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논단 103회 모임(7월 13일)

1. 붓다와 ‘똥군 니다이’

불교가 인류의 미래라는 말이 나돈 지 오래이다. 불교에 인류가 풀어가야 할 모든 문제의 해법이 담겨 있다고도 한다. 불교에 담긴 풍부한 사유를 짚어보면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다. 다만 불교가 갈등하는 세상에 의미 있는 담론을 펴려면 ‘지금 여기’를 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붓다는 당대 인류에게 최고의 갈등인 신분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일찍이 오현 스님은 <현우경>에 나오는 ‘똥꾼과 왕의 손을 잡은 부처님’의 이야기를 종종 대중들에게 설파했다.

붓다가 어느 날 사위성으로 외출을 나갔을 때, 좁은 골목길에서 분뇨를 수거하는 똥꾼 니다이를 만났다. 그는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길을 비키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지고 있던 똥통이 쏟아지면서 부처님에게 똥물이 튀었다. 그는 놀랍고 송구스러워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부처님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니다이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다. 나와 함께 강으로 가서 목욕을 하자. 냄새가 너무 심하구나.”

“부처님은 왕의 아들이지만, 저는 천한 똥꾼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찌 고귀한 분과 같이 목욕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 나의 가르침은 맑은 물과 같아서 온갖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준다.”

니다이는 부처님과 함께 갠지스강에 가서 목욕을 한 뒤 머리를 깎고 수행자가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파세나디 왕은 불만을 토로했다.

“부처님은 왕족이시다. 귀한 신분이 어찌 불가촉천민을 제자로 삼고, 귀한 신분의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고 공양하도록 했단 말인가.”

그러자 부처님은 파세나디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교단 안에서는 직업이나 신분이 문제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마음과 행실이 중요하다. 니다이는 이미 나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은 자가 됐다.”

왕은 자신의 생각이 모자랐음을 사과하고, 부처님과 니다이에게 예배했다.

오현 스님은 “여기엔 몇 군데 눈여겨볼 데가 있다”면서 “우선 인도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인 계급구조가 부정되고 있다.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은 인간 이하의 버림받은 인생으로 취급을 받는다. 〈마누법전〉에, 그들의 손발이 바라문이나 왕족의 몸에 닿으면, 그것을 잘라버려야 하고, 이들을 바로 본 그들의 눈은 빼 버리도록 되어 있다. 부처님은 이런 사람의 손을 잡고 이끌어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강조했다.

오현 스님은 파세나디 왕이 니다이에게 사과하고 예배한 사실도 눈여겨보았다. 스님은 그 장면을 두고 인권의식이 발달한 요즘 세상에도 쉬운 일이 아니라며 불가촉천민을 ‘말하는 짐승’으로 여기던 2600년 전의 현실을 상기시켰다. 이어 2600년이 지나 오늘의 갈등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일찍이 불교의 스승들은 ‘야차와 부살은 백지장 하나 차이’라고 가르쳤다. 남을 헐뜯고 욕심만 채우려는 순간 야차가 되고, 서로 돕고 배려하는 마음을 내는 순간 보살이 된다는 것이다. 똥꾼이 수행자가 된 것이나, 파세나디 왕이 그에게 사과하고 예배한 것은 백지장을 뒤집어 보살이 된 사례들이다.

요즘 세상이 두 쪽으로 날카롭게 나뉘어 갈등하고 충돌한다. 특히 날로 심해지는 빈부 격차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뾰족한 해법도 없다. 서민 정권을 자처하는 현 정부가 나서고는 있지만,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실마리는 야차와 보살의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야차의 마음을 보살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 모든 것 가운데, 본래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잠시 가지고 있다가 내놓아야 한다. 아옹다옹 집착하다 보면 업보만 두터워진다. 왕이 똥꾼에게 사과하듯이 한 생각 고쳐먹는 곳에서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문이 열린다. 부처님은 이 길을 일러주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들은 해마다 부처님 오신 날(5일)이 되면 마음의 소원을 담은 등을 내건다. 그러나 등불을 켜기 전에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무엇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는 것인지 생각하는 일이다.”

오현 스님의 법문은 2006년 부처님오신날에 한 일간지에 실렸다. 신문 지면의 한계 때문에 더 자세히 논의하지 않았으리라 짐작된다.

오현 스님의 분석에 공감하며 하나 더 주목할 부분이 있다. ‘똥꾼 니다이 일화’에서 보듯이 붓다는 신분제도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실천에 나섰다. 짐승처럼 대우받던 불가촉천민들과 왕족들에게 ‘생각만 바꾸라’고 하지 않았다.

파세나디 왕이 생각을 바꾼 것은 붓다의 과감한 실천행과 그 자비의 실천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지혜 때문이다. 붓다의 과감한 실천이 없었다면 파세나디 왕은 생각을 바꿀 계기를 맞지 못했을 터다.

붓다가 엄혹한 신분제 사회에서 불가촉천민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파격으로 실천한 ‘똥꾼 니다이의 일화’는 갈등하는 세상에 불교의 해법을 찾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오현 스님이 그토록 아옹다옹 집착하다 보면 업보만 두터워진다고 경고했고, 왕이 똥꾼에게 사과하듯이 한 생각 고쳐먹는 곳에서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문이 열린다고 강조했지만, 그로부터 13년이 지나고 스님께서도 열반에 든 오늘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요즘 세상이 두 쪽으로 날카롭게 나뉘어 갈등하고 충돌한다. 특히 날로 심해지는 빈부 격차는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킨다”는 지적은 지금도 적중하고 있다.

21세기 인류에게 최고의 갈등은 무엇일까를 짚어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붓다가 살던 2500여 년 전의 사회와 오늘날의 사회는 사뭇 다르다. 붓다가 깨달음에 이어 45년 동안 실천에 나선 사회에 존재했던 신분 제도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사라졌다.

현재 지구촌 어디에서도 법적 신분 제도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인류에게도 갈등은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정파 갈등, 보수와 진보의 갈등, 빈부 갈등, 세대 갈등, 남북 갈등과 남남 갈등, 남녀 갈등과 노사 갈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불거져있다.

숱한 갈등의 해법을 찾을 때 그 모든 갈등이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 여실지견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다.   

2. 자본주의 사회의 갈등

불교는 자금의 한국인, 특히 청소년에게 ‘할머니 또는 아주머니의 종교’ 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더러는 갈등을 해결한다고 심리적 치료에 주목한다.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도 갈등의 심리 치료에 불교가 활용되고 있다. 서양학자들의 불교적 심리 치료 저작들이 거꾸로 국내에 번역되어 들어오기도 한다. 불교의 고갱이인 제법무아(諸法無我)는 현대인이 정신적 장애를 넘어서는 데 효과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불교가 갈등하는 세상에 답을 주려면, 또는 기독교 문명의 ‘뒷북치기’에 머물지 않으려면 심리적 차원의 치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먼저 오늘의 시대를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아야 한다. 그동안 글로벌 시대를 줄곧 주창해온 사람들은 경쟁을 부르대며 언제나 ‘신자유주의’ 가치를 내세웠다. 모든 걸 시장에 맡기자는 논리 아래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추구해왔다.

그 결과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너나 할 것 없이 탐욕으로 물들어 갈등이 증폭되는 비인간적 체제를 낳았다.

무릇 불교의 인간관은 현대 사회과학의 인간관과 닮은꼴이다. 현대 사회과학도 연기법이 그렇듯이 인간을 실체적 존재 아닌 관계적 존재로 본다. 독일의 중등학교 사회교재가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로 가족관계와 노사관계를 꼽아 가르칠 만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사 갈등은 가장 기본적인 갈등이다.

노사 갈등의 중요성은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대다수 인간이 평생 노사관계 속에 살아가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대학생 대다수의 꿈은 ‘취업’이다. 취업은 노동계약을 맺는 순간에 이뤄진다.

기업에 원서를 내고 최종합격 통지를 받기위해 지금 이 순간도 절대다수의 대학생들이 스펙 쌓기에 골몰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 기업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갈등의 수준이다.

촛불혁명이 일어나면서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자는 의지가 모아졌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70년을 맞았던 2018년의 풍경은 우리가 살고 있는 민주주의 수준, 기업 내부의 갈등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해 우리말 ‘갑질’은 외신에서도 영어표기 ‘Gapjil’로 보도될 정도로 화제였다. 갑질을 꼭 거창하게 여길 일은 아닐 터다. ‘일상의 파시즘’이란 말도 있듯이 갑질은 가족관계, 연인관계를 비롯해 일상생활에서도 무시로 저질러진다. 갑질이 갈등을 불러일으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2018년에 드러난 갑질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얼마나 민중에게 억압적일 수 있는가를 증언해주었다. 기업에서 일어난 적나라한 자본의 갑질을 찬찬히 짚어보자.

자본의 갑질이 사회적 문제점으로 불거진 것은 2018년 봄 대한항공 전무 조현민의 이른바 ‘물벼락 갑질’이다. 서른다섯 살 조현민은 광고업체 팀장에게 괴성을 지르며 유리컵을 던지고 종이컵에 든 매실 음료를 참석자들에게 뿌려댔다.

조현민은 ‘땅콩 회항’으로 공분을 일으킨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 조현아의 동생이다. 곧이어 두 자매의 어머니 영상이 온라인에 공개됐다. 회장 조양호의 아내이자 일우재단 이사장인 이명희는 호텔 증축 공사장에 등장해 폭언과 손찌검을 했고, 자택 개축공사 노동인들에게도 욕을 하며 폭행했다. 곧이어 대웅제약 회장 윤재승이 욕설을 내뱉는 녹취록도 공개됐다.

기실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자본의 갑질은 대한항공이나 대웅제약만이 아니다. 2017년 11월 1일 노동시민단체와 전문가들이 연대한 ‘직장 갑질 119’가 문을 열자 6개월 만에 1만1938건의 ‘갑질’ 제보가 접수됐다. 하루 평균 66건 꼴이다.

그동안 일터에서 얼마나 많은 갑질이 있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준 통계다. 하지만 언론은 공분을 살 때에 잠깐 일회성으로 보도하는데 그쳤다. 바로 그래서 자본의 갑질은 불쑥 튀어나왔다가 망각되기 일쑤였다.

SK그룹 회장 최태원의 사촌 아우 최철원이 고용인을 야구방망이로 실컷 두들겨 팬 야만도, 현대그룹 정주영의 손자 정일선 현대BNG스틸 사장이 운전기사를 평균 18일 꼴로 교체한 갑질도 어느새 망각 되었다. 대림산업 부회장 이해욱이 운전기사를 상습적으로 폭언·폭행한 일도 마찬가지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습관성으로 갑질을 일상화 했으면서도 버젓이 거짓말을 한다는 점이다.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들먹이기도 민망할 정도다. 이명희는 법망을 의식해 “욕은 했지만 때린 적은 없다”고 의혹을 전면 부인했지만 곧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대웅제약 윤재승은 네티즌의 비판 여론이 빗발치자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면서도 상습적인 욕설이나 폭언은 없었으며 폭언을 견디지 못해 회사를 그만둔 사람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윤 회장의 언어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한 사람이 최근 2~3년에 100명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모두 국민을 우롱하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우리 헌법은 자본의 갑질에 대항할 단체결성의 권리를 명문화해놓고 있다. 노동조합이다. 실제로 선정적인 장기자랑을 강요하고 임금체불에 초과근로를 강제해온 한림성심병원의 갑질에 맞서 간호사들은 노동조합을 설립했다.

하지만 종합일간지와 경제지들, 방송들이 틈만 나면 노동조합을 마녀 사냥해오면서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은 기피어가 되었다. 국민의 대다수가 일하는 취업현장에서 심각한 갈등이 억압되고 은폐되어 온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사 갈등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 점에서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첫째, 갈등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사 갈등은 부정적 현상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현상이다. 여실지견으로 갈등을 볼 때 갈등의 연기구조가 확연히 드러난다.

둘째, 노사관계 악화의 책임을 모두 노동인들에게 돌린다. 한국의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노사관계가 최하위라는 통계를 제시하며 모든 책임이 강성노조에 있다는 식의 담론이 한국의 여론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노사 갈등의 책임 또한 연기법으로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노사관계 악화의 책임은 노사 양쪽의 책임이며 굳이 따지자면 권력이 강한 사쪽의 책임이 크다. 헌법이 노동권을 보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민주노총을 ‘기득권 집단’으로 몰아가는데 앞장선 언론 자본의 실체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상징적이다. 유력 언론사의 아들인 종편방송 대표이사의 어린 딸이 50대 후반인 운전기사에게 반말은 물론 폭언과 욕설, 해고 협박을 했다. 음성파일에 나타난 초등 3학년의 말은 섬뜩하다.

“당장 내려줘… 아저씨는 해고야. 진짜 미쳤나봐…나 아저씨 때문에 더 나빠지기 싫거든? 나 원래 착한 사람이었는데 아저씨 때문에 이렇게 나빠지기 싫어…그 전 아저씨한테도 그랬지만 너무 못해서, 아저씨가 더 못해. 그 아저씨가 그나마 너보단 더 나은 거 같아…일단은 잘못된 게 네 엄마, 아빠가 널 교육을 잘못시키고 이상했던 거야.”

녹취록을 공개한 운전기사는 인터뷰에서 “나는 운전기사가 아니라 머슴이었다”며 아이가 자신을 때리고 귀에 소리를 질렀고, 운전 중에 핸들까지 꺾었다고 주장했다.

언론자본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민주노총을 마녀사냥하며 갑질을 벌이고, 자기 집 어린 딸을 수행하는 운전기사 노동인에게도 갑질을 해온 셈이다. 자본의 갑질과 갑질의 언론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물론 정파 갈등, 보수와 진보의 갈등, 빈부 갈등, 세대 갈등, 남북 갈등과 남남 갈등, 남녀 갈등들을 모두 노사 갈등으로 환원하자는 뜻은 전혀 아니다. 다만, 숱한 갈등의 해법을 찾으려면 그 모든 갈등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본주의 사회의 엄연한 기본 갈등이면서도 은폐 또는 왜곡되기 쉬운 갈등부터 ‘바로 보자’는 뜻이다.

3. 산중 법당의 금불상을 넘어

언론 자본이 지배하는 언론은 ‘글로벌시대’니 ‘글로벌스탠더드’를 부르대며 지금 이 순간도 경쟁력을 부르댄다. 국가 경쟁력, 시장 경쟁력, 지역 경쟁력, 기업 경쟁력으로 이어지며 마침내 개개인의 경쟁력을 지고지선의 가치로 무람없이 내세운다.

새삼 불교의 가르침을 톺아볼 까닭이 여기 있다. 불교와 21세기의 커뮤니케이션을 사색한다면 더 그렇다. 왜 그런가? 불교는 언제나 근본적 물음을 던지며 허상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파악하는 슬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글로벌시대의 근본적 물음이란 무엇일까? 간명하다. 무엇이 ‘글로벌시대’인가라는 물음이 그것이다. 글로벌시대라는 담론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그것을 새롭게 파악하는 눈, 바로 붓다가 우리에게 건네는 슬기다.

적잖은 한국인들이,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불교와 ‘글로벌시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예단한다. 유럽과 미국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는 상황에서, 정작 1600년 넘도록 불교가 삶 깊숙이 깊은 영향을 끼쳐온 사회의 구성원들이 불교의 고갱이를 모르거나 아예 만날 기회도 없다면 얼마나 생게망게한 일인가.

글로벌 시대를 줄곧 주창해온 사람들은 경쟁을 부르대며 언제나 ‘신자유주의’ 가치를 내세웠다. 모든 걸 시장에 맡기자는 논리 아래 공공부문을 ‘민영화’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실물경제를 ‘금융화’했다. 그 결과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고, 너나 할 것 없이 탐욕으로 물들어가는 비인간적 체제를 낳았다. 신자유주의를 비판할라치면 저들은 언제나 세계가 모두 그렇게 가고 있다고 윽박질렀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하자는 것이냐고 도끼눈을 떴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주장해온 바로 그 체제, 미국식 모델은 2008년 금융 위기로 한계가 또렷이 드러났다. 미국의 주류 경제학자들 스스로 오늘의 상황을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경제이론으로 대응해나갈 수 없다고 곰비임비 고백하는 상황이다. ‘글로벌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로벌 시대의 글로벌 스탠더드란 없다. 더없이 견고해보이던 미국식 모델의 실체가 얼마나 부실한 허상이었는가를 우리는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다. 기실 미국식 모델, 곧 신자유주의 경쟁체제가 지난 30여 년 동안 미국은 물론, 유럽 여러 나라의 복지국가 모델을 흔들고 경쟁 체제를 강요하면서 인간성을 황폐화해갔다. 미국과 유럽에서 불교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렇다. 세계는 지금 정신적이든 경제적이든 전환점을 맞고 있다. 너와 나를 엄격히 구분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로 상징되는 서양 문명은 또렷한 한계를 드러냈다. 개개인의 탐욕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지속가능한 체제일 수 없다는 사실도 명확하게 드러났다.

세계사적 전환점에서, 그렇다면 불교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복종교나 산중종교로 머물러 과연 시대적 갈등을 해결해나갈 수 있을까? 우리 시대의 갈등을 적극 풀어갈 새로운 불교운동이 절실한 까닭이다.

새로운 불교는 탐욕과 경쟁 체제가 빚어낸 숱한 갈등으로 지치고 찌든 현대인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해야 옳다. 동시에 그 길은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과제와 이어져야 한다.

2600년 전 붓다가 일어선 까닭을 저 금불상 앞에서 성찰해야 할 이유다. 무릇 불교는 개인의 해탈과 동시에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해탈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불교가 오랜 세월 농축되어 온 한국에서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에게 불교는 산사에 머물고 있다. 반면에 한국인들의 일상은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야만적인 경쟁 체제에 놓여있다. 10대 이전부터 80대에 이르기까지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경쟁에 몰입해 있다. 서로를 겨냥하는 적대감마저 곳곳에서 묻어난다.

여기서 굳이 ‘부처님’이나 ‘부처’보다 ‘붓다’라 부르는 까닭이 있다. 깊은 산 대웅전 법당에 앉아 있는 금불상과 다른 ‘깨달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은 뒤 조용히 앉아있지 않았다. 금불상으로 앉아 있는 ‘부처님’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먼지와 벌레, 짐승이 우글거리는 길을 옹근 45년 내내 걸었다.

붓다가 일어선 까닭은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의 깨달음을 나누는 데 있었다.

선입견 없이 진지하게 자문해볼 일이다. 만일 붓다가 다시 이 땅에 온다면, 오늘 대웅전에 금불상으로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의 금불상 앞에 쉼 없이 절하고 그런 행위를 스님들이 부추기는 모습을 어떤 눈으로 볼까?

2600년 전 붓다가 어디서도 앉아 머물지 않고 일어나 45년을 쉼 없이 걸었던 까닭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붓다가 일어섰던 시대와 달리 21세기는 ‘사통팔달’로 전 세계가 이어져있다. 하지만 그렇게 길로 이어진 지구촌 곳곳은 탐욕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이다. 해탈에 이른 뒤 시장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라는 가르침은 21세기의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불교가 종단차원의 장기적 전망이든 일상에서 불자들과 만나는 스님들의 법문에서든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내는 데 적극 나서야 할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바로 그것이 붓다의 길이기 때문이다.

4. 재가운동과 ‘사회계율’

지금까지 재가불자 운동은 종단에 대한 ‘감시’가 주된 흐름을 이뤄왔다. 물론 종단 감시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재가불자운동이다.

과연 불자로서 자기소임을 다하지 못하며 사는 것이 비구‧비구니 만일까. 오늘날의 재가자들은 과연 세간, 곧 자본주의 사회 속에 살면서 붓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가. 현대 사회의 담론을 생산하고 유통하는 데 출가종단이 적극적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면 재가단체들이 여론을 모아가는 데 앞장서가야 옳다. 사부대중 모두 이미 붓다라면, ‘붓다로 살자’고 서원했다면 더욱 그렇다.

구체적으로 사부대중이 불교적 가치로 현대사회의 갈등을 해결해나가는 지혜를 모아 체계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 조계종 총무원이 ‘자승 체제’에서 안팎의 갈등을 풀어갈 ‘사부대중 100인 공사’를 제안하며 그 모델로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언급한 바 있다. 종단 안팎의 주목을 받으며 출범한 사부대중의 100인 공사가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한 지금, 처음 공사를 구상할 때 염두에 둔 바티칸공의회를 새삼 짚어보며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바티칸공의회의 역사적 의미는 천주교의 테두리에 머물지 않는다. 공의회 자체가 100년 만에 열려 4년에 걸친 긴 회의를 열었다. 당시 교황 요한 23세는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교회 생활의 모든 분야가 현대 세계에 ‘적응’하는 차원을 넘어 현대 사회 속에서 완전히 의식 변화를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천주교를 넘어 다른 종교, 더 나아가 현대 문명 전반에 넓고 깊은 영향을 끼친 이유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흔히 나타나지만, 자기 아집에 매몰된 사람들은 다른 종교와의 대화나 사회참여에 거부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하지만 공의회는 오랜 세월에 걸쳐 개신교나 정교회조차 이단시해온 천주교의 ‘우물’을 벗어났다.

무엇보다 천주교 신자든 아니든 그것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 개개인의 존엄성을 강조했고, 종교에 관계없이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핍박받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적극 제기해갔다. 공의회 이후 천주교는 인간을 추상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사회 속의 인간’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단순한 사회 비판이나 자선은 해결책일 수 없다고 강조한다. 예수 가르침에 근거한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해 가야 옳다고 주장한다.

‘현대 세계와의 소통’을 강조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없었다면 오늘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나올 수 없었다. 2013년 3월, 새 교황에 선출된 아르헨티나 추기경은 평생 청빈한 삶을 살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한 ‘빈자들의 성인’이름을 ‘교황명’으로 선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스스로를 ‘교황’ 대신 ‘로마 주교’라 부르며 교황에게 따르는 특권들을 모두 거부했다. 교황으로 선출된 날에도 베드로 광장에 모인 군중과 인사한 뒤 추기경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저녁 만찬장으로 갔다. 신임 교황을 위해 기사가 딸린 리무진과 경호원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사양했다. 숙소도 교황의 공식 거처인 교황궁에 머물지 않고 일반 사제들이 오가는 바티칸의 게스트하우스에 정했다. 관용차로도 값비싼 방탄차를 물리치고 소형차를 선택했다. 늘 제기되어 왔지만 용두사미로 끝난 교황청 개혁을 위해 민간인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도 구성했다.

무엇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라는 그의 믿음을 차근차근 현실로 구현해가고 있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는 폐쇄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더 좋아한다”고 밝힌 프란치스코는 글로벌 경제 체제를 ‘돈에 대한 숭배’라고 비판하며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거침없이 천명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자유시장경제만이 경제성장 보장하고, 그 성장이 세상을 더욱 정의롭고 평등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런 것은 시장에 대한 너무 유치하고 순진한 믿음”이라면서 “이런 경제는 사람을 사회에서 쫓아낼 뿐 아니라 사용하다가 소모품처럼 버리고 죽이는 경제다. 이런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는 안 된다고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딱히 천주교 공의회 사례가 아니더라도 현대 사회에서 모든 종교는 사회 교리를 갖춰야 한다. 불교가 현대 사회의 갈등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 대한 계율을 만드는 ‘불사’는 붓다와 21세기의 소통이라고 할 수도 있다. 현대사회의 여러 갈등을 풀어 가는 ‘사회계율’ 작성 과정에서 다음 세 가지를 길잡이로 삼을 수 있다.

첫째, 생명존중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불교는 생명을 존중한다. 하지만 불자들이 살고 있는 오늘날에 자본의 이윤추구 논리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 바로 거기서 갈등이 일어난다. 2인 1조로 일하게 되어있는 곳에서 인건비를 아끼려고 한 사람만 투입되어 참혹한 죽음을 맞게 한 사건들은 자본의 논리가 생명을 위협하는 대표적 사례들이다. 산업재해로 지금도 연간 2천여 명이 숨지고 있다.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비단 노동 현장만이 아니다. 세월호의 어처구니없는 침몰 또한 이윤을 추구하는 해운회사의 요구에 따른 규제 완화가 참사의 뿌리이다. 팽목항에서 울려 퍼진 목탁은 생명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사회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

둘째, 평등세상이다. 인간은 모두 불성을 지닌 존재이다. 생명을 존중하는 불교에서 인간은 각별한 존재이다. 맹구우목(盲龜遇木), 눈이 먼 거북이가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구멍 뚫린 통나무를 만나는 것처럼 인간으로서 태어나기가 어렵다(人身難得). 인간은 모두 불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평등하다. 다만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불법(法, 가르침)을 만나기가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려움은 사회적 조건과 인연에 따라 얼마든지 해소할 수 있다. 생존권에 쫓겨 허덕일수록 불경을 만날 가능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불교는 모든 불평등 해소에 나서야 한다. 인간의 평등을 훼손하는 모든 사회제도는 불교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문제가 대표적 보기이다.   

셋째, 탈탐진치(脫貪瞋癡)이다. 인간을 탐진치에 젖게 만들거나 부추기는 사회제도는 불교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새로운 불교운동은 탐진치로 찌든 경쟁과 갈등 체제, ‘탐진치 체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해야 옳다. 그 길은 ‘신자유주의를 넘어선 사회’를 구현하는 과제와 이어져 있다. 현재 대한민국 복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꼴찌 수준이다. 국내총생산에서 복지 지출 비중은 OECD 평균의 절반 수준이다. 예산 대비 복지지출 비율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언급한 세 가지 가치로 우리 사회 갈등을 바라보면 해법이 보인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 민주당과 한국당의 정파갈등, 지역갈등, 남녀갈등, 노사 갈등과 같은 모든 갈등에 불교는 어느 한쪽에 설 필요가 없다.

갈등 당사자들 가운데 누가 생명존중, 평등세상, 탈탐진치에 부합하는가로 판단해야 한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 정파를 넘어, 지역을 넘어, 분단을 넘어, 남녀를 넘어, 노사를 넘어 어느 쪽이 ‘생명존중, 평등세상, 탈탐진치’를 추구하는가를 살펴야 한다. 그것이 중도이다.

불자들은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고 불평등에 기반하며 탐진치의 갈등을 부추기는 사회경제 체제의 대안을 단순히 구두선처럼 이야기할 게 아니라 새로운 비전과 정책으로 제시해야 한다. 불교의 현대적 담론을 만들어내려면, 종단 스님들 사이에 의지가 모아져야 한다. 종단 차원의 의지가 모아지지 않는다면, 유력한 사찰이 선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국 불교 어딘가에서 불교의 현대적 담론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것을 스님들의 법회자료와 재교육 자료, 청소년의 교양 교재, 평생교육원의 강좌들로 소통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현대적 담론으로 스님을 비롯해 재가자들까지 의식수준을 높일 때 불자들은 자연스럽게 늘어날 수 있다.

종단이 의지가 없다면 재가불자들이 ‘사회계율’을 만드는 불사를 주도해갈 수도 있다. 사회계율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재가불자들의 사회적 깨달음도 폭넓고 깊게 이뤄낼 수 있다.

 

참고문헌

손석춘, 『붓다, 일어서다 - 21세기 한국과 불교의 커뮤니케이션』, 들녘, 2012.
손석춘, 『민중언론학의 논리:정보혁명시대 네티즌의 무기』, 시대의 창,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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