는 경향보다도 문학 본질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한국의 작가는 건강관리에 유의하고 끝까지 문학에 정진할 수 있도록 문학 이외의 어떠한 이익과도 타협하지 말아야 하며 문학 이외의 어떠한 다른 가치에도 문학을 그 보조수단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여기에서 첫 번째의 그의 주장은 이른바 ‘제3기 휴머니즘’을 일컫는 문학관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주장은 1960년대 순수 · 참여문학 논쟁에서 그가 지속성을 주장해온 문학관에 기초한 견해이다.

김동리의 제3기 휴머니즘의 방향 설정은 순수 · 참여 논쟁의 민족문학의 이론 정립에서 시작된다. 김동리는 세계문예사조를 일별하면서 신본주의 문학관이 팽배했던 중세기 문학 이후 이에 대한 반발로 대두된 인본주의, 그 인본주의의 극대화 현상으로 나타난 세기말 현상의 인간성 말살을 극복하는 문학사상으로 제3기 휴머니즘을 주장하게 된다. 그것은 인본주의에 신본주의를 가미한 문학 사상으로 중세의 신본주의와는 다른 인간 중심 사상에 신본주의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으로, 그가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문학사상인 무속, 기독교, 도교, 유교, 그리고 불교사상을 수용한 소설들이다. 〈무녀도〉는 무속을, 〈사반의 십자가〉는 기독교를,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등신불〉(1961)과 〈극락조〉(1968), 〈눈 오는 오후〉(1969)와 1970년대에 발표된 〈저승새〉(1977)는 불교사상을 수용한 소설이다.

〈등신불〉은 액자소설로 액자의 틀에 해당하는 내레이터의 ‘나’(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간 스물세 살의 청년)의 이야기와 액자 속의 그림에 해당하는 이야기인 소신공양으로 등신불이 된 만적의 이야기를 통해 불교의 이적과 승속일여(僧俗一如) 사상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학병인 속세인 ‘나’의 손가락 자르기와 승려 만적의 소신공양 의미가 성불 모티프라는 점에서이다.

〈등신불〉의 구조는 그의 다른 소설과 비슷한 액자소설의 형태를 유지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고전소설인 박지원의 〈옥갑야화〉, 김만중의 〈구운몽〉, 그리고 김동인의 〈배따라기〉의 구조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액자 속의 이야기를 좀 더 객관화시켜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해주는 효율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또한 메인 스토리 밖의 이야기를 다른 화자의 시점에서 다각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등신불〉은 이렇게 시작된다. 

 

등신불(等身佛)은, 양자강(揚子江)의 북쪽에 있는 정원사(凈願寺)의 금불각(金佛閣) 속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佛像)의 이름이다, 등신금불(等身金佛) 또는 그냥 금불(金佛)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나는, 이 등신불, 또는 금불로 불리워지는 불상에 대해 보고 듣고 한 그대로를 여기다 적으려 하거니와, 그보다 먼저, 내가 어떻게 해서 그 정원사라는 먼 이역의 고찰(古刹)을 찾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이야기해야겠다.

 

내가 일본의 대정대학 재학 중에, 학병(태평양 전쟁)으로 끌려나간 것은 일구사삼(1943)년 이른 여름, 내 나이 스물세 살 나던 때였다.

내가 소속된 부대는 북경(北京)서 서주(徐州)를 거쳐 남경(南京)에 도착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부대가 당도할 때까지 거기서 머무르게 되었다. .

— 김동리 〈등신불〉 서두

이 소설의 서두는 학병인 ‘나’가 등신불과 만나는 계기를 이야기한다. ‘나’가 학병으로 끌려간 시기는 현재(태평양전쟁)이다. 그리고 등신불이 안치되어 있는 금불각이 있는 곳은 양자강 북쪽에 위치한 정원사라는 절이다. 그러나 만적의 이야기는 중국 당나라 때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로 들어가는 연결고리는 금불각의 노승이 돌함에서 내어 준 책자 《만적선사소신성불기(萬寂禪師燒身成佛記)》를 접하고 나서이다. 그리고 ‘나’가 원혜 대사로부터 천이백 년간 등신금불에 대하여 절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이야기가 〈등신불〉의 백미이다. 만적의 수행과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핵심적인 이야기는 소신공양 부분과 이적 부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많은 부분은 학병인 ‘나’가 남경에 주둔하면서 겪은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가 현재진행의 메인 스토리임에도 불구하고 〈등신불〉은 만적 이야기에 집중되어 있다. ‘나’는 남경을 떠나기 전 비장했던 ‘남경 진기수’라는 쪽지의 인물을 찾기 위해 정심원의 포교사를 통해 그가 서공암이라는 작은 암자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간다. 낯선 사람을 만난 그는 처음에는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른손 식지 끝을 물어 피로 “원면살생귀의불은(願免殺生歸依佛恩, 원컨대 살생을 면하게 하옵시며, 부처님의 은혜 속에 귀의코자 하나이다)”이라는 여덟 글자를 써서 두 손으로 올리고 합장을 하자 그는 골방으로 데려가 법의를 입게 한다. 그리고 노승을 만나게 해준다. 그로 인해 ‘나’는 학병에서 탈출하여 먼 타국 절에 숨어들게 된 것이다. 

   

김동리
(金東里, 1913~1995)

노승 경암은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이백 리 산길을 데리고 간다. 이튿날 늦은 아침에 정원사에 도착한다. 전기수의 편지를 받은 그 절의 주지 원혜 대사는 청정실 옆, 작은 방으로 안내한다. 청정실에 기거하는 원혜 대사의 시봉인 젊은 스님은 청운으로 친절하다. 그로부터 들은 전기수의 법명은 혜운이었다. ‘나’는 청운에게 중국어를 배웠고 다른 스님들과 함께 수행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곳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나’는 금불각을 발견하고 그곳을 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나’는 “머리 위에 향로(香爐)를 이고 두 손을 합장한, 고개와 등이 앞으로 좀 수그러진, 입도 조금 헤벌어진, 그것은 불상이라고 할 수 없는, 형편없이 초라한, 그러면서도 무언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사무치게 애절한 느낌을 주는 등신대(等身大)의 결가부좌상(結跏趺坐像)”을 보게 된다. ‘나’는 경악과 충격, 전율과 공포를 느꼈다. ‘저건 부처님이 아니다! 불상도 아니다!’라는 내면의 목소리는 터져 나오지 않고 정강마루와 아래턱이 덜덜덜 떨리게 한다. 

원혜 대사는 그 불상에 대해 한마디 말만 해준다. “그렇지, 본래는 부처님이 아니야. 모두가 부처님이라고 부르게 됐어. 본래는 이 정이 스님인데, 성불(成佛)했으니까 부처님이라고 부른 게지. 자네도 마찬가지야” 그 불상에 대해서 청운은 ‘나’에게 들려주었다. 그때야 나는 소신공양(燒身供養)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사흘 후 나는 다시 금불을 찾는다. 그러나 그 금불을 보는 동안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랄까 아픔이 같이 밀려왔다. 이튿날 ‘나’는 다시 금불각으로 가서 《만적선사소신성불기》라는 책자를 보게 되고, 만적 선사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만적은 법명이요. 속명은 기, 성은 조 씨다. 금릉서 났지만, 아버지가 어떤 이인지는 잘 모른다. 어머니 장 씨는 사구(謝仇)라는 사람에게 개가를 했는데, 사구에게 한 아들이 있어 이름을 신이라 했다. 나이는 기와 같은 또래로 모두가 여남은 살씩 되었었다.(萬寂法名日耆姓曹氏地金陵出生父未詳母張氏改嫁謝公仇之家仇有一子明日信年似興耆各十有餘歲)”로 시작하는 내용이었다.

 

만적이 스물세 살 나던 해 겨울에 금릉 방면으로 나갔다가, 전날의 사신(謝信)을 만났다. 그리고 자기는 이 사신을 찾아 역시 집을 나왔다가 그를 찾지 못하고 중이 된 채 어느덧 꼭 십 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난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다시 만난 사신을 보고는, 비록 속세의 인연을 끊어 버린 만적으로서도 눈물을 금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착하고 어질던 사신이 어쩌면 하늘의 형벌을 받았단 말인고. 사신은 문둥병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만적은 자기의 목에 걸었던 염주를 벗겨서 사신의 목에 걸어 주고, 그 길로 곧장 정원사에 돌아왔다.

그때부터 만적은 화식(火食)을 끊고 말을 잃었다. 이듬해 봄까지 그가 먹은 것은 하루에 깨 한 접시뿐이었다(그때까지의 목욕재계는 말할 것도 없다).

 

만적은 개가한 양부의 자식이며 친구인 문둥병에 걸린 사신(謝信)에게 자신의 목에 걸린 염주를 벗어주는데 이는 일종의 보시행이다. 보시는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실천 수행법의 하나이다. 보시는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삼는 이타(利他) 정신의 극치로 자신과 가족의 미래와 사후 세계를 위해 공덕을 쌓는 방편으로 하나이다. 만적이 사신에게 염주를 보시하는 행위는 소신공양의 전 단계로 자비심으로써 물욕을 갖지 않는 재시(財施)이기도 하지만, 병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탈하라는 무외시(無畏施)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깨달음이나 일체중생의 성불(成佛)이라는 의미로 확산되어 간다. 유상보시(有相布施)가 아닌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의미로 마음에 걸림이 없고[無礙], 머무름이 없는[無住] 원만한 보시를 의미한다.

 

이듬해 이월 초하룻날, 그는 법사 스님(운봉 선사)과 공양주 스님 두 분만을 모시고 취단식(就壇式)을 봉행했다. 먼저 법의를 벗고 알몸이 된 뒤에, 가늘고 깨끗한 명주를 발끝에서 어깨까지(목 위만 남겨 놓고) 전신에 감았다. 그리고는 단 위에 올라가 가부좌(跏趺坐)를 개고 앉아 두 손을 모아 합장을 올렸다. 그리하여 그가 염불을 외우기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곁에서 들기름 항아리를 받들고 서 있던 공양주 스님이 그의 어깨에서부터 기름을 들이부었다.

기름을 다 붓고, 취단식이 끝나자, 법사 스님과 공양주 스님은 합장을 올리고 그 곁을 떠났다. 기름에 전 만적은 그때부터 한 달 동안(삼월 초하루까지) 단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부좌를 갠 채, 합장을 한 채, 숨 쉬는 화석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레에 한 번씩 공양주 스님이 들기름 항아리를 안고 장막(帳幕, 흰 천으로 장막을 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면, 어깨에서부터 다시 기름을 부어 주고 돌아가는 일밖에 그 누구도 이 장막 안을 엿보지 못했다.

취단식은 소신공양하기 위해 단에 오르는 의식으로 소신공양의 첫 단계이다. 위의 인용문은 소신공양의 단계를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소신공양의 종류는 손가락, 팔, 그리고 전신을 소신하여 부처에게 공양하는 것으로 분류된다. 소신공양은 《묘법연화경》의 〈약왕보살본사품〉에서 약왕보살이 향유를 몸에 바르고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 앞에서 보의(寶衣)를 걸친 뒤 신통력의 염원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 몸을 불살랐다고 하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전에서는 이 소신공양을 찬양하여, “이것은 참다운 법으로써 여래를 공양하는 길이다. 나라를 다 바치고 처자로 보시하여도 이것이 제일의 보시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구도(求道)의 불교 수행 한 방편으로 세상까지도 구제하는 데 그 목적을 둔 수행 방편이라는 것이다. 

 

대공양(大共養, 소신공양을 가리킴)은 오시(五時) 초에 장막이 걷히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오백을 헤아리는 승려가 단을 향해 합장을 하고 선 가운데, 공양주 스님이 불 담긴 향로를 받들고 단 앞으로 나아가 만적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와 동시, 그 앞에 합장하고 선 승려들의 입에서 일제히 아미타불이 불리기 시작했다.

만적의 머리 위에 화관같이 씌어진 향로에서는 점점 더 많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오랫동안의 정진으로 말미암아 거의 화석이 되어 가고 있는 만적의 육신이지만, 불기운이 그의 숨골(정수리)을 뚫었을 때는 저절로 몸이 움찔해졌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눈에 보이지 않게 그의 고개와 등 가슴이 조금씩 앞으로 숙여져 갔다.

들기름에 전 만적의 육신이 연기로 화하여 나가는 시간은 길었다. 그러나 그 앞에 선 오백의 대중(승려)은 아무도 쉬지 않고 아미타불을 불렀다. 신시(申時) 말(末)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그러나 웬일인지 단 위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만적의 머리 위로는 더 많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 〈등신불〉 중 만적의 소신공양 부분

 

이 인용문은 만적의 머리 위에 향로가 올려지고 소신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들기름에 전 만적의 육신에 불에 타들어 가고 대중들이 아미타불을 합송하는 가운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그러나 단 위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고 만적의 머리 위에는 더 많은 연기가 오르기 시작하는 이적 현상이 생긴다. “염불을 올리던 중들과 그 뒤에서 구경을 하던 신도들이 신기한 일이라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만적을 바라보았을 때, 그의 머리 뒤에는 보름달 같은 원광이 씌워져 있었다. 이때부터 새전이 쏟아지기 시작하여 그 뒤 삼 년간이나 그칠 날이 없었다. 이 새전으로 만적의 타다가 굳어진 몸에 금을 씌우고 금불각을 짓고 석대를 쌓”게 된다. 이것이 만적에 대한 액자 속 이야기이다. 

액자 속 이야기인 만적의 이야기가 끝나고 이 소설은 결말 부분에서 액자 밖의 이야기인 ‘나’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원혜 대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맘속으로 이렇게 해서 된 불상이라면 과연 지금의 저 금불각의 등신 금불같이 될 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많은 부처님(불상) 가운데 그렇게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아로새긴 부처님(등신불)이 한 분쯤 있는 것도 무관한 일일 듯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다 마치고 난 원혜 대사는 이제 다시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는 않았다. 

“자네, 바른손 식지를 들어 보게.”

이것은 지금까지 그가 이야기해 오던 금불각이나 등신불이나 만적의 소신공양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엉뚱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달포 전에 남경 교외에서 진기수 씨에게 혈서를 바치느라고 내 입으로 살을 물어 뗀 나의 식지를 쳐들었다.

그러나 원혜 대사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 더 말이 없다. 왜 그 손가락을 들어 보라고 했는지, 이 손가락과 만적의 소신공양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겐지, 이제 그만 손을 내리어도 좋다는 겐지 일체 뒷말이 없는 것이다.

 “......” “......”

태허루에서 정오를 아뢰는 큰북 소리가 목어(木魚)와 함께 으르렁거리며 들려온다.

— 〈등신불〉 결말 부분

이렇게 해서 소설 〈등신불〉은 끝난다. 이 인용문에서 주목되는 부분은 “많은 부처님(불상) 가운데 그렇게 인간의 고뇌와 슬픔을 아로새긴 부처님(등신불)이 한 분쯤 있는 것도 무관한 일”이라는 것과 원혜 대사가 ‘나’에게 “남경 교외에서 진기수 씨에게 혈서를 바치느라고 내 입으로 살을 물어 뗀 나의 식지를” 들어 보이라는 부분이다. 만적의 소신공양 깨달음에 비하면 ‘나’의 식지 혈서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자신의 몸을 바쳐 초시간적인 생명 구원과 깨달음의 문제는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마음의 차이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불살생의 계율을 지켜 불가에 귀의하겠다는 마음, 더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은 분명 부처의 마음이다. 그 마음은 한 인간이 마음을 낼 수 있는 방편으로, 〈등신불〉은 이복동생을 위한 소신공양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나아가 인간 모두를 위한 희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동리의 〈극락조〉는 〈등신불〉과는 달리 신문에 연재된 만큼 현실 종교로서 리얼한 삶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집안의 반대로 주인공인 화가 정우와 비구니가 된 지희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 둘의 관계는 용봉 선사의 도움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재가수행과 보살정신을 구현한 소설로 평가받는다. 

이 소설의 대략적인 이야기는 이렇다. 사랑에 실패한 지희는 극락암으로 들어가 비구니가 된다. 정우는 화가로서의 열정을 상실하고 방황하고 떠돌다가 우연히 극락암에서 지희를 만난다. 하지만 지희는 정우의 사랑을 거절한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의 삶은 승과 속의 세계로 나누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구니가 된 지희는 정우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정우 씨와 나는 이미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그러냐 하면 정우 씨가 살고 계시는 그 세상을” 나는 버렸고,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지희는 두 번 죽었지만 공교롭게 살아나게 되었지만, 본래의 지희는 죽고 지금 살아 있는 지희는 부처님의 제자인 ‘정련’이라고 말하면서 정우의 사랑을 거절한다. 그리고 “사랑도 인생도 무상”함을 말한다. 그러나 스님 정련은 정우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이 거짓임을 알고 번민하게 된다. 이 사정을 지켜본 용봉 선사는 지희에게 승과 속은 하나라는 ‘승속불이(僧俗不二)’임을 주지시킨다. 절과 집은 별 차이가 없다. 어디에 있든 부처를 떠나지 않은 마음이 중요하며, 어디서든 보살행을 하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하며 비구니 정련을 속세의 여인 지희로 돌아가게 한다. 

‘승속불이’의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역사적인 인물은 원효 대사이다. 원효는 한국의 대승불교의 하화중생의 이타행을 실천한 스님으로 일심사상(一心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 무애사상(無碍思想)으로 승과 속을 넘나들며 중생과 삶을 같이한 스님이다. 이러한 승속불이 사상은 어떤 국면에서는 정우와 지희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대승불교의 가능 지평을 여는 소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눈 오는 오후〉는 윤회한 한 소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업보와 윤회 사상을 구현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윤득희의 아버지가 내레이터가 되어 딸의 이야기를 전언하는 방식의 1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스토리의 개관은 이렇다.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간 윤득희는 우연히 들른 집에서 전생을 기억해 낸다. 그 집에서 그녀는 바깥 사랑방에 호랑이 그림이 결렸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우물이 있었던 자리를 지적한다. 그리고 그 우물에 자신의 어머니가 빠져 죽었다는 전생을 기억해낸다. 그 우물은 뒤에 사실로 밝혀진다. 업보로 인해 윤회의 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이 〈눈 오는 오후〉 외에 김동리의 70년대 소설 〈저승새〉(1977)에서도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1970년대에 발표되었지만, 소설 모티프 맥락에서 〈눈 오는 오후〉와 궤를 같이하고 있으며, 작품의 완성도적인 측면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소설이다. 

 

〈저승새〉는 전생의 업보로 인해 ‘저승새’로 환생한 한 여인과 만허 스님의 이야기, 그리고 그 절의 만허 스님과 사미승 혜인(慧印)과 적인(寂印) 이야기를 통해 질긴 불교적 인연과 업보를 환기하는 소설이다.

 

“다그르르르……”

저승새가 왔다.

툇마루에 앉아 졸고 있던 만허(滿虛) 스님은 눈을 뜨며 주름살 그것 같은 얼굴을 쳐들었다. 보리수(菩提樹)를 바라보았다.

“다그르르르……”

저승새가 두 번째로 내는 소리였다.

스님의 눈길은 그 소리가 나는, 보리수의 중간 윗가지 쪽으로 쏠렸다. 저기, 비둘기보다 조금 작고 야윈 듯한, 빨강 파랑 노랑 주황, 그리고 잿빛의 오색 실을 꿈속같이 은은하게 감은 그 새는 앉아 있었다. 새의 크기와 빛깔은 작년에 왔을 때나, 십 년 전에 또는 그보다 더 아득한 옛날에 왔을 때나 변함이 없어 보였다.

“다그르르르……”

세 번째로 내는 소리였다.

— 김동리 〈저승새〉 서두 부분

 

위의 인용문처럼 만허(滿虛) 스님이 머무는 절에 해마다 저승새는 날아온다. “십 년 전에 또는 그보다 더 아득한 옛날”인 35년 전부터 저승새는 만허 스님을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스님의 두 눈에는 차츰 야릇한 광채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는 황홀한 환희(歡喜)라기보다 차라리 법열(法悅)에 잠기는 듯했다.” 그리고는 ‘오 가엾은 것……이제 나도 따라가야지’라고 마음속으로 되뇐다. 만허의 속엣말은 저승새에게 하는 말로, 이 양자는 깊은 관계가 있음을 할 수 있다. “진달래 무렵이 되면 어김없이 이 절을 찾아주는 이 야릇한 새의 이름을, 처음 누가 저승새라고 부르기 시작했는지 그것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 처음엔 목탁새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그르르르…… 하는, 이상하게 맑고 투명한 소리가, 목탁 소리 같다 하여 처음엔 그렇게 불렀던 것”이라고 한다. 이 새는 35년 전, 만허 스님이 절에 들어온 그 이듬해에 처음 나타난다. “이 새가 나타났던 첫해에는 스님의 얼굴이 눈물로 젖었다고 어떤 스님이 슬쩍 비친 일도 있었다. 또 어느 해에는, 다그르르르…… 하는 소리를 듣자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오 남이’ 하고 불렀다는 것이다”라는 서술로 볼 때, 만허 스님은 저승새를 어느 한 사람의 목소리로 인식하고 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저승새는 만허 스님이 세속에 있을 때 사랑했던 ‘남이’라는 여인이었다. 만허 스님의 세속명은 경술(慶述)로 남이와 사랑을 했지만, 헤어지게 된다, 남이가 부모의 강권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술은 입산하여 만허 스님이 된다. 그러나 남이는 아들이 죽자 전생의 업으로 인해 저승새가 되어 만허 스님을 해마다 찾아오는 것이다. 저승새가 나타나는 날이면 언제나 스님은 산문 밖으로 사라진다. 이를 수상히 여겨 그 뒤를 가만히 쫓아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스님이 가는 곳은 길마재 마을 앞에 있는 샘터라는 것이다. 절 사람들은 스님의 샘터 나들이와 “새로도 태어나고”라는 말꼬투리로 여러 가지로 스님 이야기를 추측한다.

만허 스님의 속명 경술이 남이네 집 머슴으로 들어간 나이는 열아홉 살 때였다. 그때 남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남이는 경술을 ‘이 도령’이라 불렀고, 경술은 남이를 ‘남이’로 부르며 서로 사랑한다. 남이의 어머니는 “몇 차례나, ‘얌전한 사윗감’이니 ‘씨 받을 사윗감’이니 하고” 의도적으로 말해 사위 삼아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남이는 중매로 혼처가 정해진다. 남이는 “나 부모님과 싸우는 것보다 차라리 시집가서 죽어버릴란다” 또는 “그럼 이 도령도 마음 변치 말아줘, 나 먼저 저승 가서 기다릴게”라고 말하고 시집을 간다. 그날부터 경술은 시름시름 앓다 홀어머니만 사는 본가로 가서 치유하려 하지만 병세가 깊어진다. 그의 홀어머니는 약이 듣지 않자 절에 가 부처님께 기도한다. 그 결과 차츰 나아져 경술은 길마재 마을 앞 샘터까지도 다녀오게 된다. 이 샘터는 저승새가 오는 날 찾아가곤 했던 그 샘터이다. 이 샘터로부터 한 이십 리 떨어져 있는 운봉사로 경술은 입산계를 받고 중이 된다. 만허 스님이 해인사를 찾아 “참선을 시작한 건 다시 그 이듬해 봄, 그 황홀한 목탁새(저승새)가 나타난 뒤의 일이었다. 그는 해인사의 백련암에서 삼 년간이나 참선을 했으면서도 끝내 그새를 잊지 못한 채 운봉사로 돌아오고” 만다.

운봉사의 두 사미인 예인과 적인은 만허 스님이 절 내에서 보이지 않을 때 길마재 마을 샘터를 찾아온다. 그러나 스님은 보이지 않고 그곳에서 한 사내를 만난다. 그 사내는 사미 혜인을 보고 “늬 영근이 아니가?”라고 묻는다. “오늘이 늬 할매 늬 아배 제삿날이다. 안 가볼래?”라고 대답 없는 혜인에게 다시 묻는다. 말 없는 혜인 대신 적인은 사내의 말에 대꾸하고 그 사내가 술을 받으러 동네 쪽으로 간 사이에 누구냐고 묻는다. 혜인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죽자 자신을 맡은 일가 아저씨인데, 자신을 구타해서 마을 사람들이 절로 보내도록 했던 아저씨라고 말한다. 사미 혜인이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죽은 날이 옛날 할머니가 죽은 날로, 할머니가 아버지를 데려간다고 했다는 말을 혜인은 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무덤에 막걸리 한 병과 마른 명태 한 마리를 놓고 절을 시킨 아저씨라는 사내는 세 무덤의 주인공 이야기를 한다.

 

“저 할매 시집와서 이듬해에 아들 하나 낳고 이내 죽었지. 그게 느의 아배다. 덕분으로 느 할배는 평생 홀아비로 아들 하나 키우고 살았다. 그런데 그 아들이, 느의 아배 말이다, 느 할배보다도 한 해 앞서 죽었다 앙이가. 그것도 느 할매가 데려간 거란 말이다. (……) 자(혜인)는 아무꺼도 모를 거다마는, 자 할매 땜에 이 집은 아주 망한 거다. 어째 하필 자기 죽은 날, 아들을 데려가노 말이다. 그것도 독자 아들을. 하도 기가 막혀서 집안 사람들이 무당한테 가서 점을 쳐봤다 안카나. 점을 쳐보니 본디 자 할매가 우리 집에 시집오기 전에 좋아한 남자가 있었다 안카나? 그 남자 땜에 자 할매는 이내 죽고, 아들 하나 있는 것까지 데려갔다 안카나? 그래 굿을 해주먼 원한 풀릴 꺼락 하지만 인자 자도 절에 가버렸고 아무도 없으니 귀신도 달라붙을 데가 없어졌다 앙이가.”

 

이와 같은 혜인의 아저씨뻘 사내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암시한다. 혜인의 할머니가 남이일지도 모른다는, 그러니까 사미 혜인과 만허 스님은 속세의 친조부 간일 수 있다는 암시, 그리고 남이와 경술(만허 스님)과의 사랑의 결실이 혜인의 아버지이고, 그 업보를 거둬가기 위해 할매는 자기가 죽은 날에 자식을 데려간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한다. 이러한 개연성이 이 소설의 불교적 문학성을 높여준다. 

 

그러나 두 사미가 절에 돌아갔을 때 만허 스님은 절에도 와 있지 않았다. 으레 먼저 돌아와 계시리라 생각했던 스님이 보이지 않자 혜인은 또 주먹으로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이튿날도, 그리고 그다음, 그다음 날도 스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절에서는 스님이 큰절(해인사)로 가셨거니 하고 있었다. 그러나 큰절에서도 만허 스님을 보았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자 스님이 윗녘으로 정처 없이 떠나갔다는 등, 어느 산중의 벼랑 위에 가만히 앉아서 열반을 했다는 등 여러 가지 소문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에도 운봉사의 앞뒷산에는 진달래가 벌겋게 피었다. 그러나 해마다 오던 다그르르르…… 저승새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 김동리 〈저승새〉 결말 부분

 

위의 인용문을 보면 만허 스님은 절에 계시지 않는다. 스님은 어디 있는지 혹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저승새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소설의 서두 부분에서 암시했던 “오 가엾은 것……이제 나도 따라가야지”라는 만허 스님의 속엣말처럼 만허 스님도 남이의 환생인 저승새를 따라 저세상으로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현재적 서사 구조 외에 다른 서사 구조인 만허 스님이 입산하기 전 속세에 있었을 때, 남이와의 사랑 이야기와 남이의 죽음과 그리고 사미 혜인과의 암시적 인연이 이 소설을 다시 재조명하게 한다.

 

2. 김정한 〈수라도〉의 미륵사상

김정한은 등단작품 〈사하촌〉(1936)과 관련된 일화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로 반체제 작가이다. 그는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한 작가로, 현실반영과 역사의식이 충실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불교소설 〈수라도〉(1969)로 한국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수라도(修羅道)’는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윤회 중 하나로 아수라도(阿修羅道)를 의미하는 말이다. 삼악도(三惡道)인 지옥도 · 축생도 · 수라도 중 하나로 죄를 조금 덜 지은 사람이 간다는 세계를 의미하지만, 죽은 귀신들이 환생해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고 한다. 

김정한의 불교소설 〈수라도〉는 김해로 시집온 가야부인의 가족사 소설로 우리 민족의 수난사 소설이다. 이 소설의 서두 부분은 가야부인의 임종식으로 시작했고, 수미상관 구조를 차용하여 결말 부분도 임종식으로 마무리한다. 

 

“저 애씨는 시집 몬 깔까 봐 불공 드러러 왔나? 이 비좁은 방에 온!”

“와 그라노, 우리 부체 새끼를 …… 그러지 마라, 내 손지다”

아직 불당답게 패 꾸미지 않은 방 안 벽받이에 안치된 커다란 돌부처 곁에 빠듯이 끼여 앉아 있는 소녀는, 겨우 여남은 살 될까 말까 하는 나이다. 소복 차림의 보살 할머니들이 웅성대는 양을 눈여겨보고 있던 소녀는 별안간 자기를 놀려 주는 핀잔 소리에 눈을 오끔해지다가, 할머니 가야부인의 감싸 주는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딱다그르 하고 웃는 바람에, 못내 수줍어진다. 그녀의 얼굴보다 더 붉게 물들여진, 수박처럼 둥글둥글한 종이 등들이 천정이며 뜰 안을 온통 메우고 있다. 관등절의 오후였다.

……분이는 이러한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할머니 가야부인의 장엄한(그녀는 장엄이란 형용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임종을 지켜보고 있다. 벌써 그녀는 소녀가 아니다. 낭자가 반듯한 색시다. 

(……)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그녀의 머리맡에서 반야심경을 읽고 있는 안면 있는 스님의 나지막한 목청은, 분이의 생각을 줄곧 어린 손녀 시절로 이끌고 갔다. 할머니의 얼굴에 미륵불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져 보였다. 할머니가 미륵불로 보이고, 미륵불이 할머니로도 보이고…… 

— 김정한 〈수라도〉 서두 부분

 

   

김정한
(金廷漢, 1908~1996)

위 인용문은 김정한의 〈수라도〉의 서두 부분이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마지막 서술문장이다. “할머니의 얼굴에 미륵불의 얼굴이 자꾸만 겹쳐져 보였다. 할머니가 미륵불로 보이고, 미륵불이 할머니로도 보이고……”이다. 이 문장으로 보면, 손녀인 분이가 할머니인 가야부인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수라도〉는 불교소설로, 미륵신앙의 세계를 보여주려 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미륵신앙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한다는 신앙이다. 미륵의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레야(Maitreya)는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된 말로 자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미래불은 석가모니불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을 근거로 출현한다. 미륵보살은 인도 바라나시국의 바라문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의 교화를 받으면서 수도하다가,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올라갔고, 지금은 천인(天人)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하여 56억 7000만 년이 지난 뒤 나타난다는 미륵불은 앞으로 올 세상에 대한 유토피아적 이념이 표출된 희망의 신앙이라는 면에서 우리의 불교사 속에서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정작 이 소설에서의 갈등은 불교와 유교과 무속의 문화적 정신적 갈등이다. 그 갈등의 시작은 땅속에 묻혔던 미륵불을 우연히 발견하고 나서부터이다. 가야부인의 시아버지 오봉 선생의 완고한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가야부인도 유교적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전통적 부덕을 갖춘 여인이다. 그러나 미륵불이 발굴되자 미륵당을 세우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시아버지의 가부장적 권위에 저항한다. 결국 오봉 선생은 아버지를 찾아 만주 땅을 헤매다가 가산을 탕진하고, 죽음에 임박하여 유교의 이념과 불교의 교리, 즉 유교적 인(仁)과 불교의 자비가 같은 덕목임을 인정하지만, 전통적인 유교 사회는 붕괴를 맞게 된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진 오봉 선생은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진전 모여 앉은 가족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 그러고는 점점 멀어져가는 의식을 억지로 잡아매기라도 하듯, 눈까풀에 힘을 주어 가야부인 쪽을 쏘아보면서

“공가의 인(仁)이나 석가의 자비심이……근본에 있어서 같다고 했……제?”

겨우 이렇게 더듬거리고 눈을 감은 것이 결국 최후가 되고 말았다. 그만큼 그는 유교사상에 무서운 집념을 가졌던 것이다. 감옥에서 받은 앞이마의 푸렁덩이가 이내 시커메져갔다.

가야부인은 오봉 선생이 마지막 눈을 감았을 때 비로소 합장기도를 올렸다. 그녀의 곱게 감은 눈 속에는 사랑 앞 모란꽃이 소리 없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 그것이 가야부인이 시집온 이후 허씨 가문에 있었던 세 번째의 비극이었다. 

 

위의 인용문처럼 가부장적인 유교의 전통은 무너지고 가야부인 집안의 비극은 계속된다. 그 흐름의 단편들은 3 · 1만세 사건으로 인해 시숙인 밀양 양반이 죽음을 당하고, 가야부인이 기울어지는 가세와 서생인 남편 명호 양반을 대신해서 양반 부인으로서 집안일을 돌보게 되며, 수양딸과 같은 종의 딸 옥이가 위안부로 징발되지 않도록 상처한 사위와의 혼례식을 허락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는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측면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가야부인이 시집온 허 진사댁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할아버지의 죽음, 오봉 선생의 둘째 아들인 손아래 시숙의 왜놈에 의한 생죽음, 시어머니의 식음 전폐 등이 이어지며 가세가 기울어지고 권속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러나 돌미륵불이 발견되고, 죽은 고명딸의 사위가 미륵불을 모실 미륵당을 지어주면서 집안 살림은 활기를 찾는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져 투옥되었던 오봉 선생이 출옥하면서 칠십 노령으로 숨을 거둔 그 이듬해에 조국은 해방된다. 그러자 가야부인의 육 남매 중 학병을 피해 일본으로 유학 갔던 막내는 돌아왔으나 여자정신대에 끌려갔던 마을 처녀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고등계 경보부에 있었던 참봉댁 맏아들이 해방 후 숨어 지내다가 다시 돌아와 경찰 간부가 되고 몇 해 뒤에는 국회의원이 된다. 그런 와중에 한국전쟁이 터진다. 가야부인은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들으면서 막내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최후를 기다린다. 

이렇게 김정한의 〈수라도〉는 우리 근대사의 격랑 속에 가야부인의 부침이 반복되는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통해 민족의 수난적인 역사를 증언한다. 조야한 줄거리 대강을 통해서 살펴보았지만, 이 소설은 본격적인 불교소설이라기보다는 역사라는 외부적인 폭력으로 인해 몰락하는 양반 가문의 가족사를 그린 소설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수난과 고통을 삼악도의 하나인 수라도로 표상하려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야부인의 산기슭에 묻힌 돌미륵불 발견과 미륵당을 건립이 표상하고 있는 부분을 주목할 때 김정한의 〈수라도〉는 우리 민족의 미래 구원을 염원하기 위한 소설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가야부인의 불심의 시작은 거시적이기보다는 미시적이고 개인적인 염원 때문에 토착화된 불교소설적 경향을 지닌다.

   

〈수라도〉의 무대가 된 경남 양산 원동면 화제리의 용화사

 

그녀가 사위를 데리고 간 곳은 바라 저번날 돌부처의 머리가 보인 곳이었다. (……) 가야부인은 역시 푸석푸석한 흙바닥을 긁적거리더니, 흙 칠갑이 되어 있는 돌부처의 얼굴을 드러내고, 그 앞에 딸의 유골을 잠깐 놓았다. 그러고는 합장을 하였다. ‘나무 상주 시방불/나무 상주 시방법/나무 상주 시방승’ 이런 소리를 한참 중얼대고는 얼굴을 드는 것이었다.

“이 사람아, 자네 처는 인자 부체님한테 영 맽깄데잇!”

말은 수월했지만, 한숨은 길었다. (……)

미륵당의 터가 닦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이튿날의 일이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미륵당 건립의 계기는 죽은 딸 때문이다. 가야부인은 집을 나올 때 머리 깎고 중이 되려고 했다. “늘그막까지의 시집살이가 고되어서 아니다. 그런 건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직 신심 탓이었다. (……) 더 자신의 신심을 묵살한다든가 하는 것은 정말 스스로 억겁의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가야부인은 생각한다. 이런 장모의 심정을 들은 사위는 이렇게 장모를 위로한다. “절은 어데 꼭 장모님이 지어야 하능기요. 누라도 절만 지어서 부체만 모시문 안대겠능기요. 지가 짓겠심더. 죽은 처를 위해서라도……”라며 “불각시 떠오른 자기의 생각 숫제 자부라도 하듯이 벙긋”거린다. 미륵당이 세워지자 “애살과 앙심이 가슴에” 찬 사람은 무당인 천금새다. 미륵당이 생긴 후 ‘심심풀이’로라도 청해오는 사람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벙어리 냉가슴 앓듯 자기 집 안에 차려둔 ‘신주상’에서 ‘비손’이나 ‘푸념’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고, “엇쇠, 썩 물러가거라! 미련한 미륵신아!”라고 저주하곤 했다. 그러다가 이와모토 참봉의 병세가 심상치 않아 ‘오귀’ 굿을 하는 기회에 미륵당을 침범하려 한다. 뒤풀이의 장단이 잦은 고비를 한참 넘고 화랑이가 들고 있던 넋대가 이와모토 참봉집 대문을 나서자, 넋대를 잡은 화랑이 뒤에는 천금새, 그리고 그 뒤에는 동네 애들이 따라간다. 넋대는 가야부인의 집 앞 담벼락을 두어 번 툭툭 치고는 이내 돌아서 미륵당 쪽을 향해 갔다. 이윽고 미륵당 문전에 다다랐지만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절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넋대는 이와모토 참봉을 덮친 악귀의 꼬투리가 그 안에 있기나 한 듯이, 미륵당 대문구틀 짬 땅바닥만 툭툭 쳐댔다. 천금새는 무슨 주문을 중얼중얼하고는 거기에다 ‘물밥’을 철썩 엎질러 버렸다. 그러고 돌아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느닷없이 물밥과 흙더미가 천금새 일행의 머리 위에 마구 덮씌워”져서 굿은 엉망이 되었다, 이로써 소설 〈수라도〉에서의 불교과 무속의 갈등 구조는 이렇게 끝나게 된다. 그러나 이와모토의 횡포는 그치지 않는다. 마을 어귀에 있는 동사의 종소리에 옥이 외에도 여섯 명의 처녀가 모여들었고, 이와모토 구장이 앞장서서 배에 그들을 실으려고 하자 박 서방이 뛰어온다. 그는 옥이가 자신의 처라고 주장하며 증거물로 호적등본을 꺼내 보여준다. 순사부장도 어쩔 수 없이 옥이를 보내주게 되고 그들은 그날 미륵당에서 백년가약을 맺는다. 그러나 처녀 여섯 명을 제물처럼 데려다주고 돌아오던 이와모토는 이튿날 아침 낭떠러지 밑 강물에 시체가 되어 떠 있었다. 그다음 해 조국은 해방을 맞게 된다. 

 

가야부인의 머리에 흰 털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 막내 때문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가야부인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집에 있을 때 돌아가신 시어머님처럼 천수나 치고 미륵당에 나가면 미륵불 앞에 앉아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곧잘 자줏빛 모란꽃잎이 뚝뚝 떨어지곤 하였다.

“석이 안 왔나?”

가야부인은 겨우 눈을 또 뜨곤 막내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멀리서 또 포성이 킁! 울려왔다. 왜 사람들은 싸우지 않음 안 될까? 가야부인은 무슨 말이라도 할 듯이 입을 약간 우물하다 만다. 이마에서 잇달아 솟는 땀이 드디어 그녀의 열반을 알리는 것 같았다.

— 김정한 〈수라도〉 결말 부분

 

위 인용문이 김정한 소설 〈수라도〉의 끝부분이다. 가야부인의 열반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마무리된다. 가야부인은 우리 근세사에서 사대부 여인의 삶의 전형적인 모습일 수 있다. 삶의 모습이나 정신세계가 그러하다. 가부장적인 유교적인 삶을 위협하는 모든 재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속에 의지했던 여인들. 그러나 가야부인은 여타의 여인과는 달리 미륵불상과의 인연으로 불교에 귀의한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막내아들이 이름을 부르다가 열반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미륵신앙은 《미륵삼부경(彌勒三部經)》 등 여러 경을 토대로 하여 발생한 신앙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미륵삼부경》은 미륵보살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부지런히 덕을 닦으면, 이 세상을 떠나 도솔천(兜率天)에 태어나서 미륵보살을 만날 수 있으며, 미래세에 미륵이 성불할 때 그를 따라 사바세계로 내려와 제일 먼저 미륵불의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오해를 받고 있는 이 미륵신앙이 몽매한 민중들 속에서 인기를 얻게 되는 이유는 구세주가 현현한다는 통속적인 예언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미래에 불안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토피아의 세계를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정한의 〈수라도〉는 수라도와도 같은 우리 현실공간에서 가야부인이 발견하고 모신 미륵의 유토피아적인 미래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되는 소설일 것이다. ■

 

유한근
시인 ·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명지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등단.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역임.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평론집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인간, 불교, 문학》 등 저서와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문학평론가협회상, 동국문학상, 월산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간과 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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