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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속화 시대, 붓다를 사유하기 / 명법
특집 | 탈종교화 시대, 불교의 위상과 역할
[79호] 2019년 09월 01일 (일) 명법 myeongbeop@gmail.com

들어가는 말

‘세속화’와 함께 공론의 장에서 사라진 것으로 간주되었던 ‘종교적인 것’이 돌아오고 있다. 9 · 11과 IS 테러, 미얀마에서 일어난 로힝야족 인종 청소, 인도의 힌두근본주의 힌두뜨바(Hindutva)에 의한 무슬림 박해 등 지구 곳곳에서 갈등과 분쟁이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종교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함께 한국사회에서 종교가 누렸던 예외적 지위가 도전받는 한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등의 종교집단이 정교분리 원칙을 위협하면서 정치 세계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오늘날 종교라는 이름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서양 근대 계몽주의가 이성과 합리성, 과학의 반대편에 비합리와 주술, 이른바 전근대의 모든 문제의 온상으로 지목했던 ‘종교적인 것’이 오늘날 돌아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과거에 그랬듯이 ‘종교적인 것’은 문제적이며 위험하며 불온한 것일까? 또는 초월적인 권위를 승인하고 신봉하는, 순진하고 맹목적이며 독단적인 신앙으로의 회귀일까? ‘종교적인 것의 회귀’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한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사유 안에서 어떠한 자리도 가지지 못한다.”고 단언했던 철학이 다시 종교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하이데거, 베르그송, 레비나스 등은 물론이고 해체철학을 주창했던 데리다, 좌파 사상가인 지제크 등이 종교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하고 있다. 계몽주의 이후 이성과 지식, 기술, 과학, 그리고 사유의 적합한 대상이 아니라고 간주되었던 종교가 다시금 철학의 관심을 받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오늘날 종교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며, ‘종교를 사유하기’ 역시 중요한 과제이다. 오늘날 ‘종교적인 것의 회귀’라고 불리는 사태가 급박하게 철학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철학이 다시 종교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계몽이 베버가 명명했던 ‘탈주술화’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배제한 후에도 종교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테러리즘 시대에 철학이 종교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었던 구원은 무엇일까? 어쩌면 바티모가 “철학이 서구의 몰락에 뒤따르는 여러 책임들을 떠맡을 때, 철학은 과학보다는 종교에 더 가깝게 닮아간다. 그렇게 닮아가는 것을 많은 철학자들은 잊고 있었다. 이를 상기시키고 그 의미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마 오늘날 철학이 수행해야 할 주된 임무일 것이다.”라고 밝혔듯이 이성의 해체를 수행해온 철학 스스로 종교를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물음을 통해 ‘오늘의 종교’로서 한국불교를 사유해보려고 한다. 교리에 대한 관심은 한국불교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이다. 근대 이후 한국의 불교학 연구는 일본의 불교학 연구를 비판 없이 답습했다. 그런 이유로 스에키 후미히코가 지적한 일본불교학의 특징과 문제를 그대로 한국불교에 적용해도 거의 틀리지 않는다. 일본의 불교연구는 각 종파의 교학을 연구하는 종학과 서구의 인도학을 모델로 한 불교학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고 있다. 후미히코의 지적에 따르면, 불교학은 기독교의 신학에 해당하는 종학을 보완하는 역할을 맡아 “일본 종파의 종조 중심의 교학이 인도 대승 경전이나 불교 이론의 바른 계승과 발전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 목표를 두고 가치판단보다 문헌 연구에 치중하면서 종조의 사상과 연관 짓는 것을 주된 연구과제로 삼았다. 교리연구가 중심이 되는 일본불교학 연구 경향은 한국불교학계에도 반복되었다. 현장 연구가 드물고, 미신적 주술로 오해되었던 밀교 연구가 배제된다는 비판은 한국불교학 연구에도 바로 적용된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불교 연구가 포르, 로페즈 등 서양학자들에 의해 시작된 불교연구의 자기반성을 수용하며 ‘비판불교’라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과 달리, 한국불교학에서 자기반성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아직까지도 일본불교의 역오리엔탈리즘을 비판 없이 받아들여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자랑하는 수사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은 한국불교 연구의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다른 한편, 최근 빨리어, 산스끄리뜨어, 티베트어 등 ‘이른바’ 원전 언어로 기록된 문헌 연구가 불교학 연구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교학 중심주의는 더욱 강화되었고, 초기 경전의 원본성을 강조한 결과 불교학 연구에서 초기불교는 과거 대승불교가 누렸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불교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실천운동은 정당한 권위의 원천으로서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 고타마 싯다르타를 소환한다. 최근 조계종단에서 표방하는 “붓다로 살자”라는 슬로건마저 ‘붓다’는 교리상의 붓다, 더 엄밀하게 말해 초기불교 텍스트에 나타난 ‘붓다’에 한정된다. 이러한 경향은 승려뿐 아니라 불교학 전공자와 재가불교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관찰되고 있다. 

탈종교 시대에 다급하게 요청되는 불교적 해답으로서 구체화된 ‘붓다’가 텍스트적 권위에 의존된 존재, 다시 말해 경전에 묘사된 그대로의 존재여야 한다는 생각은 뒤에서 살펴볼 데리다의 ‘자가면역’ 개념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불교를 근대적 종교로서 재구성하려는 강박관념이 결부되어 있다. 한편으로, 종교를 신앙과 실천의 관점이 아닌 이성과 인식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근대적 관점을 장착함으로써 한국불교는 ‘붓다’를 이성적 사유의 대상으로 환원하여 불교를 일종의 철학이며 과학이라고 주장할 뿐 아니라, 초기불교 이후의 역사적 발전, 특히 대승불교의 실천철학을 이성과 신앙, 과학과 주술이라는 이분법에 의거하여 배제한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불교는 ‘불교는 윤리적으로 비폭력적이다’ 등의 이상화된 불교관에 입각하여 초기불교, 특히 ‘붓다’라고 호명된 존재에게서 현대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강력한 요청, 다시 말해 사회참여의 실천과제를 제기하였다. 하지만 과거의 종학이 그랬듯이 호교론은 다시 텍스트 연구에 고개를 파묻지 않기 어렵다. 

서양 학문의 세례를 받아 성립된 불교학이 자기 속에 내재된 계몽주의적 종교 이해를 해체하고 과거의 종교가 아니라 오늘의 종교로서 불교를 사유하기 위해 ‘한국불교를 사유하기’는 ‘붓다를 사유하기’라는 방식으로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불(佛)’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닌, ‘붓다’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는 존재가 바로 한국불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적인 것의 회귀’를 보여주는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2. 세속화 이후 종교의 위치

불교를 실천이 아니라 인식의 대상으로 이해하게 된 배경에는 서구에서 나타났던 신(神) 개념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다. 막스 베버에 의해 정식화된 이래 근대화의 지표로 이해되는 ‘탈주술화’는 라틴 기독교 국가들에서 일어난 종교 및 정치 개혁운동의 산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 결과로 마법적 힘과 영혼 세계만 쇠락한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 이전에 ‘경건함’ 또는 ‘신앙’을 의미했던 ‘종교’가 교리와 의식의 체계로 바뀌었다. 종교개혁 이후,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에 초점을 맞춘 호교론적 논쟁이 격화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칸트에 따르면, ‘신의 호의’를 추구하지만 사실상 기도와 욕망만을 가르치는 ‘단순한 숭배의 종교’와 ‘반성적 종교’라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급진적 계몽주의는 전근대의 종교적 삶에서 당연시되었던 행위들을 비판하고 배척했다. 찰스 테일러가 “원-뒤르켐적 종교”라고 불렀던 종교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사회로서 신과 관계를 맺었다. 의례는 집단적으로 거행되었으며, 그 의례를 관리하는 성직자, 무당, 주술사, 예언자, 족장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계몽주의는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여겨졌던 이러한 사회질서를 비판하면서 그것을 불평등과 지배, 착취를 옹호하는 구체제와 동일시했다. 

탈프로테스탄트 개혁만 아니라 가톨릭교회의 변화도 동반했던 개혁운동의 결과, 근대 사회는 안정적이고 합리적인 질서를 확립했다. 계몽주의는 특정 종교의 교리에 의존하거나 주술에 기대는 단순한 숭배의 종교인 계시종교를 대신하여 이상적인 종교로서 이신론을 주장하였다. 이신론은 인간의 자연적인 인식능력인 이성과 경험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자연종교’라고 불리는데, 로크는 “인간 안에 있는 신의 목소리인 이성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지켜야 한다는 자연의(본성의) 성향을 추구하는 것이 창조자의 의지를 따르는 것임을 가르치고 또 확신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신론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신을 믿는다는 점에서 종교의 부패와 타락을 근절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도덕적 실천 외에 논쟁의 여지가 있는 신조나 교리를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적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이상적인 종교로 간주되었지만, 18세기 전반기에 생존했던 흄은 로크와 다른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본성의 취약성은 우리가 관여하는 모든 것 가운데 뒤섞여 나타난다. 따라서 어떠한 인간적 제도도 완전할 수는 없다. 무한한 정신, 우주의 창조라는 얼핏 생각하기에 모든 종교적 의례나 제도가 배제된, 더 나아가 아무런 사원도, 사제도, 또 기도문이나 기원문도 없는 완벽하게 순수하며, 단순한 예배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신앙이 빈번히 가장 위험한 광신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어느 정도 종교를 인간의 취약함에 부합하게 하기 위해서는 감각과 상상에 의존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미신의 침투를 막는다거나 예배에 있어서 제의적이며, 장식적인 요소들을 강조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데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찰스 테일러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사회에서 탈주술화의 등장과 더불어 우주와 정치체를 모두 연관 짓는 또 다른 모델이 형성되었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설계(Design) 개념이다. 우주는 신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으며, 그것은 신이 우주를 만든 바로 그 설계에서, 그 아름다움에서, 그 규칙성에서 명백하게 표명되고 있으며, 동시에 신의 피조물, 특히 우리 자신들, 우주 전체를 사용하는 탁월한 피조물의 복지를 위해 도움이 되도록 만들어졌다고 믿어졌다. 

따라서 시민들이 스스로 ‘신 아래 하나의 인민’으로 자신을 규정하면서 사회를 구성하는 교환의 법칙, 상호이익의 질서 역시 본래 신이 창조한 것이라고 진지하게 믿는 미국의 경우처럼 신의 설계에 따라 사회를 건설한다면, 비록 신을 대리하는 왕은 없어도 그 사회에 거룩함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또한 미국의 독립선언서에서도 표명되듯이 신에 의해 수립된 것으로 간주되는 도덕질서 관념 안에 거룩함의 현존이 존립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근대 이후 나타난 이러한 종교관에서 신은 종교적 의식 속에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 대한 그의 설계를 통하여 동일하게 강력히 현존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제 신은 기도에 응답하는 신이 아니라 세계 원리로서 작용한다. 탈주술화의 결과, 종교는 개인화되었으며, 종교 생활과 사회적 삶의 연결, 의례 행위의 국가적 차원은 사라졌다. 찰스 테일러는 “이전에 신이 존재했던 하나의 양식, 즉 고귀한 시대에 존재하는 사회의 행위 초월적 토대에 관한 이야기의 일부로서 신을 제거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하면서도 그 때문에 신이 공적 공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근대성을 세속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종교의 부재를 가리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종교가 다른 장소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그런 것”이라고 본다. 

계시종교를 자연종교로 대체하려고 했던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계시종교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자연종교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 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사이에 신을 믿지 않지만 종교의 유용성은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을 믿지 않지만 기도를 하고 예배에 참석하며 경전을 읽고 봉사를 하는 등의 종교적 활동이 정신적으로, 또는 육체적으로 자신들의 삶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이신론을 ‘종교 없는 신’이라고 부른다면, 이 두 번째 형태의 종교는 ‘신 없는 종교’라고 부른다. 

이 두 번째 형태의 자연종교는 탈종교 시대에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으로, 특히 ‘신 없는 종교’로 간주되는 불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가운데 두드러진다. 템플스테이, 명상, 기도, 심지어 예불 등 의례에 참여하며 그 유용함은 인정하지만, 불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앙드레 보통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이런 형태의 종교의 효용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그것이 종교적인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최근 불교계에서는 명상과 힐링 붐이 불교의 저변 확대를 위한 기회이며 탈종교 시대에 불교가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불교를 웰빙, 또는 힐링의 방법으로 여기는 이러한 태도는 일견 불교에 친화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타자보다 자신의 심리적 안위와 삶의 발전을 위한 ‘변신’에 열중하는 성공학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오진영이 주장하듯이 “타자와의 관계가 우리 삶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기동일성의 (과대망상적) 긍정심리학이 광고하는 달콤한-알약-인문학의 유행에 따르면 따를수록, 논리실증주의가 상품적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의 중핵으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작용과는 멀어진다.” 그렇다면 불교의 종교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데리다의 ‘종교 이전의 종교성’에 대한 성찰이 웰빙과 문화로 소비되고 있는 오늘날의 불교에 요구되는 이유이다.

 

3.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

종교에 대한 사유는 후기 데리다가 천착했던 윤리철학의 중심을 이룬다. 종교는 윤리의 다른 측면, 타자론의 한 형태이다. 《신앙과 지식》에서 데리다는 ‘종교적인 것의 회귀’에 대해 “한편으로 종교와 다른 한편으로 이성, 계몽, 과학, 비판(마르크스의 비판, 니체의 계보학,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이들의 유산)을, 마치 한쪽이 다른 한쪽과 끝을 볼 수 없는 것인 양 순진하게 양자택일의 문제로 믿고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종교적인 것의 회귀’를 “‘근본주의’ ‘전통주의’ ‘광신주의’라고 막연히 규정하는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데리다는 “이성과 종교를, 비판 혹은 과학과 종교를, 과학기술적인 근대성과 종교를 대립시키는 것”을 순진한 사유라고 비판하면서, 이런 이분법적 사유로는 ‘종교’ 혹은 오늘날 ‘종교적인 것의 회귀’라고 일컬어지는 이 현상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데리다는 “사유의 가장 환원 불가능하고, 가장 기원적인 것으로 지시하는 것을 신앙 일반으로부터 분리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고백하는데, 데리다가 보기에 신앙과 지식은 상부상조로써 공모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경제적이고 자본주의적인 합리성”에 봉사하기 위한 관계이다. 

‘우리’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이러한 신앙의 요소 안에 자리한다. [……] 이 파크툼은 경험적 사실이 아니다. 하이데거가 이 단어를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동의가 꼭 필요한 지대로 추방된다. [……] 이러한 동의는 일체의 가능한 질문을 목적으로 그에 앞서서, 따라서 일체의 철학, 일체의 신학, 일체의 학문, 일체의 비판, 일체의 이성 등에 앞서 요구된다. 이 지대는 우리가 이미 인용했던 것들을 필두로 개념들의 개쇄를 통해 끊임없이 재확인되는 신앙의 구역이다.

종교와 이성은 이러한 공통의 원천으로부터 출발해 함께 발전하는데, 그것은 바로 일체의 수행에 대한 증언적 보증으로, 이는 타자 앞에서만큼이나 과학기술의 고성능 수행성에 대해 대답할 것을 촉구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칸트가 말한바 바른 행동, 도덕적 삶에 관심을 둔 ‘반성적 신앙’은 실천을 중요시하면서 앎을 거기에 종속시키는 동시에 그로부터 분리시키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행동하면서 더 선해질 것을 명령한다. 반성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어떤 역사적 계시에도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실천 이성의 합리성에만 부합하기 때문에 지식 너머의 선의지를 장려한다. “‘누구에게든 본질적이고 필요한 것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했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구원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해야 할 바를 아는 것이다.”

‘반성적 신앙’과 순수한 도덕성의 이념을 기독교적 계시와 분리 불가능하게 연결시키면서 칸트가 하나의 순수한 원리로서 제시한 것은 실천이성이다.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 우리는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또는 신이 더 이상 우리의 구원에 관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인이 도덕적이어야 한다면 선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순간에 더 이상 신을 향해서는 안 되며, 마치 신이 우리를 포기한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바로 이것이 도덕적인 것이고, 따라서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데리다에 따르면, 신의 죽음은 니체 이전에 이미 칸트에 의해 실천이성의 명령으로 요청된 것으로, 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아가면서 ‘근본주의’와 ‘전통주의’는 오늘날 이러한 ‘가치 다툼/과열 경쟁’을 과장한다. 이것들은 신의 죽음에 대한 경험으로서 기독교와 원격과학기술적 자본주의의 기이한 동맹이 패권적인 동시에 한계를 드러내고, 초강력한 동시에 쇠약해가는 바로 이 순간에 ‘가치 다툼/과열 경쟁’을 고조시킨다. 데리다는 “이것이야말로 광기이자 우리 시대의 절대적 시대착오”라고 주장한다. 과격한 이슬람주의와 같은 근본주의의 귀환이 현대사회에서 신의 죽음이 의미하는 모든 것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종교적인 것의 귀환’은 그가 ‘세계 라틴화’라고 명명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설명한다. 

데리다는 “독단적 철학과 자연종교는 사라져야 하며, 가장 큰 완악함으로부터, 가장 완고한 불신앙으로부터, 케노즈로부터, 가장 심각한 신의 결여라는 공백으로부터 가장 평온한 자유가 그 지고한 총체성 속에서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신앙이나 기도 또는 희생과 구분되는 존재신학은 종교를 무너뜨리지만, 또 다른 역설은 그것이 반대로 신앙의 신학적이고 교회적이고 나아가 종교적인 생성/변천을 일깨운다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가 정식화한 ‘자가면역’ 개념을 적용시킨다. 

데리다는 베르그송의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에서 가져온 ‘믿음의 경험’과 ‘신성함’이라는 두 가지 원천이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고 본다. ‘믿음의 경험’이란 반복적인 약속을 위해 물리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경험이라면 ‘신성의 경험’은 신비적인 경험이다. 데리다는 종교의 신성성이, 믿음의 경험인 원격과학기술(현대의 미디어 기술)과 결탁하여 종교성을 확대하는 과정을 ‘세계 라틴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자가면역성’이란 면역학에서 차용한 것으로 데리다 철학에서 사회와 종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생명과 죽음은 단순히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 내부에 처음부터 죽음의 자리가 기입되어 있다. 자가면역성은 이러한 생명의 유지가 역설적으로 오직 생명을 해침으로써만, 다시 말해 죽음을 ‘자기’ 안에 기입함으로써만 가능함을 보여준다. 요컨대 자가면역 과정은 생명 안에, “삶 안에 죽음을 배태시키”는 것이다.

데리다는 이 개념을 종교 현상에 적용하여, 종교가 자기의 신성을 보호하기 위해 동원한 면역적 기제, 즉 원격과학기술이 종교의 신성을 다시 위험에 빠뜨리는 사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 유일하고 동일한 원천은 기계적, 자동적으로 나누어지고, 반응적으로 자기 자신에 맞선다. 데리다는 이로부터 하나인 두 개의 원천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반작용은 희생적 무손화/보상의 과정이고, 그것은 자기가 위협하는 무손한 것을 복원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다. 자가면역성은 시스템이 스스로 붕괴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기 해체의 논리를 밝힌 후기 데리다의 핵심적인 비평 개념”으로 평가된다. 

종교의 ‘자가면역성’은 종교가 ‘세계 라틴화’ 과정을 스스로 해체한다.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확장해 가던 종교가 다시금 미디어를 통해 자기를 파괴한다. 데리다는 이것을 현대 종교전쟁의 원인으로 파악한다. 김상환에 따르면, 데리다가 말하는 자기 면역의 논리는 자기를 스스로 훼손해 자신을 보존하는 논리, 스스로 더럽혀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는 논리, 스스로 탈 내어 무탈한 삶의 길을 가는 논리다. 가령 정신적 생명도 자기 면역의 논리에 의해 태어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계몽주의 시대에 이성에 의해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종교가 이성에 의해, 이성 안에서 다른 형태로 부활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책임의 윤리’이다.

데리다는 신앙을 무엇보다 “삼감에서 오는 중지, 조심함에서 오는 신중함”이라고 이해한다. 하이데거가 《철학에의 기여》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떤 중지, 경의, 타자와 관계 맺기 위해 그 자신과 관계 맺는 결정 혹은 확언의 보증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의 책임이 믿음의 기초이다. 이러한 신탁적 ‘관계’는 일체의 한정된 공동체, 일체의 실증 종교, 일체의 존재-인간-신학적 지평에 선행한다.

데리다는 타자에게 주는 ‘선물’ 행위는 자본주의적 교환관계를 초월하여 비교환적 윤리적 행위임을 강조하는 가운데 종교를 언급한다. “절대적으로 타자와의 조우란 무엇인가? [……] 총체성을 방해하고 그것들과 거리를 가지는, 언어와 눈길 안에서 타자와 조우하는 것 [……] 레비나스는 이것을 종교라고 부른다. 이것은 윤리를 열어준다. 윤리적 관계는 종교적 관계이다. 어떤 종교가 아니라, 종교적인 것의 종교성, 그 종교이다.”

데리다는 ‘religion’과 ‘reply’의 어원적 유사성을 지적하면서 “종교, 그것은 대답이다.”라고 단언한다. “실제로 책임의 원리 없이는 대답도 없다. 타자에게, 타자 앞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대답해야만 한다. 또한 맹세된 신앙/서약 없이는, 저당 없이는, 서원 없이는, 어떤 성사나 맹세 없이는 책임도 없다.” 

종교의 이중적 기원으로서 말한 ‘신성성의 경험’과 ‘믿음의 경험’ 가운데 ‘용서’는 ‘신’을 소환한다. 여기서 신은 맹세의 최종적 심급이다.

전적으로 타자인 타자로부터 와서, 기원적이고 인격적인 그의 현전이 결코 불가능할 곳(가능한 가장 기초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의미에서의 행해진 증언이나 말, 즉 심지어 위증까지도 포함한 진리의 약속)에서, 미트자인(공동 존재), 타자 일반과의 관계 혹은 말 건넴의 조건을 구성하게 될 것으로서의 충실한 믿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론은 바로 현재 혹은 현재 속의 주체는 그 자체가 완성은커녕 끊임없이 현재가 아닌 다른 시간, 미래에 의존해 있으면서 이런 시간 속에서의 타자에 매여서 혹은 주체의 차원에서는 자기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책임감 속에서 자신을 열어놓고 타자와의 연계 속에서 차연의 과정을 거쳐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 있음을 강조한다. 

데리다의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은 “장래에의 열림 혹은 기대 지평도 선지자적 전조도 없는, 정의의 출현으로서 타자의 도래에의 열림”을 의미한다. 타자의 도래는 어떤 예측으로도 도래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그곳에서만, 타자와 죽음이 줄곧 불시에 습격하는 그곳에서만 특이한 사건으로 출현하기 때문에, 메시아적인 것은 절대적 놀라움에 노출되고, 언제나 평화나 정의의 현상적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해도, 그렇게 추상적으로 노출됨으로써 최악과 동시에 최선을-왜냐하면 하나는 다른 하나의 열린 가능성 없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기대해야만 (기대하지 않고 기다려야만) 한다.

데리다에 따르면, 정의에 대한 불굴의 욕망은 이러한 기다림과 관련된다. 기다림이라는 것은 그 정의상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어떠한 지식, 의식, 예측, 프로그램으로도 확신할 수 없고 확신해서도 안 된다. 그는 이러한 믿음을 추상적 메시아성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애당초 신앙의 경험, 믿음의 경험 또는 지식으로 환원 불가능한 신탁의 경험, 그리고 증언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 일체를 ‘창설하는’ 신뢰성의 경험에 속하는 것이다. 

응당 그래야 하듯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이러한 메시아성을, 곧 절대적 밤의 위험 속에서 전진하는 교리 없는 이러한 신앙을, 우리의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그 어떤 대립, 예를 들어 이성과 신비의 대립 속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해체론적 의미의 메시아성은 계산 가능성을 초과하는, 그러나 정의로서 도래하는 타자에 대한 열림과 응답을 말한다. 따라서 종교성의 진면목은 경전이나 종교적인 의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에 있다. 결정 불가능한 것을 결정하는 전율과 도약의 순간은 종교보다 더 종교적일 수 있는 계기다. 카푸토는 데리다의 메시아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신앙과 지식이라는 논문에서] 데리다는 종교 자체의, 그리고 오늘의 종교의, 오늘날 대규모적으로 세계적인 근본주의의 재등장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그는 또한 이 문제를 취급하면서 그의 사막-같은 [……] 종교 없는 종교, 계몽주의 이후의 또 다른 종교의 귀환을 언급한다. 그는 놀랍게 간결한 표현으로 말하기를, 이 메시아적 종교가 “홀로 ‘종교’의 주제에 대한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담론을 허락한다.”

 

데리다의 후기 저작은 주로 윤리, 정치, 종교 등과 관련된 실천의 문제를 천착하고 있다. 해체론은 용서의 윤리학이자 타협의 윤리학 혹은 창조의 윤리학이다. 그러나 이 모든 용어는 어떤 숨 막히는 결단의 사건을 대체, 설명하는 위치에 있다.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해체론적 윤리학은 도덕적 판단의 기원과 조건을 묻는 결단의 윤리학으로 귀결된다. 

 

4. 데리다를 따라 붓다를 사유하기

데리다는 만일 종교를 사변적, 종교적으로 반성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만일 그것의 이름으로 말을 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데리다는 이론화 또는 개념화가 특정한 종류의 편견과 이데올로기를 생산하며 원-사태를 왜곡한다는 직관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는 종교의 종교성이 방향잡이가 되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도로도 없고 내부도 없는 이 사막 ‘안’에서 방향잡이가 되어줄 것은 물론 여전히 렐리기오와 렐레게레의 가능성일 것이다. 그것은 문제적이면서 필경 재구성된 어원인 렐리가레의 ‘관계’에 앞선,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혹은 인간과 신의 신성 사이의 관계에 앞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특정한 종교가 아니라 관계들에 앞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며 절대적인 타자이다. 데리다는 ‘새로운 세계’란 ‘불가능성의 세계’이며 ‘도래하는 세계’라고 말한다. 그것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는 결코 도래하지 않는 불가능성의 세계에 대한 열정을 부여잡는 것이라고 한다. 가능성 너머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과 갈망을 간직하면서 현실세계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무조건적인 용서, 환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종교가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 종교가 실현 가능한 세계에만 안주할 때, 종교는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한다. 데리다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 환대할 수 없는 이를 환대하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것들에 대한 열정이야말로 종교적 가치의 심오한 의미가 비로소 드러나는 지점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붓다’를 소환하는 한국불교의 다양한 요청들은, 그 의도와 관계없이 불교를 자연종교로 변형시킨다. ‘종교 없는 신’에 견주어 말한다면 ‘불교 없는 붓다’를 요구하는 이러한 요청에 따라, ‘붓다’는 그의 세계에서 추방되었고 ‘윤회’와 ‘공덕’, ‘업’에 대한 논의는 기껏해야 주술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불교의 자연종교화는 철학, 과학, 최근에는 심리학과의 동일성을 주장하게 함으로써 불교 안에 존재하는 ‘비이성적이고 불가능한 것에 대한 추구’는 비합리적이며 전근대적인 것으로 조롱받고 ‘비불교적인 것’으로 비판받고 있다. 신도들의 기도에 감응하는 ‘부처님’은 기복과 주술의 대상으로 폐기되고, 텍스트 속에만 존재하는 ‘붓다’는 사실상 과거의 ‘붓다’ 즉 붓다의 죽음이 선포된다. 

위에서 말한 ‘불교 없는 붓다’와 ‘붓다 없는 불교’는 불교를 자연종교로 변형시킨 것으로, 서구에서 불교를 이해하는 방식의 하나이지만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탈종교화와 함께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서양에서 ‘신의 죽음’이 도덕철학과 시민윤리를 촉진시킨 것과 달리, 한국불교에서 ‘붓다의 죽음’은 ‘붓다’를 지적 이해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탈종교화 시대에 불교가 공적인 장에서 전근대 전통을 대표하면서 하나의 취향 또는 자기계발 프로그램으로 인식되는 원인을 제공한다. 자연종교화된 불교는 데리다가 ‘세계 라틴화’라고 명명한 원격과학기술과 결합하여 날로 확장하고 있지만, 언제 자가면역적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탈세속 시대 ‘붓다를 사유하기’는 ‘붓다’의 죽음을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붓다를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실천적 차원에서 회복하는 일이며, ‘오늘의 불교’를 사유하는 일이다. 후미히코가 암시하듯이 타자론의 입장에 선다면 대승불교의 실천정신은 새롭게 이해될 수 있다. 

신앙의 체험이 현실의 해체이며 불가능한 것에 대한 기대라는 데리다의 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주술로서 폄하되지 않는 불교의 신앙 경험을 도래할 붓다, 즉 보디사트바에서 찾을 수 없을까? 최근의 명상 붐이 베르그송이 종교의 한 원천이라고 말한 ‘신성성’만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불교에서 말하는 ‘서원’은 믿음, 신앙의 경험을 근거로 한다. 서원의 윤리적 차원은 데리다가 주장한 것처럼 결코 불가능한 것을 서원하는 믿음에 의해 성립한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처럼 “결코 다 구원할 수 없는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보현보살의 행원과 “지옥의 중생까지 모든 중생이 성불하기 전까지 성불하지 않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은 계산 가능한 것을 초과하는, 미래에 도래할 타자에 대한 열림이다.

데리다는 타자의 부름에 반응하거나 응답하는 것이 종교라고 말한다. 교리나 내적 깨달음의 추구가 아니라 타자로서 중생의 부름에 응답하는 보살의 실천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설명해줄 불교적 해답이 아닐까? ■

 

명법
 구미 화엄탑사 주지.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동 대학원 미학과 졸업(박사). 해인사 국일암에서 성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 운문승가대학 졸업.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미국 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등과 〈서양 현대예술에 나타난 선과 오리엔탈리즘〉 〈한국불교의 세계화 담론에 대한 반성과 제언〉 외 논문 다수. 은유와마음연구소 소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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