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일하는 곳은 파주출판도시입니다. 단지 조성 초기에 입주했습니다. 처음엔 허허벌판이었습니다. 그 무렵 한 친구가 공장에서 키워 보라며 진돗개 새끼 한 마리를 주었습니다. 암놈이었습니다. 점심식사 후 나는 놈에게 목걸이를 채워 산책을 자주 나갔습니다. 처음엔 몰랐습니다. 놈은 가는 곳마다 킁킁거리며 오줌을 지리면서 자기 영역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은 이미 인간들이 금 그어 놓고 등기를 낸 땅인데 저도 등기를 낼 심산인 모양이었습니다. 놈은 땅을 점점 넓히는 것입니다. 생후 3개월째 이야기입니다. 

생후 6개월 되었을 때입니다. 놈은 툭하면 집을 나가더니만 한나절 어디 가서 놀다가 저녁이면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배가 불러오는 것입니다. ‘오매-’ 요놈이 바람이 나서 임신을 해 온 것입니다. 안 되겠다 싶어 목줄을 채워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목줄을 끊고 밖으로 나가려 무진 애를 쓰는 것입니다. 가끔 목줄을 풀고 도망가기도 했습니다. 그럴수록 목줄을 더 단단히 했습니다. 어느 날 이번에는 어디서 수놈이 한 마리 나타나 놈의 근처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놈의 목에 끊긴 사슬이 있는 걸 보면 분명 주인이 있는 놈인데, 제 연인을 만나려 기를 쓰고 목줄을 끊고 냄새 따라 이곳에 온 것입니다. 이 무렵 나는 이 진돗개의 행태를 빌려 몇 편의 시를 씁니다. 세 번째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놈이 이 땅에 등기를 낼 줄이야
목줄에 끌린 저녁 산책길
그래도 놈이 가는 곳은 일정했다
감나무 밑동에 오줌 한 줄기
몇 발짝 더 가
싸리나무 곁에 또 한 줄기
국화 꽃잎에 코 대고 킁킁
빙 둘러 경계 그으며 등기 내더니
살을 붙이듯 조금씩 넓힌다
나도 어렴풋이 놈의 땅을 짐작한다
그 땅 안에서 놈은 왕이다
길 잃은 개라도 들어오면
이빨 세워 으르렁
놈의 허락 없이는 넘볼 수 없는 영역
인간들도 그 땅에 금 그으며 킁킁거린다

 노을을 타고 앉은 부처님/ 빙긋 웃는다 

— 졸시 〈견공의 등기〉 전문 

    

놈은 인간들이 제 땅이라 우기며 등기를 낸 땅에 저도 등기를 낸 듯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짝짓기도 합니다. 인간들이 하는 행동과 똑같습니다. 새끼까지 늘자 감당할 수가 없어 새끼 따로 어미 따로 남에게 분양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개가 넓혀 놓은 땅도 놈에겐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라고 다를 게 없습니다. 등기를 내놓고 제 땅이라 우기던 사람도 저세상으로 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니 노을을 타고 앉은 부처님이 빙긋 웃으시지요. 

세상에 살아 있는 동물들은 이렇듯 주변에 많은 호기심을 보입니다. 인간도 동물인지라 예를 든 개처럼 재산과 권력에 욕심을 내기도 하고, 이성에 강한 호기심을 보이며 집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에 한 가지 더하여 지적(知的)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덕에 앉아, 해는 왜 동쪽에서 뜨는지 궁금해하면서 해 뜨는 곳을 향해 앉아 사색하는 호랑이나 늑대를 본 일이 없습니다. 동물들은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관심이 없습니다. 노트르담 성당이 불에 타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먹고, 자고, 종족을 번식하고, 생존하는 문제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인간처럼 원초적 본능을 벗어난 어떤 형이상학적 문제에 고뇌하지 않습니다.

인간도 동물의 한 속입니다. 인간 역시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 충족을 위한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 충족과는 관계없이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연 현상의 변화는 물론, 인간 본연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많은 고뇌를 합니다. 해는 왜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지, 수평선 너머에는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지, 우주의 다른 별에도 인간 같은 지적 동물이 존재하는지,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하는 등등의 의문에 고심하고 그런 것들을 알고 규명하기 위해 사색과 연구에 몰두합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의문을 풀기 위한 석가모니처럼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본능 충족에서 오는 쾌락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고통을 수반합니다. 인간은 이런 고통을 감수하면서 그 원인을 알아내려 합니다. 그것은 분명 동물들의 본능 충족 행위와는 다른, 지적 욕구의 실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호기심을 동물이 지닌 본능적 호기심과 구별하여 지적 호기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지적 호기심. 그것은 오직 인간만이 지니 고유한 특성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지적 호기심을 가진 동물’로 정의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고 예쁜 여자와 즐기는 일을 낙으로 삼으며, 금력과 권력에 집착하고 투쟁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을 부러워할지는 몰라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는 자라도 이 세계란 무엇인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왜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인지, 죽음 이후의 인간은 어찌 되는지, 등등 인간의 삶과 직결된 지적 문제에 고민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사람을 존경합니다. 

석가모니, 예수그리스도, 공자, 소크라테스 등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2천 년 또는 4천 년이 지난 지금도 절을 하며 경배합니다. 그들은 돈을 소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개처럼 땅을 넓히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인간다운 인간, 가장 고귀한 인간은 바로 이처럼 ‘지적 호기심’이 강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적 호기심의 정도에 따라 여러 계층의 인간 즉, 동물적 수준의 인간으로부터 인간다운 인간, 나아가 그 자체를 초월한 신격화된 인간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예수도 석가도 인간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는 격이 다른 인간입니다. 

인간도 사람에 따라 그 품격을 달리합니다. 해탈하여 신의 경지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에서 예를 든 개처럼 동물적 본능만으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품격을 만듭니다. 나는 과연 인간다운 인간인가, 아니면 동물적인 인간인가, 하는 품격도 스스로 만듭니다. 내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도 스스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gilwon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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