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삶의 의미 물음을 포기할 수 없는 존재자들이다. 일상에 존재하는 존재자와 그 존재자들을 포용하는 이념 또는 보편적 속성으로서의 존재를 구분하고자 하는 독일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우리 인간을 구별 짓는 요소가 바로 그 존재 자체에 관한 물음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이다. 그 물음 속에 우리는 왜 살고 있는가와 같은 의미 물음이 포함된다.

이 의미 물음은 여러 계기를 통해 불현듯 찾아든다.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느 퇴근길 지하철 창문으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과 마주할 때 찾아들기도 하고, 카톡방에 뜨는 고등학교 친구의 부음을 들은 다음 날 아침 문득 스미기도 한다. 그럴 때 나의 죽음은 어떻게 다가올까를 생각하며 잠시 두려움을 느끼거나, 내 삶은 친구들에게 어떻게 기억될까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다듬기도 한다.

그런 생각들이 쉽게 떠나지 않으면 잠시 짬을 내어 책방을 찾아 눈길이 머무는 책들을 펼쳐본다.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책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습관 같은 것들을 다룬 이른바 자기계발서지만, 이런 날은 그런 책들로는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아 좀 더 깊이 있는 책들을 찾아 안쪽으로 들어간다. 철학이나 종교 코너로 가서 오래 머물며 펼쳐보다가 마음에 드는 책 한두 권쯤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왠지 모를 충만함이 동행한다.

 

우리 종교의 초상

그런데 그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집으로 모셔온 그 철학책이나 종교 서적을 통해 원했던 답을 얻는 경우보다는, 잠시 위안을 얻고 말거나 뒤편으로 가면 갈수록 알 수 없는 말들에 걸려 멈추고 만다. 물론 그 독서를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수도 있고, 거기에서 얻은 정보로 다른 도움이 가능한 모임을 찾아나서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그런 답을 종교나 철학에 기대하곤 한다. 철학 자체가 왜 사는가와 같은 존재론적 물음을 던지는 학문이고, 종교 또한 그런 물음에 대한 보다 확고한 답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 철학과 종교가 과연 그런 기대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을 하기 어렵다. 20세기 초반 일본 제국주의를 통한 서양철학의 왜곡된 수입으로 시작된 우리 철학연구가 한 세기를 넘기고도 여전히 그 수입품으로서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동학(東學)이 소멸한 자리를 대체한 그리스도교와 왜색화의 거센 물결을 겨우 이겨낸 불교로 상징되는 종교 또한, 시대의 변화를 이끌기는커녕 자본주의의 물결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는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보완하기도 하면서 그 역사를 축적해왔다. 우리 역사에서 유교는 종교이자 철학인 불교와 만나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철학과 종교로 정착했다. 성리학은 하늘의 명령[天命]을 우리 삶의 기준이자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고, 그때의 하늘은 다시 동학을 만나 내 안에 있는 한울님으로 재해석되어 땅으로 내려왔다. 그 한울님을 억압하는 체제에 저항하고 모든 사람이 인격적으로 대우받는 사회를 꿈꾸던 동학도들은, 현실적인 좌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후 이어지는 3 · 1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축 중 하나를 이루었다. 

전통종교를 대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불교 또한 왜색불교와 친일의 질긴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용성과 만해 등의 헌신에 힘입어 곤고한 중생들의 삶에 희망의 등불이 될 수 있었다. 그 후 한 세기를 지나면서 성철과 법정, 지관 등의 이름이 상징하는 출가보살의 정진과 재가보살의 개혁적 실천 노력이 중심이 되어, 끈질긴 자본주의화의 유혹과 세속적 타락에 저항하며 그 생명력을 겨우 이어가고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하는 그리스도교는 초기 선교사들의 교육과 의료 중심의 헌신과 민주화 운동에의 결정적인 기여 등의 긍정적인 역사와 함께,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성장주의 신화에의 함몰과 예수 정신의 쇠퇴 등의 부정적인 징후들로 신음하고 있다. 이 땅을 대표하는 두 제도종교가 모두 사회를 이끌기는커녕 흐름을 뒤쫓기에도 힘겨워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 우리 종교의 현주소이자 초상이다.

 

‘제도종교’ 없는 종교생활은 가능할까?

종교는 일차적으로 그 종교를 이끄는 구체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신도와 공간 등을 갖춘 제도종교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에게는 주로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대표적인 제도종교이지만, 최근에 이슬람이 다문화가정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런 제도종교들은 각 창시자의 말씀이나 행적을 담은 경전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확장을 꾀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미래에도 어느 정도까지는 그 생명력을 보장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다른 한편 이 제도종교들은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욕구가 시민들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근원적인 위기를 맞고 있다는 분석들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자로서 우리 인간들이 그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에서 의존할 수 있는 매개체로서 종교의 필요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양상은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고,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현재의 제도종교들 또한 그 요구를 수용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있다.

종교는 죽음을 근거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일상적 실존 상황 속에서 마주하는 의미 물음을 근거로 성립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둘은 당연히 연결되어 있고, 그런 점에서 모든 철학과 종교는 죽음에 대한 묵상과 사유일 뿐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언급은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바뀐 것이 있다면 그 철학과 종교가 제도종교와 강단철학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외부에 존재하는 ‘종교적인 것들’의 영향력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불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명상은 더 이상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제도종교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을 이끄는 실천지침이기도 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즐겨 활용하는 종교적 실천 과정에 포함되고 있기도 하다. 유대교 전통에서 성장한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의 역사학 교수 유발 하라리는 하루의 시작을 위빠사나 수행으로 시작한다고 한 인터뷰에서 소개하면서, 현재의 종교가 이미 제도종교의 경계를 넘어서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불교평론》 창간 2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종교의 변화양상 속에서 불교가 어떤 방향성을 잡고 어떻게 실천해가야 하는지를 특집 주제로 삼았다. 불교 신도 수가 급격히 줄고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교와 함께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제도종교 중 하나인 불교는, 새로운 시대에도 여전히 제기될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과 실천지침을 제공해줄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제도종교를 전제로 하지 않는 종교적 삶이 가능할 수 있을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성 자체에 종교성이 포함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제도종교에 의존하지 않을 경우 다른 방식의 종교생활, 즉 자신만의 ‘종교적인 것’을 추구하는 일이 어느 정도 불가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버드의 종교학자 하비 콕스의 명제와 같이 ‘신이 되어버린 시장’에 기반하여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 살아가는 ‘종교적 삶’ 또한 넓은 의미의 종교생활에 포함시킬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생활이 온전한 답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줄 수는 없다는 ‘쾌락의 역설’과 같은 한계에서 비롯된다. 목이 마를 때 물이 아닌 설탕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제도종교의 근원적 변화를 전제로, 그런 삶까지도 종교생활에 포용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포교의 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2019년 9월

박병기(본지 편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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