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탈종교화 시대, 불교의 위상과 역할

-미래 종교로서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

1. 들어가는 말

근대에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서양에서는 기술 유토피아 사상이 널리 퍼졌다. 근대 과학혁명을 대표하는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과학적 지식의 축적과 기술의 발전으로 자연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지상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베이컨 이래 기술 유토피아 사상은 공산적 사회에 대한 이념과 결합하여 다양한 형태로 등장했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같은 유토피아 소설에서 비판적으로 다루어졌다. 하이데거를 비롯하여 현대의 철학자들은 기술을 통해 유토피아적 세상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기술 중심의 사회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동서 냉전시대의 종식과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기술이 인간의 삶 속에 전례 없이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20세기 후반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킨 신생 기술들의 부상은 기술의 혜택에 대한 기대를 한껏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머지않은 미래에 기술적 특이점의 도래를 예견한 레이 커즈와일(Rey Kuzweil)과 같은 기술 낙관주의자들이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2016년 프로 바둑기사 이세돌과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AlphaGo)의 바둑 대결은 대단히 성공적인 프로모션이었다. 같은 해에 스위스의 다보스에서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했음이 선언되었다. 21세기는 명백히 기술의 시대이며, 새로운 기술들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인간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어떤 형태로 우리의 삶이 변화될지 예측하기 힘든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나노기술, 생명공학, 정보통신기술, 인공지능, 인지신경과학, 로봇공학 등 융합기술들은 과거 근대과학이 이루어낸 과학혁명을 능가하는 커다란 변화를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근대과학의 성과로 인류는 자연을 정복하겠다는 생각을 진척시켜왔으며 자연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면서 자연으로부터 더 많은 이득을 얻는 방법을 고안해내고, 이를 통해 유례없는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이제 인류는 자연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꿈꾸고 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배우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연으로부터 삶의 다양한 자원을 얻는 소극적 행위자에 그치지 않고, 자연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자연을 창조하는 적극적 행위자로 나아가고 있다. 나노미터 수준에서의 물질의 재구성, 생명의 구성 요소에 대한 조작적 처치와 생명의 합성, 두뇌에 대한 지배력 획득과 인공두뇌의 제작 등은 이제 우리 인류가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자에서 벗어나 자연을 만들어내는 자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이런 자신감은 기술의 적용 대상을 자연과 사물에서 인간 자신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 물론 그동안 인간의 몸은 자연 일부로서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몸을 이해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한 의학의 발전을 위한 것으로 소극적인 것이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변형하고, 기술적 수단으로 능력을 향상시키고, 심지어 자연적 진화를 기술적 진화로 대체하려는 꿈을 꾸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transhumanists)이 바로 이런 꿈을 실현하려는 이들이다. 그들은 인류의 미래를 포스트휴먼(posthuman)으로 상정하고, 행복과 번영을 약속하는 인류의 미래를 위해 기술적 수단을 통해 인간을 변형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최근 융합기술들의 성과와 발전 전망을 고려해 보면,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상상하는 포스트휴먼 시대의 도래 여부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전혀 비현실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이 글은 트랜스휴머니스트의 이상과 불교적 사유가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불교의 궁극적 목표를 트랜스휴머니즘을 통해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른바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buddhist transhumanism)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을 비판적인 시각에서 검토할 것이다. 

 

2.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포스트휴먼은 현재 인류의 생물학적 한계를 근본적으로 뛰어넘은, 새로운 단계의 인간을 가리킨다. 트랜스휴머니스트인 영국의 철학자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의 말을 빌리면, 지능이 현재 인류의 천재 이상의 수준이고, 무한한 젊음과 활력을 자랑하며, 자연적 욕구나 기분, 심적 상태에 대한 탁월한 통제력을 지니고 있고, 심지어 강력한 물리적 힘까지 가진 존재이다. 포스트휴먼은 발전된 기술을 인간 자신에 적용한 결과로 등장하는 미래의 인류이다. 

인류가 포스트휴먼으로 진화하는 길은 첨단기술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기술을 인간에게 직접 적용함으로써 인간 스스로 자신을 변형하고 재창조하는 것이다. 보스트롬은 포스트휴먼의 가능성을 세 가지로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완전한 합성 인공지능(synthetic artificial intelligence)이고, 다른 하나는 마인드 업로딩(mind uplo-ading)을 통해 향상된 인간이다. 나머지 하나는 생물학적 인간에게 기술을 통한 향상(human enhancement)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런 것들이 축적된 결과로 등장하는 인간이다. 캐나다의 트랜스휴머니스트인 조지 드보르스키(George Dvorsky)는 미래에 등장할 새로운 인류의 형태로 사이보그, 트랜스제닉 혼종 인간, 유정적 기계, 마인드 업로딩 등을 언급했다. 

포스트휴먼과 유사한 개념으로 트랜스휴먼(transhuman)이 있다. 한 마디로 구분하면 포스트휴먼은 목표 개념이고 트랜스휴머니즘은 도구 개념이다. 트랜스휴먼은 인간과 포스트휴먼 사이의 중간 단계를 가리킨다. 인류가 포스트휴먼이라는 기술적으로 진화된 미래의 인류로 나아가는 이행 과정을 트랜스휴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이행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트랜스휴먼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인간 향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갖가지 시도와 실패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포스트휴먼은 상상에 불과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트랜스휴먼이라는 개념이 가리키는 대상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을 수 있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들은 인류가 이미 트랜스휴먼의 단계에 진입했다고 말한다. 포스트휴먼을 인간 능력향상이 완성된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본다면 트랜스휴먼은 그 과정에 있는 상태, 즉 능력향상의 미완성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 능력향상의 완성 상태를 규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트랜스휴먼은 포스트휴먼을 이해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로 보면 될 것이다.

포스트휴먼과 트랜스휴먼을 구분하는 또 다른 흥미로운 시각이 가능하다. 포스트휴먼을 기술적인 용어(descriptive term)로 보고 트랜스휴먼을 규범적인 용어(prescriptive term)로 이해하는 것이다. 신상규는 포스트휴먼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그것에 붙인 명칭이라고 이해한다.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을 규범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용어로 이해하는데, 트랜스휴머니즘이 포스트휴먼으로의 기술적 진화를 긍정하고 지지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이 규범적인 함축을 갖는 용어라면, 인간에서 포스트휴먼으로의 이행 과정을 뜻하는 트랜스휴먼 또한 규범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할 가능성이 보인다.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용어는 생각보다 역사가 깊다. 이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7년 생물학자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의 《계시 없는 종교》에서였다. 이 책에서 헉슬리는 인류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즉 인류가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용어가 오늘날처럼 사용된 것은 1990년대에 맥스 모어(Max More)가 《엑스트로피(Extropy)》라는 잡지에서 이 용어를 다시 사용하고, 닉 보스트롬과 데이비드 피어스(David Pearce)가 세계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World Transhumanist Association: WTA)를 창립하면서부터이다. 

WTA에 따르면,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적 진보를 통한 생물학적 한계 극복의 가능성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추구하는 학제적 접근법이라고 할 수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과 기술의 적용을 통해 인간 향상을 촉진하고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사람들이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고, 지적 능력과 신체적 및 정서적 능력을 향상시킬 기술적 기회의 확대를 꾀한다. 많은 트랜스휴머니스트는 트랜스휴머니즘을 근대 휴머니즘 혹은 근대 계몽주의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머니즘을 두 가지 방향에서 정의한다. 첫째,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을 통해 인간 조건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일이 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지적 문화적인 운동이다. 둘째, 트랜스휴머니즘은 위와 같은 인간 향상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들의 영향, 약속, 잠재적 위험에 대한 연구이다. 이러한 연구는 인류가 포스트휴먼으로 안전하게 이행하는 것을 보장해줄 것이다. 인간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기술을 이용할 수 있으며, 또한 기술을 이용해야 인간의 주어진 한계를 극복하고 포스트휴먼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3. 도덕공학(Moral engineering)

기술을 통한 인간 조건의 개선과 인간의 자연적 한계의 극복에 대해 믿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애쓸 것을 요구하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이 제기되었다. 인간 존엄성 문제의 지적부터 계층적 불평등과 정의 문제, 가치 체계의 붕괴와 인간관계의 파괴 문제, 나아가 우생학의 위험까지 다양한 비판이 제시되었다. 그리고 이런 비판들은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에 상당한 논쟁을 일으키며 여러 학자의 관심과 지지를 받고 있는 인간 향상의 쟁점이 있다. 이른바 도덕공학(virtue engineering 혹은 moral engineering)이라고 불리는 인간 향상(human enhancement) 영역이다. 

단순히 신체적 우월성이나 지적인 우월성을 획득할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향상은 윤리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겠지만, 도덕성 혹은 도덕적 행위 능력을 증진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기술적 향상은 윤리적으로 옹호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다수의 철학자가 피력했다. 인류는 어떤 문화에서든 도덕성 혹은 덕성의 함양을 늘 강조해왔으며, 다양한 방식의 교육과 훈련을 통해 개인의 도덕성과 공동체의 도덕의식을 함양하는 데 애썼다. 하지만 이런 노력의 결실은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으며 우리의 바람은 만족할 만큼 충족되지 않았다. 하지만 교육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으므로, 또한 그 정도의 효과라도 필요하기 때문에 덕성 함양을 위한 교육은 늘 중요했다. 그런데 인간의 도덕성 혹은 도덕적 행위 능력을 좀 더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증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설령 그것이 기술적 수단이라도 하더라도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다름 아니라 기술적 수단을 통해 인간의 도덕성 혹은 도덕적 행위 능력을 증진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도덕공학이며,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도덕공학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지지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옥스퍼드대학교 실천윤리연구소의 사불레스쿠(Jul-ian Savulescu)와 페르손(Ingmar Persson)은 《미래사회를 위한 준비(Unfit for the Future)》(2012)에서 도덕공학의 정당화 근거를 치밀하게 논의한다. 이들은 현재 인류가 직면한 위기의 상황에서 현재 인류의 내적 조건과 외적 조건의 특성을 감안한다면, 달리 방안이 없는 한 도덕공학을 지지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인류는 대량살상 무기의 위협, 기후 변화 및 환경 문제 등 전 지구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위기는 현실적인 것이며,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협력과 실천이 없으면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현재 인간과 인간 사회는 이 위기를 타개할 능력이 없다. 

사불레스쿠와 페르손은 먼저 현재 인류의 내적 조건을 지적한다.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지난 15만 년 동안 거의 변한 것이 없는데, 지금까지 인간의 생존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전 지구적 위기에 대해서는 대처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류의 자연 본성,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형성된 상식적 도덕성과 도덕규범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긴밀한 결속력을 지닌 사회환경, 다시 말해 전 지구적인 협력과 공조, 그리고 먼 미래에 미칠 영향까지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서는 문제가 없지만, 오늘날 인류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낯선 타인에 대한 너무 적은 관심과 다수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 현재와 가까운 미래에 시선을 집중하고 먼 미래에 대한 미미한 관심, 개인적 행위의 직접적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느끼지만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에 대한 무책임 등의 경향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다. 이런 성향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먼 나라 사람이나 먼 미래를 위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은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데, 고통받는 먼 나라 사람들과 미래 인류를 위해 자발적으로 현재의 쾌락을 줄이고 불편과 고통을 감수하려는 의지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설령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을 멈추거나 감소시킬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다고 해도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 

인류의 외적 조건 또한 현재 인류가 처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좋은 체제이기는 하지만, 현재 인류가 보유한, 그리고 앞으로 더욱 늘어나게 될 대량살상 무기의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어렵게 한다.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맞서 시민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프라이버시의 권리를 축소하는 시도들은 자유를 존중하는 정신을 약화시킬 것이며, 기후변화나 환경오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나치게 소비지향적인 생활 방식에 실질적인 제한을 가하는 정책을 유권자의 지지에 민감한 정치인들이 선택할 방안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독재 정권을 옹호할 수는 없다. 

그리고 전통적인 도덕교육 방법은 현재 인류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 이런 방식이 그동안은 유용했지만, 인류가 타개해야 하는 문제의 시급성을 고려한다면 그 유용성에 한계가 분명하다. 기존의 상식적 도덕과 가치규범에 상당한 변경을 빠른 시일 내에 이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통적인 방식인 도덕적으로 선한 것에 대한 교육이나 가르침은 현재 인류의 당면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도덕적 향상을 이뤄내기에 충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으로 선해진다는 것은 선한 것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친인척만을 챙기고 외국인을 혐오하는 것과 같은 편견이나 충동을 제압할 수 있는 도덕적으로 선한 동기를 지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성찰을 통해 사불레스쿠와 페르손은 기술적 수단을 통한 인류의 도덕적 향상을 정당화한다. 

마크 워커(Mark Walker)는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살고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기술적 수단을 이용한 도덕적 향상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워커는 유전적 덕성 프로젝트(Genetic Virtue Project: GVP)를 제안하는데, 이것은 도덕적 행동의 유전적 상관자(genetic correlates of virtuous behavior)를 발견하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조절함으로써 인간의 덕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워커는 유전적 악을 제거하고, 인간 본성의 나쁜 기능들을 제거하여 우리의 도덕적 향상을 이룰 수 있다면 GVP를 실행에 옮기는 것은 도덕적 필연성(moral necessity)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개인의 도덕성 함양에 관련된 요인들은 교육은 물론 사회 정치적 요인들도 있지만, 유전자 또한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특히 덕을 더 잘 쌓을 수 있는 사람과 덕을 쌓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그들이 타고난 유전적 성향과 관련이 있으며, GVP를 통해 이런 유전자를 조절할 수 있다고 워커는 믿는다. 그리고 덕성과 관련된 유전자를 조정하여 덕을 쌓는 데 좀 더 용이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만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므로 윤리적으로 장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워커는 주장한다. 

토마스 더글러스(Thomas Douglas) 역시 도덕공학을 지지한다. 그는 “어떤 사람이 자신을 변형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그 사람이 가지는 동기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나은 동기를 가질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기대되는 한에서 그 자신을 변형”하는 것을 도덕적 향상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도덕적 향상은 개인을 좀 더 덕스럽게 만들거나 책임감이 더 강해지게 하거나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좀 더 도덕적 동기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글러스는 도덕적 성향이나 품성의 개조가 아니라 도덕적 동기를 강화하는 데 초점을 두어 논의한다. 그는 사람들이 좀 더 도덕적인 동기를 향상시킬 수 있도록 개인 스스로 자신의 변형을 꾀한다면, 비록 기술적 수단을 활용하고 인간의 신체에 변형을 가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윤리적인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4. 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교

서양의 근대 휴머니즘은 계몽주의와 유토피아 사상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와 인간 중심적 사고, 그리고 인류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근대 휴머니즘의 근본 사상이다. 특히, 과학과 기술을 토대로 건설되는 기술 유토피아에 대한 강한 신뢰는 다수의 유토피아 사상가들에게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새로운 아틀란티스》(1627)에서 소개한 유토피아는 과학과 기술 탐구를 통해 이른바 ‘자연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회복함으로써 지상에 건설된 낙원이다. 19세기 미국의 소설가 에드워드 벨라미(Edward Bellamy)는 《뒤를 돌아보며》(1888)라는 유토피아 소설에서 자유, 평등, 박애라는 휴머니즘의 이상이 실현된 사회를 그렸다. 그는 비록 상상 속이지만 관대함, 이타성, 동정심 등 긍정적인 인간 본성이 보편적으로 육성되고 분쟁과 질투, 폭력과 사기가 근절된 세상을 꿈꾸었다. 

근대의 기술 유토피아 사상에서는 물질적 풍요를 획득하는 방법으로 과학과 기술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성의 함양을 위한 확실한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1932)에서 과학과 기술을 통해 인간성을 통제하는 방안이 언급되어 있는 정도이다. 그러나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성 자체를 기술을 통해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벨라미가 상상한 인간 본성의 보편적 육성, 그렇게 해서 분쟁과 질투, 폭력과 사기가 근절된 세상을 실현할 방법으로 기술적 수단을 통한 인간 향상을 언급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여 질병과 노화 등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악덕과 심리적 결함을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아직까지 인간의 잠재력이 거의 실현되지 않았으며 과학과 기술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경이롭고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류를 더 높은 단계로 고양시키고 인간 세상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이러한 사고는 불교와 공통점이 많다. 

불교의 핵심 진리는 연기와 사성제이다. 연기는 싯다르타가 보리수 아래서의 오랜 수행 끝에 깨달은 진리이다. 일체의 존재와 현상은 연기에 의해 생겨나고 소멸한다.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지금, 여기’의 현상들과 사물들은 다양한 원인(因)과 조건(緣)의 일시적인 결합의 결과이다. 인간을 비롯한 일체 존재와 생명 현상의 변화 과정은 여러 가지 원인이나 요소들의 이합집산 결과로 생겨난 것인데, 인과 연이 서로 변하기 때문에 현상도 변화를 계속한다. 그러므로 어떠한 것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으며 무상하다. 

불교는 연기의 법칙을 토대로 인생의 문제에서 네 가지 핵심 진리를 전한다. 고집멸도로 표현되는 사성제는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와 그 해결 방법에 대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 고성제는 인생의 참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인생에는 근본적인 고통이 있다고 한다. 그 고통에는 생로병사의 괴로움,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 오온에 집착함으로써 비롯되는 괴로움 등이 있다. 집성제는 고통의 원인을 밝혀준다. 인생의 고통은 무지, 욕망, 집착이 원인이 되어 생긴다. 멸성제는 모든 욕망의 뿌리가 되는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시킨 이상적인 경지로 열반을 말한다. 도성제는 모든 고통이 소멸되고 참된 자유를 얻는 열반의 상태에 들기 위한 수행의 방법을 말한다. 불교는 인생의 근본적인 고통을 극복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주장한다. 

팔정도는 초기불교의 경전인 아함부 경전에 나오는 것으로, 중생이 각종 고통의 원인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의 세계로 들어서기 위한 실천 수행의 여덟 가지 길을 밝힌 것이다. 열거하면, 정견(正見) 즉 올바로 보는 것, 정사(正思) 혹은 정사유(正思惟) 즉 올바로 생각하는 것, 정어(正語) 즉 올바로 말하는 것, 정업(正業) 즉 올바로 행동하는 것, 정명(正命) 즉 바르게 생활하는 것, 정근(正勤) 혹은 정정진(正精進) 즉 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정념(正念) 즉 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정정(正定) 즉 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 등이다. 팔정도는 성격상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정견부터 정명까지 앞의 다섯 정도는 행동적 규율 혹은 도덕적 규율이다. 이 다섯 규율의 계발은 개인은 물론 사회에도 득이 된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 정정진에서 정정까지 뒤의 세 가지 정도의 계발을 위한 충족시켜야 하는 기본 요건이다. 뒤의 세 가지 정도는 바른 의식과 관련되어 있다. 앞의 다섯 정도는 우리의 도덕적 삶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다섯 정도를 닦음으로써 더 나은 삶으로 인도되고, 다음 생에 더 나은 삶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의 영속적인 종결은 아니다. 불교의 최종 목표인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을 이루기 위해서는 윤회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한다. 이 최종적인 목표를 이루는 길이 바로 팔정도에서 뒤의 세 가지 정도이다. 

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교는 그 목표에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행복하고 덕스러운 삶을 살도록 유도하며, 궁극적으로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트랜스휴머니즘이 깨달음을 직접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 계몽주의와의 연장선에서 이해한다면 계몽과 깨달음을 비유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교의 접점을 발견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불교가 깨달음을 얻는 방편으로 기술적 수단을 거부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연기의 사슬을 끊고 도달하게 되는 열반에 준하는 상태, 즉 “열반적이고 준-유토피아적인 미래(a Nirvanaesque quasi-utopian futurefuture)”를 과학과 기술의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5.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Buddhist transhumanism)

불교도가 트랜스휴머니스트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불교에서 다양한 깨달음의 수단을 강구해왔으며 기술적 수단이라고 해서 배제될 이유가 없다는 데 있다. 전통적인 불교의 수행 방식인 요가(yoga)와 명상(meditation)을 드보르스키는 소프트웨어 향상(software enhancement)의 양식이라고 말한다. 요가는 여러 가지 생리적 및 심리적 향상을 불러오는데 강인함, 참을성, 균형, 신체의 인식 및 운동감각 의식 등의 향상을 가져온다. 기분(mood)을 개선하고, 적개심, 우울감, 불안 등의 감정을 완화하고, 자아수용감(self-acceptance)과 자아실현감(self-actualization)을 증가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명상은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고 기분과 기분을 개선하고 정신을 맑게 한다. 더 나은 인지적 의식과 더 큰 행복을 얻는 데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꾸준한 명상 훈련으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더 잘 통제할 수 있게 되고, 어떤 관념이나 느낌, 동기를 어떻게 하면 의식적으로 사유하고 그에 따라 어떻게 해야 더 잘 행동할 수 있는지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앤드루 펜턴(Andrew Fenton)은 메틸페이데이트와 같은 신경 약물을 일상적인 마음챙김(mindfulness)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불교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대승불교는 공리주의적 이유들로 인해서 신경 약물과 같은 기술적 수단을 방편으로 삼는 것에 개방적이라고 말한다. 펜턴은 좀 더 나아가서, 미래의 신경 약물들과 여러 기술적 수단들이 마음챙김을 돕는 수단은 물론이고 행복을 향상시키고 덕을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을 주장하는 이들은 불교의 수행에서 과학과 기술을 포함시키는 것을 금지하는 부처의 가르침이 없다고 주장한다. 달라이 라마는 어디에선가 불교의 목표가 “서양 과학의 목표와 같은 것”이라고, 다시 말해, “인류에 공헌하고 더 나은 인간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드보르스키는 아인슈타인이 언젠가 불교에 대해 미래의 종교라고 말했다고 밝히면서 포스트휴먼 시대의 종교로서 불교의 가능성을 지적한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 이후 인류에게 닥칠 급격한 변화와 미래 쇼크에 적절히 대응하고 인간성의 변화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대처하기 위해 고전적인 형태의 불교에 의존할 것을 주장한다.  

불교에서는 수양을 위해 효과적인 방법을 강구하고 그것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을 장려했다.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방편 사상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대승불교의 초기 경전인 《십지경(Daśabhūmika Sūtra)》에서는 10바라밀 가운데 일곱 번째 바라밀로 방편 바라밀(upaya)을 올려놓았다. 《법화경》의 방편품은 대승불교의 방편 사상의 근본적인 이념을 전하는 경전이다. 방편에서 방은 ‘방법’을 의미하고 편은 ‘적용’을 뜻한다. 방편(upaya)은 ‘가까이 다가가다’ ‘도달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한 말이며, 중생이 불교적 목적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을 의미한다. 붓다는 중생이 불교의 궁극 목표인 깨달음에 이르도록, 즉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통찰하도록 가르침을 펼쳤는데, 그런 점에서 보면 붓다의 가르침 역시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인 마이클 라토라(Michael LaTorra)는 소극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고통을 줄이는 목표를 달성하고, 적극적인 측면에서 인간의 행복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기능적 수단에 있어서 트랜스휴머니즘과 불교의 차이를 언급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 삶의 물질적 조건을 변형하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인체의 생물학적 메커니즘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반면에 불교는 인간이 자신의 물질적 조건에 관계하는 방식과 인간들 상호 간에 관계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한다. 이것은 도덕적 수양과 지혜 탐구 및 명상 수행을 통해 이루어진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은 이 두 가지 방법을 모두 결합하여 활용한다. 

라토라는 제임스 휴즈(James Hughes)가 주도하는 사이보그 붓다 프로젝트(Cyborg Buddha Project)에 참여하고 있다. IEET(Insti-tute for Ethics and Emerging Technologies)의 공동 설립자인 휴즈는 신경과학과 신생 신경기술들이 행복, 영성, 인지적 자유, 도덕적 행동, 마음의 명상적 상태 및 황홀 상태에 대한 탐구에 미칠 충격에 대한 논의를 촉진하기 위해 만든 모임이다. 여기에는 라토라 이외에 조지 드보르스키도 참여하고 있다. 드보르스키는 캐나다의 과학 저술가이자 미래학자로 동물과 인간의 ‘상승(uplift)’을 주창한다. 상승은 미국의 SF 작가인 데이비드 브린(David Brin)이 사용한 용어로, 어떤 종이나 문명의 지능이 더 높은 단계로 뛰어오르는 것을 말한다. 드보르스키는 장기적으로 인간으로부터 포스트휴먼으로의 ‘상승’을 주장한다. 

휴즈는 신경공학이 급속도로 발전해서 안전하고 자발적인 향상 기법들을 통해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지적 결합과 보완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휴즈는 정직과 동정심 등 특정한 도덕적 행위의 일관성 있는 성향이 확인되고, 우리가 그런 성향을 드러낼 가능성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소인들이나 지속적인 신경화학작용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면, 미래의 신경공학 기술들을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우리 자신을 좀 더 정직하고 동정심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의 악덕을 지속적으로 회피하고 미덕을 실행하도록 신경공학을 이용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번뇌를 씻어내는 데에 쓸모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6. 나오는 말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은 미래 종교로서 불교의 가능성 실험으로 생각된다. 신이나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그런 것들을 가정하지 않고 개인의 심신 수양을 통해 더 나은 기인과 공동체의 삶과 도덕적 행위를 추구하는 불교는 여타의 종교와 다른 점이 있다. 우주적 진리를 토대로 세워진 불교의 가르침은 시공에 구애받지 않는 유연함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인류가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이 다수 발생할 것으로 예견되는 포스트휴먼의 시대에도 불교는 여전히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우리 세상을 더 살기 좋은 세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가르침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불교의 바로 그런 특성을 발견할 것이 아닐까?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은 아직 하나의 시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휴즈를 비롯해 몇몇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불교와 트랜스휴머니즘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물론이고 새로운 접점에 대해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트랜스휴머니즘의 적용 범위를 인간에 국한할 것인지 모든 생명체로 확산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피어스나 드보르스키는 트랜스휴머니즘의 범위를 동물까지 포함하여 논의하고 있다. WTA의 선언문 7조를 보면, 트랜스휴머니즘의 적용 범위가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27) 피어스는 인간의 고통 제거뿐만 아니라 동물의 고통 제거를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로 삼고 있으며, 드보르스키는 단기적으로는 동물의 고통 제거, 장기적으로는 동물의 ‘상승’을 트랜스휴머니즘의 목표로 삼고 있다. 이 외에도 불교적 트랜스휴머니즘의 포스트휴먼 시대에 삶에 방향을 정위해 줄 수 있는 신념, 더 나아가 미래의 대안적 종교로서 가능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좀 더 깊이 있는 다각도의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

 

이상헌
서강대학교 교수. 서강대 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세종대학교 · 가톨릭대학교 초빙교수, 동국대학교 강의전담교수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칸트 도덕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포스트휴먼〉 〈환경교육의 방향 설정과 생물모방학〉 〈자연중심기술과 환경철학의 새로운 관점 모색〉 등과 저서로 《융합시대의 기술윤리》 《철학, 과학기술에 말을 걸다》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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