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각범 한국정보통신대학교 교수

박세일 교수의 발표문 '불교와 정치'를 읽으면서 박교수는 평생 두 가지 화두를 가지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나는 우리나라를 위한 실천이고, 다른 하나는 불교적 수행이다. 이 글을 통해서도 우리는 박 교수의 고민이 깊고, 일관되며, 철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때때로 나는 불교적 삶과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이 양립 가능한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인간이 무릇 생명을 가진 중생과 차별적인 것이며, 우리나라는 인류의 보편적 위치와 차별을 갖는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부모은중경을 떠올린다. 부모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는 두 분을 우리의 어깨 위에 모시고 수미산을 수천 번 올라도 다 갚지 못한다고 하셨다. 우리나라와 우리가 맺고 있는 인연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지만 우리의 오늘이 있게 한 인연, 그리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이 짊어진 공업(共業) 또한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둘이 아닌 진리라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가 서있는 바로 이 자리. 현실은 송곳하나 꽂을 수 없는 찰나이지만, 그것만이 진실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철저하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다시 3류국가로 전락하는가 아니면 선진의 반열에 진입하여 인류의 보편적 복지의 향상을 위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의 기로에 서있다.

이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고 우리나라의 발전과 동떨어진 세계적 문제의 해결이라든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복지를 외면하는 관념적인 행위는 우리의 공업(共業)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박교수는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적 실천과 우리나라를 위한 실천에 철저해야 함을 내성외왕(內聖外王)으로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지도자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이나 집단에 묶여서 사고하고 행동하며,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이용하여 지역의식을 조장하고, 집단적 시기심을 부채질하는 것을 흔하게 본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정치인에서 그치지 않고 때때로 불교의 지도자들이나 학자들 속에서도 지연, 학연, 계급 같은 개인적 인연에 집착하는 것을 본다. 박교수는 이를 아상(我相)에 결박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나라의 정치는 우리나라의 문제를 해결하여야 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그런데 태어난 고향이나 소속한 집단의 이해가 우리나라의 이해보다도 앞서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며 우리나라의 시계는 세계의 시계보다 뒤로 가게 되는 것이다. 정권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상(我相)을 바탕으로 대중조작과 대중선동을 조직적으로 행함으로써 갈등을 증폭시키고 조장하여 왔다. 이것을 통틀어 포퓰리즘의 정치라고 한다. 정치가 포퓰리즘에 빠지면 나라의 장래는 어둡다. 국가는 발전동력을 잃어버리고 사회는 해체현상을 겪게 된다.

노무현대통령은 최근 지방분권과 국토균형발전이야말로 참여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는 개혁과제라고 하였다. 지방분권과 국토균형의 대명제에 대하여 이의를 갖고 있는 국민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지방분권이며, 무엇이 진정한 국토균형발전인가에 대한 내용은 입장에 따라서 다를 수 있다.

소아(小我)에 집착하여 이 문제를 본다면 집권세력이나 야당의 당리당략에 의하여 접근하는 현재의 '수도분할 계획'이나 공기업과 공공기관 지방분산 이전계획이 가장 손쉽게 떠오를 것이다. 문제를 수도권 대비 비수도권의 불균형 발전에 둠으로써, 수도의 기능을 이전하고 정부가 처리하기 가장 손쉬운 공공기관을 지방의 곳곳으로 이전하는 안(案)이다. 이렇게 원초적 불평등 감각을 자극하면 대중선동에는 편리하다.

그러나 정부와 공공기관을 해당지역에 유치하기 위하여 각축을 벌이는 지방자치단체들의 입장에서 보면 '죄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정치권도 '죄수의 딜레마'에 빠졌다. 우리나라의 장기적 발전을 위하여서나, 정부의 올바른 기능을 위하여서나 시대의 흐름에 맞는 진정한 국토균형발전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균형발전론은 국망(國亡)으로 이끄는 안(案)이다. 그러나 정권이나 정당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다음 선거의 표계산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지역도 거세게 추진하는데 우리 지역만 빠진다면 우리는 최소한의 이익도 챙길 수 없다. 그래서 모두가 국망(國亡)의 안(案)인줄 뻔히 알면서 경쟁적으로 유치전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새로운 문명사적 흐름에 맞추어 새롭게 도시와 국토체계를 갖추어 가는데, 우리는 세계화와 동떨어지면서 지식정보화에 맞는 효율적 정부의 운용과 역행하는 방식으로 지방분권화와 균형발전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업(共業)을 외면하고 아상(我相)에 집착한 소리(小利)의 탐(貪)함이라는 박교수의 발표문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정치는 나라의 발전을 도모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예부터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국가지도자는 추구하여 왔다. 우리의 현실은 이와 정반대로 가고 있다. 미래 국가성장의 원동력은 교육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은 하향평준화의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다.

교육의 질적 저하에는 정부도 교원단체도 관심이 없다. 대신 평준화를 추진하는 세력의 일각에서 '서울대 없애기'라는 극단적인 처방까지 제시하는 것처럼 세계적으로 경쟁하여야 하는 부분을 국내의 평균적 교육으로 끌어내리기 위한 노력에 열심이다. 이제는 세계화의 시대이다. 국경 없는 경쟁이 모든 부문에서 행해지고 있다.

또 지식정보사회이다. 세계의 유수한 나라에서는 지식과 혁신력이 이전의 자본보다도 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기 위하여 부심하고 있다. 국가경쟁력은 교육의 경쟁력 강화와 교육의 다양성에 의하여 일차적으로 형성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여 교육에 대한 투자를 하고 있다. 미래지향적으로 교육개혁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교육의 반개혁(反改革)을 하고 있다.

많은 우수한 청소년들과 그 부모들이 한국의 교육에 대하여 좌절하고 있다. 그들 중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자녀를 외국에 유학 보내므로 교육이민이 늘어나고 기러기 아빠, 엄마들이 양산되고 있다. 그럴 여유가 없는 학부모들은 속절없이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자녀들에게 인내심(忍耐心)을 기를 것을 주문하면서 많은 사교육비를 감내하고 있다. 교육당국과 교원단체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애써 눈을 감으며, 국내 교육을 평준화의 틀에 묶어두기 위하여 분주하다.

정치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우리는 철저하게 변화하는 세계적 환경과 민족의 미래를 외면하는 정치 속에서 살았다. 그 결과로 우리는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되는 뼈저린 경험을 갖게 되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미래지향적 정치를 하지 못하면 우리의 후손들은 똑 같은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을 보고 가슴 아파하며 그 처방을 위하여 진력(盡力)하는 것이 이 시대 동업중생을 위한 지도자들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현재 역사에 대한 해석은 거꾸로 가고 있다. 우리 민족이 미래를 향하여 웅비할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드는 그 구조를 시정하는 것이 과거의 청산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개인에 화살을 겨누는 것은 부질없는 복수심이거나 부차적인 것이다. 과거사에 대한 접근은 동기와 방식에서 어긋났다.

진참회(眞懺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대신 또 하나의 포퓰리즘적 정치가 되고 있다. 정치는 개인적 시기심이나 억울함의 감정에서 벗어나서 이 나라의 미래와 이 시대를 같은 땅에서 사는 국민의 안녕과 복지에 일차적 힘을 경주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발표문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여 토론의 결론을 삼고자 한다.

“'마음개조'하면서 그 원력으로 '세계개조'를 하라”고 가르치시고 싶으실 것이다. 같은 이야기이나 “'세계개조'하면서 그 원력으로 '마음개조'하라”고 가르치시고 싶으실 것이다. 두 개를 함께 하는 것이 옳다. 결코 둘이 아니라고 가르치시고 싶으실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를 살며,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 세계에 낙토를 건설하고 싶은 사람들의 원(願)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불법은 우리의 마음공부와 우리의 이 땅 위에서의 실천이 둘이 아님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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