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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서커스다!
[79호] 2019년 09월 01일 (일) 허정주 민속학자·전북대 강사
   
솟대위에서 재주부리는 곡예사의 모습. 상주 남장사 감로탱화,1701년

“불교가 서커스!”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먼저 필자가 이 글을 쓰게 된 경위부터 기술해야 독자들이 어리둥절해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호모 서커스-곡예사와 21세기 인류문화》(광대와바다, 2019)라는, 21세기 신인류를 ‘호모 서커스’라고 명명하는 문화, 문명, 인간론을 다룬 졸저를 한 권 펴냈다. 

이 책을 훑어보던 불교계의 한 인사는 대뜸 “불교도 서커스인데…….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이 있지요.”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아차!’ 뭔가 놓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곧바로 말귀를 알아듣고 “맞아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 백척간두(百尺竿頭)가 무엇이던가? 백 척(30미터 이상)이나 되는 높은 장대/솟대 위에 올라서서, 진일보(進一步)한다는 말인즉, 솟대 위에서 솟대쟁이들이 서커스(곡예)를 하는 장면이 아니던가.

이와 같은 솟대쟁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놓은 감로탱화가 몇몇 사찰에 남아 전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이 감로탱화들에는 솟대쟁이패, 사당패, 악 · 가 · 무를 하는 스님 등, 그 시대의 장면들을 현장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감로탱화는 주지하다시피 지옥이나 아귀도에 빠진 죽은 자를 위해 모든 고통을 여의고 극락에 왕생하는 전 과정을 그림으로 묘사해 놓은 것이 아니던가. 그 탱화에는 당시의 상황들을 알 수 있는 귀한 장면들을 그려 놓았는데, 대부분의 감로탱화에는 솟대쟁이패들의 곡예(서커스) 장면이 생동감 있게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묘사된 그림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그 고분벽화에도 상당수의 서커스 장면이 그려져 있다. 고분 벽화와 감로탱화에 서커스 그림이 그려져 있다니? 뭔가 상관관계가 그려지지 않는가? 고분도 감로탱화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를 위한 것이 아니던가?

우리가 어떠한 극도의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서 거기에 머뭇거리게 되면 그대로 주저앉게 될 수도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새로운 차원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만약 솟대쟁이가 높은 장대에 올라가는 데까지만 머물러 있다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달리 기대할 것이 없다. 즉 장대에 오르는 험난한 과정을 거친 뒤, 그 깨달음 뒤에 경계(境界)에 서면 주저 없이 마음속의 깊은 믿음과 도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높은 장대에 올라선 솟대쟁이가 그 꼭대기에서 피리도 불고, 물구나무도 서고, 온갖 재주를 부릴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호모 서커스》라는 책에서 인간의 속성 중의 하나로 ‘극한성’을 꼽았다. 이것은 다른 동물과 달리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만의 독특한 속성을 말한다. 

물론 그 이전에 우리 몸의 ‘순수-신체성’을 기본 전제로 해야 한다. 이런 극한성의 추구는 그 전제조건으로서 부단한 ‘도전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도 하다. 도전성이 없으면 아예 이런 수행의 길을 출발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극한성’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 바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극한적 도전성은 시간상으로는 찰나적 ‘순간성’ 속에서 추구되는 것이다. 이 점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찰나적 순간성 속에서 추구되는 극한적 도전성은 새로운 ‘창조성’의 길을 지향해 나아가게 된다. 

이런 ‘득도’의 경지는 바로 새로운 창조적 자각의 지평이다. 이러한 창조적 자각의 깨달음은 나중에 그 깨달음 이전에 종교적 성전 등으로 정리되어 있던 기성 진리와의 새로운 ‘대승적 융합’을 꾀하게 되는 것이니, 이 또한 ‘호모 서커스’의 주요 속성인 ‘융합성’과 깊이 연계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호모 서커스’의 주요 특성인 ‘예술성’에 관해서 살펴보자. 여기서 잠시 눈길을 기독교 성경의 《창세기》로 돌려보는 것도 흥미롭다는 생각이 든다.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한 다음 세상을 바라보고,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온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교의 진리 세계도 그 궁극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아름다움’으로 통하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방법이 인류의 특성인 ‘호모 서커스’의 속성과 서로 상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지점에 이르러서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합장.

cokubak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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