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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 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
-반성적으로 살펴보는 재가불자의 지계 생활
[79호] 2019년 09월 01일 (일) 이자랑 jaranglee@hanmail.net

1. 나는 재가불자인가?

‘나는 재가불자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또한 이 글을 읽을 재가불자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을 재가불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재가불자들을 대상으로 계율을 강의할 기회가 생기면, 필자는 강의 첫 시간에 이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여러분은 재가불자이신가요?” 모두 큰 소리로 “예∼”라고 대답한다. 이어 “그렇다면 여러분은 왜 자신을 재가불자라고 생각하시나요?”라고 다시 물어본다. 좀 엉뚱한 질문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다 이내 다양한 대답을 쏟아낸다. ‘절에 다니니까요.’ ‘이렇게 교양대학에 나와 불교도 공부하고, 스님 법문도 열심히 찾아 들으니까요.’ ‘불공도 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심도 깊어요.’ ‘절에서 하는 봉사 활동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어요.’ ‘계를 받았어요.’ 심지어 ‘초파일에 등 달아요.’ ‘손에 염주 차고 다녀요.’ ‘절에 시주해요.’라는 대답까지 나온다. 여기서 언급되는 행동들은 분명 재가불자들이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자 신행 생활의 중요한 특징들이다. 그렇다면 이들 행동 가운데 한두 가지만 실천하면 그 사람은 불교도일까? 

몇 년 전부터 필자는 자타공인 재가불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이 재가불자의 삶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신심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신체 일부처럼 불교를 접하며 살았고, 심지어 불교를 전공하고 지금은 불교를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다. 종교를 묻는 질문에 단 한 순간도 망설인 적이 없을 만큼 필자는 철저한 불교신자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나는 왜 스스로를 불교신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 삶은 재가불자의 삶에 부합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난감한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재가불자의 삶은 이런 것이라고 쉽게 정의를 내릴 수 없었다. 재가불자로서 삶에 대한 어떤 성찰이나 고뇌도 없이, 나아가 실천도 없이 그저 불교도라 여기며 한두 가지 신행 생활에 만족해 온 나는 진정한 불교도일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과 이 의문에 대한 필자 나름의 답을 제시한 것이 이 글이다. 하나의 ‘답’일 뿐 ‘정답’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누군가에게는 이 글이 정답을 찾아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계율을 이야기하겠다면서 재가불자로서의 자격 유무를 운운하는 서론으로 글을 시작한 이유는 모든 불교도가 공통분모로 갖추어야 할 조건 중 하나가 ‘계율의 수지와 실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출가와 재가를 불문하고 언제부턴가 계율은 불교도에게 있어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해 버린 것 같다. 지키면 나쁠 것은 없어 보이지만, 굳이 힘들게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고 할까. 그저 불교도에게 요구되는 형식적인 규범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나친 진단이라고 비판받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에서 제기한 의문을 품고 필자가 수년간 지켜본 한국불교도의 모습은 이러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계율은 불교도가 불교도답게 살 수 있는 구체적인 생활 방침을 제시한 가르침이다. 불교가 성립한 당시부터 불도 수행의 기반으로 강조되어 왔으며, 불교도로 사는 한 그 가치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계율의 수지와 실천에 무관심한 것일까? 필자가 수년간 재가불자를 대상으로 계율을 강의하면서 느낀 점을 말한다면, 의외로 많은 이들이 계율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내용도 가치도 중요성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이 글에서는 재가불자가 지켜야 할 계율의 구체적인 내용, 실천 의의, 실천 방법 등을 살펴보며, 계율의 수지와 실천이 불교도에게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재가불자의 조건

‘재가불자’, 다시 말해 우바새(優婆塞, 남성 재가신자)와 우바이(優婆夷, 여성 재가신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엇일까? 재가불자의 신행 생활이 다양하듯이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역시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재가불자가 갖추어야 할 공통된 조건, 이른바 공통분모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불교 문헌을 통해 보건대, 그 공통분모는 ‘삼귀의(三歸依)’와 ‘오계(五戒)의 수지’이다. 즉,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앞으로 재가불자로 사는 한 다섯 가지 계를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통해 재가불자라는 신분을 얻게 된다. 장아함 《유행경》을 예로 보면 다음과 같다.

저는 지금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며, 승가에 귀의하겠습니다. 오로지 바라옵건대 여래께서는 제가 정법 가운데에서 우바새가 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지금부터 이후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생명을]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음행하지 않고, 속이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바라옵건대 세존께서는 제가 정법 가운데에서 우바새가 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삼귀의에 대한 귀의와 오계 수지의 맹서가 없으면, 그 사람은 재가불자의 자격을 얻지 못한다. 물론 이 중 재가불자가 갖추어야 할 보다 본질적인 조건은 삼귀의이다. 깨달음을 얻고 그 길을 가르쳐주신, 이른바 불교의 개조인 부처님[佛], 나아가 그분이 제시한 가르침[法], 그리고 그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며 생활하는 출가 공동체[僧]에 대한 신심이 없다면, 불교신자가 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삼귀의는 믿음[信]의 표명이다.

그런데 이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닌, 실천을 이끌어내는 믿음이다. 이 점은 삼귀의의 ‘귀의’라는 단어의 의미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귀의는 ‘사라나(ⓟsaraṇa, ⓢśaraṇa)’의 한역어인데, 사라나는 √śṛ(의지하다, 의존하다)로부터 파생된 명사로 구호(救護), 구제 등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하며, √śṝ(죽이다, 파멸시키다, 없애다)로부터 파생된 말로 “소멸시킨다는 의미에서 귀의처이다. 귀의한 사람들이 그 귀의에 의해 두려움 · 공포 · 괴로움 · 악취(惡趣)라는 고난을 없애고 소멸시킨다는 의미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귀의를 통해 두려움 등을 소멸시키고 보호받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어떤 행동이 미래세에 자신에게 유익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를 알아, 그 실천을 통해 불이익을 미리 차단한다는 점에서 구호받고, 두려움 등을 소멸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컨대, 불교도가 되어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을 확립하여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현재는 물론이거니와 미래세의 나쁜 과보까지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불법승 삼보에 대한 귀의를 기반으로 재가불자가 실천해야 할 기본행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오계(五戒)’이다. 앞서 인용한 《유행경》의 한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삼귀의의 표명이 끝나면 오계의 수지를 맹세하게 된다. 오계는 불법승 삼보에 의지하며 앞으로 재가불자로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이후 어떤 생활방식을 유지해야 하는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오계의 ‘계(戒)’는 실라(ⓟsīla, ⓢśīla)의 한역어이다. 실라는 √śīl(명상하다, 봉사하다, 실행하다)로부터 파생된 명사로 습관, 경향, 성격 등의 의미를 지니는데, 이로부터 발전하여 선한 습관, 선한 행위, 도덕적 행위 등을 의미하게 된다. 윤리나 도덕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오로지 자발적 의지하에 올바른 행위가 자신의 몸에 습관처럼 붙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혹은 그러한 상태를 계라고 한다. 

5세기경에 붓다고사(Buddhaghosa)가 지은 《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에서는 계라는 말은 ‘습관적으로 행한다.’ ‘확고하게 지킨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한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습관적으로 행한다는 것은 올바른 행동을 습관처럼 몸에 익혀 신업(身業) 등을 흐트러짐 없이 항상 유지하는 것을 의미하며, 확고하게 지킨다는 것은 습관이 된 선한 신업 등이 모든 선법(善法)을 확립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재가불자는 오계라는 다섯 가지 올바른 행동을 습관화하여 잘 유지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모든 선법을 확립하는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계는 좋은 습관의 유지이자 선법의 수행 기반으로서 재가불자가 실천해야 할 필수적인 생활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재가불자가 지켜야 할 계로는 오계 외에 팔재계(八齋戒)나 보살계(菩薩戒) 등도 있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오계이다. 오계는 상계(常戒, nicca-sīla)라고 하여 재가불자로 사는 한 항상 지켜야 할 필수적인 계이다. 그렇다면, 오계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 실천을 통해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 그 의의에 대해 다음 장에서 살펴보자.

3. 오계의 내용과 실천 의의

1) 오계의 내용 

오계는 흔히 “불살생(不殺生) · 불투도(不偸盜) · 불사음(不邪婬) · 불망어(不妄語) · 불음주(不飮酒)”라고 해서 ‘불(不)’, 즉 ‘하지 말라’라는 금지의 명령형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살생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등이다. 한역 경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인데, 이는 살생이라는 악행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무언가 모를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 즉, 수지자로 하여금 무언가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느낌을 받게 한다. 실제로 필자가 불자들을 대상으로 계율 강의를 하다 보면, ‘살생 등을 저지르면 어떻게 되나요?’ ‘지옥에 가나요?’ ‘개미를 죽이면 다음 생에 개미로 태어나나요?’ 등의 질문을 자주 받는다. 이는 악행을 왜 해서는 안 되는지 그 의미를 생각하기에 앞서, 하지 말라고 하는 행위를 했을 때 본인에게 주어질 죄과를 두려워하고 꺼리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나오는 질문들이다. 이는 물론 악행을 저지르지 않게 하는 데 어느 정도의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속적인 실천 내지 적극적인 선행으로까지 발전시켜 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한역 경전 가운데는 “이살생 · 이투도 · 이음행 · 이망어 · 이음주”라고 하여 이들 악행으로부터 멀어지다, 떠난다는 의미를 지니는 ‘리(離)’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빨리 혹은 산스끄리뜨 문헌에 보이는 오계의 내용을 고려한다면 ‘불’보다는 ‘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다 원어의 의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오계의 실천 의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불살생 등의 표현보다 빨리 등의 원어에 근거해서 이해하는 것이 좀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므로, 이하 원어에 근거해서 오계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빨리어 경전에 보이는 오계는 다음과 같다.

① 생물을 죽이는 행위를 떠나는 학처를 저는 수지하겠습니다.

    (pāṇātipāt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

②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행위를 떠나는 학처를 저는 수지하겠습니다.

    (adinnādān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

③ 애욕에 있어 삿된 행위를 떠나는 학처를 저는 수지하겠습니다.

    (kāmesu micchācār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

④ 거짓말을 떠나는 학처를 저는 수지하겠습니다.

    (musāvād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

⑤ 방일(放逸)의 원인인 곡주 · 과실주 · 취하게 하는 것을 떠나는 학처를 저는 수지하겠습니다.

    (surā-meraya-majja-pamādaṭṭhānā veramaṇī-sikkhāpadaṃ sam-ādiyāmi.)

‘불살생’이라는 표현과 비교해 보면 한눈에도 알 수 있듯이, 여기서는 살생 등의 악행으로부터 떠나겠다는 자발적인 약속이 느껴진다. 이는 도덕이나 윤리 정도의 의미를 지니는 오계의 성격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점이다. 계는 어겼을 때 누군가로부터 벌을 받는 성격의 규범은 아니며, 지키는 것도 어기는 것도 모두 본인의 몫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다. 

첫 번째는 살아 있는 생물을 죽이거나 해치는 행위를 문제 삼고 있다. 《숫따니빠따》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세상에서 움직이는 것이든 움직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존재에 대해 무기를 버리고, 살아 있는 존재를 죽여서는 안 되며, [타인으로 하여금]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살해하는 것을 용인해서도 안 된다.” 생류에 대해 스스로 가하는 직접적인 폭력이나 살생 외에 다른 사람에게 시켜서 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이 저지르는 것을 묵인하는 행위 등을 모두 경계하고 있다. 두 번째 계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행위를 떠나는 학처를 저는 수지하겠습니다.”라고 하여 주어지지 않은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불투도’라고 하면 남의 것을 훔치는 행위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조문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행위 모두를 문제 삼고 있다. 그것이 물건이든 아니면 추상적인 그 무엇이든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면 그것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므로, 이 계가 대상으로 하는 행동 범위는 상당히 넓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공을 슬쩍 가로채는 행위도 포함될 것이며, 훔칠 의도는 없었다 해도 어쩌다 손에 들어온 이익을 꿀꺽하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나아가 자연계를 훼손시키는 행위 역시 포함된다. 이 역시 자신은 물론 타인이 취하는 것 역시 용인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계는 사음, 즉 자신의 배우자 외에 남의 아내나 남편을 탐하는 행위를, 네 번째 계는 거짓된 말을 경계하고 있다. 거짓된 말이란 말 그대로 ‘거짓’된 말, 즉 일반적인 거짓말을 비롯하여 이간질하거나 아첨하는 말, 욕 등도 모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이상 네 가지 행위는 그 자체로 악행이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보아도 살생이나 도둑질, 사음, 거짓말은 악행이다. 하지만 다섯째 “방일(放逸)의 원인인 곡주 · 과실주 · 취하게 하는 것을 떠나는 학처를 저는 수지하겠습니다.”라는 조문은 어떠할까. 음주 자체가 악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음주는 왜 오계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일까?

이 점과 관련하여 우바새의 불도 실천법을 설하는 《우빠사까자나랑까라》라는 문헌에서는 “부처님이 음주를 금지한 것은 유정의 즐거움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닌, 술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게 될 재난으로부터 유정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즉, 음주는 그 자체가 악행은 아니지만, 다른 악행을 유발함으로써 중생을 재난에 빠지게 하기 때문에 금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대비바사론》에 전한다. 어느 마을에 덕망 높은 우바새가 살았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해 그만 옆집에서 날아든 닭을 잡아 안주로 삶아 먹어 버렸다. 잠시 후에 옆집 여인이 닭을 찾으러 오자 시치미를 뚝 떼고 여인을 돌려보냈다. 그런데 돌아서 가는 그 뒷모습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 그만 이성을 잃고 여자를 범하고 말았다. 화가 난 옆집 남자는 그를 관가로 끌고 갔지만, 그 우바새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평소 존경받던 사람이 술로 인해 살생 · 도둑질 · 사음 · 거짓말이라는 중죄를 한꺼번에 저지르게 된 것이다. 음주는 이처럼 자기 통제력을 상실하여 다른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여지를 만들 가능성을 높인다. 그래서 살생 등의 네 악행은 실죄(實罪) 혹은 성죄(性罪)라고 하는 데 비해, 음주는 차죄(遮罪)라고 한다. 

음주가 갖는 이러한 위험성을 고려하며, 음주계의 조문을 다시 보자. 

방일의 원인인 곡주 · 과실주 · 취하게 하는 것을 떠나는 학처를 저는 수지하겠습니다.

이 조문에서 주목할 점은 두 가지이다. 첫째, 흔히 불음주계라고 하면 음주만이 문제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작 조문에서는 곡주(surā) · 과실주(meraya) · 맛자(majja)의 셋을 들고 있다. 이 중 곡주와 과실주는 각각 곡물로 만든 술과 과실로 만든 술이다. 술의 종류를 나누어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맛자’는 ‘취하다, 흥분하다’ 등을 의미하는 √mad에서 파생된 명사로 알코올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 마시면 취하는 모든 음료를 비롯하여 마약이나 각성제처럼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환각성 물질까지 모두 포함한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제5계에서 문제 삼는 행위는 그 범위가 상당히 넓다고 할 수 있으며, 왜 그 자체 악행은 아닌 듯 보이는 음주가 다른 악행들과 더불어 기피되는지, 그 이유가 보다 명확해진다.

둘째, 그 이유와 관련하여 조문에서 이들 행위가 ‘방일의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방일(pamāda)’이란 나태나 부주의를 의미한다. 그 반대는 불방일(不放逸, appamāda)인데, 경전에서 불방일은 팔정도가 생겨나는 전조이자, 선법을 일으키고 불선법을 없애는 기반이며, ‘사띠(sati, 念)’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으로 설명된다. 사띠는 마음 챙김, 마음 새김, 마음 집중, 주시(注視), 마음 지킴, 알아차림, 수동적 주의집중 등 다양한 역어의 가능성이 제기되며 한국불교계에서도 논의가 많았던 용어이다. √smṛ(기억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심신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경전에서는 불방일을 사띠를 지닌 상태라고 설명한다. 즉, “사띠를 잃어버리지 않아 방일하지 않고, 좋은 말과 나쁜 말을 구분할 줄 아는 사려 깊음을 얻어 지녀야 한다.” 등이다. 따라서 방일이란 자신의 심신을 관찰하는 사띠의 힘을 잃고 풀어진 상태에서 나오는 나태함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술 등을 방일의 원인으로 보는 이유는 이러한 것들을 마시거나 복용하면 사띠를 잃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의 몸이나 입, 혹은 마음에서 불선법이 일어나도 그것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언제 악행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불교 경전에서는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이유 혹은 음주로 인해 발생하게 될 손실로 음주가 안색을 나쁘게 하고, 힘을 약하게 하며, 시력을 쇠퇴시키고, 질병을 일으키는 등의 육체적 손실과 더불어, 분노하기 쉬워지고, 싸움을 일으키며, 나쁜 명성을 유발시키며, 지혜의 힘을 약하게 하고, 재산에 손실을 가져온다고 하는 등의 해악을 거론하고 있다. 이 모두가 사띠의 힘을 상실함으로써 부주의하고 나태해져 발생하게 되는 손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와 동시대에 중인도에서 함께 세력을 확장했던 자이나교 역시 오대서(五大誓, pañca-mahāvrata)라고 하여 ‘살생(hiṃsa) · 망어(anṛta) · 투도(steya) · 비범행(abrahma) · 소유(parigraha)’의 다섯 가지 악덕으로부터 떠날 것을 주장한다. 불교의 오계와 비교해 보면, 불음주 대신 무소유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살생이나 도둑질, 사음, 거짓말은 불교 당시 이미 인도사회에서 공통적으로 기피하는 악행이었다. 불교 역시 이를 오계 안에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음주는 다르다. 소유를 특히 문제 삼는 것이 자이나교의 입장이라면, 음주를 문제 삼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곡차(穀茶), 반야탕(般若湯) 등 음주를 합리화하는 말이 예로부터 사용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불교도조차 음주에 대한 태도는 관용적이다. 하지만, ‘불방일’이 갖는 의미를 생각할 때 ‘방일의 원인’이라 지목되는 음주에 불교도가 그렇듯 관대한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될 것이다. 

2) 오계 실천의 의의

그렇다면, 오계는 왜 실천해야 할까? 다시 말해 오계를 실천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은 무엇일까?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 심신의 평안함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악행을 저지르며 산다. 분노나 미움, 탐욕, 시기 등과 같은 악한 정서 혹은 부주의로 인해 살생도 도둑질도 사음도 거짓말도 한다. 그런데, 이런 행동을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마음 한구석에 불편함을 느낀다. 어쩔 수 없었다며 합리화시켜보곤 하지만, 마음의 짐은 안고 갈 수밖에 없다. 또 때로는 사안에 따라 심각한 불안을 느끼거나 혹은 실제로 사건에 휘말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행을 반복한다. 나에게 이익이 되니까, 그 사람이 미우니까, 상황이 어쩔 수 없었으니까 등 갖가지 이유로 마음 한구석에 돌덩어리를 매다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때로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도 있는 그 악한 습관들을 끝도 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오계를 받는다는 것은 이러한 짐으로 심신을 괴롭히는 일 없이, 가뿐하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길의 출발점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 악행으로 인한 심신의 번뇌를 줄여가게 된다. 흔히 불도 수행을 계정혜(戒定慧) 삼학으로 표현하듯이, 지계는 올바른 신구의의 확립을 통해 평안함을 갖춤으로써 정과 혜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이것은 분명 오계 실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혹은 반드시 얻어야 할 중요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정말 중요한 오계의 실천적 의미가 있다. 우리는 오계의 실천을 통해 무엇을 실현해야 하는가. 그 ‘왜’에 대한 진짜 대답을 생각해 보자.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계는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생류에 대한 자비심(慈悲心)’의 배양에 그 실천 의의가 있다. 오계의 실천을 통해 이 두 가지 마음을 배양해야 하며, 또한 이 두 가지 마음이 배양되어 갈 때 오계의 실천 역시 내실을 기하게 된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란 참괴심(慚愧心)이다. 즉, 자신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 내면에서 느끼는 부끄러움[慚, hiri]과 밖으로 느끼는 부끄러움[愧, ottappa]이다. 안팎으로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계는 실천할 수 없다. 부끄러움이야말로 계를 실천하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갖는다. 그렇다면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그것은 다른 생류를 괴롭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참괴심과 더불어 생류에 대한 자비심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서 자비심이란 모든 생류가 다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자(慈, mettā)와 고통에 처한 사람을 보았을 때 연민의 정을 느끼는 비(悲, karuṇā)의 마음이다. 

‘왜 오계를 지켜야 하는가?’ 상윳따니까야에 의하면 “모든 방향을 마음으로 편력해 보아도 그 어디에서도 자신보다 사랑스러운 것은 발견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신이 사랑스럽다. 따라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라고 한다. 만약 누군가 내게 살상(殺傷)의 위협을 가하다면,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을 그 누군가 가져가 버린다면, 내 배우자가 누군가와 삿된 관계를 맺는다면, 누군가 나를 속이고 욕하고 비난한다면, 누군가 술을 마시고 내게 상처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면, 내가 느낄 고통과 슬픔, 분노는 어떠할까. 이를 기억한다면 결코 다른 생류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은 할 수 없다. 우리는 가끔 이기심 혹은 선하지 못한 감정, 무지 등으로 인해 이를 잊고 살지만, 잊는 만큼 우리는 다른 생류에게 상처를 주게 되며, 다른 생류로부터 다시 그 상처를 돌려받는 악순환을 거듭하며 살아가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행복을 갉아먹으며 사는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성도 후 잠시 교화의 의욕을 상실했지만, 곧 중생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 세상을 향해 교화의 문을 열어갔다고 한다. 깨닫기 전의 자신처럼 괴로움[苦]을 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눈을 돌린 것이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불교도의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생류라면 누구나 안고 살아가야 할 생로병사의 괴로움, 그 괴로움을 보듬어주어야 하는데, 하물며 괴롭힌다는 일이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다른 생류에게 해를 가하는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개선하려 하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신행 생활을 열심히 한다 해도 진정한 불교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로 버리지 못하는 악한 습관을, 재가불자는 오계의 수지를 계기로 선한 습관으로 바꾸어가게 된다. 악한 습관도 선한 습관도 반복하면서 강도를 높여가기 마련이다. 작은 악행도 반복하다 보면 익숙해져 강도가 높아지고, 작은 선행도 반복하다 보면 좀 더 큰 선행으로 발전하게 된다. 오계를 실천하며 의식적으로 악한 습관을 끊고, 선한 습관을 확고하게 익혀간다면, 나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정화된 나로 인해 다른 생류도 상처받거나 피해받을 일이 줄기 때문에 모두 행복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자애심을 배양해가다 보면, 탐진치(貪瞋癡)로 물든 마음이 점차 정화되어 악행을 멈추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선법(善法)을 짓는 쪽으로 마음이 개선되어 간다. 생류에게 살상을 가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생류를 보면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거짓말이나 나쁜 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말이 상대방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참괴심과 자애심을 배양해간다는 점에서 오계의 실천은 근본적으로 삶의 질을 바꿀 수 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회, 국가, 전 세계를 바꾸는 힘이 될 수 있다. 

4. 오계의 실천 방법

오계의 실천 방법에 대해서는 경전에 체계적인 설명이 있는 것은 아니므로, 경전에 산발적으로 보이는 내용을 종합하고, 여기에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을 더하는 방식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불자들의 다양한 의견이 추가되면 좋겠다. 

첫째, 수계의식에 참석해야 한다. 오계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출발점이 필요하다. 재가불자는 당연히 오계를 지켜야 한다는 인식이 먼저 확립되어야 하는데, 수계식이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다. ‘살다 보면 생물을 죽일 수도 있고, 살다 보면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도 있고, 감정에 충실하다 보면 올바르지 못한 이성 관계를 가질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거짓말도 필요하고, 원활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라면 음주도 필요하다.’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오계는 절대로 실천할 수 없다. 적어도 내가 재가불자의 삶을 선택했다면 오계는 기본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수계식을 통해 재가불자는 오계의 내용이 무엇인지, 왜 이를 어기면 안 되는지, 그 안에 담긴 가르침은 무엇인지 등의 가르침을 접해야 한다. 그 교육을 통해 수계 희망자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고, 자발적으로 이들 악행을 떠날 것을 결심하고 맹세해야 한다. 수계식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속에 깃든 강한 의지가 이후 오계를 지키는 힘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이를 계체(戒體)라 부른다. 요컨대, 악행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힘이다. 악행을 저지를 상황에서도 이 힘이 마음속에서 기능하면서 악행을 멈추게 되는데, 수계하지 않은 사람은 이러한 힘을 마음에 심을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

둘째, 참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수계의 순간에는 오계 실천에 대한 의지가 불타오르지만, 시간이 흐르며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면 점차 의지가 약해진다. 처음 어겼을 때 불편하던 마음도 한두 번 반복하다 보면 둔해지고, 어느 순간부터 오계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해진다. 열 중 아홉, 아니 열 명 모두 이런 현상을 경험했을 것이다. 오계의 수지를 맹세한다 해도 그 순간부터 철저히 수지한다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오계를 어기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선한 방향으로의 변화이다. 조금씩이라도 변화해가면 되는 것이다. 벌레 한 마리라도 죽이면 큰일 난다고 하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계율이 싫어질 수 있다. 필자가 접한 재가불자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수계하고 나니 마음만 불편하다. 오계를 받고 그런 죄의식에 사로잡히느니 차라리 안 받고 편하게 살고 싶다.’ ‘지금 이런 세상에 벌레 한 마리 안 죽이고 사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현실성 없는 가르침이다.’ 등등…… 지키지 못한 계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계에 대한 오해이다. 계를 어긴다 해도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계를 통해 자신의 심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조금씩 이끌어가면 되는 것이다. 

다만 파계했을 때 참회를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이 없다면 개선 역시 없다. 살생이나 거짓말 등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도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의 양면을 갖고 있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슬쩍 눈 감고 악행을 용납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마음의 변화를 잘 감지하고, 범계에 대처하는 것이다. 설사 계를 어겼다 해도 그 파계를 통해 심신의 상태를 되돌아보며 재점검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참회의 반복을 통해 그 사람의 심신은 점차 선한 방향으로 정착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오계가 재가불자의 필수조건이라는 점만 잊지 않으면 된다. 내가 재가불자인 이상 오계는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당장은 이 모두를 실천하기 어려워도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참회하는 시간을 통해 개선해 갈 수 있다. 그 개선이 중요하다. 내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혹은 부주의한 상황에서 오계를 어겼지만, 그 행동을 돌아봄으로써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문제점을 찾아낼 수 있고, 나아가 그 안에 담긴 진리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반드시 참회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 놓고 혹은 기회가 되는 대로 혼자 참회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고, 주기적으로 사찰이나 불교 공동체 활동 등을 통해 참회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다. 재가불자의 포살(布薩) 같은 것이 이루어지면 좋을 것이다. 자신이 한 행동 가운데 마음에 걸렸던 점을 중심으로 스스로 참회하면 된다. 

셋째, 계율 관련 법문이나 강의, 혹은 책 등을 접할 기회를 가능하면 많이 갖도록 노력한다. 오계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당장 어긴다고 무슨 불이익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살다 보면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히는 일도 많다. 결국 오계를 지키는 힘은 스스로 길러가야 하는데, 이때 계율의 수지 의의를 접할 수 있는 법문 등을 접하면 적지 않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세 가지, 즉 수계의식과 참회, 그리고 계율 관련 법문 등은 재가불자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각 사찰이나 불교 단체에서 관심을 갖고 효과적인 시스템을 갖추도록 고민해야 한다. 적어도 재가불자로서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려는 사람은 수계식을 통해 첫걸음을 내딛도록 해야 한다. 수계의식이 일상적인 통과의례처럼 실행되어서는 안 되며, 오계의 내용과 실천의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단 한 순간일지라도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오계의 실천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회 역시 범계 여부를 확인하고 형식적인 참회문을 읊는 차원에서 이루어진다면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강압적인 느낌을 주어서는 안 되며, 편안하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그 상황에서 그 악행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면 된다. 그리고 계율 관련 법문이나 강의, 저서 등을 통해 재가불자가 계율을 수지하는 의의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일정 기간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반드시 그 효과를 체험할 것이다. 효과를 느끼고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 단계가 올 때까지 지도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다음 단계는 각 개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두 가지가 사부대중의 협력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면, 개인적으로 시도해 볼 만한 방법들도 있다. 첫째, ‘내 마음 들여다보기’이다. 이것은 최근에 필자가 신경 써서 실천하고 있는 방법이다. 신심의 움직임이 이상하다고 판단되면 잠시 멈추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누군가에 대해 못마땅한 감정이 고개를 내밀고 올라올 때, 나만 편해지고자 하는 이기심이 발동할 때,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올 것 같을 때, 아니면 이미 나왔을 때 일단 더 발전하지 않도록 멈추고 생각해 본다. 그러한 감정이나 행동이 어디에서 오는지, 과연 올바른 것인지…… 대부분 놀랍도록 유치한 감정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나 미움은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시기나 질투, 미움, 내 이익 등과 결부되어 있을 때가 많다. 때로는 나의 분노 등이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그럴 경우에도 잠시 마음 들여다보기를 하다 보면 감정이 옅어지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진짜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미워할 수 있는 경우는 사실 많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탐진치를 잘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자애심은 배양된다. 

둘째, 선우(善友)와의 교류에 힘쓰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살다 보면 이런저런 기회를 통해 삶의 전환점을 발견하곤 하는데, 특히 좋은 사람과의 교류는 많은 변화를 가져다준다. 사실 필자가 ‘나는 불자로서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된 계기도 본받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는 불자들과의 만남이었다. 향기가 느껴지는 그들의 삶을 보며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고, 나 역시 그런 불자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향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선우와의 교류는 잊고 살았던 혹은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나의 부족함을 일깨워주고,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정표가 되어 준다.

셋째, 자애명상을 실천하면 좋을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계의 실천은 ‘생류에 대한 자비심의 배양’이 핵심이다. 이 자비심은 오계의 실천 속에서 점차 배양되기는 하지만, 명상을 병행하며 그 느낌을 잡아간다면 한층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명상을 지도하는 사찰이나 불교 단체도 많아졌기 때문에 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일정 기간 지도를 받고 나면 혼자 《자애경(慈愛經, mettā-sutta)》을 독송하며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이 행복하고 안락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꾸준히 길러가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자애경》은 《숫따니빠따》 제1장 〈사품(蛇品)〉 가운데 여덟 번째 경으로 10게 남짓으로 구성되어 있다.21) “……어떠한 생물일지라도 두려움에 떠는 약한 것이든, 강하고 굳센 것이든, 긴 것이든, 굵은 것이든, 중간 정도의 것이든, 짧은 것이든, 아주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눈에 보이는 것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든, 멀리 살고 있는 것이든, 가까이 살고 있는 것이든, 이미 태어난 것이든, 앞으로 태어날 것이든,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해라. ……” 등 자애의 마음을 닦으며 모든 생류의 행복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5. 결론 

근년 들어 불자 인구의 감소에 우려를 표하는 목소리가 높다.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를 보면, 불자 인구는 해마다 줄고 있고 몇 년 전부터는 개신교에 신도 수 1위 자리를 내준 상황이다. 이는 분명 걱정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이 숫자보다 더 염려스러운 것은 이 조사에서 불자로 분류된 사람 중에 진정한 불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하는 점이다. 이 중에는 무교에 가까운 불교신자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거나 등산길에 오가며 사찰에 들르곤 했던 기억 등으로 정서적으로 불교에 친근감을 느끼는 정도의 사람들이다. 물론 이들보다 한층 진지하게 신행생활을 하는 불자들도 적지 않다. 정기적으로 사찰 행사에도 참석하고, 불교 공부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분명 훌륭한 재가불자들이다. 하지만, 만약 이들이 불법승 삼보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을 기반으로 자신의 신구의(身口意)를 청정히 하는 삶을 소홀히 하고 있다면, 실은 재가불자로서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을 놓치고 있는 셈이다.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 이른바 ‘칠불통게(七佛通偈)’라 불리는 게송이다. “모든 악을 짓지 않고 온갖 선을 봉행하며 스스로 그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 그것이 불교이다.” 자신의 몸과 입과 마음을 잘 다스리며 선법을 쌓고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이 불교라는 것이다. 

재가불자가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신행생활은 바로 지계(持戒)이다. 기도도 수행도 공부도 봉사 활동도 지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진정한 변화는 이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계의 수지 후 우리는 강력하고 뿌리 깊은 내면의 번뇌와 현실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 이를 다스리며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순간순간 탐진치가 자비심으로 변화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재가불자라면 이 경험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신행생활의 기반이자 불교를 이끌어가는 힘이다. 이런 경험을 소중히 하는 재가불자의 수가 많아져야 한다. 숫자와 상관없이 이런 불자가 한국불교를 지탱하고 있는 한 그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을 것이다. ■

 

이자랑 /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 졸업, 일본 도쿄대학 인도철학 · 불교학 전공 석사, 박사. 〈초기불교교단의 연구-승단의 분열과 부파의 성립〉으로 박사학위 취득. 초기불교 교단사 및 율장에 관한 논문 50여 편을 비롯하여 《나를 일깨우는 계율이야기》 《붓다와 39인의 제자》 《도표로 읽는 불교입문》(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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