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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의 바위, 동해의 파도로 남으십시오”
[79호] 2019년 09월 01일 (일) 김진태 법무법인 세종 명예대표변호사

글머리에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 오현 스님과의 만남은 스님이 열반에 들면서 멈췄다.

스님과 상당히 가까이 지낸 분들마저 도대체 두 사람의 사이는 어떤 관계요, 하고 물을 정도로 30년 가까이 유별(有別)한 승속을 거리낌 없이 오고 간 관계가 마무리된 것이다.

스님은 수행자이지만 몸은 늘 세속과 함께했고 나는 세속인이지만 머리는 늘 수행 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는 승속에 따른 걸림은 전혀 없었다. 그런 관계에서 만나 얘기하고, 때론 웃고, 때론 침묵하고 한 것이 주위 사람들에겐 쉽게 이해가 되지 아니했던 것 같다.

혹 사람의 무게를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순간이나마 삶의 의미를 반추하는 기회가 되길 기대하면서 편집자의 청에 맞추어 스님의 지구에서의 한바탕 유희 중 몇 토막을 소개하고자 한다.

 

죽음을 만들고

생 · 노 · 병 · 사의 짧고도 긴 여정에 젊은이들도 병들어 중도하차하는데 나이 들어 종착역에 도착해서 병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노골은 종착역에 닿아 병들었는데도 하차하지 않고 수술을 받고 투약하는 것은 역행이요 사치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엄살이 아니겠습니까!

퇴원해서 약을 먹으며 자신을 돌아보니 좀거머리 한 마리가 부평초 잎에 붙어 기가 다하고 맥이 다했는데도 떨어지기 싫어 몸부림을 치고 있네요.이 꼴을 보니 보고 싶은 사람도 없고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도 없어져 끄먹끄먹 먼바다 해조음 소리를 들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날 불학무식한 놈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천방지축 · 기고만장 · 허장성세로 맞아죽지 않고 살아온 자신이 우섭네요.

그간 소식 전하지 못한 변명이 길어졌습니다. 만면참황입니다(불탄절까지는 묵연할 것입니다).

설악무산 합장

 

윗글은 스님이 열반에 들기 두 해 전쯤에 내게 보낸 문자이고, 아래의 글은 그에 대하여 내가 답한 것이다.

혹 삶과 죽음 중 죽음에 더 집착하고 계신 건 아닙니까.

삶 역시 자기만큼만 살 수 있지만 죽음 역시 자기만큼만 죽을 수 있는 것 아닌지요.

죽음에 어디 흉내 내거나 속임수가 들어갈 틈이 있겠습니까.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이루는 죽음을 만드십시오.

본래 삶이든 죽음이든 저 홀로 설 수 있는 힘은 없는 것이니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살려내는 생을 엮어가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나마 스님의 청안하심을 기원합니다.

김진태 절하다.

세속인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수행자들에게도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는 진실로 실존의 마당이다.

죽음을 삶과 한 몸으로 보느냐, 아니면 삶과 맞서는 세계로 보느냐에 따라 사람이 삶을 꾸려가는 태도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승속을 떠나 누구든 꼭 자기만큼만 살 수 있을 뿐이다. 자기만큼 기뻐하고, 자기만큼 슬퍼하고, 자기만큼 보고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오히려 죽음이야말로 흉내 냄이나 속임수를 끼워 넣을 틈을 전혀 주지 않는다.  

이는 오현 스님에게도 당연히 그러하다. 스님은 그가 열반에 들기 대략 두 해쯤 전부터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를 깊이 고뇌하고 있었다. 나는 그 고뇌의 절박함을 전혀 헤아리지 못한 채 중생이란 어차피 무변 허공을 무시, 무종의 세월 동안 떠돌게 되어 있으니 이왕 온 이 별에서 좀 더 많은 구경을 하고 가시면 안 되겠느냐면서 파문은커녕 미동도 일으키지 못하는 부언으로 설득 아닌 설득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아님 과보라고 해야 할까 하는 일이 생겼으니 스님이 식도암 수술을 한 것이다. 암이란 육신의 조직에 생긴 종양이라지만 그것이 왜 생기고, 어떻게 자라며, 특히 생명현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식도 부위의 커다란 살점 한 덩어리를 덜컹 잘라낸 것이다. 이미 노쇠하여 세포분열이 활발하지 못한 육신은 그 잘라낸 자국의 봉합마저 더디었고, 이를 위한답시고 투여하는 약물은 그 상처의 원상회복은커녕 오온(五蘊)과 육근(六根)을 심히 흔들어 죽음이라는 명제를 바로 눈앞의 과제로 만든 것이었다. 스님이 이것까지 알고 일부러 그런 수술을 선택했는지 여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이 죽음을 이루도록 재촉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는 특히 스님이 열반에 들기 전 위 기간 동안 행한 삶의 궤적들을 살펴보면 스님은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스님은 금생에서 맺은 인연이란 인연은 모두 그 무게의 경중에 관계없이 나름대로 이렇게 풀고 저렇게 어루만져 쌓인 업의 자물쇠를 열어주고는 홀연히 열반을 취한 것이다. 평생을 탁발도 하지 않은 수행승으로 살면서 육신은 간수해야 했고, 더 나아가 마주치는 인연마다 자신도 여전히 묻고 있던 진리를 훤히 알고 있는 양 말해 주어야 했으니 부처의 눈으로 보면 창생들을 힘들게 하고 속인 업보가 얼마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미산보다 더 크고 무거운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룰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생사에 어두운 무연 중생들에게 불볕더위에 한줄기 소나기를 뿌려주고 갔다 할 것이다. 

걸림 없는 행을 나투고

스님은 일찍부터 승속을 부담 없이 넘나들면서 걸림 없이 살았지만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중 하나가 이른바 ‘10 · 27 법난’이었다. 많은 스님들이 영문도 모른 채 무작정 끌려가거나, 몸을 피할 때 스님은 바로 자진 출두하여 무시무시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실려갔다. 

그곳에서 군인들이 지금까지의 승려로서의 행적, 특히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토설하라고 하자 스님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신도들의 정재나 사찰 재산으로 술 먹고, 담배 피운 것 등을 빼곡히 적어 제출했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하나같이 청정계행으로 수행에만 전념했을 뿐 어떠한 일탈 행위도 없었다고 호소하고 있는 가운데 스님만이 이렇게 나온 것이다. 

스님의 진술서를 읽은 조사관은 너무 예상외의 진술에 심히 의아해하면서 “당신은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우고 하니 중이 아니구먼.” 하고 힐난했다. 그러자 스님은 바로 “맞습니다. 나는 중이 못 됩니다.”라고 대꾸하여 군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중이 아니니 술을 먹든 담배를 피우든 더 이상 붙잡아둘 명분이 없었고, 그 뒤부터 스님은 낙승(落僧)을 자처하면서 승도 놓아 버리고, 속도 놓아버린 채 승속을 유유자적했다.

그렇지만, 청정계행 속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에 대하여는 자신의 파계행(?)으로 인한 불문에 대한 폄훼를, 시정의 단월들에 대하여는 크게 이룬 것이 없음에도 절받고, 시주받는 대접을 심히 미안해했고,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다.

이러한 스님의 걸림 없는 행 중 널리 회자된 것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것이었다. 흔히 스님들이 술을 마시는 것을 곡차를 마신다고 하지만 실제로 스님은 술을 차처럼, 물처럼 마셨다. 안주니 하는 것은 아예 없고 그냥 술을 물 마시듯, 차 마시듯 마시는 것이다. 스님을 처음 뵌 지 얼마 되지 아니했을 때 놀란 것 중 하나가 거의 온종일 술, 그것도 독한 위스키를 차처럼, 물처럼 마시고, 담배 역시 늘 입에 물고 있는 것이었다. 위스키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모금 빨고, 말씀 한 마디 하시고, 다시 술, 담배, 말씀 순으로…… 그건 열반할 때까지 한결같았다.

하도 이해가 안 되어 스님께 술 마시기 내기를 한번 하자고 청하여 어느 해 늦가을 백담사 스님 방에서 산 그림자가 그 방문 앞에 다다랐을 무렵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는 나도 제법 호기 있게 벌술을 마실 때였는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위스키를 아마 서너 병쯤 마셨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쓰러져 의식을 잃었고, 몇 시간 뒤 깨어보니 스님은 여전히 그 자세로 혼자서 마시고 계셨다. 그러면서 그걸 가지고 술 마신다고 하느냐, 앞으로 먹지 말라 하셔서 그 뒤론 스님 앞에서는 술을 절제했다. 

그런데 스님의 이와 같은 술, 담배 등의 습관은 열반하실 때까지 거의 그대로 이어졌고, 그럼에도 그동안 취한 상태에 이르렀구나 하고 느낀 기억은 거의 없다. 어느 핸가 몸이 좀 이상하다고 하여 억지로 건강검진을 받게 했는데 간은 나보다 더 깨끗하다고 하여 적어도 술은 자재하는 경지에 갔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스님의 이런 행을 무애행이라 하든, 파계행이라 하든, 아님 낙승의 보살행이라 하든 스님은 확실히 보통 사람은 범접하기 어려운 견처가 있었고, 얻은 것이 있었으며, 사람에 대한 이해가 있었다. 그러하길래 신분과 지위 등에 상관없이 따르고 받드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고, 그의 말은 말이 되고, 그의 글은 글로 이루어졌다.

허수아비의 무게

스님의 이러한 걸림 없는 행보가 점차 주목받기 시작한 가운데 수행의 여적으로 나온 말이나 글은 시가 되고, 산문이 되어 널리 회자되었다. 찬사가 넘치고 박수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외에서 그것들을 모으고, 연구하고, 분석하는 모임들이 만들어지고, 출판으로 이루어졌다. 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문예와 다소 거리가 있는 일반 사회 저명인사들도 스님의 글이나 시를 인용하고, 찬사를 붙여 게재하고, 그것들을 소개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이리저리 내 눈치를 살피다가 대단히 겸연쩍어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이 내 시나 글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소개를 하는데, 너는 왜 아무 말이 없느냐. 네가 보기에는 전혀 아닌가?” 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씀에 대단히 미안하기도 하여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도 한번 써보겠습니다.” 하고는 바로 써 드린 것이 아랫글이다.

글이란 배움에서 시작하되 뛰어넘어야 이루어지는 것이고, 시란 글로써 나아가되 벗어나야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허수아비를 그리려다 자기 마음을 드러내었다면 노욕이 지나친 것이고, 드러내지 못했다면 헤어나지 못한 것이다. 글 없는 시는 사바를 이해시키기가 어렵고, 글 있는 시는 시비를 벗어나기가 어려우니 이 또한 평화가 아니다. 노파심절이 지나쳐 저렇듯 자상하게 부연하고 있으니 삼척동자라도 허수아비가 아님은 알 것이다. 이 시를 듣고 설악의 바위가 고개를 끄덕이고 동해의 파도가 노래를 부른다면 눈 밝은 이를 다시 찾을 필요가 있겠는가. 참으로 여시아문(如是我聞)이로다.

이는 스님의 시집에 실린 〈허수아비〉라는 제목의 시를 발견하고는 이것이 바로 스님의 그림자로구나 생각하여 그에 대하여 토를 단 것이다.

이 글을 보신 스님은 상당히 흡족해하시면서 내 글이야 다 잡문이고 아무 쓸 데도 없는 헛소리에 불과하지만, 내가 가고 나서 혹 누가 내 글을 추려 엮게 되면 이것을 맨 서두에 넣어 달라 하셨다. 스님은 자주 나의 스승이신 백봉 김기추 거사에 관해 묻곤 하셨는데, 특히 그분과 비교하여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가가 대단히 궁금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면서

앞에서도 간략하게 소개한 바와 같이 스님은 한평생 승속을 오르내리면서 많은 활동을 하고 교유도 깊어서 따르고 받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신흥사 주지 시절 만나 신흥사 경내 정비를 도와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작으로 지난해 열반했을 때 트윗으로 스님과의 따뜻한 관계를 소개했던 문재인 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역대 대통령과는 신분, 종교, 이념 등과 상관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따뜻하고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만들어졌었다. 

오랫동안 미국, 영국 등 외국을 순례하거나, 이런저런 일들을 만들고 관계를 형성했으니, 그 과정에서 생긴 사연이 얼마나 많겠는가. 천일야화가 따로 없겠지만 나머지 소개는 시절의 인연에 맡기고자 한다. 

낙동강 칠백 리에 물새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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