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2020년 1월 런던대 킹스칼리지(King’s College)에서 유럽과 북미 그리고 아시아 불교학자들이 참가하는 ‘불교 음식윤리’ 콘퍼런스가 예정되어 있다. 유럽의 제반 학문 분야에서 음식 관련 주제가 이미 콘퍼런스 등 학술행사에서 다양하고 빈번하게 논의되어 온 사정에 비추어 보면, 영국 불교학계의 이 학술행사는 조금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유럽과 북미의 종교학계에서 음식과 관련된 연구는 하나의 중요한 연구 분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종교학회(American Academy of Religion)에는 이미 종교와 음식(Religion and Food Unit) 분과가 있으며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음식연구는 불교에 비해 상당한 정도로 진척되어 있다.

한국 종교학계에서 음식과 관련된 연구는 산발적이고 일회적으로 진행되어 왔으며 불교학계의 음식에 관한 연구도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 TV, 신문 등에 음식과 관련한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하면서 한국 인문학계에서도 음식을 주제로 한 학술행사들이 과거보다는 조금 더 자주 개최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각각의 전공 분야에서 음식을 자기 주제로 삼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현재 불교학계의 음식에 관한 연구는 불교학 내부적 주제, 즉 불교의 음식 금기나 음식 관련 계율, 사찰음식과 관련된 내용이 주된 부분을 이루고 있으며, 여전히 기존 연구의 시각과 방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전체 불교학에서 음식 관련 연구는 대단히 주변적인 연구에 머무르고 있다.

현대 종교학이 음식을 다루는 태도는 이미 종교학적 테두리를 벗어나 현대 음식학의 범주들과 시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와 있다. 미국종교학회 음식분과의 연구 지향을 보면 이 분과의 목적이 단지 종교학의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대 음식학의 주제와 범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제기되는 음식 관련 제반 이슈에 대한 종교적 논의와 대안을 추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불교는 대장경과 한국불교 문헌이라는 풍부한 문헌적 자산과 사찰음식이라는 불교 물질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대중적으로 인지된 음식으로서 역할도 하고 있다. 따라서 불교학에서 음식 연구, 나아가서는 현대 음식학을 수용한 불교음식학의 자산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불교의 경·율·논 속에서 일정한 체계를 보이는 불교의 음식관과 그 실천 방식을 간략하게 개괄해보고 불교음식학이라는 종교 음식학의 한 분야를 간략히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의 서술 차례는 경전과 논서에 나타난 불교의 음식적 세계관을 살펴보고 그 시각에 근거한 실천으로서 음식에 관한 계행과 수행을 살펴보는 것이다.  

 

2. 음식에 대한 불교의 생각

음식의 질은 윤리적 수준에 조응한다.

인간의 건강을 해치는 주범으로 흔히 설탕, 소금 또는 지방이 언급되곤 한다. 그러나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음식 그 자체가 해(害)가 있다기보다는 인간이 적절한 선을 넘어 그러한 음식물들을 과용하는 것이 문제의 본질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음식이 야기하는 해로움은 음식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문제, 즉 인간의 인식과 행위의 문제이다. 

초기불교 문헌인 《아간냐경(Aggañña sutta, DN 27)》은 인도불교의 음식에 대한 시각을 살펴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이 경전은 물질적 음식이 등장하기 이전의 이상적인 음식과 중생과의 관계 및 물질적 음식의 등장, 특히 쌀의 등장과 그 이후의 음식과 중생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시사들을 던져준다.

향을 먹고 살았고 남녀라는 성의 구별이 없었던 색계의 존재였던 중생은 그 업력이 다하여 욕계로 떨어진다. 욕계로 떨어진 중생에게 ‘지미(地味)’라고 불리는 최초의 음식이 출현한다. 이 음식은 먹으면 아무런 배설물을 남기지 않고 소화가 되는 음식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음식에 대한 탐욕이 생겨나면서 음식의 질은 점차 악화되기 시작한다.

음식과 중생의 관계에서 중요한 전변은 쌀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최초의 쌀은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저절로 자라나는 존재로 묘사된다. 아침에 소비하면 저녁에 다시 그만큼의 쌀이 생겨나고 저녁에 소비하면 그만큼의 쌀이 아침에 생겨났다. 그런데 쌀에 대한 욕심이 생겨난 중생들이 한 끼 분량 이상의 쌀을 취하면서 쌀의 질은 점점 나빠져 갔다.

그 때문에 상좌부 논서인 《청정도론(Visuddhimagga)》은 “음식은 곧 번뇌이다”라고 설파했다. 음식이라는 존재는 탐욕이라는 번뇌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이 논서는 보여주고 있다.

중생의 윤리적 수준을 나타내는 쌀의 등장은 중생에게 커다란 변화를 야기했다. 남녀의 구분이 없었던 중생의 몸은, 완전히 소화되지 않고 음식 찌꺼기를 몸에 남기는 쌀로 인하여 배설을 필요로 하였고 중생의 몸에 배설기관이 생겨나야 했다. 이로써 중생은 남녀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고, 배설기관은 곧 성적기관으로 성욕을 가지게 되었다. 《아간냐경》은 식욕과 성욕의 등장을 음식을 통한 필연적 과정과 결과로 보고 있다.

음식에 대한 탐욕이 점증함에 따라 즉 중생의 윤리적 수준이 악화됨에 따라 중생은 1) 음식 질의 악화 2) 외모의 악화 3) 체격의 왜소화 4) 수명의 악화 5) 자연환경, 동식물 등 자연계 전반의 상태와 관계의 악화를 야기한다고 불교 논서들은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윤리적 수준은 일차적으로는 음식의 상태를 악화시키며 나아가 음식을 둘러싼 제반 요소들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한다. 

 

3. 계율과 음식

초기불교의 상황에서 수행자와 재가자의 일상적 접촉의 계기는 음식이다. 매일 아침 벌어지는 탁발의 상황은 수행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음식물을 얻는 과정이자 출가사회와 재가사회가 만나는 접촉의 장을 제공한다. 이 만남의 공간은 출가사회의 필요와 목적 그리고 재가사회의 그것이 조화하고 때로는 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음식 관련 계율조항이 지향하는 가장 주된 관심사는 재가사회와의 조화이다. 특히 음식과 관련된 계율조항을 가지고 있는 바일제와 중학법의 ‘식품(食品)’ 조항에서 이러한 모습이 상세하게 언급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음식 관련 바라제목차 범주들은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탐착의 제어’라는 역할도 수행한다.

각각의 음식 관련 계율조항을 1) 재가사회와의 조화, 2)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제어로 단순하게 분리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측면을 하나의 계율조항이 동시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탁발의 공간에서 수행자는 수행자로서의 위의를 요구받고, 재가자는 재가자로서 도리와 태도를 요구받는다. 재가자의 음식 보시는 수행자들의 수행자로서 자세와 위의를 전제하며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 수행자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생겨난다. 탁발 시에 수행자는 수행자로서 위의와 음식에 대한 수행자로서 태도, 그 모두를 요구받는다. 따라서 탁발의 공간은 기본적으로 출가사회와 재가사회 사이의 긴장이 항존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재가자가 마련하는 음식은 현실 생활을 해 나가는 재가자들이 그들의 생활용품의 일정분량을 희생하여 준비한 것들로, 그들의 신앙심의 크기와 깊이를 물질적 형태로 드러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공양받을 만한 요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수행자에 대한 음식 보시는 그들로서도 용납하기 어려운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래는 빨리 상좌부 계율의 바일제 식품 10개 항(바일제 31조-40조)을 서술한 것으로 출가사회의 재가사회와의 조화를 위한 규정과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탐착의 제어라는 두 가지 측면을 보여준다.

 

31조: 아프지 않은 비구는 공공 급식소에서 한 번 음식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이상 먹으면 바일제이다.

32조: 대중식은 적절한 때 이외에는 바일제이다. 적절한 때란 아플 때, 옷을 보시할 때, 가사를 만들 때, 여행할 때, 배를 탈 때, 성대한 행사가 있을 때, 수행자가 음식을 제공할 때이다. 오직 이때만이 적절한 때이다.

33조: 한 곳에서 음식공양을 받고 또 다른 곳에서 음식공양을 받으면 적절한 때 이외에는 바일제이다. 적절한 때란 아플 때, 옷을 보시할 때, 가사를 만들 때이다. 오직 이때만이 적절한 때이다.

34조: 비구가 신도의 집에 초대받아 빵과 밥을 권유받을 때, 원한다면 두세 그릇은 상관없으나 그 이상을 받으면 바일제이다. 두세 그릇을 받아 돌아오면 다른 비구들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오직 이렇게 하는 것만이 올바른 행위이다.

35조: 비구가 식사를 마치고 더 이상 음식 받기를 거절한 후 잔식이 아닌 식사나 간식을 먹으면 바일제이다.

36조: 만일 비구가 이미 식사를 마치고 음식 받기를 거절한 비구에게 “비구여, 이 음식을 드시오.”라고 하고서 고의로 계율을 어기게 만들어, 그 음식을 먹게 되면 바일제이다.

37조: 만일 비구가 비시(非時)에 밥이나 간식을 먹으면 바일제이다.

38조: 만일 비구가 저장해 놓았던 밥이나 간식을 먹으면 바일제이다.

39조: 다음과 같은 음식은 미식이다. 기(ghee), 생소(生酥), 기름, 꿀, 당밀, 생선, 고기, 우유, 커드. 만일 비구가 병중이 아닌데도 자신이 먹기 위해 이와 같은 미식을 요구하여 먹으면 바일제이다.

40조: 만일 비구가 물이나 이쑤시개를 제외하고 주지 않은 음식을 입에 넣으면 바일제이다.

 

불교 수행자는 탁발에 실패했을 때 ‘복덕사(福德社)’라고 불리는 무료 음식급식소에서 한 번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다. 그러나 며칠씩 연달아 음식을 제공받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불교 계율 문헌에는 계율이 성립한 인연담을 서술하고 있는데, 계율의 금지 이유는 재가자들로부터의 사회적 비난에 주로 근거한다. 바일제 31조의 계율에서 사회적 관례인 복덕사의 음식 보시 규정을 위반한 출가자와 재가사회와의 갈등을 볼 수 있다. 또한 탁발이라는 불안정한 음식 조달 방식을 기피하는 비구들이 가진 음식에 대한 욕구, 즉 안정적으로 음식을 확보하고자 하는 욕구를 제어하는 측면을 이 계율은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재가사회에 물질적 부담을 주지 않고 또한 그들과의 갈등을 피하려는 모습은 대중식에 대한 제한(32조)이나 반복적인 음식 보시를 받는 것에 대한 제한(33조), 두세 그릇 이상의 보시 금지(34조), 미식 요구 금지(30조), 허락받지 않은 음식섭취 금지(40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재가사회와의 조화로운 공존이라는 측면 이외에 수행자들에게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제어’라는 측면도 이들 계율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수행자가 음식의 맛에 탐착하여 고기, 생선, 유제품, 꿀 등과 같은 미식을 요구하는 행위(39조)는 금지된다. 우유나 기(ghee), 고기, 생선 등의 식재료는 재가자들도 일상적으로 먹기 어려운 값비싼 고급 식재료이다. 일반적으로 좋은 맛을 가진 이러한 음식에 탐착하여 재가자에게 이러한 음식을 요구하는 것은 금지된다.

음식에 대한 욕구 때문에 비시(非時)에 음식을 먹는 행위(37조)는 금지된다. 음식물을 저장하는 행위(38조) 또한 금지된다. 이 두 가지 조항 또한 음식에 대한 욕구와 밀접하게 관계된 계율이다. 육체적 허기는 음식을 부른다. 또한 음식 확보에 대한 불안정성은 저장의 욕구를 불러온다. 이 두 가지는 기본적으로는 ‘음식의 양’에 대한 욕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의 음식에 대한 예절이나 상세한 음식섭취 방식에 대한 것은 바라제목차, 중학법에 주로 언급되고 있다. 중학법 또한 재가사회와의 조화로운 생활이나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탐착의 제어라는 측면과 관계되어 있으면서, 구체적으로는 식사 시의 행위들과 보다 밀착된 내용들을 언급하고 있다. 중학법 식품(食品) 조항들은 크게 ① 음식에 대한 탐욕을 제어하는 부분, ② 식사 시의 예절과 관계된 부분, 두 가지로 구분된다.

 

① 음식에 대한 탐욕

29번째 조항: 나는 적절한 양의 콩 커리를 음식으로 받겠다.

30번째 조항: 나는 발우의 높이만큼만 음식을 받겠다.

34번째 조항: 나는 적당량의 콩 커리와 음식을 먹겠다. 

36번째 조항: 나는 좀 더 받기 위하여 콩 커리와 음식을 밥으로 덮지 않겠다. 

37번째 조항: 나는 아프지 않을 때 먹기 위해서 밥과 콩 커리를 더 요청하여 먹지 않을 것이다.

38번째 조항: 나는 잘못을 찾기 위하여 다른 이의 발우를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39번째 조항: 나는 입이 터지게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이들 일곱 가지 중학법 계율조항은 비구들이 음식을 받거나 먹을 때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탐욕적 행위를 제어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여섯 가지 조항들은 비구들이 음식을 받을 때와 관계되어 있으며 마지막 39번째 계율조항은 음식을 먹을 때와 관련되어 있다.

 

② 식사 예절

41번째 조항: 나는 음식을 입 가까이 가져오기 전에는 입을 벌리지 않겠다.

42번째 조항: 나는 음식을 먹으면서 손 전체를 입속에 넣지 않겠다.

43번째 조항: 나는 입에 음식이 가득할 때 말하지 않을 것이다.

46번째 조항: 나는 볼이 터지게 먹지 않겠다. 

47번째 조항: 나는 손에서 밥풀을 털면서 먹지 않겠다.

51번째 조항: 나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지 않겠다. 

52번째 조항: 나는 손을 핥으며 먹지 않겠다.

53번째 조항: 나는 발우를 핥으며 먹지 않겠다.

54번째 조항: 나는 입술을 핥으며 먹지 않겠다.

56번째 조항: 나는 쌀알이 들어 있는 발우 씻은 물을 사람이 사는 곳에 버리지 않겠다.

 

식사 예절과 관련된 중학법 조항은 23개이다. 위에서는 그중 중요한 몇 가지 계율만을 언급했다. 탁발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그들의 수행 정도와 인간적 됨됨이 등 다양한 면모가 재가사회에 노출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재가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가까이에서 그들 수행자가 자신들의 물질적 보시를 받기에 합당한 집단인가를 평가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것은 출가사회가 재가사회와 조화하고 그들의 물질적 보시를 확보하는 데에 가장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장이다.

식사 시의 수행자의 예절에 관한 조항은 또한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탐착을 제어하는 측면과 내용상 분리되지 않는다. 식사예절을 통해 그들이 음식에 탐욕을 가진 집단이나 개인인지 혹은 보시를 받을 만한 수행과 위의를 갖춘 집단이나 개인인지가 재가자의 눈 앞에서 명확해진다고 할 수 있다.

 

4. 음식과 수행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탐착’ 즉 음식에 대한 탐착이 번뇌를 야기한다는 초기 인도불교의 시각은 그 궁극적 해결책으로 수행을 제시한다. 음식과 관련된 대표적인 수행법으로는 ‘염식상(饜食想)’과 ‘염처(念處)’ 수행이 언급되고 있다.

염식상 수행의 요체는 음식이라는 오감을 유혹하는 대상에 대한 혐오상을 일으킴으로써 그 대상에 대한 탐착을 제거하는 방식의 수행이다. 이 수행은 초기불교에서는 수행방식의 하위항목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가 《청정도론》에 와서 40가지 수행방법 중 하나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청정도론》에서 염식상 수행은 감각적 혐오를 일으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음식을 먹기 이전의 향기로운 냄새와 좋은 모양의 색과 형태를 가진 음식이 ‘씹는 과정에 동반되는 혐오상’ ‘몸속 내장기관에 들어갔을 때 위액 등 체액과 섞였을 때의 혐오상’ ‘배설되는 과정의 혐오상’ ‘배설 이후의 혐오상’ 등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음식의 변화상 관찰을 통해 음식에 대한 혐오상을 일으키는 것이 빨리 상좌부 《청정도론》에서 언급하고 있는 ‘염식상’의 핵심적 수행방식이다. 이 수행방식은 감각적 혐오를 일으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설일체유부 논서나 대승 《유가사지론》 등에 보이는 염식상의 수행방식은 빨리 상좌부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의 방식은 흔히 ‘인식적 혐오’라 불리는 것인데, 개별 식재료를 신체 내외의 요소와 연결시켜 연상함으로써 혐오상을 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염식상 수행방식을 들어보자.

 

만약 걸식 시에 떡을 얻었을 때는 (그것을) 사람의 위장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만약 보릿가루(죽)를 얻었을 때는 (그것을) 뼛가루 죽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만약 소금을 얻었을 때는 (그것을) 사람의 이빨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만약 밥을 얻었을 때는 (그것을) 구더기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만약 채소를 얻었을 때는 (그것을) 사람의 털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만약 국을 얻었을 때는 (그것을) 소변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만약 우유나 커드를 얻었을 때는 (그것을) 사람의 뇌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만약 연유나 꿀을 얻었을 때는 (그것을) 사람의 기름과 지방이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 만약 생선이나 고기를 얻었을 때는 사람의 고기라고 생각하여야 한다.

 

이 방식은 상좌부의 방식인, 음식물의 저작(咀嚼), 소화, 배설의 과정을 관찰하는 과정이 아닌, 개별 식재료를 신체 각 부분과 연관시키는 인식을 통해 혐오상을 일으키는 방식이다. 

현대심리학은 ‘음식적 혐오’를 1) 감각적 혐오 2) 인식적 혐오의 두 가지 방식으로 분류한다.

감각적 혐오는 감각기관을 통한 실제 경험에 근거한다: 예를 들면 빨간 베리의 독성으로 고생한 경험을 통해 빨간 베리에 대한 혐오가 생기며, 기름기 많은 음식에 체한 경험은 기름기 음식에 대한 기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한편 인식적 혐오는 실제로 피해를 본 경험과 상관없이 마음속에 형성되어 있는 부정적 연관과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그 자식에게 독이 있는 베리에 대하여 경고를 하면 그 후 그 아들은 베리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 수 있으며, 마찬가지 방식으로 ‘돼지고기는 부정(不淨)하고 더럽다.’는 믿음이 종교적 음식 금기 이면에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 염식상의 방식을, 음식에 대한 의미론적 정보를 통해 혐오성을 야기하는 인식적 혐오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자인 리처드 스티븐슨(Richard J. Stevenson)은 “인식적 혐오가 감각적 혐오보다 더 강력하고 지속적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불교 전체에서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탐착’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염처’ 수행이다. 수행의 단계로 보면 염식상은 예비정이라 할 수 있고 염처 수행은 근본정(根本定)으로 규정된다. 즉 염식상은 음식의 맛과 양에 대한 탐착을 완화시킬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그러한 갈애를 근절할 수는 없는 수행으로 여겨진다. 이에 비해 염처 수행은 음식에 대한 탐착의 뿌리를 제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치방식으로 간주된다. 

음식이라는 대상의 혐오상을 통해 음식에 대한 탐착을 제거하는 수행은, 그 탐착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감각과 인식, 즉 탐착의 주체가 가진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수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반해 염처 수행은 음식 탐착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감각과 인식을 다룸으로써 음식에 대한 갈애의 뿌리를 제거하는 수행으로 간주된다.

 

5. 나오며

한국 불교음식문화의 사상적 토대는 선불교이다. 동일한 불교지만 인도불교의 음식 활동에 대한 시각과 선불교의 그것은 판이하다. 인도불교가 수행자의 생산 활동을 금하는 반면, 선불교는 보청법에 의해 모든 수행자가 식재료를 마련하는 생산활동을 하는 것이 수행 생활과 더불어 중요한 일상활동으로 요구한다. 저장 행위도 인도불교에서는 계율로 금지되는 반면 선불교에서는 사찰의 중요한 일상 중 하나이다. 수행자의 요리 행위도 인도불교에서 금지되는 반면에 선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직분을 맡아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일상이다. 이로 인해 한국, 중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선불교에서는 각국이 독특한 불교 음식문화가 형성되었다.

선불교 음식관은 인도불교 음식관과는 판이한 시각과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소위 ‘선불교 음식학’의 정립은 한국 불교음식 연구의 필요불가결한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인도불교 음식학’에 관한 박사논문을 썼지만, 한국 불교음식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불교 음식학’을 연구, 정립하는 것이 목전의 과제이다.

또한 불교음식학이 단지 불교학적 테두리에서 음식 관련 주제와 시각 그리고 방법론만을 다루는 것은 현대의 음식 관련 이슈와 내용을 담기에는 여러 가지 제약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교학의 음식 연구는 현대 음식학의 문제의식, 내용, 시각,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불가피할 것으로 생각된다. 불교음식학은 단지 불교학 내의 주제에 대한 음식 연구가 아니라 현대 음식 이슈에 대한 불교적 혜안과 대안을 제시하는 ‘불교음식학’이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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