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탈종교화 시대, 불교의 위상과 역할

1. 시작하는 말

‘시민사회 공론장’이라는 단어를 접하면 아마도 촛불집회, 태극기집회, TV 토론회, 온라인 SNS 커뮤니티 등을 떠올리고,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자칫 두통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동안 공공(公共)의 쟁점을 드러내는 집단행동들이 여러 영역에서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집단들 사이에서 서로 격하게 대립하거나 갈등을 증폭시키는 경우가 빈발했기 때문이다. 송호근에 의하면, 군사정권이 종말을 고한 1987년까지 과잉의 ‘인민/국가’가 있었을 뿐, ‘시민성’에 관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다. 촌락 질서를 구성했던 공동체 정신이 소멸되는 것을 아쉬워했을 뿐, 어떻게 도시에서 그것을 회복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 제안, 교육이 없었다. 도시화 · 산업화의 시간 동안 국가권력 밑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시민사회가 1987년 민주화 이후 ‘폭발했다’1)고 한다. 

그런데 이런 사회학자들의 논리를 따라 읽다 보니, 내가 모종의 함정에 빠진 듯하다. 말하자면, 그리스 · 로마의 공화정에 이어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에 이어서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시민혁명을 거치지 않은 한국의 인민들은 ‘어쩌다 시민’이 된 탓으로 ‘시민성’에 관한 특수교육을 미리 받았어야 한다-고로 우리는 저열(低劣)한 시민의식에서 저급(低級)한 시민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 논리가 쉽게 공감되지 않으면서도 우리를 비하(卑下)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소위 그 폭발적인 현상에 부응해서 연구들을 한 까닭인지, 학술자료 데이터베이스에서 ‘공론장’을 검색하면, 수천 건의 자료가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필자가 특히 종교계의 활약상을 파악하고자 문헌목록을 일별(一瞥)한 결과, 기독교계가 불교계에 비해서 훨씬 많은 자료를 생산해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간의 시민사회 관련 연구들이 ‘시민’ 형성의 발전사 같은 것을 주목하기보다는 주로 공익적 시민단체나 NGO(비정부기구)의 활동에 편향되었음을 지적한 시각도 있지만, 하여간에 사회봉사, 사회복지의 공익적 활동은 물론이고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도 기독교계 연구가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한국인의 절반쯤이 종교인이고 그중 절반쯤은 불교인이라고 추정하며 지내왔던 지난 시절에, 공공선(公共善)을 위해 행동하는 선진적 시민사회 영역에서 불교계가 기여한 비중은 실제로 얼마나 되었을지 궁금하다. 

물론 어느 교단[교회]에서 시민사회 차원의 활동이 적극적이라거나 소극적이라거나, 양적으로 많다거나 적다거나, 그런 문제는 단순하게 외형상으로 비교할 일이 아니다. 과거 종교계의 일부 성직자들이 특정한 정치권력에 유착해서 정치사회적 편향성을 널리 표방한 독선(獨善)의 맥락을 연구한 자료들이 적지 않다. 그런 경우의 종교계 사회참여라는 것은, 오히려 적극적이고 빈도가 잦을수록 우리 사회에 불행한 일이 된다. 신자들을 동원해서 집단활동의 모양새는 보일지라도 교회조직 차원의 자발적 · 민주적인 공론절차를 거치지 않고, 교단의 총체적 의지를 반영하거나 대표성을 가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요컨대, 종교계 집단행동이 시민사회운동에 속하려면, 성직자의 종교권력에 의한 강제성 추진이 아니라, 시민의식을 가진 교인들이 자발적 결사를 통해서 숙의(熟議)해야 한다. 사회적 행동으로써 자기 교회만의 이익이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달성할 수 있는지, 여타 사회성원들과의 연대성이 가능할지 등을 평가해야 한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 시민사회란, 자체조직을 갖추고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성장하며, 정치사회적인 환경에 지배를 받고, 평등과 민주주의 등의 가치실현에 기여하고, 정부 · 기업 ·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므로 참여, 조직, 가치, 영향력, 환경의 5대 지표(혹은 구조, 공간, 가치, 영향력의 4대 지표)로써 시민사회의 건강성과 지속가능성을 측정해볼 수 있다. 기존의 개념들을 필자가 이해한 방식으로 재인용하자면, 시민사회 공론장이란 가치 공공성 · 참여 자발성 · 연대 책임성 · 논의 합리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한 이해범위 안에서 불교계가 책임성 있게 수행해야 할 역할을 추론하고자 한다. 

 

2. 시민사회 공론장에 대한 불교적 이해 

1) 연기(緣起)하는 사회현상-공공성의 근거

불교학자가 세상을 읽는 방식과 사회과학자가 세상을 읽는 방식은 같지 않을 것이므로, 금번 주제를 다루기 위해서 우선 시민사회 공론장에 관한 기존의 글들을 가능한 한 많이 읽음으로써 사회과학자의 언어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였다. 그 끝에 한 가지 떠오른 의문이 있다. 

한국의 시민사회를 해설하고 그 발전을 위해 제안하겠다는 연구물 대부분이, 시간적 · 공간적 편차가 엄연함에도 불구하고 서구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비록 드물기는 하지만 유교사상의 사회이론화를 시도한 연구들이 나와 있는데 유교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한민족의 사고방식과 생활문화의 토대가 되면서 국왕들의 통치이념이 되기도 한 불교철학은 왜 사회학자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였을까? 한국 학자들이 잘 아는 한나 아렌트(H. Arendt)도, 서구 근대의 기점이 되는 세계탐험, 종교개혁, 과학발전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폭발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선행사건이 있고 부단한 연속성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그녀의 관점을 즐겨 학습한 사람들이라면 한국사회 변동을 내부자의 눈으로 살피고 거기서 중요한 맥락의 연속성을 놓치지 않도록 깊은 성찰을 좀 더 했어야 하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1970년대를 시작으로 일부 사회과학자들은 서구의 이론적 틀과 한국의 현실이 부합되지 못하는 점을 깨닫고, 사회이론의 ‘토착화’에 이어서 ‘한국화’ 담론을 이끌었다. 예컨대, 사회학계는 2001년 “한국 사회이론 만들기: 이론의 식민지성을 넘어서”라는 주제로 ‘한국이론사회학회’를 출범시키고 한국적 사회이론을 위한 학문의 장을 별도로 마련하였다. 사회과학에서 탈(脫)맥락적이고 통(通)시대적인 보편성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더구나 서구 역사상 특수한 의미가 우리에게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경험을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그것이 인류사회에 보편타당한 것으로 신봉하는 서구중심주의에 빠져 있다. 즉, 근대 서구문명이 인류사의 최고 수준이라는 ‘서구 우월주의’, 서구문명의 발전 경로는 전체 인류사회에 보편타당하다는 ‘서구 보편주의’, 그리고 비(非)서구사회는 오직 서구문명을 모방 ㆍ 수용함으로써 발전할 수 있다는 ‘서구화’가 그것이다.

종교사회학의 대부처럼 인용되는 베버(M. Weber)는 유럽의 합리성 이외에도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자본주의 탄생의 비결임을 입증하기 위하여 세계의 주요 종교들을 연구하였는데,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가 신화적 · 주술적 · 신비적인 반(反)합리적 요소를 갖고 있어서 신자들이 현실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 이름도 찬란한 서구의 사상가들, 몽테스키외, 로크, 루소, 밀, 헤겔, 마르크스 등은 오직 기독교 안에서만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주의사회는 기독교의 토대 위에서만 구축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저서 《제3의 물결: 20세기 후반의 민주화》에서 헌팅턴(S.p.Huntington)도 기독교가 민주주의의 발전을 촉진한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사회를 연구한 자료들이 주목한 지점은 위의 주장들과 사뭇 다르다. 즉, 우리나라에 해외 선교사들이 전래(傳來)한 당시부터 기독교는 내부적으로 계급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 후로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의사결정 과정은 민주주의 원리와 상관없이 형식화되거나, 교권을 장악한 세력들에 의해서 배타적 권위주의로 지배적 공론장이 확산되었다. 더불어 교회 밖 세상에서도 정치적 · 경제적 권력층의 헤게모니 동맹에 적극 가담하여 지배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여 왔다는 것이다. 서구 근대성을 기준으로 한국사회를 재단(裁斷)하는 사회학자들의 글을 따라가 보니, 결국 뿌리 깊은 근거지로서 ‘서구 기독교 중심주의’를 만나고, 더욱이 기독교가 한국의 교회를 통해서는 얼마나 활발하게 권력지향적인 사회활동의 주체가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쯤에서 불교계는 무엇을 참고해야 할까.

사회학자 베버 등이 불교에 대해서 얼마나 무식하였는지를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는 없다. 불교가 실제적으로 작동하는 내용이 중요한데 그 현실을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연구가 희귀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래도 “불교는 근대성을 성찰하고 21세기 탈현대적 공공성을 구축할 수 있는 교리로 넘쳐난다”고 말하는 이도흠의 낙관에 필자는 경의를 표하고 그 논조(論調)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2,500여 년 전 지식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당대의 문화전통, 소유, 분배, 권력, 사회계층, 환경, 사회변동 등에 대해서 깊은 탐구와 통찰의 역량을 발휘하여, 마치 오늘날 학문을 하는 과정처럼 본격적이고 지속적으로 공론[公/共論]의 장(場)을 개설하였다. 그런 공공성으로 결집된 불교이니만큼, 불교교리는 누구든지 세간사[현실사회]에 적용해볼 만한 지식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사물이 상의상관(相依相關)하는 조건 아래 오직 잠정적(暫定的) 존재임(inter-being)을 알아차리게 하고, 사람들이 서로 의존하는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부합되게 살도록 하라는 것이며, 그렇게 발견된 존재원리를 연기법(緣起法)이라고 칭한다. 일상의 맥락에서 그 의미를 부연하자면, 인간[집단]이 개별적 특성을 띠고 사회생활 세계에 참여하는 것은, 독자노선이 아니라 서로 간 인연의 줄이 엮이는 과정이다. 그렇게 연결되어 있는 삶의 그물망(network) 체계에서 인과관계를 널리 다 파악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행여 그물망에서 예외가 되거나 혹은 배제되어야 할 특수한 존재란 본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계내존재의 공공연한 상호관계(inter-relatedness)를 근거로, 모두가 지닌 ‘본원적 평등성’을 해명하는 연기법 자체가 불교의 내재적 · 이념적 공공성의 근거라고 생각된다.

불교사회학자 유승무는 사회현상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연기체 사회학’이라 부르고, 또한 화엄교의 어려운 ‘상즉상입(相卽相入)’ 개념을 사회학에 도입하려는 열의를 보인다. ‘연기체’라는 말은 아마도 엘리아스(N. Elias)의 용어 ‘결합체(configuration)’와 ‘연기법’의 합성어일 것 같다. 엘리아스는 인간과 사회 사이의 상호의존적 결합과정을 ‘configuration’이라 명명하고, 양자의 상호의존성과 그 변화의 과정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관점에서 해석할 것을 제안했다. 옳은 제안이다. 인간사회의 유기체적 상호작용은 고정되지 않고 역동적이므로 항상 맥락[因緣]을 고려해야 하고, 시간과 공간을 망라한 다차원의 연기(緣起)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 

연기법설이라든가 화엄교의는 자연환경과 인간사회 안에서 구성요인의 생주이멸(生住異滅) · 만족[樂] · 불만족[苦] 등이 현현하는 과정을 직관한 순수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순수직관은 깊이 보고 아는 것일 뿐, 복합요인의 사회현상 속에서 의도적으로 우리가 행동할 바를 결정해가는 것은 행위론[業說]이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연기법이 우리에게 사회를 마치 이미 짜인 그물망으로 보고 현실을 체념하게 하거나, 탈맥락적으로 오지의 수도자처럼 시공을 초월하는 법을 구하라고 가르치는 듯이,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정반대로, 연기법에 의하면 그물망세계의 이음매(node)인 모두가 예외 없이 권리와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지면 관계상 긴 논의를 생략하고, 필요할 경우 조애너 메이시(J. Macy) 등의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2) 연대(連帶)하는 시민사회-공공성의 활로

고타마 싯다르타는 실천가이고 경험주의자이다. 그러므로 불제자라면 누구나 사회현상에 대해서 불교식 용어로 독특하게 바꿔 해설하는 것보다 더 우선하는 과제가 있을 것 같다. 세상사 연기하는 과정에 장애가 생기지 않도록, 선량한 흐름을 거슬러서 갈등이나 고통을 더 많이 초래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따로 또 같이’ 불제자답게 행동하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 그것이다. 사회현상을 현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제해결의 실질적인 방법론을 더욱 고민해야 할 복잡사회 시점에 이르러서, 연기는 필연(必然)이고 연대는 필수(必須)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실제 불자시민들의 연대활동의 경험이 어떤지를 알아야겠는데, 불자들이 어떤 사회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사회활동에 참여하는지도 제대로 파악할 기회가 없었고, 파악하기가 어렵기도 하다. 대규모 사회조사에서 종교를 변수로 분석한 통계치를 보거나, 개별 연구자들의 조사결과에서 그 편린(片鱗)을 보게 될 뿐이다. 그래서 쉽게는 불교를 표방한 사회단체들의 활동만을 보고 불교계를 설명하지만, 금번에 필자는 불교단체의 외형에 주목하지 않고 불자시민의 개별적 선택들이 어떠할 것인지를 상상해보려고 한다. 불자로서 일반 사회단체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적잖게 있을 것이고, 심지어 기독교계 사회봉사활동을 후원하는 불자들이 상당히 많다는 점도 그리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다.

오늘날 여러 가지 이유로 경쟁하고 충돌하는 사회현상들 속에서도 화쟁(和諍)의 방안을 찾고자 이도흠은 원효 스님의 법문을 빌려서 멋지게, “협력(cooperation)은 일심이고 진여문이며, 경쟁(com-petition)은 이문이고 생멸문이다. 경쟁하면서 상생할 수 있는 길, 자비행을 실천하면서도 이윤을 확보하는 대안은 코피티션(co-opetition)의 원리를 경영에 응용하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몇몇 기업의 성공적 사례까지 소개하며 자신감을 보인 코피티션의 원리에 대해서 필자가 더 자세히 파악한 바는 없으나, 적어도 각 경쟁사가 사업상 수지계산을 해보았을 때 담합이 아닌 공조(共助)를 선택하는 편이 독자노선에서보다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오리라고 판단했을 것 같다.

코피티션 개념에 원용된 ‘협력 즉 경쟁=상생’이라는 논리가 얼핏 허구로 보인다. 그러나 각도를 달리해서, 기업이 서로 죽기를 바라지 않고 살기를 전제로 한다면 ‘협력 즉 경쟁’이라는 역설적 패러다임이 오히려 합리적인 지향점이 되겠다. 진정한 공조행위가 ‘합리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사회관 · 세계관으로서 불교의 연기법을 믿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생활세계뿐만 아니라 기업활동의 근거 역시 상호의존[緣起]이라는 조건에 있으므로, 인근의 그물코와 같은 상대기업들이 충실했을 때 그물망 전체에 상보적(相補的)인 긍정효과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업과 같은 이익집단 사이에서도 결국 연대 행위가 필수인 것처럼, 시민들이 유능한 연대활동을 통하지 않고 잘 살아갈 방도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시민사회 내부의 다양성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연대할 수가 있을까. 

시민적 연대의 출발점에 대해서, 타인 혹은 타(他) 집단에 대한 도덕적 책임성이라거나, 인간 존엄성에 기초한 상호존중과 신뢰의 시민문화라거나, 혹은 각자의 개인적 안녕 · 소외 등 잠재적 위험요인에 대처하려는 감정적 동기라거나 하는 분석들이 있다. 사회연대활동을 위해서 인간적인 도덕성이나 집합감정도 물론 필요하지만, ‘연대’ 자체를 사회존립에 필수적인 요소로 보는 이성적 인식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진다. 예를 들면, 종교인이 사회연대활동에 참여할 때나 참여를 권하려고 할 때, 흔히 신앙적 감수성을 겨냥하여 사랑 · 연민 같은 덕목을 부추기는데, 불교계는 그렇게 정서적인 보살심보다도 연기법에 철저한 연대의 책무감을 각성하자는 의미에서 이지적(理智的) 보살행이 되기를 강조해야 할 것이다.

한국이 얼마나 분열되고 갈등하는 사회인지를 해설하는 자료들이 많지만 그것을 읽기 전에 현실감각만으로도, 우리 가운데서 누군가가 괴로우면 결과적으로 모두가 고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부자와 빈자 · 노년과 청년 · 남자와 여자 · 고위층과 하위층 등 각자의 입장에서 인과관계를 추정하며 고통의 서로 다른 원인을 찾겠지만, 결국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함께 겪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여기저기서 공동체, 연대, 치유 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함께 지어서 함께 받는 공업세간(共業世間)’의 고통이므로, 사회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상호주체성에 입각해서 공동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사회현실문제에 공동대처하려면 바로 시민사회 연대활동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시민사회 발전의 여건은 충분히 성숙하여 있는데도 그 밑거름이 되는 시민들의 참여가 여전히 부진하다는 시민사회지표 분석의 결과가 있었다. 김석호는 “모두가 불안하지만, 함께 문제를 해결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커졌고, 사회봉사나 기부문화는 취약하다. 시민적 성찰과 시민적 덕목이 촉진되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한국인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지식은 다른 국가 국민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마음에는 정치혐오와 냉소가 점점 더 크게 자라고 있다.”라고 진단한다. 정치사회적 현상에 관심이 높은, 그러나 지금 냉담한 시민들이 신뢰하고 동참할 만한 사회적 연대의 결사체를 구성하는 것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어야 할까? 추상적 개념의 시민사회가 구체적으로 조직화되면 시민사회단체라고 할 것이며, 대내 · 대외의 조직적 활동을 통해서 구성원들은 ‘연대성’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간혹 이론가들이 몇몇 종교단체의 활동에 대해서 시민사회활동이라고 볼 것인지 여부를 논박하는데, 핵심은 그 단체활동이 갖는 사회적 공익성, 참여 자발성, 민주적 의사결정 등에 관련이 있다. 흔히 종교계가 교육기관 · 언론기관 · 사회복지기관 등을 개설하면 공익성 사회활동으로 간주하지만, 그런 활동을 통해서 실은 교단이 세속적이고 배타적인 종교권력을 키우고 더 나아가 정치사회적 권력을 행사한다는 분석이 있다. 그중에서도 작금(昨今)의 불교계 사회단체 활동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한국사회에 각종 ‘연대’라는 이름을 붙인 사회단체가 생겨나던 1990년대부터 불교계에도 조직적 활동이 늘어났는데, 불자들이 참여한 사회단체에서의 경험은 어떠할까. 청년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부채감으로 1990년대에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사회단체 회비를 내기 시작한다는 불자도 있다. 사회단체에 후원금을 내고 공식적 멤버십을 갖기는 했지만, 정작 단체의 활동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다. 소위 ‘민주화’ 분위기 속에 생겨난 사회단체를 후원함으로써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시민적 책무감을 해소하려는 것 같다. 이런 경우도 자발적 참여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모래알 같은 구성원이라서 시민사회의 진정한 연대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일본에서도 사회참여라는 것이 불교의 오래된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전통주의자가 있고, 반면에 서구화 영향으로 달라진 사회에 맞춰 새롭게 생긴 활동이라고 보는 근대주의자가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불자들이 같은 사찰이나 사회단체에 속해 있을 때, 실제로 그 내부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알다시피, 상대적으로 활발한 기독교 사회참여에서도 기독교계 내부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리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이제 불교계가 내부자들과 공유할 수 있는 불교적 신념이나 소속감을 강제하지 않고도, 시민사회 영역에서 연대하는 역량을 증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단체 활동에 주체적 시민성을 가진 시민참여가 부족하다는 점은, 사회발전에 지속적으로 중대한 과제이므로 이미 많은 연구가 있다. 불교계에서도 나름대로 시민사회 활동의 경험이 있다. 필자의 수준에서 그 두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시민사회에 가장 필요한 동력은 연대감을 높이면서 합리적인 소통역량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각종 논쟁거리가 쏟아지는데, 서로 일방적인 주장을 할 뿐 상대방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지역사회나 종교계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미리부터 서로를 배제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서로가 시민으로서 진정한 주체임을 인정함으로써 개방적인 공론장이 열려야 할 필요성이 시급하다. 

3) 승가(僧伽)-전설의 공론장 참조하기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지 100년쯤 지났을 무렵, 바이샬리 지역 비구들은 모일 때마다 자신의 발우에 금 · 은 · 진주 · 상아 등을 보시하도록 요구하면서, 그렇게 보시하는 신도들에게 큰 부와 행복이 온다고 가르치고 있었다. 이 사실을 확인한 비구 야사는 바이샬리 비구들을 찾아가서 그런 공양이 옳지 않음을 주장했는데, 오히려 그들은 야사를 비난하면서 “신심 깊고 호의적인 신도들이 화가 났으니 가서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비구 야사는 그 요구대로 신도대중에게 가서 말했다. “나는 법을 법이라 말했고, 비법을 비법이라 말했습니다. 나는 율(律)을 율이라 말했고, 비율(非律)을 비율이라 말했습니다. 비구는 금은보화를 공양받지 말아야 한다는 내 말에 화가 났습니까? 여러분을 화나게 하였다니 사과하러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놀라는 신도들에게 비구 야사는 비법[非法]에 관해서 더욱 자세히 설명하였고, 충분한 설명을 들은 신도들은 오히려 비구 야사를 지지하게 되었고, 바이샬리 비구들은 야사가 교단을 모욕했다고 비난하였다.

위 내용은 부처님 입멸 후 100년경 바이샬리 지역불교계의 공론장을 단편적으로나마 보여주는 서술이다. 바이샬리 비구들의 행위가 계율을 어겼다[非法]/어기지 않았다[法]라는 쟁점에 대해서 논리적이고도 정규적인 절차를 거치면서 승가대중이 의사소통을 한 것이다. 이는 불교 경전 성립사에서 매우 중요한 바이샬리 700명 결집의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불교승가는 사람들의 조직이므로 서로 다른 견해와 판단이 생길 수 있고, 그로 인한 분쟁이 생길 여지가 있으므로 그에 대처하기 위한 규율이 마련되어 있고, 함께 규율을 지킴으로써 ‘일미화합(一味和合)’을 지향한다. 다양한 구성원들이 한 방향으로 의견을 모으고 결사체를 유지하는 것이 불자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저절로 쉽게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불교계 내부에 중대한 쟁점이 생겼을 때, 불자들이 실제로 나서서 이견(異見)을 조율하고 화합하는 역량이 어느 정도일까. 나아가서, 일반사회에 쟁점이 발생했을 때 불자들이 사회적 공론장에 참여하는 자세나 역량이 어떠할까. 물론 필자는, 종교적 결사체인 불교승가의 소통원리를 그대로 임의결사체인 시민사회에서도 적용 가능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종교공동체는 일반 사회집단에 비해서 무조건적인 ‘신뢰’가 큰 자산이고 전통적인 조직규율도 확립되어 있으므로, 각각의 집단에서 이루어지는 구성원 간 소통의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종교공동체와 달리 시민사회 공론장은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촉진해야 하고, 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절차로써 구성원 간의 신뢰도를 높여야 한다. 

그런데 다수의 사람이 뭔가를 말한다고 해서 그대로 공론화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사회 공론장은 주체적 시민이 자신의 관심사를 공공의 이익이 되도록 확장하고, 참여 시민들이 민주적으로 소통한 결과를 가지고 정치사회적으로 반영되게 하려는 의사결정의 공간[場]이다. 즉, 진정한 시민사회 공론장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시민이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주체적 시민성 · 공공성 · 합리적 의사소통 · 사회적 영향력 등이 필요하다.

 

주체적 시민성이란 무엇인가. 과거 독재권력이나 권위주의 시대의 국민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라는 구획에 갇혀서, 공권력이 공적 영역으로 규정한 건에 대하여는 개인으로서 하등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체제였다. 오늘날에 와서 시민은 국가권력이나 사회권력과의 수직적 관계를 벗어나고자 하며, 시민사회에서 능동적이고 조직적인 참여를 하는 가운데 스스로 시민주권을 터득하게 된다. 이처럼 시민사회란 시민들의 자발적인 경험과 학습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인데, 우리의 시민참여 수준은 여러모로 미흡하다고 평가된 바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계가 과연 시민적 주체성을 고양(高揚)하고 사회참여를 촉진할 수 있을까? 

불교교의로 돌아가면, 당연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 만물은 저 홀로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연(相互緣)하여 공생공존하기 때문에, 이 시대 시민들도 본래의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y]을 알아차리고 현실적으로 인증하도록 불교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모든 시민에게는 평등한 권리와 더불어 평등한 의무가 있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관여할 권리와 의무라는 양 날개를 다 같이 지혜롭게 사용할 때, 시민은 좀 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삶을 살 수 있으며 그와 더불어 시민사회도 비상(飛上)할 수 있다. 일찍이 불교는 이러한 상호작용 원리를 연기법이라 부르고, 우리가 그 원리를 망각함으로써 현실의 고난을 초래하지 않도록, 통찰과 각성을 가르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민의 주체성과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계몽하고 선도할 책임과 그 가능성이 불교계에 있다는 것이다.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시간적 · 공간적 맥락을 포함하여 세상은 공업(共業)의 산물이므로 현실 책임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구성원 각자는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경험을 통해서 공공성에 민감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 공공성은 그 자체로 개념화되어 있기보다는 공공성에 대한 주체의 판단과 인식에 종속된다. 시민주권시대에는 시민이 공공성의 주체이고 시민사회는 공공성의 저수지로서, 국가 · 시장 · 시민사회 전체가 공정하게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공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공공의 이익이라는 개념도 실은 그 경계를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데, 관련 분야 전문가나 이해당사자들 몇몇에 의해서 단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개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습관적으로 우리는 자기 자신과 가족, 사회관계 등에서 사적인 이익을 우선 추구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어쩌다 공동의 생활영역에서 자신의 욕망과 충돌하는 이웃들의 욕망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익과 공익의 경계를 탐색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의 이익과 저들의 이익과 우리의 이익에 대해서 나름 합리적인 계산을 치열하게 할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사회적 공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정치적 상호작용이라고 하겠다. 비록 이와 같은 이익들의 대결구도에서 출발한 이해타산의 시민참여일지라도, 합리적인 공론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공익성의 개념이 규정되는 것이라고 보면, 시민사회 공론장에서는 무엇보다도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역량이 중요한 변수라고 말할 수 있다. 

의사소통의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합리성이란 윤리도덕의 준거(準據)나 종교적 도그마처럼 선험(先驗)으로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니라, 참여 시민들이 자발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숙의(熟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결정되는 상대적 최선이라고 본다. 합리적 숙의가 가능한 공론장의 여건으로서는, 자발적 참여자라면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개방적이어야 하고, 상호주체적으로 설득하고 합의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민주적이고 수평적이어야 한다. 그처럼 숙의하는 과정에서 구현되는 합리성이, 결과적으로 공론의 합리성을 보증하게 될 것이며 시민사회 공론장의 목적에도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솔직한 경험이 말해주듯이, 다양한 대중이 참여하는 공의(公議)에서 충분한 의사소통 자체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당면한 사안에서 참여자들의 이해관계나 입장의 차이가 크면 클수록, 그 차이를 조율하는 역할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근래 온 · 오프라인 공론장이 각종 사안으로 들끓는 현상을 보자. 충돌하는 이견들을 수렴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데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써먹을 특단의 기술이 있을까. 앞서도 ‘민주적이고 수평적’이라는 공론장의 요건을 말했지만, 근본적으로는 시민사회의 조직운영 과정에서부터 탄탄한 민주화가 필요하다. 참여자 구성원들이 서로의 인격을 무조건적으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가운데서 서로의 언행에 집중하고 경청할 가능성은 커질 것이며, 그 속에서 의사소통은 더 민주적이고 더 수용적일 가능성이 커진다. 더욱이 공론장은 개개인의 단순한 복수(複數)가 아니라 이해관계자들의 결사체이므로 집단차원에서 이견을 중재하고 갈등을 해소하는 기술적 방침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서 일찍이 필자는 불교계가 원효의 화쟁사상에 기초한 갈등중재 전문가를 양성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굳이 원효의 화쟁이 아니더라도 불교교리는 모두 상생과 공존을 가르치고, 우리 마음 안팎에서 올바르고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마음챙김[正念, Mindfulness]’ 수행은 이미 불교계를 넘어 일반사회에서 세계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누구나 그런 원리를 자신의 일상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도록, 한국불교계가 부지런히 제 역할을 찾아야만 한다. 혹자는 기독교계 내부에서 의사결정이 때로는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이라는 평가를 하였지만, 사찰이나 불교단체에서의 의사소통은 얼마나 민주적이고 합리적일까. 불교계라고 해서 저절로 잘 소통될 리가 없으므로, 평소 불자들이 승가공동체에서부터 효과적인 의사소통과 갈등 조율의 역량을 수련할 필요가 있다.

사회적 영향력이란 무엇인가. 하버마스(W. Habermas)에 의하면, 국가와 시장은 권력과 돈의 영향력에 의해서 작동하는 공적 ‘체계’가 되고, 의사소통이 일어나는 일상적 삶의 현장은 ‘생활세계’가 된다. 국가와 시장이라는 공적 체계의 권력이 사적인 생활세계를 식민지처럼 장악하는 사태를 극복하기 위하여, 생활세계 내에서 합리적 의사소통에 의한 공론장이 형성되는데, 그 공론장이 바로 시민사회라고 한다. 시민사회를 통해서 축적된 합리적 의사소통의 힘은 시민주권의 토대가 되며, 지금껏 큰 강제력을 가졌던 국가의 정치권력이나 기업 · 시장의 경제권력에 맞서서 견제하고 균형을 지킬 또 하나의 권력이 된다는 것이다. 주체적 시민들의 결사체가 공공성을 위하여 합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한 결과로써 기존 권력체계들에 대등한 시민사회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은, 시민으로서 공론장에 참여하고 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킬 만한 희소식인 것 같다. 

그러나 실은 공론장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경연이 항상 게임의 바른 규칙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론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구조화하기 위한 조건은 까다롭다고 한다. 작금의 우리 현실을 보더라도, 정치 · 경제의 공적 체계와 시민적 생활세계 사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매스컴이나 종교공동체들의 정치적 행위를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집단의 응집력이나 정치사회적 개입의 이력을 생각하면, 종교계가 공론장의 권력구조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사회권력임이 분명하다. 또, 수시로 공론장의 내용을 확대 · 축소 · 왜곡시킬 수 있는 언론 매체 역시 또 하나의 권력주체라고 봐야 한다. 이처럼 다차원의 권력들이 공론장을 왜곡하거나 간섭할 위험성이 항존하는 가운데서도, 시민주권 즉 의사소통 권력을 합목적적으로 공고히 하려면 불교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시민사회 공론장은 자율시민이 정치 · 경제체계의 왜곡된 권력 행사를 바로잡고, 시민적 생활세계의 가치를 지키려는 공공성 결사체라고 요약된다. 그러므로 공론장이 더욱 발전해야 할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불교계가 자칫 기존의 공권력 체계에 유착하여 관습적인 종교권력을 보장받으려고 시민주권 차원의 의사소통을 방해할 수 있다. 기독교계 특히 일부 대형교회가 보여주는 정파적이고 권력지향적인 집단행동에 대해서 종교사회학자들이 비판했던 바로 그 문제를 불교계가 재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시대착오적이고 불교적이지도 않은 그런 오류를 답습하지 않으려면, 타 종교계의 잘못된 활동이라도 반면교사 삼아 거꾸로 학습할 필요가 있다. 불교계[불자들]의 사회행동은 불교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로 확장되며 공공성을 담보할 수 있을 때, 그 사회적 영향력이 정당하게 평가될 것이다.

아울러 불교계가 구체적으로 수행할 만한 과업을 간단히 제안하자면, 우선 사찰[불교단체]에서 사회적으로 민감한 쟁점들을 공유하여 개방적으로 학습하는 여러 가지 채널[on/off line, 내부공론장]을 마련한다. 거기서 불자들은 다양한 이견(異見)에도 불구하고 서로 평등하게 경청하고 합리적으로 의사소통하는 역량을 성장시킴으로써, 일상적 수행(修行)을 한다. 더 나아가, 공업(共業)의 산물인 현실사회에서 시민적 권리와 의무를 함께 이행할 수 있는 통로가 바로 시민사회 공론장임을 확실히 알고, 불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결사(結社) 차원의 집단수행을 완수한다. 이런 제안들이 얼핏 단순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오히려 한편으로 너무 야심 찬 것은 아닌지, 필자는 이웃 도반들의 생각이 매우 궁금하다.

 

3. 마무리하는 말

사회학자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인생을 관조하는(contemplat-ive) 삶과 행동하는(active) 삶의 두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관조가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만 진리와 지식이 획득될 수 있다. 지식이란 오직 우리가 스스로 행한 것에만 관계하고, 보다 많은 행위를 통해서만 검증될 수 있다. 권력은 함께 행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고 사람들이 흩어지는 순간 사라진다. ‘관심(inter-est)’이라는 말은 본래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을 함께하도록 만드는 힘은 상호약속 또는 계약의 힘이라고 한다. 아렌트의 이런 글귀는 마치 우리 불자들을 겨냥하는 것 같고 매우 불교적인 메시지로 느껴져서, 여기에 인용한 것이다. 필자의 관점으로, 불교철학은 경험[실천]주의임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우리가 사회적 존재로서 현실을 잘 살고자 한다면, 국민이라기보다 시민으로서 · 주체적으로 · 공동선을 추구하며 · 민주적으로 합의하는 · 이웃 사람들과 조직적으로 연대할 필요가 있다. 그 필요성은, 2,500여 년 전 고타마 싯다르타가 발견한 세계원리와 인간사회에 대한 가르침에도 통한다는 것이 이 논문의 결론이다. ‘시민사회’라는 주제는 대개 사회학 분야에서 다루어왔지만, 모쪼록 불자들이 연기법설과 승가공동체 원리 등을 이론으로만 학습하지 않고 사회참여를 통해서, 배운 지식을 적극적으로 검증해보기를 바라는 불교학의 시도인 셈이다. 

그런데 이 시대에 필요한 시민사회 공론장의 확립을 위해서, 불교계가 취해야 할 역할에 대해서 좀 더 실질적인 제안을 하려면, 이미 상당한 경험들이 불교계에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불교교리를 시민사회에 원론적으로 들이대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 영역에서 불교계가 활동한 내용과 그 역량을 자세히 분석할 수 있는 실증적 조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필자도 개인적으로는 나름 오랫동안 불교계 단체활동을 해왔으므로 그 경험들을 포함하여 사회참여 차원의 성찰과 반성의 글을 여기에 쓰고자 하였지만, 사정상 다음 기회로 미루면서 그 아쉬움을 고백한다. ■

 

이혜숙
금강대 초빙교수.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학과 철학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사회복지사협회 국제교류위원 등 역임. 저서로 《종교사회복지(편저)》 《아시아의 종교분쟁과 평화운동(공저)》 역서로 《불교사회복지학》 등 다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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