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탈종교화 시대, 불교의 위상과 역할

-탈종교화 담론에서 한국불교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

1. 서론

통계청의 〈2015 인구주택총조사 종교인구 통계〉 발표(2016년)에 따르면 한국의 종교인구는 크게 감소했다. 2015년 종교인구는 43.9%, 무종교인이 56.1%로 조사되었다. 통계청이 종교인구를 조사하기 시작한 1985년 이래 처음으로 무종교인 인구가 절반을 넘었다. 2015년 조사에서 불교 인구는 총인구의 15.5%,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친 기독교 인구는 27.6%였다. 불교 인구는 10년 만에 300만 명 정도가 줄었고, 더불어 전체적인 종교인구도 줄어든 것이다. 이 통계에 의하면 현재 대한민국 국민의 절반 이상은 종교가 없고, 최대 종교는 개신교라는 종교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이 조사가 나온 후 ‘한국불교의 위기설’과 함께 서구의 세속화와 같은 탈종교 현상이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의가 전개되었다. 통계청 조사를 다룬 불교계의 토론과 기사들이 대부분 ‘탈종교화’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현대사회는 과연 탈종교화하고 있는가? 탈종교화 시대, 종교의 위상과 의미는 무엇인가? 만일 탈종교화가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면, 이 새로운 종교지형의 등장은 한국불교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탈종교’란 곧 종교(사회)학에서 말하는 ‘세속화(secularization)’를 말한다. 캐나다의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도 ‘세속의 시대(Secular Age)’라는 말로 현대를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현대는 과연 세속의 시대’인가? 그리고 그것은 탈종교화의 결과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사실상 오늘날에는 세속화의 테제는 거의 폐기되었다. 한편으로 세속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의 부흥이 다시 관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계의 종교적 총량은 줄어든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버마스(J. Habermas)도 현대사회가 정치적 · 공적 영역에서 종교적 믿음의 중요성이 다시 증가하는 탈세속화 현상과 세속화 현상이 공존하는 ‘포스트-세속시대(post-secular age)’라고 보았다. 그리고 ‘세속적 이성과 종교적 이성 사이에 서로의 견해를 충분히 나눌 수 있는 공론장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세속과 종교, 두 영역의 소통 불가능성을 현대사회의 난제 중 하나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여러 종교 사이의 대화만큼 요청되는 것은 ‘종교’와 ‘세속’ 사이의 상호이해와 대화이다. 

이 글은 ‘세속화’와 ‘탈세속화’ 이론의 함의, 세속화 사회 속에서 종교의 존재 이유 및 가치를 살펴본다. 이를 위해 ‘합리적 선택이론’, 피터 버거의 ‘매개구조’, 찰스 테일러의 ‘표현적 개인주의’의 관점을 소개하고, 이 이론들이 불교에 지니는 함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세속화와 탈세속화-종교의 소멸인가 종교의 귀환인가

1) 두 개의 세계‐성스러운 세계와 세속화된 세계  

미국 노스텍사스(North Texas)대학의 케빈 맥카프리(Kevin Mc-Caffree)는 《세속적 지형: 미국 종교의 쇠락》에서 두 일화를 언급한다. 하나는 1100년경 십자군 전쟁에서 돌아온 한 남자의 종교관이다. 당시 십자군은 20세기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에 맞먹는 수의 사람들을 죽였다. 십자군에게 유대인과 무슬림은 죄로 물든 이단(heretic)이자 신성한 예루살렘을 훔친 도둑들이었던 만큼 끔찍한 죽음을 당해도 마땅한 사람들이었다. 이 시기 로마 농촌의 한 가정의 가장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상상해볼 수 있다.

 

나의 가족은 헨리(Henry) 황제와 베네딕트(Benedict) 교황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신의 섭리하에 있습니다. 나의 농장과 당신이 먹는 음식은 주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신(God)이 우리가 박애를 알게 하기 위해 그의 아들 예수를 주셨고, 예수가 죽음 후 부활했을 때 우리는 죄 없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든 만물에게 베풀어진 가장 큰 선물입니다. 최근 소식을 들으셨나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군사로 하여금 먼 곳에서 불신자들을 전멸시켰다고 들었어요. 오늘 우리가 그들을 위해 이 음식을 먹음으로써 하느님의 선한 말씀이 널리 퍼지고 영혼들의 정화가 완성될 것입니다. 내일 나의 가족과 니케네 미사(Nicene Mass)에 참석하시겠어요? 우리는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예수님이 전장에서 신의 전사들을 보호하도록 설득해야 합니다.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전 삶을 언제나 그들을 굽어보고 있는 한 신(a Watchful God)을 통해 이해한다. 그 신은 항상 그들을 돌봐주는데,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그에게 지속적인 예배와 공경을 바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과 가족, 나라의 안녕이 모두 그들의 종교적 신앙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맥카프리는 이들을 “종교를 진지하게 여기는(take religion seriously)” 사람들이라고 평한다. 그들에게 신실한 예배와 활동은 목숨을 바칠 만큼 중요한 문제다.

이처럼 아직 세계가 세속화되기 이전, 다시 말해 서구사회가 성스러움(sacred)을 담고 있던 전근대의 시기는 현대사회와 분명 질적으로 다른 특징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전근대사회는 “우주가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생각, 따라서 우주의 도덕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신의 얼굴에 쓰여 있다는 생각”을 가진 세계였고,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 본래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세계는 온통 의미들로 충만’해 있던 그런 세계였다.”

이제 맥카프리는 2017년의 시간대로 돌아와 미국의 전형적인 한 고등학교 학생의 상황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이 학생은 신성한 전쟁에 참여해 본 적이 없는 반면, 인권에 대한 폭력이라면 아주 혐오한다. 이 학생의 종교관은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성공회 신도예요. 어머니는 가톨릭으로 자랐지만 지금 내가 보기엔 아마도 불교도 같아요. 사실은 잘 몰라요.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많이 얘기하지 않기 때문이죠. 나는 기독교적으로 자랐어요. 크리스마스를 기념했고 몇 년 동안 기독교 농구팀 선수였으니까요. 종교가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사람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는 모든 종교들이 다 나름의 진리를 가졌다고 생각해요. 나는 어릴 때 가끔 교회에 갔지만 지금은 가지 않아요. 나는 …… 나만의 개인적 신앙(my own personal faith)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인간보다 위대한 어떤 존재가 아마 ‘그 곳에(out there)’ 있다고 믿어요. 하지만 자신의 종교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종교는 개인적인 문제일 뿐, 다른 사람이 관여할 사항은 아니죠.

맥카프리는 비록 이 학생이 어느 정도 종교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신앙을 위해 기꺼이 죽으려 하지는 않을 거라고 평한다. 또 신을 예배하기 위해 하루를 전부 바치지도 않을 거라고 말한다. 오늘날 보통의 미국인들이 속한 이 유형의 사람들에게 종교란 그들 문화 환경의 한 구성요소로 매우 사소한(casual) 것으로, 종교적 정체성은 삶과 죽음이 걸린 절박한 것이라기보다 삶의 배경(background) 정도의 성격을 지닌 모호한 것일 뿐이라고 한다. 

앞의 두 이야기를 비교해보면 12세기 초에서 21세기 초의 시간 사이에 종교의 의미가 큰 변화를 겪었음을 알 수 있다. 21세기의 미국과 유럽 등 근대화된 세계 대부분은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다 다른 종교를 가질 수 있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의 사회이다. 과거에 비춰보면 오늘날 종교에 대한 심각성과 진지함은 사라졌다. 종교가 있고 없고 사이에, 또 하나의 종교와 다른 종교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이며 모호하게 되었다.

맥카프리는 이 두 에피소드를 통해 현대 미국 사회가 상당히 세속화된 공간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세속화 방향은 역전시킬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수많은 통계자료를 통해 유럽과 미국의 탈종교화 경향이 심화되고 있다고 강조한다. 간혹 미국의 탈세속화 현상이나 종교부흥 사례가 보고되지만, 그것은 큰 틀의 세속화 흐름을 뒤바꿀 정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서구세계가 세속화되어 왔으나 미국만은 예외적으로 종교적’이라는 이른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2013~2016년 사이의 연구들에 따르면, 미국의 무종교인(nonaffi-liate)은 30% 정도이며, 그것이 1980년대~1990년대 출생한 미국 학생들에게는 무려 42% 정도의 높은 비율로까지 나타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점차 세속화되어 가는 현대세계에서 종교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2) ‘탈세속화’ ‘반세속화’ 테제의 등장 

20~21세기 종교사회학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세속화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세속화(secularization)’ 개념은 종교개혁을 통해 교회의 재산이 국가 소유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종교사회학에서 이 개념은 다원적 사회에서 종교가 점점 주변화되고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현대의 종교세속화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1950~1960년대에 시작되어, 근대화론과 더불어 현대사회에 종교의 운명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으로서 군림하게 된다. 

이 이론의 기초는 뒤르켐(E. Durkeim)과 베버(M. Weber)의 종교사회학이었다. 이들은 종교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왜 점차 축소되고 소멸되고 있는지에 대해 보다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의를 구사했다. 종교세속화론의 기본 가정은 ‘근대화가 진전되면 될수록 세속화도 증대된다(more modernization, more seculariza-tion)’는 종교와 모더니티 양자 간의 관계에 관한 명제에 기초한다. 베버는 세상의 ‘탈주술화(disenchantment)’, 즉 합리화(ratio-nalization)의 증대로 전통종교의 사회적 정당화 기능은 점점 축소될 것이며, 궁극적으로 종교는 개인의 사사로운 삶의 영역 속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았다. 뒤르켐과 베버는 당시 근대사회의 역동적 변화가 더욱더 합리적인 사회유형을 이끌어내게 될 것이며, 초자연적인 것은 점진적 위축과 쇠퇴가 불가피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같은 세속화론은 1990년대 이후 경험적이고 논리적인 한계에 직면하게 된다. 근대화를 성취한 북미와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종교가 오히려 부흥하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反)세속화(counter-secularization) 현상은 종교의 ‘탈세속화(de-secularization)’ 테제를 불러오게 된다. 21세기 들어 나타나는 종교부흥 현상을 보고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은 “21세기 초에 볼 수 있는 종교로의 회귀 현상은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200년 넘게 계속되어 온 ‘세속화이론’을 파괴했다.”고 단정했다. 

탈세속화 테제는 종교 세속화론의 단선적(unilinear) 명제가 가지는 한계와 문제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다. ‘탈세속화’라는 용어 자체는 오래된 것이지만, 종교의 세속화론에 대한 대응 논리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9년 피터 버거의 한 저서가 등장한 이후였다. 탈세속화 테제는 근대화와 세속화를 동시적 현상이라고 간주했던 초기의 세속화론의 논지에 대항하여, 세속화 현상과 더불어 ‘반세속화’ 또한 현실세계를 구성하는 주요 현상이라는 것을 가정한다.

한때 세속화론자였지만 탈세속화론으로 자신의 입장을 변경한 피터 버거는 〈세상의 탈세속화: 개관〉을 통해 ‘세속화 이론의 오류’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우리가 세속화된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강조하며 지난날 그가 주장해왔던 세속화이론을 스스로 뒤집었다. 그는 오늘날의 세상도 이전 세계만큼이나 매우 종교적이며, 몇몇 지역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욱 종교적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가들과 사회과학자들의 문헌에서 막연하게 사용되어 오던 ‘세속화론’의 전체적 틀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판한 것이다.

버거는 근대화로 인해 어느 한 편에서는 세속화가 진행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반세속화’운동이 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차원에서의 세속화가 반드시 개인의 의식 차원의 세속화로 이어지지도 않으며, 제도종교들이 사회적 권위와 영향력을 잃어버렸지만, 신구(新舊) 종교 모두 신앙과 의례가 개인의 삶의 차원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제도적으로 신도가 거의 없을 때라도 제도종교는 사회적 · 정치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따라서 종교와 모더니티의 관계는 단선적이기보다 매우 복합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파악한다. 

그가 세속화이론을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세속화를 거부한 종교공동체가 오히려 더 잘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버거는 그 책을 쓸 당시 이슬람교와 복음주의의 역동적 부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세속화된 종교에 대한 실험은 거의 모두 실패했으며, 반동적 초자연적인 분위기가 충만한 신앙과 의례를 수반한 종교운동들은 광범위하게 번성하고 있다 …… 반(反)세속화는 세속화만큼이나 현대세계의 중요한 현상이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반세속화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발생하게 된 것일까? 버거는 전 세계적으로 종교의 부흥이 일어나는 이유의 하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더니티가 과거의 모든 확실성의 토대를 허물어버림으로써, 불확실성은 오늘의 현대인들이 감내하기 힘든 존재론적 조건의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그 어떤 운동(종교적 운동뿐 아니라)이라도 그것이 확실성을 제공하거나 회복한다고 공약하는 경우 그 운동은 손쉽게 시장의 수요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즉 근대성으로 인해 전통사회가 해체됨으로써 현대인들이 갖게 된 존재론적 불안 · 불확실성이 종교부흥의 한 원인이라는 것이다. 결국 탈세속화 현상으로부터 버거가 이끌어낸 결론은 “인간 경험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위상의 지속성”이다. 그는 세속성이 궁극적으로 종교를 이 세계로부터 완전히 추방하는 날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소수의 종교사회학자들은 ‘궁지에 몰린’ 구(舊)세속화이론을 살려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이 테제는 근대화는 세속화를 가져오고, 따라서 이슬람교나 복음주의운동과 같은 종교운동들은 곧 소멸될 종교에 매달린 채 궁지에 몰려 있는 방어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 테제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세속성이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란의 율법학자들, 성령강림파 목회자, 티베트교 라마승들은 머지않아 모두 미국 대학의 인문학 교수들처럼 사고하고 행동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 테제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이처럼 탈세속화 테제는 종교 세속화론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세속화론을 약화시켰다. 이와 더불어 종교현상을 세속화나 탈세속화 중의 어느 일방향적이고 단선적인 것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이 두 경향성을 포함하는 보다 복합적이고 다중적 의미를 지닌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바로 이와 같은 통찰이야말로 이 테제의 중요한 의의라 할 수 있다.

3. 세속화사회에서 ‘종교’의 존재 이유, 그리고 구조

오늘날 세속화의 테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세속화, 즉 베버가 말한 ‘탈주술화’의 방향이 완전히 멈춰 서거나 역전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탈세속화의 입장을 대변하는 피터 버거도 ‘세속(the secular)’과 ‘종교(the religious)’ 가운데 세속이 “우선적 실재(paramount reality)”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세속과 종교의 공존은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세속화/탈세속화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존재 이유와 가치, 그리고 구조적 특징을 지니는 것일까? 

1) ‘합리적 선택이론’에서 본 ‘종교적 욕구’의 항상성

세속화이론은 기본적으로 종교적 수요의 불안정성을 전제하고, 종교적 수요의 감소나 쇠퇴가 언제나 가능하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다. 반면, 1990년대 이후 북미에서 종교사회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합리적 선택이론(Rational Choice Theory)’은 종교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항상적이라고 본다. ‘합리적 선택이론(이하 RCT)’의 관점에서 본다면 ‘종교’는 ‘세속’에서 계속 살아남으며, 종교와 세속은 서로 보완적으로 공존할 가능성이 높다. 고전적 세속화의 이론이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종교적 욕구(religious needs)의 ‘항상성’이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존재론적 문제들이 존재하는 한 종교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언제나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수요’ 보다 ‘종교의 공급’이 중요하다고 본다.

나아가 이 이론은 인간을 합리적 존재라고 가정하며, 인간은 ‘종교적 존재(homo religiosus)’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라고 본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이므로 신을 믿음으로써 투자하는 시간과 돈, 열정 등 자신의 자원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신으로부터 영생이나 구원과 같은 내세적 보상(otherworldly reward)과 물질적 풍요 등 현세적 보상(worldly reward)을 얻고자 한다. 이 잠재적 수요자들의 종교적 욕구는 없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합리적 선택에 따라 그들에게 호소력 있는 종교적 기업들의 서비스를 늘 기대하고 있다.   

RCT에 따르면 종교적 수요를 감소시키는 주요 원인으로 인정되어 온 과학적 세계관은 종교적 세계관과 상호충돌하기보다 오히려 상보적일 수 있다. 종교의 보상체계는 과학의 보상체계에 비해 그 범위가 더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세계관이 ‘현세적 보상’만을 제공하는 반면, 종교적 세계관은 ‘내세적 세계관과 현세적 보상’을 모두 제공함으로써 그 보상의 범위가 더 넓은 설명체계이다. 또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는 종교적 설명체계가 경험적 검증 과정에 종속되지 않는 이유는 내세적 맥락으로 보상의 성취를 유예할 수 있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설명처럼 종교와 과학은 서로 다른 보상의 기초와 범위에 근거한 설명체계이므로 충돌보다는 보완적 관계에서 병립할 수 있다. 합리적 인간은 현세적 보상에 치중하는 과학적 세계관과 내세적 보상에 중점을 두는 종교적 세계관을 동시에 소비하고자 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RCT는 자유롭고 다원주의적인 종교시장이 형성되어 종교 공급자들이 더 값싸고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상호 경쟁한다면 다양한 선호를 가진 종교수요자들에게는 더 좋은 종교시장이 형성될 수 있다고 본다. RCT는 공급이 종교시장의 변화를 만든다고 보는 관점에 서 있으므로, 수요자의 관점에 서 있는 세속화론의 입장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스웨덴이 유럽에서 가장 세속화된 나라로 존재하는 이유도 종교적 수요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선호를 만족시켜줄 다양한 공급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2) ‘매개구조(mediating structure)’로서 종교: 피터 버거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피터 버거는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종교의 부흥에 주목했다. 그는 그것을 모더니티와 세속화로 인해 존재의 불안을 느낀 현대인들이 과거의 전통적 종교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때 피터 버거가 말하는 ‘종교’는 이른바 그가 말하는 과거의 ‘성스러운 천개(sacred canopy, 天蓋)’와 동일한 역할과 의미를 지니지는 못할 것이다. 세속화가 진행되지 않았던 근대 이전의 ‘종교(religion)’와 현대의 다원주의적 상황하의 ‘종교들(religions)’은 이미 그 존재론적 지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버거는 근대화가 반드시 세속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다원성(plurality)으로 귀결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그는 “근대는 무신론의 시대라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실제로는 다신론의 시대였다.”고 강조하면서, ‘근대는 궁극적 의미의 제공자인 신의 결핍으로 고통받는 시대가 아니라 오히려 신들의 과잉으로 인해 그 신들 가운데 선택을 고민해야 하는 시대’였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원화되고 파편화된 현대사회에서 종교는 어떤 의미와 위상을 지니는가? 버거에 의하면 종교의 다원성은 여러 가치체계의 ‘상대주의(relativism)’를 불러온다. 전근대 세계는 모든 것이 일관되게 확고한 것으로 경험되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원적인 근대세계에서는 모든 경험이 상대화되기 때문에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하게 떠오른다. 복수의 세계에 살고 있는 만큼, 근대적 정체성은 세분화 · 개별화되어 현대사회의 개인은 자기성찰적이며, 따라서 언제나 불안하다. 사회생활세계의 다원화로부터 비롯되는 불만은 버거의 공저 《고향을 잃은 사람들(the homeless mind)》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생활세계가 복수라는 것은 하나의 제도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타당성을 지닐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며, 더 이상 자아의 ‘고향(home)’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현대인은 소외와 아노미의 위험성에 직면한다. 버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근대사회에서 적절한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조, 즉 ‘매개구조(mediating structure)’를 제안한다. 매개구조는 사적인 삶을 사는 개인과, 국가 · 경제 · 관료조직들과 같은 공적인 거대구조들(mega-structures)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적인 제도들을 일컫는다. 근대화는 거대하고 비인간적이며 추상화된 공적 삶과, 본래의 많은 기능을 공적 세계에 빼앗긴 잉여적이고 덜 발달된 사적인 삶 사이에 극명한 분리를 낳게 되었다. 근대인은 이 두 영역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며 살아야 한다. 이러한 분리는 이중적인 위기를 야기하는데, 한편으로는 두 영역의 요구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하는 문제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거대구조, 특히 국가가 더 이상 개인적인 의미를 제공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정치적 위기다. 매개구조는 이 두 영역을 연결해줌으로써 바로 이와 같은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는 장치이다. 

버거가 제안하는 대표적인 매개구조는 ‘이웃, 가족, 종교기관(rel-igious institutions), 자발적 조합(voluntary associations)’이다. 이 매개구조들은 개인들에게 정체성과 의미와 안정성을 제공해줄 수 있다. 특히 교회, 절, 회당 등과 같은 종교단체들은 공공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흔히 종교는 종교다원주의 사회에서 정교분리의 원칙 아래 공적인 담론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종교는 국가라는 거대 구조의 비인격적, 몰가치적 실체에 도덕적 기반을 마련해 줌으로써 사회의 통합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즉 종교는 개인을 집단으로 이끌어가는 통로이며, 거대구조와 개인을 연결시키는 교량의 역할을 하게 된다.

3) ‘표현적 개인주의’의 종교성 원천으로서 종교전통: 찰스 테일러

찰스 테일러는 세속사회의 지형 변화에 관심을 갖고, 세속사회의 종교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보인 철학자이다. 그는 현대사회가 근대화될수록 종교는 쇠퇴할 것이며 기능적으로 무용한 자원이 될 것이라는 세속화의 테제를 비판했다. 서구의 세속화는 기독교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서구세계는 영원히 기독교에 입각한 채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피터 버거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찰스 테일러는 현대사회의 세속성(secularity)을 ‘공적 영역의 세속성’ ‘종교적 믿음과 실천의 쇠퇴’보다는 “믿음을 위한 새로운 조건(the new conditions of belief)”의 등장으로 설명한다. 즉 사람들의 도덕적 · 영적인 열망과 종교적인 경험을 이해하는 방식이 변한 것을 세속성이라고 정의한다. ‘세속의 시대’란 “신에 대한 믿음(belief in God)이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으면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사회로부터, 이제 그 믿음이 하나의 선택사항(option)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믿음을 갖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사회로 이동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테일러가 말하는 현대사회의 특성과 이 시대의 종교의 특징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는 1960년대를 분기점으로 미국 문화에 혁명적 변화, 즉 개인화의 혁명이 일어났다고 본다. 테일러는 이 시대를 ‘표현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 또는 ‘진정성의 문화(culture of Authenticity)’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는 소비자 혁명의 시대로서 개인들이 자기 취향에 따라 소비를 시작하였고, 매체들도 상품광고를 전략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소비자문화는 권위에 항거하고 자기 자신의 감정과 취향을 표현하는 청년문화를 발생시켰다. ‘진정성 문화’의 핵심은 ‘우리 각자에게는 자신의 인간성을 실현하는 자신만의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종교적, 정치적 외적 권위가 부과하는 모델에 대한 순응을 거부하고 자신의 고유한 삶을 발견하려는 태도이다.

이 표현적 개인주의의 시대는 테일러의 분류에 의하면 후기-뒤르켐적 사회(post-Durkheimian social forms)이다. 후기-뒤르켐적 사회란 ‘우리의 영적인 것과의 관계가 우리의 정치사회(political societies)에 대한 관계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고, 우리의 종교적 소속이 우리의 국가 정체성(national identity)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게 되는’ 사회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 경험에 초점이 맞춰진 종교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확실한’ 사회를 말한다.

이 후기-뒤르켐적 사회의 종교적 삶은 몇 가지 결과를 초래했다. 무엇보다 영국, 프랑스,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많은 국가에서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무종교인 숫자가 늘어났다. 아울러 종교에 대한 ‘중간적 입장(intermediate positions)’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신앙 활동에 참가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특정 교파에 속하거나 신을 믿는다고 표명한다. 또 인격신을 믿는다고 표명하는 사람이 감소된 반면, 비인격적인 힘을 믿는 사람은 늘어났다. 즉 광범위한 사람들이 기독교 정통신앙 밖의 종교 신앙이 있다고 표명한다.

이처럼 ‘표현적 개인주의’와 ‘포스트-뒤르켐적’ 사회인 현대사회에서는 전통적 종교로 다 포괄하거나 분류할 수 없는 새로운 유형의 종교와 종교성이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그 예가 동양에 기원을 둔 종교들, 여러 뉴에이지(New Age)형 실천 양식, 인본주의적인 것과 영성적인 것의 가교 역할을 모색하는 다양한 비기독교적 종교들, 영성(spirituality)과 치료(therapy)를 연결하는 실천 등이다. 그 외에도 가톨릭 신자라고 자임하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교리를 거부하는 사람들, 기독교와 불교를 연합하는 흐름, 또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서 기도하는 종교인 등 그 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들이 다양하게 출현하였다. 

그런데 과거에 이와 같은 경우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런 것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세속의 시대’인 것이다. 이들은 표현주의 문화(expres-sivist culture)가 우리 세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나타난 결과들이다.

그런데 테일러가 전통적 종교의 입장에서 ‘세속화시대의 종교의 미래’를 진단한 결론은 상당히 낙관적이며 긍정적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강력한 전통적 종교공동체의 힘

테일러에 의하면 현대사회의 새로운 개인주의는 형식에서는 개인주의이지만 내용에서도 반드시 개인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의례든 일상적 실천을 통한 것이든, 집단과의 연결(collective connection)은 분명히 현대 세계에서도 아직 강력한 힘을 갖는다. 테일러는 개인주의적 영성을 추구하던 많은 사람들도 결국은 강력한 종교 공동체(extremely powerful religious communities)에 가담하려 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곳에서 자신의 영적 감각(sense of the spiritual)을 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2) 깊이 있는 종교적 삶의 토대

테일러는 현대사회의 개인주의화된 영적 체험은 아무래도 피상성(the superficial), 다시 말해 ‘요구 수준이 낮은 영성(undeman-ding spirituality)’에 의존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최초의 영적 직관은 보다 깊이 있는, 그리고 형식을 갖춘 종교 본연의 실천으로 발전될 수 있다고 예견한다. 그는 경우에 따라 요구 수준이 아주 높은 영적 수련(demanding spiritual discipline)으로 이어질 수 있는 종교적 삶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예견한다. 테일러에 의하면 “인간은 나름의 방법으로 종교적 삶을 발전시킨다.” 그런 요구 수준이 높은 종교적 삶은 명상일 수도, 기도의 형태일 수도 있다. 

(3) 정신적 고향으로서 종교전통

테일러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개인적 경험에 기반을 두고 종교적 삶을 추구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적 고향(spiritual home)’을 기존의 종교 전통 안에서 찾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강렬한 영적 호감과 맹목적 통찰에서 종교 생활이 시작되더라도 그 종교적 삶을 발전시키는 가운데 전통적 형식의 신앙(traditional forms of faith)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많은 사람이 일순간의 감동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일순간의 감동보다 더 멀리 나아가길 바라며, 그만큼 그 감동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것이 바로 그들로 하여금 전통적 형식의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는 이유다.

찰스 테일러는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자(liberal communitari-an)’로 알려져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테일러는 전통적으로 존재해 온 종교공동체가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도 중요한 위상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종교적 운동들이 생성되고 있지만, 결국 그들의 토대로서 전통적 종교가 차지하는 위상과 의미, 기능은 여전히 막대하다고 보는 것이다.

4. 세속화담론이 불교에 주는 교훈은? 

이 글은 앞에서 세속화론과 탈세속화론의 주장들을 나란히 소개하고, 현대사회의 세속화 방향 속에서도 종교가 사라지지 않고 존재하는 이유와 전개양상에 대해 설명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한국불교에는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을까?

1) ‘합리적 선택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론적 고뇌가 있는 한 종교적 욕구는 언제나 상수로 존재하며, 합리성이 지배하는 세속의 영역이 인간의 욕구를 다 해결해줄 수는 없다. 바로 여기에 현대사회에서의 종교의 존재 이유가 있고 또 그에 합당한 종교적 기능과 역할의 수행이 요청된다. 문제는 현대인의 종교적 욕구와 전근대인의 종교적 욕구는 상당히 다르다는 점이다. 2장의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현대사회의 종교성은 불분명한 경계성과 유동성(fluidity), 다원성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것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consumerism)’로 대변되는 현대사회의 환경과도 상호작용하고 있다. 오늘날 뉴에이지, 신영성운동, 신종교 등이 주목받는 이유도 바로 이 같은 맥락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선택이론’에 따르면, 종교인구가 줄었다는 것은 공급자가 수요자가 선호할 만한 다양한 종교상품을 개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각 종교가 해야 할 일은 현대의 종교성과 종교적 욕구에 걸맞은 종교로 자신을 재구조화하는 것이다. 종교성은 항상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 내용과 표출 형식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며, 종교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고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한국불교계에서도 현대인의 종교적 욕구와 그에 맞는 불교의 내용이 무엇인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2) 불교가 종교로 존립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의 ‘종교성’과 ‘종교적 욕구’에 부응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동시에 사회적 맥락에서도 자신의 존재의의를 구현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 기능하는지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 입장이 한국불교의 사회적 존재의의와 사회적 사명 · 역할 · 기능을 명료하게 인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3장. 세속화사회에서 ‘종교’의 존재 이유와 작동방식). 세속화와 탈세속화가 동시적으로 전개하는 현대사회에서 종교를 ‘매개구조’(피터 버거)로 보는 관점과 종교전통을 ‘표현주의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다양한 현대의 종교들의 원천’(찰스 테일러)으로 보는 관점이 바로 그 두 입장이다. 전자(매개구조)가 세속사회 속의 종교를 구조와 조직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후자(종교성의 원천)는 주로 현대에 새로 생성되는 종교운동들과의 관계에 주목한다.

사회적 맥락에서 불교의 존재의의를 찾는 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종교를 ‘매개구조’(피터 버거)로 보는 관점이다. 이 관점에 따른다면, 불교는 하나의 ‘매개구조’로서, 탈인격화되고 거대해지는 공적 기관 중심의 현대사회에서 소외되는 개인들의 파편화된 사적 영역을 연결하고 통합해줌으로써, 개인의 공동체로부터의 일탈과 허무주의로 침잠할 위험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관점은 구조적 · 제도적 관점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결합하는 중간적 공간으로 종교를 제도화하고자 한다.

제도종교의 대안적 영성으로 떠오르는 현대의 다양한 종교 현상들을 더 ‘깊이 있는 종교적 경험’으로 이끄는 토대로서 기존의 종교전통을 바라보는 관점(찰스 테일러)은 한국불교에 또 다른 의미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요즘 불교계는 ‘명상수행’과 ‘템플스테이’ 등을 통해 불교의 문호를 대중에게 개방하여 세속과의 소통에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세속과의 교섭으로 자칫 불교가 ‘종교성’을 잃고 하나의 ‘전통문화’나 ‘관광’의 소재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테일러는 이런 불교 입문적인 문화 행사와 수행은 그 자체에 머물지 않고 장차 보다 깊은 종교적 차원으로 연결될 것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명상의 대중화, 템플스테이를 통해 당장 불교 신도를 확보하겠다는 생각보다는, 불교가 가진 종교적 차원을 대중에게 소개하여 일차적 관심을 갖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런 시도들은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테일러에 의하면 오랜 역사 속에서 문화적 차원을 담당해온 종교 전통들은 시류에 편승하는 가벼운 존재들이 아니라 저력과 가치가 있는 제도들이다. 불교 역시 한국의 역사와 전통의 많은 부분을 담당해 옴으로써 지금도 한국인으로서의 종교적 · 문화적 정체성의 원천으로 기능하고 있다. 다만 문제는 현대의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 불교가 실제로 한국인의 종교적 · 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어느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고민해 봐야 할 부분이다. 

현재 한국불교는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많다. 이 논문에서 소개된 ‘세속화-탈세속화’ 담론이 이런 고민을 모두 해결해줄 수는 없다. 하지만 고민이 많다는 것 자체가 꼭 비관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여전히 중요하고 살아 있는 큰 종교전통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송현주
순천향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철학박사). 주요논문으로 〈현대 한국불교 예불의 성격에 관한 연구〉(학위논문), 〈근대 한국불교의 종교정체성 인식: 1910~1930년대 불교잡지를 중심으로〉 〈여성에 대한 불교의 시선, 불교에 대한 여성의 시선(주제 서평)〉 〈“불교는 철학적 종교”: 이노우에 엔료의 ‘근대일본불교’ 만들기〉 등이 있다.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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