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여 전 신문사 논설위원 시절부터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빼도 박도 못하는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내 오른쪽에는 영혼의 은사인 법정 스님이 계시고, 왼쪽에는 설악산 오현 스님, 마음 한가운데는 김수환 추기경님, 그리고 머리 위에는 예수님이 앉아 계신다”라고.

돌이켜 생각하고 음미해 볼수록 얼마나 가소로운 자아도취적 주장인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주장하며 살아왔다. 

 

오현 스님과의 인연은 아마도 문화부 기자 초년 시절 종교담당으로 일하기 시작한 1988년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스님은 ‘10 · 27 법난(法難)’으로 집도 절도 모두 빼앗긴 채 ‘낙척거사(落拓居士)’처럼 지내고 계셨다. 취재차 조계사 건너편 법보신문사에 가면 이따금 편집국장실이나 사장실 한구석에서 중진 스님들의 48권 화엄경 법회가 열리곤 했다. 조계종단에서 알 만한 스님들이 웃고 소리 지르고 다투면서도 막판에 가서는 절묘하게 판돈을 나누며 화해하며 헤어지던 모습이 지금도 파노라마 영화처럼 선명하게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30대 초반의 어린 마음에 솔직히 처음에는 눈살이 찌푸려졌으나 몇 달이 지나자 금세 익숙해졌다. 저렇듯 ‘솔직담백하고 인간적인 모습’은 어쩌면 1,600년을 이어온 한국불교의 ‘매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때 내 맘속에서 작은 불성(佛性)이 발아(發芽)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6개월여가 지났을 무렵이다. 법회(?)에서 늘 호구(虎口)처럼 패를 읽히고 돈을 잃으면서도 동자승 같은 미소를 짓기 일쑤였던 중진 스님이 잠시 차를 한 잔 들이켜시더니 대뜸 내게 툭 한 말씀 던지셨다. “조계종에 오래 출입한 일부 기자들이 종정이네 총무원장이네 사칭하면서 스님들 알기를 개떡같이 하고, 종단 간부 스님들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오명철이 너는, 교회 열심히 다닌다는데 나 같은 땡초를 만나도 꼬박꼬박 불교식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 존댓말을 하는 게 기특하다.”고 하셨다. 스님과의 본격적인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스님에 대한 세간의 인물평은 넘칠 만큼 많으니 이쯤 해서 스님과 나만의 이야기 또는 일화 몇 토막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생각나는 건 2015년 3월 4일 백담사 무금선원에서 열린 동안거 해제 법회 때 이야기다. 석 달여 동안 무문관(無門關)에서 젊은 수좌들과 똑같이 용맹정진한 뒤 해제법회에 나온 스님은 만행을 떠날 선승들에게 돌연 절집에서 듣도 보도 못한 영어 화두를 꺼내 드셨다.

“스테이 풀리시, 스테이 헝그리(Stay Foolish, Stay Hungry).”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스님이 수좌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무슨 말인지 알아? 알아맞히는 녀석한테 내가 상금으로 100만 원을 주겠다.” 법당에 있던 수좌들을 비롯해 사부대중들 사이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스님이 덧붙이셨다. 

“나한테 장학금을 받는 한 학생이 날 찾아 백담사에 왔다가 안거 중이라 못 만나니까 시자를 통해 쪽지를 넣어줬어. 나더러 ‘노망해도 괜찮아’라고 하더군.”

10월부터 인적이 끊기는 백담계곡 산중 깊은 곳에 틀어박혀 ‘이 뭣꼬’를 화두의 핵심으로 알고 정진해 온 불제자들이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1955~2012)가 2005년 스탠포드대학교의 졸업식 연설에서 한 21세기 최고 연설의 핵심 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운 좋게도 그의 명연설에 대한 신문기사와 동영상을 통해 정답을 알고 있던 내가 번쩍 손을 들었다. 

그때까지 내가 그 자리에 와 있는 줄 모르셨던 스님이 미소를 지으시더니 “오, 오명철이구나. 쟈가 저래 봬도 동아일보 국장이었다. 그래 답을 알면 말해 보거라.” “예 스님.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는 백담사 동안거 석 달뿐 아니라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끊임없이 어리석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스님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시더니 “맞다. 이리 나오너라.” 하시면서 사부대중과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100만 원짜리 수표를 내게 상금으로 주셨다. 지극히 속물스러운 인간인 나는 우쭐했으면서도, 고된 동안거를 마친 수좌 스님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그런데 또 이 무슨 낭패란 말인가. 스님은 또 영어 화두 하나를 다시 꺼내 놓으셨다. 

“그럼 ‘스테이 위어드, 스테이 디퍼런트(Stay Weird, Stay Diff-erent)’는 또 무슨 뜻이더냐?”

앞서보다 더 어색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운 좋게도 정답을 알고 있었던 나는 내친김에 다시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스님. 얼마 전 전 세계에 중계된 2015년 제87회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각색상을 받은 그레이엄 무어의 수상 소감인데 ‘조금 별나거나 달라도 괜찮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스님이 이 두 말씀을 엄숙한 동안거 해제 자리에서 하신 의도는 ‘진리를 찾는 길은 멀고 험난하지만 그 과정에서 크게 어리석어도 괜찮고 늘 갈구해야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좀 괴상하게 비쳐도 되고 남과 달라도 상관없다’는 법문을 주신 것으로 새기고 있습니다.” 

스님은 흡족했던지 파안대소를 하면서 다시 100만 원짜리 수표를 꺼냈다. 나는 뿌듯하기보다는 세상 소식에 관한 얄팍한 지식으로 동안거의 혹독한 고행을 마친 수좌 스님들을 곤혹스럽게 한 부끄러움으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이 ‘21세기 백담사판 법거량(法擧量)’과 ‘오현당표 선문답(禪問答)’을 목격한 영광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당시 현장에는 일간지 기자들이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서둘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후배 종교담당 기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불교사에 남을 한 장면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 이야기는 하루 이틀 건너 두 신문 문화면에 비중 있게 보도됐다. 

 

스님은 절집의 큰 어른이면서 시봉(侍奉) 드는 상좌 하나 없이 늘 서울 강남의 오피스텔이나 강남구 신사동 만해사상실천연구회 사무실에서 ‘독거노인’처럼 홀로 지냈다. 전기밥통으로 밥을 지어 이를 주먹밥처럼 뭉쳐 냉장고 냉동실에 쌓아두었다가 식사 때도 맞추지 않고 레인지에 데워 궁상맞게 드시는 것을 보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어느 날 작심하고 ‘이제는 나이도 있고 하시니 시봉도 받고 그러시지 웬 궁상이시냐’고 한마디 했다. 그러자 스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씀했다. “나도 한때 노스님을 시봉했는데 어찌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래서 내가 그때 ‘혹 내가 나중에 수백, 수천의 상좌를 거느리게 될지라도 절대 시봉은 받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나는 죽비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아! 우리 스님. 정말 무서운 어른이시구나…….’

 

어느 핸가 스님은 신사동 만해사상실천연구회에서 두문불출하시면서 삼시 세끼 막걸리만 드시며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풍문을 듣고 찾았더니 테이블 옆의 해골상을 쓰다듬으며 나 들으라는 듯 “이게 나다. 나 얼마 안 있어 갈 끼다.” 하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받잡기 두렵습니다. 많은 사람이 스님을 따르고 좋아하는데 그렇게 무책임한 말씀 하시면 덕이 안 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스님은 마치 자신의 열반을 준비하고 계시는 듯 단호한 표정을 지으셨다. 겁이 더럭 난 나는 평소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처럼 가깝게 지내는 정휴 스님에게 연락해 내가 목격한 상황을 말한 뒤 도움을 청했다. 며칠 뒤 정휴 스님이 전화를 주셨다. 

“내가 오현당한테 다녀왔습니다. 밤새 대작하면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아직 못다 이룬 일들이 있지 않으냐. 이렇게 곡기를 끊고 있다 홀연히 떠나면 당신을 좋아하고 따르던 뒤에 남은 사람들은 뭐가 되느냐. 그러니, 자연스럽게 세상 마칠 때까지 그냥저냥 살자’고 했습니다. 오현당이 제 말을 듣기로 했어요. 오 국장이 연락 안 해줬으면 몰랐을 텐데 뒤늦게 찾아가서 마음을 돌리게 했으니 고맙소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고, 스님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셨다. 

스님이 입적하신 뒤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메시지가 의미심장하다. 현직 대통령이 특정 스님의 입적과 관련해 자신의 개인 SNS에 스님과의 인연을 소개하며 애도를 표시하는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문 대통령 페이스북 올린 내용 중 이런 것이 있다.

“……이제사 털어놓자면, 스님께선 서울 나들이 때 저를 한 번씩 불러 막걸릿잔을 건네주시기도 하고 시자 몰래 슬쩍슬쩍 주머니에 용돈을 찔러주시기도 했습니다. 물론 묵직한 ‘화두’도 하나씩 주셨습니다……”

이른바 ‘김영란법’의 적용을 받는 현직 대통령이 자진해서 스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은 사실을 고백했으니, 백수인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양심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오현 스님의 ‘장학생’이었다. 신문사 재직 중에는 스님에게 염치도 없이 내가 도와주던 지인이나 후배의 학비와 용돈을 달라고 한 적도 있다. 또 정년퇴임 후 백수가 된 뒤에는 종종 용돈도 얻어 썼다. 지금도 핸드폰 문자함에는 이런 편지가 남아 있다.

 

해제 날 귀한 걸음 하셨는데 노골이 정신이 없어 인사 못 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오늘 혼자 적적히 앉아 전화기를 꼼꼼히 검색해보니 오 국장께서 특별히 챙겨줘야 할 학생 계좌를 찍어 주시면 보내주도록 하겠습니다. 진작 문자를 보았으면 조치했을 텐데 그때는 사실상 오 국장님 아시는 바로 술에 찌들어 세상 싫어서 전화기 어떤 놈에게 맡겼다가 오늘 첨 봅니다. 오 국장님이 처음 하신 말씀인 만큼 들어드리고자 합니다. 액수와 계좌번호 꼭 부탁드립니다. 나는 며칠 볼일 보고 서울 가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설악무산 합장 (2015년 3월 6일 오후 3시 33분)

 

해제 날에 유발(有髮)이 겁도 없이 끼어들어 좌중을 어지럽혀 죄송합니다. 잊지 않고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제게 보내주시면 제가 조치하겠습니다. 국민은행. 예금주 오명철(국장). 870302-XX-XXXXXX

 

국장님 감사합니다. 학자금과 오명철 국장님 약값 약간, 방금 전화로 입금했습니다. 실직 비관하지 마시고 운동하고 공부하십시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무산 합장

 

2018년 5월 26일 스님이 홀연히 입적하셨을 때 나는 끝내 다비식에 가지 못했다. 8년 전 법정 스님께서 홀연히 입적하셨을 때 송광사에서 열린 다비식에 갔다가 슬픔과 상실감을 견디지 못해 2년간 스스로를 ‘마음 감옥’에 가둔 채 두문불출한 전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가축’처럼 1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홍사성 선배가 전화를 했다.

“기운 차려서 스님 뵈러 갑시다. 1주기가 낼모레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가자. 가서 뵙고 야단맞고 맘 편히 돌아오자……”

‘무산대종사 열반 1주기 추모 세미나’가 열리는 2019년 5월 15일 오후 5시경 백담사 만해마을 ‘문인의 집’ 강당에 들어섰다. 정면에 있는 대형 사진 속에서 스님이 천진난만하게 웃고 계셨다. 합장을 하고 눈을 마주치자 사진 속 스님이 하는 말씀을 나는 분명히 들었다. 

“오명철이 왔나? 괜찮나?” 

그게 다였다. 나는 마치 어제 스님을 만나 헤어졌다 하루 만에 다시 만난 것처럼 마음이 편해졌다. 이날 발표된 주제문과 회고담 중 한겨레신문 종교전문기자인 조현 학형의 〈기자가 본 설악무산의 인간적 면모〉는 근래에 보거나 듣지 못한 ‘절창(絶唱)’이었다. 나는 그의 취재력과 글솜씨에 탄복했다. 나 죽으면 누가 저렇게 나를 추모하는 글을 써준단 말인가?

다음 날인 17일 신흥사에서 열린 ‘설악무산 대종사 1주기 추모 다례’도 성황리에 끝났다. 

승속(僧俗)의 참석자들 사이에 ‘이제 아마 어떤 스님이 돌아가셔도 이같이 자발적인 추모 열기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나도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추모의 정(情)이 상당히 오래 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절집과 문단, 정계와 재계, 학계와 언론계에 뿌리 깊이 침투해 있는 스님 추종자들이 거의 ‘사단급’에 이르는 데다, 그들이 한결같이 ‘오현 스님은 나를 제일 좋아하고 아끼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시 스님은 대단한 법력(法力)의 소유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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