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탈종교화 시대, 불교의 위상과 역할

10만 년 전에는 평범한 포유류의 하나였던 현생인류가 인지혁명과 농업혁명과 과학혁명의 단계를 거치면서 도약을 거듭한 결과, 인간 특유의 문명과 역사를 이루어냈고 이제는 생명세계의 정점에 서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지구 생명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막강한 능력을 갖추게 됐다. 어떻게 이런 과정이 가능했는지를 인류의 특성과 인류 문명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논의하고자 한다.

 

1. 인류의 특성과 역사의 시작

우주가 138억 년 전에, 지구가 45억 년 전에 만들어졌고 지구 위의 최초의 생명이 38억 년 전에 나타났지만, 인류는 기껏해야 300만 년 정도 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인류의 등장은 자연사에서 극히 최근에 벌어진 일이다. 그나마 10만 년 전까지는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별로 나은 점이 없고, 주변 환경에 별 영향을 미칠 능력도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포유류였다.

더구나 생물학적인 면만을 본다면, 생존에 불리한 여러 가지 특성을 고루 다 갖추고 있다. 다른 동물과 비교해서 머리가 너무 크고 근력이 약하며 피부가 약하고 털이 없다. 더군다나 여성은 수유기가 아닐 때도 커다란 가슴을 유지한다. 머리가 커서 아주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출산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두뇌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피부가 연약해서 쉽게 상처를 입고, 털이 없어서 옷을 입지 않고는 체온을 유지할 수도 없다. 사냥한 임팔라를 나무 위로 물고 올라가는 치타와 달리, 균형 감각이 형편없고 근력이 약해서 무거운 짐을 나르지도 못한다. 영양처럼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원숭이처럼 나무를 탈 수도 없으며, 새처럼 날지도 못한다. 고래나 악어나 물고기처럼 수영을 잘하지도 못하며, 두더지처럼 땅을 파는 재주도 없다. 소처럼 풀을 으깰 수 있는 넓적한 어금니도 없고, 사자나 고양이처럼 날카로운 송곳니도 없으며, 악어처럼 강한 턱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이처럼 인간은 생존에 취약할 뿐 아니라, 제대로 잘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타고난 신체적인 능력만 놓고 본다면,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기적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10만 년도 안 되는 최근에 와서 극적으로 전환됐다. 수십억 년이라는 생명사에 비추어보면, 10만 년이란 생명체가 조그마한 적응을 위해 자신의 형질을 약간 바꾸는 것조차 어려운 아주 짧은 기간이다. 그러므로 10만 년 전의 우리의 조상과 우리 자신은 유전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동일할 것이다. 이 짧은 기간 동안 별다른 특징이나 강점이 없는 그저 그런 평범한 포유류였던 인간이 지금은 생명세계의 정점에 서게 됐다. 유전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두 생명체지만, 10만 년 전의 인류는 평범한 포유류의 하나였던 데 반해 지금의 인류는 지구상의 거의 모든 영역에 거주하면서 생명세계 전체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극적인 변화가 가능했을까? 아마도 유연한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동물의 의사소통에 대해 알아보자. 소통은 무리를 지어 살기 때문에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중요한 동물들에게는 필수적인 생존 기술일 수 있다. 그러나 동물의 경우, 소통의 역할은 서로 위험을 알리거나 먹이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등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한정된다. 치타나 독수리를 발견한 원숭이가 위험 신호를 동료에게 보낸다든가, 동북 쪽 방향의 상당히 먼 거리에 꽃 무더기가 있다는 정보를 알리는 꿀벌의 춤과 같은 것이 그 예다. 사자나 독수리가 나타났다는 것을 알리는 임팔라나 망구스의 경고는 지금 현재의 상황을 알리면 충분하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에 과거나 미래와 같은 시제는 필요 없을 것이다. 또한, 나타난 포식자가 독수리와 사자 중의 어느 것인지를 가릴 수 있도록 위인지 아래인지만을 알려주면 충분하기 때문에, 어느 방향에서 몇 마리가 나타났는지를 나타내는 정교한 정보도 필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언어와 이 언어에 의해 촉발된 사고체계는 다른 동물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의사소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내용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우선, 정교하게 발전된 인간의 언어는 시간과 공간을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의 의사소통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 “오늘 아침 해가 뜰 무렵, 강이 흐르는 동쪽 초원에 사슴 떼가 있었다.”라는 정보를 동료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정보를 접한 동료들은 이 사슴 떼를 사냥하는 것이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인지, 필요하다면 이를 추적하는 것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떤 방식으로 사냥하는 것이 좋을지를 논의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다른 동물이나 그 이전의 인류와 달리, 언어를 통한 정교한 정보에 근거해서 체계적인 논의와 조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인류는 언어체계를 발전시키면서 이에 근거하여 사고체계를 정교화하고 조직적인 협력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이 과정을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지혁명이라고 부른다. 7만 년 전부터 3만 년 전 사이에 의사소통과 사고방식이 혁신적으로 바뀐 것을 일컫는다. 인지혁명의 원인은 그가 주장하는 대로 생물학적 돌연변이가 인류의 두뇌에 나타나면서 두뇌의 기능이 폭발적으로 증대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동안의 누적적인 무언가의 축적이 이 기간 동안 폭발적인 혁신을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다. 이에 더해 사냥과 같이 우연히 이루어진 집단행동의 결과가 기대치 이상의 대단한 성과로 이어지는 상황을 경험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런 인상적인 경험을 학습하면서 더욱 치밀한 계획을 짜고 조직적인 협동을 하게 되었고, 이런 계획과 협동이 언어와 사고체계를 조금씩 변화시켰고, 수만 년에 걸친 누적적인 변화의 결과로 엄청난 혁신이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조직적인 계획과 협동이 언어와 사고체계를 정교하게 만들고,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진 언어와 사고체계가 보다 조직적인 계획과 협동을 가능하게 하는 선순환을 만들어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인지혁명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만 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인류에게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 혁신적인 변화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하며 그 이전의 시기에선 없었던 수많은 증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지혁명의 결과로 인해 어떤 변화가 인류사회에 일어났는지, 그리고 그런 변화가 생명세계와 지구에 어떤 변화를 촉발했는지를 살펴보자.

 

2. 호모사피엔스의 초창기 역사

고도의 언어와 사고체계를 지니고 있으며 불을 다룰 줄 알았던 현생인류를 호모사피엔스라고 부른다. 적어도 지난 1만 년 동안 지구상에는 호모사피엔스라는 오직 하나의 종(種, species)만이 살아왔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적어도 30여 종 이상의 인간 종이 살았었다. 호모 네안데르탈, 호모 데니소반스,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호모 날레디, 호모 솔로엔시스, 자바원인, 북경원인, 호모 에렉투스, 호모 에르가스터, 호모 루돌펜시스, 호모 하빌리스, 호모 플로레시엔시스 등은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언젠가 지구상에 살았던 인류의 서로 다른 종들이다. 이들은 모두 호모 속(屬, genus)에 속하며, 약 250만 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했다.

이들의 대부분은 시기적으로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하기 이전에 생존했던 종들이지만, 적어도 호모 네안데르탈과 호모 데니소반스는 호모사피엔스와 동시대까지 생존했던 종들이다. 유전학 연구에 의하면, 오늘날 중동이나 유럽인은 네안데르탈과 많게는 4% 정도의 DNA를 공유하고 있으며 현재의 호주 원주민과 멜라네시아인은 호모 데니소반스와 많게는 6% 정도의 DNA를 공유하고 있다. 이는 호모 네안데르탈과 호모 데니소반스가 과거의 어느 때에는 호모사피엔스와 교배했었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종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같은 종이었던 호모 네안데르탈과 호모 데니소반스뿐 아니라 인류의 다른 모든 종이 사라지고, 현재 지구상에 남아 있는 인류는 오직 호모사피엔스 하나뿐이다. 물론, 생명종이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것은 생명사의 과정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호모사피엔스를 제외한 모든 종이 자연스럽게 멸종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기록이 상당히 존재한다.

사피엔스는 7만 년 전 현존하는 인류 모두 공통의 조상이 살았던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을 벗어나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호모사피엔스의 서식지가 확장되는 이 과정은 인류의 다른 종과 인류가 아닌 다른 생명종이 사라지면서 진행됐다. 호모 데니소반스는 약 5만 년 전에, 호모 네안데르탈은 약 3만 년 전에, 호모 플로레시엔시스는 약 1만 2천 년 전에 사라졌다. 이들의 멸종은 모두 호모사피엔스가 그들의 거주 지역으로 진출한 다음에 일어났다. 호모사피엔스와 달리, 토착 인류들은 유연한 언어를 구사할 수 없었고 고도의 협력 체제를 운용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호모사피엔스와의 경쟁에서 밀려 자연적으로 도태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인종청소를 포함하는 인종 간의 분쟁이 심지어는 현대 사회에서도 자행되는 상황을 감안한다면, 호모사피엔스가 다른 인류 종을 조직적으로 몰살시켰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생명세계 전체로 눈을 돌리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다른 인류 종과 달리 호모사피엔스는 수십 명이 협력하는 사냥기술을 개발했다. 도구와 불을 사용하면서 수십 명이 협력하는 사냥기술을 습득한 인류가 동물 무리를 몰아서 절벽으로 떨어뜨리거나 미리 파놓은 함정에 빠트리거나 설치해 놓은 울타리에 몰아넣어서 대형동물의 무리를 몰살시킬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지속되면서 현생인류가 진출하게 된 지역의 대형동물은 하나하나 사라졌다.

몇 가지 극적인 예만 살펴보자. 오랜 기간 육지와 떨어져서 독자적인 진화의 과정을 거친 호주에는 몸집이 아주 큰 코알라, 현재의 타조보다 두 배나 큰 날지 못하는 새, 호랑이 크기의 최상위 포식자였던 유대목 사자, 몸무게가 2.5톤인 디프로토돈 등이 있었다. 이렇게 몸무게가 50kg이 넘는 호주의 대형동물이 24종이나 있었는데, 그중에서 23종이 현생인류가 호주에 진출한 후 모두 사라졌다. 마오리족이 진출한 후, 뉴질랜드에서는 대형동물 모두와 조류의 60%가 사라졌다. 매머드는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의 넓은 지역에서 번성했었지만, 현생인류의 등장과 함께 서식지가 점점 축소되다가 북극해의 랭겔 섬에서 마지막으로 사라지면서 멸종됐다. 미국 대륙에는 매머드, 마스토돈, 곰 만한 쥐, 미 대륙의 말, 낙타, 대형 사자, 송곳니가 20cm나 되는 검치호랑이 등의 대형동물이 있었지만, 기원전 1만4천 년경에 현생인류가 미 대륙에 진출한 이후 모두 사라졌다. 2만 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북미에서는 대형동물 47속 중에서 34속이 사라졌고 남미에서는 대형동물 60속 중에서 50속이 사라졌다.

이 모든 생명종의 소멸이 인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인류가 생태계의 먹이사슬의 정점에 이르고 나서 이런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지금의 고양이와 사자와 호랑이는 2,500만 년 전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분화되었으므로, 임팔라는 사자에게 쉽게 잡히지 않는 능력을 수천만 년 동안 갖춰 나갈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사자가 더욱 사냥을 잘할 수 있도록 진화하는 오랜 시간 동안, 임팔라는 더욱 빨리 달리는 능력을 갖추도록 진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 공존하고 있다. 사자와 달리 인류가 지닌 사냥 능력의 향상은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만이 아니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인지능력의 비약적인 향상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생명 진화의 산물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없었던 동물들은 멸종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흔히들 생명세계에서 일어나는 대량멸종을 과학의 발전과 산업화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대량멸종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책임을 과학과 산업화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이는 최근의 10만 년 동안 지구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알 수 없었던 때나 가능한 얘기다. 호모사피엔스가 너무 빨리 먹이사슬의 정점에 오르면서 생명세계에는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했다.

결국, 현생인류의 역사가 네안데르탈과 같은 인류의 다른 종을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생명종을 멸종시키면서 시작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생명세계의 보편적 질서를 심하게 이탈하면서 일어났던 이런 과정이 지금까지 지속돼 왔다는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관성을 극적으로 전환시키지 않는다면, 지구상의 대형동물은 인간과 인간이 기르는 가축만 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류 자신도 생명의 질서를 벗어나면서 만들어냈던 인간 특유의 역사의 기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3. 인간의 존재론적 자유와 무아의 역사

아프리카 사자는 초원에서는 거의 모든 동물 위에 군림하지만, 열대우림에서는 살지 못한다. 사자는 대부분의 동물을 제압할 수 있는 탁월한 사냥 기술을 지녔지만, 이는 초원에서 최적화된 것이기 때문에 초원을 벗어나면 그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고등동물은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어떤 외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려면 돌연변이와 적자생존을 포함하는 생물학적 진화의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변화에 적응하여 진화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생명의 역사에서는 종의 멸종이 아주 빈번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정반대의 경우가 인간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은 힘이 세지도 않고, 뿔이나 발톱 등의 무기도 없으며, 체온 유지에 필요한 털마저 없다. 풀을 씹기에 알맞은 초식동물의 어금니도 아니고 고기를 뜯기에 알맞은 육식동물의 송곳니도 아닌 어정쩡한 이를 가졌다. 육지에서 빨리 달리지도 못하고, 하늘을 날지도 못하며, 물에서 빨리 헤엄치지도 못하고, 나무를 타기에 적합하지도 않은 팔다리를 가졌다. 직립보행을 하는 다리와 도구를 정교하게 다룰 수 있는 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또한 생존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육식 포유류나 파충류에 쫓기는 상황을 상상한다면 인간이 지닌 생존능력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른 동물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 완벽하게 적응된, 기능적으로 특수화된 신체 기능 한두 가지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인간은 이와 달리 특수화된 신체 구조나 기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헤시오도스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인간과 여러 동물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을 배분해 주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여러 가지 유익한 기능을 동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인간이 찾아왔을 때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다 써버려서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다. 어떤 능력도 분배받지 못한 인간은 그 자체로는 생존마저 위태로운 상태였다. 이 곤란한 상황을 형에게 상의하자, 프로메테우스는 하늘로 올라가 여신 아테네의 수레에 달려 있는 불을 훔쳐왔다. 이 죄로 인해 캅카스의 바위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가 자신의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영원히 받게 됐지만, 이렇게 불의 사용법을 배운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월등한 존재가 되었다고 한다.

사자가 사바나 기후의 초원을 떠나면 무기력해지듯이, 특수화되고 전문화된 신체 기능과 이 기능에 걸맞은 본능으로 살아가는 동물은 자신의 신체 구조가 적응할 수 있는 특정한 환경이 존재한다. 이 환경을 떠나게 되면 이 특수화된 신체 구조가 오히려 생존을 방해하게 된다. 인간은 이런 특수화된 신체 기능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본능만으로 살아가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본능에서 유리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은 지금껏 살아왔던 상황과 다른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다. 결핍을 지녔다는 사실이 오히려 환경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게 했다.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 초원에서 출발한 현생인류가 지구 곳곳으로 이주하면서 삶의 영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환경에 대한 유연한 적응력 때문이었다. 생물학적인 제약과 부족한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현생인류는 혁명적으로 확장한 인지능력을 바탕으로 공동체가 전수하는 이전 세대의 지식을 활용하고 공동체의 협력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기후나 지형 조건 등의 난관을 극복하면서 삶의 터전을 지구의 거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이렇게 생물학적 결핍이 오히려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삶의 터전을 확장하는 가능성을 열어주게 됐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인간의 이런 특성을 겔렌은 ‘대세계적(對世界的) 개방성’이라고 하였다. 이 지점에서 생물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생인류 고유의 역사가 시작됐다.

이는 현생인류가 다른 동물과 달리 생물학적인 제약에서 상당 부분 해방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동물은 환경이 바뀌면 오랜 시간에 걸쳐 달라진 외부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학적 진화 과정을 거치는 데 반해, 인류는 자연환경에 맞춰 자신 삶의 양식을 바꿀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이는 인류가 고정된 자신의 속성에 얽매인 존재가 아니라 무아적인 존재라는 것이며, 인류의 역사가 무아적으로 전개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4. 무아의 세계관

현대과학이 제시하는 세계의 대한 설명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아마도 지구 생명의 역사일 것이다. 지구상에서 최초의 생명은 지금의 남조식물과 비슷한 것으로 약 35억 년 전에 탄생했고, 그 후 유전과 진화에 의해 생명의 역사가 이어졌다. 최초 생명의 탄생 이후 생명의 역사는 20억 년 가까이 그 단계에 머물러 있다가, 그 후 여러 번의 도약을 거쳐 개체 수가 번성하고 생명종이 다양해졌다. 원생동물, 해면동물, 연체동물, 어류가 차례로 나타났고, 약 4억3천만 년 전에 육상식물이 나타난 이후 양서류와 파충류, 조류, 포유류 등이 육지에서 번성하게 됐다.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생명 진화의 과정에서 언젠가 살았던 생명종의 수는 40억 종에 이른다. 그러나 오늘날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종의 수는 많이 잡아도 400만 종을 넘지 못한다. 이는 지구상에 살았던 생명종의 수가 지금 현재 살고 있는 생명종의 천 배에 이른다는 것이어서, 과거의 생명종은 지금 현재 거의 다 멸종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룡이나 삼엽충이나 암모나이트처럼 이미 멸종한 생명종이 특이한 게 아니라, 상어처럼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은 생명종이 특별한 것이다. 이처럼 지구 생명의 역사란 과거의 생명종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종이 만들어지는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다. 개별적인 생명체뿐 아니라 생명종도 성주괴공하는 무상(無常)의 과정을 거친다.

진화란 생명세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몇 가지의 인상적인 예만 살펴보자. 지구 최초의 생명체인 원시 녹조류는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이산화탄소를 이용하여 만든 탄산칼슘으로 단단한 골격을 만들면서 원시 바다에서 엄청난 군락을 이뤘다. 이렇게 기체인 이산화탄소가 석회암이라는 고체로 변환됨으로써, 원시 대기의 주성분이었던 이산화탄소가 오늘날에는 대기 부피의 0.04%만을 차지하는 정도로 줄었다. 지구대기의 구성성분이 극적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이산화탄소에 의한 온실효과가 줄어들어 오늘날의 대기 온도에 이르게 됐다.

더욱 극적인 사건은 현재 지구대기의 주성분인 산소다. 원시 대기에는 산소가 없었고, 따라서 대기권 상층부에서 자외선과 방사선을 적절히 걸러내 주는 오존층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생명체는 오직 바닷속에서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 미생물인 남세균(cyanobacteria) 같은 원시 생명체가 광합성을 하면서 지구 환경과 지구 생명의 역사는 극적으로 달라졌다. 이들이 만들어 낸 산소는 처음에는 바다에 이온으로 녹아 있던 철을 산화시켜 퇴적암인 산화철을 만들어냈다. 바닷물에 녹아 있던 철 이온을 모두 산화시킨 다음에도 광합성은 계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생긴 산소는 오랜 기간 지구 대기층에 축적됐다. 이 풍부한 산소에 의해 성층권에 오존층이 형성됐다. 그 결과, 태양에서 오던 강력한 자외선과 방사선이 차단됨으로써 바다에 존재했던 생명체가 4억 3천만 년 전에 육지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바다에 갇혀 있던 생명세계의 영역이 전 지구로 확산됐다. 

25억 년 이전의 지구에는 산소가 없었으므로, 산소호흡을 하는 생명체도 없었다. 그 당시의 생물은 모두 혐기성(anaerobic) 미생물이었으며, 이들에게 산소는 유독 가스였다. 산소가 풍부해지면서 혐기성 미생물의 대부분은 사라졌는데, 이는 지구상에서 일어났던 가장 규모가 크고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었던 멸종 사건이었다. 멸종한 생명체가 있는 반면, 산소가 풍부해진 상황에 적응하여 신진대사 과정에서 산소를 호흡에 이용하는 생명체가 생겨났다. 활성산소가 생명체에 치명적이라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산소호흡을 하는 생명체에게도 산소는 아주 위험한 것이지만, 산소를 이용하는 신진대사는 무산소 대사와 비교하여 에너지 효율이 월등히 높다. 이렇게 생명체가 위험을 무릅쓰고 효율을 택하는 진화과정을 선택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생명세계가 지구 위에 펼쳐졌다. 이는 생명세계가 지구 환경을 바꾸고 그 바뀐 지구 환경이 다시 생명세계를 바꾸는 역동적인 변화가 지구상에서 진행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구 표면의 모습도 끊임없이 변한다. 일례로, 우리나라에 석회암 지대가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은 퇴적암인 석회암이 형성되었던 시기에 한반도는 석회암의 재료를 제공하는 해양생물이 살 수 있는 적도 부근의 얕고 따듯한 바다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퇴적암에 남겨진 고지자기의 흔적에 의하면, 한반도는 3억 6천만 년 전에 적도 남쪽에 있었고 2억 8천만 년 전에 북위 6도까지 이동했으며 2억 년 정도에야 현재의 위도로 이동했다. 한반도만이 아니다. 하와이 군도의 섬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기존의 섬의 위치가 변한다든가, 아프리카 대륙이 북으로 이동하면서 밀어 올려 알프스산맥이 형성됐고, 인도-호주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이 충돌하면서 밀어 올려 히말라야산맥이 만들어졌다. 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어서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높이는 매년 조금씩 높아진다. 이 모든 것이 지구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변해 간다는 것을 말한다.

지구와 지구 생명만 아니라 사실은 우주 전체가 끊임없이 변해간다. 천체물리학의 대단한 성과는 언제나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머무른다고 생각됐던 천체도 형성되어 태어났다가 자신의 상태를 유지하는 단계를 거쳐 소멸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개별적인 생명체만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가면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게 아니다. 지구 표면의 모습도 바뀌고 지구 대기의 구성성분도 바뀌며, 별자리의 모습도 바뀐다. 개별적인 생명체만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 아니다. 항성도 생성하여 머무르다가 소멸하며, 생명종도 나타나서 번성하다가 사라지는 무상의 과정을 반복한다.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므로, 이 우주 전체에 무상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니,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이 우주 전체가 모두 성주괴공하는 무상이다.

이 변화하는 과정을 자연과학에서는 진화라고 하고 불교에서는 무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일체의 모든 것이 무상이어야 하는가? 그들은 왜 인연이 화합하면 나타났다가 인연이 흩어지면 사라지는 존재여야 하는가? 그들은 그 자신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존재자가 변하지 않는 자성(自性)을 가지고 있어서, 그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면 연의 도움 없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다. 연의 도움이 없었다면 연의 흩어짐도 없으므로 자성을 가진 존재자는 그 스스로 영원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확인했듯이, 이런 존재자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무아다. 제법무아(諸法無我)다.

일체의 모든 존재가 무아이기 때문에 상호 연관과 의존의 연기(緣起)에 의해 세계가 펼쳐진다. 상호 연관과 의존이 아니면 그 어떤 존재자도 성립할 수 없으므로, 그 연관과 의존의 연이 흩어지면 이에 의해 성립했던 존재자는 사라지게 된다. 이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니 무상이다. 우주 전체가 그 자체로 연기의 세계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그 스스로 성립할 수 없는 무아무실체적(無我無實體的)인 것이어서, 《능엄경》에서는 “모든 것이 인연이 화합하면 허망하게 생겨나고, 인연이 별리(別離)하면 허망하게 멸한다.”라고 했다. 무상의 원인에 대한 불교의 답은 이렇게 간명하다. 그러나 불교 밖으로 나가면 해결의 가망이 없어 보이는 복잡한 논의가 진행될 뿐이다. 이를 간단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자연세계가 변화한다는 생각은 자연세계가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과 함께 그리스 철학의 초창기부터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파르메니데스는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은 어떤 사물에 대해 생각하고 말한다는 것이며, 그 사물에 대한 생각과 말은 지금뿐 아니라 다른 때도 또한 가능한 것이므로, 사물은 존재해야 하고 이렇게 존재하는 사물에 대해 변화란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이와 달리 헤라클레이토스는 태양은 매일매일 새로우며, 언제나 샘물이 흘러 내려오기 때문에 누구도 같은 냇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하면서 만물은 유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가 제시한 것과 같은 변화의 관점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반박된다. 변화의 관점을 반박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변치 않는 영원한 것을 찾으려는 인간 본성과 깊이 연관돼 있다고 버트런드 러셀은 파악한다. 플라톤이 제시한 영원하고 보편적인 실재(實在, reality)의 개념이나, 최소한의 변화와 최대한의 정적인 완전성을 갖춘 이상국가의 개념 등은 영원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만들어 낸 좋은 예이다. 러셀은 서구의 종교가 신과 영혼의 불멸이라는 두 가지 형식으로 이런 영속성을 추구해 왔다고 이해한다. 이 점에서 변화를 인정하는 관점은 진보를 추구하는 세계관과 연관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계를 변하지 않는 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려는 관점은 근대과학의 물리학과 생물학의 영역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면서, 세계를 변화하는 동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대두됐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는 사회 유동성이 줄어들면서 계급이 고정되고 각 계층이 자신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기였다. 이런 사회적 배경은 생명세계에 대해서도 고정된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생물을 분류하는 학문 영역을 탄생하게 만들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세계에 존재하는 위계구조를 찾고 이를 천상계의 변하지 않는 질서와 대비시켰다. 그는 이런 위계구조 안에 놓인 생명체들이 각자 자신의 목적을 완수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생각했다. 자연세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목적론적인 시각은 인간과 자연세계를 신의 피조물로 이해하고 신의 목적에 따라 존재자의 형태와 기능이 정해진다고 보는 기독교의 목적론적인 세계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중세를 지배했던 이 세계관에 의하면, 이런 위계구조의 정상에 있는 인간은 여타의 다른 생물과 엄격히 구분되는 우월적인 존재였다.

인간을 정점으로 하는 자연세계의 위계질서를 파악하려는 시도는 린네에 의해 최고조에 다다른다. 린네는 불변하는 생명세계의 위계질서 속에서 각각의 생명체가 차지하는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동식물의 기관과 형태와 기능을 상세하게 비교 검토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생물종이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생명종을 정확히 분류하는 연구를 하였고, 생명종에 학명을 붙이는 표기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인간에게서 우월적 지위를 박탈한 진화생물학은 아이러니하게도 린네의 연구에서 촉발됐다. 린네의 종 개념이 정립되자, 학계의 관심은 생명종에 집중됐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유행한 박물학을 통해 생명체뿐 아니라 지구도 커다란 변혁을 거쳤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런 배경 지식은 라마르크를 거쳐 윌리스와 다윈에 이르면서 생명종이 변화해 간다는 진화생물학을 만들어내게 됐다. 이로써 변화하지 않는 정적인 우주관은 물질세계와 생명세계에서 모두 폐기되는 수순을 밟게 됐다.

그러나 자연계에 존재하는 실재(reality)를 ‘수학적 조화’로 이해했던 피타고라스 이후의 실재에 대한 확고하고 오래된 믿음은 근대과학이 발달했다고 해서 쉽사리 제거되지 않았다. 근대물리학과 진화생물학, 그리고 현대물리학의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에 의해 서구 실재론의 확고한 전통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과학철학의 일부분을 제외한다면 실재론의 대안으로 새로운 세계관이 자리 잡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와 달리 불교는 무아의 원리를 기반으로 세계관의 기초를 설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세계관의 기초를 혁명적으로 바꿀 수 있는 이러한 작업은 미래세계의 세계관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구축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자연과학의 성과를 동원하는 것을 포함하여 아주 포괄적이고 정치한 논리가 동원돼야 할 뿐 아니라 적어도 수십 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방대한 작업이 될 수도 있다. 어려운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다른 종교나 학문보다 불교가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무아에 기초한 세계관의 제시는 불교가 미래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대단히 크고 중요한 기여가 될 것이다.

 

5. 생명의 행복을 추구하는 생명불교

10만 년이 안 되는 최근에 인간의 인지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하게 되면서, 인류 공동체는 생물학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을 보유하게 됐다. 이로써 생명사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인류 특유의 역사와 문화와 문명의 시대가 시작됐다. 인류 공동체는 처음에 역사시대를 열었고, 이어서 농업혁명과 도시혁명과 과학혁명의 단계를 거쳐 과학기술문명의 시대에 접어들어 현재에 이르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인류의 이러한 발전과정이 생명세계에는 회복하기 어려운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는 점이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현생인류의 역사는 인류의 다른 종과 대형동물을 없애는 과정을 동반하면서 출발했다. 그리고 생명세계에 대한 이런 폭행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더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생명사 전체의 시간과 비교해 볼 때 아주 짧은 기간에, 인류는 다른 생명종이 살 수 없는 지구 환경을 만들었다. 서식지의 예를 들어 살펴보자.

동물도 인간처럼 자기 영역을 확보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자신과 먹이 경쟁을 하는 다른 개체와의 상호 약속일 뿐이다. 곰이 자신의 구역을 표시하면서 다른 곰이 그 구역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는 하지만, 곤충과 새가 그곳에서 사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이와 달리, 인간은 자신의 구역 안에 다른 동물이 들어오는 것을 엄격하게 차단한다. 인간은 지구의 전 영역에서 다른 생명종에 대해 가장 철저하게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한다. 그래서 인간의 개인 소유지는 사람들 사이의 배타적 구획 설정이기도 하지만, 다른 동물의 생존을 근원적으로 제한하는 장벽이 된다. 개인 소유지를 만들고 경작을 시작하면 어느 곳이든 예외 없이 여타 동물의 서식지가 제한되고 파편화되며 생명종의 다양성이 붕괴된다.

지구는 지금 여섯 번째 대규모 대량멸종의 시기에 진입하고 있다. 대량멸종(mass extinction)이란 수백만 년이란 짧은 기간 안에 대다수의 생명종이 사라지는 사건을 말한다. 무상한 세계에서 존재자가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짧은 기간에 대부분의 생명종이 사라지는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생명사에는 여러 번의 대량멸종이 있었고 적어도 다섯 번의 대량멸종은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대규모로 진행됐다. 이 다섯 번의 대량멸종에서는 그 시기에 존재했던 생명종의 적어도 75% 이상이 사라졌다. 그 원인은 기온의 급격한 변화, 전 지구적인 지각 변동, 대규모의 화산, 큰 운석과의 충돌, 대기 조성비의 변화, 대양의 화학적 변화 등 아주 다양하다.

지금 진행되는 여섯 번째 대량멸종은 자원의 낭비와 고갈, 병원균의 확산, 공기와 물의 오염, 산업화에 따른 전 지구적인 환경 파괴와 기후변화, 도시와 경작지의 확산으로 인한 서식지의 축소와 파편화, 사냥과 남획으로 인한 직접적인 종의 멸종 등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이전에 있었던 대량멸종의 원인과 확연히 다른 이 모든 원인은 단 하나의 생명종인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 생명종이 대량멸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경우는 지구생명의 역사에서 이번이 처음이다. 현생인류의 역사 초기에 있었던 다른 인류종이나 대형동물의 제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심하고 광범위한 생명세계에 대한 폭행이 자행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인류가 그 스스로 지은 생명세계에 입힌 막중한 해악을 반성하는 지점에서 출발하여 생명세계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생명불교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지구 생명을 포함하여 우리가 오늘 발 딛고 있고 숨 쉬고 있는 지구 환경은 생명세계가 수십억 년에 걸쳐 만들어 놓은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 자각 위에서 출발하여 개인적인 실천과 연대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 모두는 쉽지 않은 일일 터여서, 철저한 자각이 필요하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내가 평생 이면지를 쓴다면, 펄프를 만들기 위해 베어야 하는 아마존 우림의 나무 한 그루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평생 커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면, 커피를 재배하기 위해 베어내야 하는 아마존의 한 그루 나무를 지킬 수 있을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한 그루의 나무뿐 아니라 그 나무에 의지하는 수많은 생명을 살려내는 일이 된다. 그래서 생명운동은 불교가 해야 하는 일이고 불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조금만 더 지속된다면, 우리가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생물은 미생물을 제외하면 인간이 기르는 가축과 인간이 경작하는 식물, 그리고 인간 자신뿐일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인류도 곧 멸망하게 된다. 그런 지구를 보고 싶지 않다면, 지구생명 모두는 38억 년 동안 함께 살아왔고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공존해야 할 공동체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자체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 전체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자각하고 배려하며 실천하고 연대해야 한다. 생명불교운동은 불교가 해야 하는 일이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6.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불교 

인지혁명에 의해 생물학의 제약에서 벗어나면서 시작된 인류의 역사는 지속적인 확장과 성장의 연속이었다. 동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출발한 호모사피엔스는 중동을 거쳐 유라시아의 전 대륙으로 아주 짧은 시간에 퍼져나갔고, 빙하기를 이용하여 미국 대륙으로 건너갔으며 원거리 항해술을 익혀 호주에 정착했다. 인간이 지닌 생물학적인 한계를 인지혁명의 성과로 극복하면서 주거지를 지구의 거의 전 영역으로 확장하는 이 과정에서 인류의 다른 종이 모두 절멸하였고 대형동물이 멸종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인구수가 워낙 적어서 농업혁명 이후와 비교하면 상황이 훨씬 좋았다. 농업혁명 이전의 지구에는 오늘날 서울의 인구보다 적은 사람만이 살았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생명세계와 공존하면서 평화로운(?) 삶을 유지하는 것이 그래도 가능했다.

이런 상황은 농업혁명과 함께 달라졌다. 지금으로부터 만 년 전 정도부터 밀과 완두콩을 재배하고 염소를 사육하면서 농업혁명이 시작됐다. 그 후 5천 년 전까지 중국에서는 쌀과 수수를 작물로 키우고 돼지를 가축화했으며, 멕시코에서는 옥수수와 콩을 재배하였고, 남미에서는 감자를 키우고 라마를 기르는 데 성공했다. 농업혁명을 통해 인류는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부한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식량의 풍부함이 개인의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농사를 짓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작지를 만들려면 우선 돌을 골라내야 한다. 잡초는 쌀이나 밀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훨씬 잘 자라기 때문에 추수할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뽑아줘야 한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못 오게 막아야 하고, 추수철에는 새가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물을 끌어다 대야 하고 인분이나 동물의 변을 모아 영양분을 공급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을 하려면 하루해가 모자라기 때문에 농부는 종일 밭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경작지가 바로 거주지였고, 노동이 그대로 삶이었다.

식량 생산량이 증가했으면서도 개개인이 행복할 수 없었던 두 번째 이유는 인구의 증가 때문이었다. 인구가 급속하게 증가하여 그만큼 많은 인구를 먹여 살려야 했기 때문에, 농사 기술이 발전하여 식량 생산성이 증가했더라도 그 증가한 만큼 여유 있고 풍요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했다. 여기에 더해 도시와 왕국이 생기면서 나타난 엘리트 지배 계층을 먹여 살리는 것도 농부였고, 적과 도적으로부터 식량을 지키는 군인을 먹여 살리는 것도 농부였다. 결국, 생산량이 증가하는 성장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했던 농부들이 이전 시대보다 더 행복해지지는 않았다.

이런 경향은 그 이후의 인류 역사에서도 비슷하게 전개됐다. 농업혁명 이후 도시와 왕국을 건설하였고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신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는 과정을 통해 왕국은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됐지만, 대부분의 인류는 가난한 상태에 머물렀고 행복할 수 없었다. 엄청난 부의 성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인구가 빈곤했던 것은, 빈곤이 부의 절대적 양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이 부의 공정한 분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한번 성장이 행복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의 성장에 대한 신념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시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확고해졌지만, 자연과의 공생을 포기하고 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이방인을 정복하여 착취하고 생명세계를 파괴하는 삶의 양식은 적어도 농업혁명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일관되게 지속됐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얻은 것이 성장이지만, 그 성장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았다. 인지혁명은 다른 생명종보다 인류를 우월한 존재로 격상시켰고 엄청난 부를 안겨주었지만, 우리를 이전보다 더 행복한 존재로 만들어 주지는 못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사실상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에 중독돼 있다. 모든 사람이 정지해 있으면 쓰러지게 돼 있는 자전거에 올라타고 있는 것처럼 맹목적으로 정신없이 페달을 밟는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오늘 필요한 것은 오로지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인류 문명의 관성을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그건 성장하지 않으면 자멸하고 만다는 경제학의 원리를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물질적 도약이 아니라, 정신적 도약이다. 타인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고, 독점하지 않고 나누며, 이웃과 같이 살아야 하고 생명세계와 공존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불교가 알려줘야 한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불교가 해야 하는 일이고, 다시 한번 불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건 지금까지 관습에 적어서 맹목적으로 추종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이 될 것이다.

 

7. 미래 사회에서 불교의 역할 

인류의 특성과 인류 고유의 문명과 역사를 살펴보면서,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논의하였다. 인류문명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도약과 번영을 누적적으로 성취하는 성장의 과정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성장을 위해 피지배 계층과 이방인을 착취하고 생명종을 몰살시키는 퇴행의 과정이었다.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이 퇴행의 과정을 반성하고 종식시키면서 새로운 문명의 이정표를 세우는 역할을 불교가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다음 세대의 행복을 위해 불교가 전해줘야 하는 메시지가 될 것이다. 무아의 세계관을 인류의 세계관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와 생명세계 전체가 행복해질 수 있는 문명의 이정표를 세우는 일은 불교가 해야 하는 일이고 불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느냐는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의해 정해진다. ■ 

 

양형진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 미국 인디애나대학 물리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불교와 과학에서 평등과 차별, 중도(中道)〉 〈물리학을 통해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등이 있고, 주요 저서로 《산하대지가 참 빛이다(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양형진의) 과학으로 세상 보기》 공저서로 《지식기반사회와 불교생태학》 《미래세계와 불교》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