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후(戰後) 공간에서 불교소설의 가능 지평을 열다

해방의 감동은 무질서와 혼돈, 그리고 이데올로기 대립의 양상을 낳았고, 친일 척결 이 미해결된 채 한국전쟁(6 · 25)은 우리 민족에게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해방 직후 5년간의 민족사적 과제를 미해결 상태로 남겨둔 채 다른 양상을 대립으로 겪어야 했다. 예컨대 친일 변별에 대한 논쟁과 광복 유공자의 보상 문제의 단절이 그것인데, 소설계뿐만 아니라 제 분야에서 이러한 단절 현상은 기존의 체제에 종속을 거부하는 부정의 논리에 의한 ‘다양성’을 낳게 했다. 

한국전쟁은 서구문학의 전후 현상과 많은 국면에서 일치된다. 기존의 도덕 · 윤리에 대한 반항의식의 팽배, 실존주의 사상의 난무, 그리고 메커니즘에 대한 강한 거부와 불신, 휴머니즘 정신의 고양화 등의 그것이다. 다만 한국전쟁이 동족상잔의 대치적 상황이라는 점에서 서구 전후문학의 특성은 1950년대부터 이미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첨예화된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 극단화가 전쟁을 야기했다는 평면적인 문제보다는 민족 동질성의 추구와 분단극복 의지라는 민족 통합원리의 총체적인 암시가 전후문학의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의미이다. 이의 구체화가 소설의 다양화이다.

신동욱은 1950년대의 소설을 개관하는 자리에서 이 시대의 작가들의 소설 성향을 9가지로 분류했다. 그러나 종교적 성향이나 불교적 작품성향을 하나의 항목으로 대별하지는 않았다. 그 작품 성향은 대체로 이렇다. ①비판정신과 심리묘사의 소설로서는 김성한을, ②인간주의적 행동주의의 인물 설정과 시대적 책임인식의 소설로서는 선우휘, 오상원 등의 작품들을, ③실존적 자각과 자유인의 형상의 소설로서는 장용학의 것을, ④소외된 인간과 냉소적 삶이 인식된 소설로서는 손창섭, 이범선을, ⑤순박한 서민의 삶과 서정적 인간 이해의 소설로는 오영수의 작품을 대표로 꼽고 있고, ⑥ 자아의 내재적 모순의 발견과 그 초극을 다룬 작가로는 유주현을, ⑦민족적 기개를 고양화 시킨 작품은 정한숙의 것을, ⑧일상적 세태 속에 묻힌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쓰인 소설로는 전광용의 것을, 그리고 ⑨마지막으로 역사적 체험과 여성 수난의 문제를 다룬 작품으로는 여류작가 임옥인, 손소희, 한무숙, 박경리의 작품들을 들어 개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류는 1950년대에 발표된 이들의 작품에 한정시키지 않고 그 뒤의 작업에서 얻어진 성과까지도 포함해서 분류한 것이다. 1950년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종교적 성향인 띤 작품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연구자는 별도의 항목으로 묶지 않은 것일까? 이 글에서 담론하려는 정한숙의 소설을 민족적 기개를 고양 시킨 작품으로만 유형화하고 불교소설인 〈금당벽화〉는 고려하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에 종교적 성향을 띤 소설 중에서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은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1953년)와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1955~56)이다.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는 해방 직후의 무질서한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공간적 배경으로는 테러리즘이 만연하는 살벌한 북한 공산주의 치하로 설정되어 있다. 이 소설은 이런 소설 공간적 특성과 해방 직후의 작품적 특성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으며, 소설 제목이 시사하는바 기독교적인 소설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죄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발상과 의도로 보아 종교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김동리 〈사반의 십자가〉는 인본주의의 극대화 현상에서 야기되는 인간의 악마적 속성을 사반이라는 인물로 표상화하는 한편, 신본주의적인 내세성과 초월성의 표상으로 예수라는 인물을 설정하여 이 양자의 대립 또는 갈등 구조를 통해 죽음으로부터의 인간구원 문제를 천착한 작품이다. 소설 공간을 2천 년 전으로 소급하여 설정했다는 점과 현실문제의 구체화를 꾀하지 못한 시대적 오류의 지적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모순 미학과 제3세계관 휴머니즘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의 중요성은 인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와는 달리 이 시대 발표된 소설 중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불교소설은 정한숙의 〈금당벽화〉(《사상계》 1955년 7월호)이다.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1950년대의 이른바 불교소설이라 지칭할 수 있는 소설은 정한숙의 〈금당벽화〉 이외에는 탐색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불교소설의 불모지였던 해방공간과 전후 공간에 불교소설의 가능 지평을 열어준 작가는 정한숙이다. 그리고 이 〈금당벽화〉과 같은 맥락의 정한숙 불교소설은 1971년에 발표된 소설 〈금어(金魚)〉(《지성》 1, 11월)이다. 1950년대의 불교소설을 일별하는 이 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으로 무리가 있으나, 〈금어〉가 〈금당벽화〉과 같은 맥락의 불교소설이라는 점, 여러 측면에서 쌍생아적인 소설이라는 점에서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정한숙의 소설 세계를 정리한 송하춘은 소설가 정한숙을 이렇게 말한다. “정한숙은 전후 대표적인 신세대 작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상황은 전후의 분단된 조국 현실이었고, 산업사회로 치닫는 전환기였다. 따라서 그의 문학적 관심은 처음부터 남북분단의 비극적 현실과 산업화 시대의 인간성 상실 혹은 소외라는 문제에 닿아 있었다. 다만 그것들이 옛 조상들의 정서 혹은 삶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 다른 작가와 다를 뿐이다.” 그러면서 〈금당벽화〉에 대해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전황당인보기〉 〈거문고 산조〉 〈백자도공 최술〉이 예술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딛고 예술적 성취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면, 〈금당벽화〉 〈금어〉는 〈백자도공 최술〉과는 달리 ‘현실’의 문맥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문맥이 ’역사적 현실’이 확장된 작품이다. 즉 역사적 현실이 개입되어 예술적 정열과 충돌한다. 〈금당벽화〉의 담징은 붓을 들고 벽면을 향할 때마다 열반의 환상이 아닌 피비린내 풍기는 조국의 현실이 떠오른다. 염불을 하면 할수록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잡념 또한 누를 길이 없다. 담징은 불승과 화공, 그 어느 하나에도 마음을 열어놓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된다.” 그리고 〈금당벽화〉를 역사소설로서, 또는 예술가소설로서 범주를 한정시켜, 사상적 측면 즉 불교사상적 탐색을 유보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1970년대에 발표된 〈금어〉를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예술가의 창조적 열정이 역사적 현실, 곧 시대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은 정한숙의 일관된 믿음이었다. 정한숙의 이러한 믿음은 〈금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나당연합군에 장렬하게 전사한 장군과 동료들과 넋을 위로하고 그들의 극락행을 축복하기 위해 삼존천불상을 새긴 석공 임실이나, 6 · 25 전란 중에 전사한 약혼자 김동성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탱화에 착수하는 아심 스님의 예술적 열정은 모두 전란이라는 역사적 현실이 창작의 계기가 된다. 또한 〈금어〉의 액자 속 주인공 임실과 액자 밖의 주인공 아심 스님이 전란이라는 역사적 현실이 야기한 상흔을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데에서 그 매개가 되는 것이 종교적 법열이었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금당벽화〉와 같은 계열이다. 결국 〈금당벽화〉의 담징이나 〈금어〉의 ‘임실과 아심 스님’은 모두 ‘주인공은 시대성을 띤 인물’이어야 한다는 작가의 믿음을 구현한 인물들이다. 또한 그들은 예술과 현실의 간극을 딛고 예술적 승화의 경지에 이르는 예인들이라는 점에서 예술과 현실과 종교가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작가의 소설미학을 구체화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송하춘은 정한숙의 〈금당벽화〉와 〈금어〉에 등장하는 석공 임실과 탱화 화가인 아심 스님의 예술가로서 창조적 열정과 예술혼에 맞추어 설명하고 있을 뿐, 불교소설로서 가치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언급이 없다. 다만 예술과 현실과 종교가 분리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정한숙의 소설미학에 주목했다.

 

2. 승려 화가로서의 갈등 구조

담징은 고구려의 승려이자 화가이다. 그의 생애는 미상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는 610년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그림 도구의 제작 기술과 화법을 전파했다고 한다. 일본 승 법정(法定)과 함께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사(法隆寺)에 기거하면서, 금당벽화를 그렸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전한다. ‘금당벽화’는 석가 · 아미타 · 미륵 · 약사 등으로 구성된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인데, 현재는 모사도로 전해진다고 한다. 담징이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소설 〈금당벽화〉를 역사소설로 보지만, 이 글에서는 소설 속에 나타난 예술가로서 담징과 승려로서 담징에 주목하여 불교사상과 예술관에 대해서만 언급하려 한다. 

단편소설 〈금당벽화〉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목탁(木鐸) 소리가 비늘 진 금빛 낙조(落照) 속에 여운(餘韻)을 끌며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기복(起伏) 진 구릉(丘陵) 밑으로 흐르고 있다.”(〈금당벽화〉의 첫 문장, 첫 단락) 바위에 앉아 서녘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담징을 시청각적 이미지로 보여주며, “그의 동광(瞳光)은 하늘빛을 닮은 듯 담뿍 부풀어 올랐던 희열의 빛이 잦아들며 몽롱한 꿈속에 잠기는 듯 흐려졌다”라고 묘사한다. 다분히 시적인 표현이다. 목탁 소리가 노을의 여운을 끌로 수풀을 헤치고 언덕 밑으로 흐른다는 이미지가 그것이다. 이는 자연친화적 상상력인 선적 발상이다. 선의 논리는 기존의 서양적 논리를 전복시키는 비논리의 논리이기 때문에 어떤 측면에서는 시적 논리와 다름이 없다. 그것을 이 소설의 서두는 예시한다.

그러나 담징의 사명은 그것에 있지 않았다.

생각하면 고국을 등진 지 삼 년, 보시(布施)의 길을 떠나, 백제 땅을 거쳐 신라에 머물다 도왜(渡倭)한 지도 지금엔 어언 이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름이 종교적인 보시였지, 기실 담징에겐 수학(修學)의 길이나 다름이 없었다.

준엄한 산악(山岳)…… 그리고 북방 오랑캐들의 침범에 의한 끊임없는 전란…… 담징은 고국의 땅 고구려에선 편안히 화필을 부여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자기의 예술적 포부를 마음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던 까닭에, 종교적인 보시라는 명목 밑에, 수학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고국을 떠나 백제에 놀고 백제를 거쳐 신라에 배운 담징은 때마침 왜국(倭國)의 초빙에 응하였던 것이다. 왜국의 청에 응하면서도 담징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볼 때, 정한숙은 담징의 도일(渡日)을 ‘종교적인 보시’로 보지 않고 ‘수학(修學)의 길’인 화가로서 창작 활동을 편히 할 수 있는 길로 보고 있다. 이 부분만 보아도 작가는 이 소설을 불교소설이라는 인식보다는 예술가소설과 역사소설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전(佛前)에 서면 승(僧)이요, 화필을 잡으면 속(俗)으로 돌아가 화공(畫工)이었지만, 조국의 품에 안길 땐, 조국의 방패여야 할 몸이었다. 말하자면, 담징은 승속(僧俗)의 세계를 오고 가는 종교예술가이며, 조국의 아들이다. 어이 조국을 등질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초탈한 순수한 고구려 청년으로서의 기백과 번민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위와 환경은 담징의 이런 기백과 열정으로써만 처리할 순 없었다”에 이르면, 조국인 고구려를 사랑하는 승려 화가로 생각하기도 한다. 즉 역사소설로서 성격을 부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소설을 굳이 불교소설로 편입시키는 이유는 우선 이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금당벽화를 그리기로 언약한 지도 벌써 칠팔 삭이 지났지만, 담징은 성큼 손에 붓이 쥐어지질 않았다.

무위도식하다시피 하는 담징의 태도에 왜승(倭僧)들의 쑥덕거림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승적(僧籍)에도 없는 자라는 등 화공을 가장한 부랑배라는 등, 갖은 욕이 떠돌고 있음도 귀익혀 들은 말이었다.

그러나 담징은 일언반구도 이에 응하질 않았다.

벌써 채색의 정제(精製)를 해 놓은 지도 오래였다. 그러나 붓을 들고 벽면을 향하면, 구슬같이 아롱진 열반(涅槃)의 환상은 고사하고, 피비린내 풍기는 조국의 현실뿐이 떠오를 따름이었다. (……) 담징의 전신엔 피가 역류하듯 불끈 힘줄이 뻗쳤고, 그 눈에선 살생의 불길이 솟아오르는 듯 뜨거웠다.

오늘날까지 닦아온 자비의 불심(佛心)은 이 순간에 물거품같이 사라졌다.

불끈 쥐여진 의분(義憤)의 주먹은 펴지질 않는다.

비록 불도에 어긋난다 해도 담징은 조국을 버릴 수 없었고, 살생의 죄로 불심(佛心)에서     버림을 받는다 해도 조국의 멸망을 보고 있을 순 없었다.

하늘 녘을 응시하고 있는 담징의 눈앞엔, 오랑캐를 쫓아 허허벌판을 달렸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작중 인물인 담징은 승려 화가로서 소명감보다는 조국인 고구려 사람으로서 멸망에 의분을 감추지 못한다. “붓을 들고 벽면을 향하면, 구슬같이 아롱진 열반(涅槃)의 환상은 고사하고, 피비린내 풍기는 조국의 현실뿐이 떠오를 따름이었다”가 그것이고, “비록 불도에 어긋난다 해도 담징은 조국을 버릴 수 없었고, 살생의 죄로 불심(佛心)에서 버림을 받는다 해도 조국의 멸망을 보고 있을 순 없었다”가 그것이다. 이는 승려로서 불도에 대한 갈등을 의미한다. 

불교소설은 불교에 의한 소설, 불교를 위한 소설 등 불교 사상을 수용한 소설이다. 불교 포교를 위한 소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를 모티프로 한 소설도 불교소설이다. 불교에 대한 회의나 갈등 나아가서는 그 사상을 전복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있어도 그 소설은 불교소설의 범주 속에 집어넣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정한숙의 〈금당벽화〉는 불교소설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비록 꿈일망정 신세를 끼치고 있는 주지에게 미안하였고, 부덕(不德)한 자기 수도(修道)를 뉘우치는 부끄러움이 가슴팍을 찌르는 것이었다.

생각하면, 요즈음 지나치게 속된 생활 속에 불공(佛供)을 게을리한 가책도 없지 않았다.

삼라만상(參羅萬像)은 어둠 속에 잠들어 각기의 꿈에 잠기는 즈음, 금당으로 간 담징은 불당 앞에 불을 밝히고 주위를 정히 가다듬었다.

합장(合掌)하고 단좌한 담징의 손끝이 너울거리는 불빛 밑에 선인장(仙人掌)같이 뻗어 올랐다.

몸을 도사리고 있는 배암 모양 장심(掌心) 밖으로 감겨져 있는 염주의 알알이 불빛에 빛난다. 불상의 자비하신 얼굴을 담징은 감히 우러러 쳐다볼 수가 없었다.

흉중(胸中)에 오르내리는 잡념을 가시게 하려고 그는 열심히 불경을 외우고 있다.

생각하면 꿈일망정 자신을 비방하는 왜승들을 미워한 것만은 사실이다.

수도에 정진하지 못하는 담징, 잡념이 가득한 담징은 부끄러움을 씻기 위해 금당에 들어가 단좌하고 염주 알을 굴리며 불경을 외우고 불심을 다잡는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또는 승려로서의 고뇌이다. “염불을 할수록 꼬리를 치며 일어나는 잡념을 누를 길이 없”고, “부처의 자비도 열반의 즐거움도, 추녀 끝에 부딪칠 바람이 어둠을 몰아가듯, 담징의 가슴속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고 말”자, “어금니에 힘을 주는 순간 담징의 합장한 손끝이 풍에 걸린 듯 부르르 떨”게 된다. 그 고뇌가 극에 다다른 것은 멸망한 조국 때문이다. “살생의 피비린내가 코끝에 스며들고 멀리 조국의 땅을 침범한 오랑캐들의 말발굽 같은 소리뿐이 귓가에 웅성거리”기 때문이다. 이에 “담징은 더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의 장심을 감고 있던 염주가 불당 앞에 떨어”지자, 주먹을 움켜쥔 담징은 벌떡 일어서 버리고”(p.68) 만다. 이는 그의 멸망한 고구려에 대한 나라 사랑이며 호국불교 사상이다.

이러한 담징의 호국불교 사상은 《인왕경》 《금강명경》 《대운경》 등의 호국불교 경전에 사상적 기반을 둔 불교 신앙의 한 형태이다. 호국불교 사상은 초기 왕권 강화를 위한 방편이기는 했지만, 부처의 정법(正法) 수호와 국가 안보를 위한 신앙 형태로 불교가 전래한 삼국시대에 자리매김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담징의 조국인 고구려 에 당나라 태종이 침입했을 때 승병 3만 명이 승군으로 출전했다는 역사적 사실만 보아도, 나라를 잃고 조국을 떠나 먼 타국인 일본에 와 있는 담징의 호국불교 사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호국불교 사상은 단순히 좁은 의미의 국토를 지킨다는 의미를 초월하여 ‘부처님의 진리가 상존하는 나라’ 혹은 ‘불법을 수호하는 신앙의 터’를 잃었다는 자괴심 때문에 고뇌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나라를 잃은 상심에 벽화를 그리지 못한 담징, 그의 예술혼을 불타오르게 하는 마음은 불심일 것이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비법(秘法)이랄까…….

이 절 주지만은 오늘날까지 자기가 화필을 못하고 있었던 이유를 알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담징은 그지없이 고마웠다.

주지의 뒷그림자를 멀리 바라다보며 그는 꿇어앉아 합장한 채 일어서질 않는다.

붉게 물든 동녘 하늘의 기운이 울창한 수목들을 물들여 비치고 있다.

목탁 소리도 그쳤다.

불당 앞으로 돌아온 담징은 떨어뜨렸던 염주를 줏어들고 다시 합장 배례한다.

아침 이슬이 풀잎에 굴러 스며들 듯 염주 한 알 한 알이 그의 엄지손가락을 타고 장심 속으로 굴러내리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담징이 화필을 잡지 못하는 이유를 주지는 이심전심으로 알고, “붉게 물든 동녘 하늘의 기운이 울창한 수목들을 물들여 비치고” “아침 이슬이 풀잎에 굴러 스며들 듯 염주 한 알 한 알이” 담징의 “엄지손가락을 타고 장심 속으로 굴러내리”자 담징의 가슴에는 희열이 북받쳐 오른다. “그제야 비로소 담징은 합장한 손끝에서 불심의 자비”를 느끼게 된다. 불심으로 인해 다시 예술혼이 살아나는 것이다. 

비로소 담징은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상태인 해탈의 경지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회화인 불화는 불교의 교리를 핵을 이해하고 사찰의 법당 등에 모셔놓고 예배하기 위한 존상화(尊像畫)를 뜻하는 것으로 절의 장엄한 분위기를 살리고 불교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나타낸 형상이다. 사부대중에게 불교의 교리를 쉽게 전달해주기 위한 교화용 불화(敎化用 佛畵)와 의식 때 예배하기 위한 예배용 불화(禮拜用 佛畵)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불화는 벽에 그리는 벽화이다. 그것을 담징은 그리려고 하는 것이다. 담징의 불화 작업, 그 모습을 이 소설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붓을 든 담징의 손길이 무학(舞鶴)같이 벽 앞에 나는가 하며, 진한 빛이 용의 초리같이 벽면을 스쳤다./ ‘격곡한 골법(骨法”이여!/ 그 오고 가는 선(線)엔 북방 고구려 남아(南兒)의 의연한 기상이 맺혔고……./ 부드러운 색조여……./ 땀에 젖었던 백제의 다사로운 꿈이 깃든 속에 남국적인 정열이 풍윤(豐潤)함이 어렸도다./ 동방에 제패(制霸)한 고구려의 환희는 관음상의 미소를 자아내게 하고 담징의 싱싱한 예술적 포부는 여기 무르익어 관음상의 불룩한 유방 위에 구슬같이 맺혔다./ 이른 봄같이 다사로운 감촉이 숨은 보살의 손끝엔 지금 악에 멸망당한 수많은 오랑캐들의 죽음을 조상하는 불심의 자비가 흘렸다./ 목에 걸린 구슬이여……

이 인용문에서도 정한숙은 불심과 호국사상, 그리고 예술혼을 등가치로 설정한다. ‘동방에 제패(制霸)한 고구려의 환희’=‘관음상의 미소’=‘담징의 싱싱한 예술적 포부’라는 등식을 〈금당벽화〉에서는 끝까지 이어간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관음상의 자비와 담징의 예술적 포부를 표상하는 ‘관음상의 불룩한 유방’이라는 감각적 표현이다. 관음보살은 중생의 괴로움을 자비로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관음은 관세음(觀世音), 광세음(光世音), 관자재(觀自在),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을 줄인 말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의미와,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하여 보살피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자비의 마음을 이 소설에서는 ‘관음상의 불룩한 유방’이라는 회화적인 감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조국에 두고 온 어떤 여인의 모습을 떠올린다. 불화 관음상의 형상을 그리기 위한 이미지를 만드는 장치이다.

굶주린 금욕의 세계여…….

일찍이 조국 땅에 두고 온 이름 모를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담징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마음속의 영상이 더 뚜렷해질 뿐이다.

담징은 몹시 괴로웠다.

그것은 열반의 세계를 구현(俱現)한 것이 아니라. 사바를 모방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다시 붓을 든 담징은 한 걸음 물러섰다 앞으로 나간다.

그대로 화면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담징은 다시 주춤 서버린다.

초생달 같은 아미(蛾眉).

열반의 세계가 그 속에 있어야 하겠고, 속세의 거칠음도, 그 가운데 있는 듯싶었던 까닭이다.

 

조국에 두고 온 여인의 모습은 담징에게 괴로운 존재이다. 그 여인은 승려로서 금욕의 대상이다. 그 대상은 사바세계를 표상하는 존재, 속세에 대한 마지막 미련의 표상이지 열반 구현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담징은 그 벽화를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다. 관음상의 초승달 같은 아미(蛾眉) 속에는 열반의 세계가 있어야 하는데 속세의 때가 묻혀 있다는 인식 때문이다. 관음상 아미 속에 내재된 열반의 속세 그것은 법열의 세계이다. ‘인연’조차도 초월하는 정신의 자리에 지혜가 있고 열반, 니르바나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의 경지, 모든 욕망도, 번뇌도, 삶과 죽음의 경계조차도 없는 해탈의 마음, 유여열반(有餘涅槃)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에게는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인 ‘니르바나(nirvana)’ 혹은 적멸(寂滅)의 공간이 아니라는 인식 때문에 담징은 고뇌한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의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 일체의 중생은 모두 부처의 성질, 마음 본디 청정하여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인데, 자신이 그린 관음상의 아미에는 티끌인 번뇌와 마음의 더러움이 내재하고 있다는 인식 때문에 괴로워한다. 

하지만 “담징의 등 뒤에 서 있던 주지가 구현(具現)된 지상열반의 세계에 도취하여, 그만 합장한 채 꿇어 엎드린”다. 담징은 관음상의 아미와 아미 사이의 미간에 일점(一點)을 찍어 유여열반을 구현한 벽화를 완성한다. 이에 뭇 승도 일제히 일어섰다가 앉으며 배례한다. “가사(袈裟)를 둘러맨 주지가 어느새 맨 앞에 앉아 목탁을 두드리면 뒤에서 누구인지가 법고(法鼓)를 울린다”. 그러나 “자기 손에 이루어진 관음상이건만 지금 담징에겐 그것이 자기 의식의 세계가 아닌 것만 같았다./ 벽면엔 관음상의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가 빛나고 타오르는 향불 속에 목탁과 법고 울리며 뭇 승들의 합장배례가 그칠 줄을 모른다”로 이 이 소설은 막을 내린다. 이 결말 부분이 〈금당벽화〉의 핵이며 불교소설로서 가치를 입증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렇게 필자는 정한숙의 〈금당벽화〉를 스토리 라인에 따라 살펴보았다. 하지만 작가가 가지고 있는 불교사상을 온전하게 탐색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1950년대에 발표된 소설은 아니지만, 그의 불교소설의 핵을 탐색하기 위해 소설 〈금어(金魚)〉를 살펴보려 한다. 

 

3. 금어(金魚)의 불화 점안

금어(金魚)는 ‘단청(丹靑)이나 불화(佛畫)를 그리는 일에 종사하는 승려’를 지칭한다. 정한숙의 소설 〈금어〉의 ‘금어’는 작중인물인 아심(芽心) 스님이다. 아심 스님은 수덕사 일엽 스님의 상좌로 설정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실제 인물인 일엽 스님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서 이 소설이 실명소설이나 혹은 팩션(Faction)은 아니다. 〈금당벽화〉처럼 역사소설, 예술가소설로서의 불교소설이다. 

이 소설의 특징은 구조상 액자소설이다. 액자 안의 이야기는 통일신라 시대 때, 나당연합군으로 전투에 참여했다는 죽은 전사들의 넋을 위로해 주고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한 새긴 삼존천불상(국보 108호로 지정된 계유명삼존천불비상으로 추정됨)을 만든 석공 임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액자 밖의 이야기는 한국전쟁 중 전사한 약혼자 김동성을 축원하기 위해 탱화를 그리는 아심 스님의 이야기이다. 〈금당벽화〉의 담징이, 〈금어〉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임실과 전후 공간의 아심 스님으로 대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금어〉의 서사는 중편 분량의 소설로 8부로 나누어져 있다. 1, 2부와 7, 8부는 액자 밖의 아심 스님 이야기이고, 가운데 부분인 3부에서부터 6부까지는 액자 안으로 임실의 이야기이다. 액자 안의 이야기 임실 스토리는 역사소설적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에 이 담론에서는 유보하고, 불교소설로서 가치를 일별할 수 있는 아심의 스토리를 집중적으로 거론하려 한다. 

소설 〈금어〉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된다. “합장하고 서 있는 스님은 아심(芽心) 스님이다./ 처음 머리를 깎았을 땐 파랗던 것이 이십여 년의 세월 속에 어느덧 입고 있는 잿빛 법의 색깔을 닮아졌다./ 아심 스님이 공주 박물관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삼 년 전부터이다”가 그것이다. 이 부분에서 아심이 공주 박물관을 들르는 이유는 ‘삼존천불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런 뒤, 아심 이야기는 이십 년 전 수덕사 일엽 스님을 만나 법명을 받고 불교에 입문하는 장면으로 전개된다.

“여자란 중이 되어도 여자의 바탕을 잃지 않아야 한다. 부처와 보살은 그런 점에서 다르다. 옛글에 이르기를 여자는 덕성(德性)과 용의(容儀)와 말씨와 재지(才智)를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 덕성이란 맑고 절개가 곧아야 하고 마음을 정연히 가다듬어 행동에 법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용의란 얼굴 단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불결함이 없게 하는 것이요, 말씨란 그른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꼭 해야 할 말을 하되 남의 귀에 거슬리게 해서서 안 된다. 솜씨란 길쌈의 뜻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지와 남을 즐겁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위의 인용문은 일엽 스님이 아심을 삭발해주면서 일러주는 법문이다. 부처와 보살이 다른 점을 덕성(德性)과 용의(容儀)와 말씨와 재지(才智)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각각의 품성에 대해서 설법하고 있다. 그리고 그 품성을 비구니가 되어도 “여자의 바탕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연결시켜 어머니처럼 인간의 고통을 보듬어 주는 관음보살의 도리를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나아가 탱화와 삼존천불상과 유기적으로 그 의미망을 형성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미학이기도 하다.

불화를 불가(佛家)에서는 탱화(幁畫) 또는 만다라(慢茶羅)라고 하며 이를 그리는 승려를 금어(金魚)라고 불렀다. 이 여대생의 만다라에 대한 조예는 물론 불상의 종류와 그 탱화에 관한 박학도 법명이 높은 승려들이 당할 바가 못 되었다.

아심 스님은 불전을 읽다가 잠시 뒤쪽 툇마루로 나와 앉았다. 대서와 중복이 지나서도 무더위는 한창이었다. 우거진 녹음의 푸르름이 눈을 시원케 했다. 아심 스님의 뒤를 이어 여대생도 따라나왔다.

“스님, 공주에 가 보신 일이 있으신가요?”

아심 스님은 여대생을 쳐다보며 머리를 흔들었다.

“기회가 있으시면 공주 박물관에 들러 보십시오.”

“박물관엔 왜? 봐야 할 것이라도 있나?”

“네, 딴 분은 몰라도 스님께선 꼭 봐둬야 할 것이 있구 말구요.”

“그게 무언데?”

“삼존천불상입니다.”

“삼존천불상…….”

어느 여름날, 위의 인용문처럼 한 여대생이 수덕사에 찾아온다. 학부에서 사학과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불화와 불상을 연구하는 학생이다. 

그 여학생으로부터 아심 스님은 공주 박물관에 전시 보관된 삼존천불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인연으로 해서 아심 스님은 삼존여래상을 알게 되는 계기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 인용문에 주목해야 할 부분은 ‘금어’의 의미와 불화인 탱화와 만다라에 대한 의미이다. 탱화의 불교 사전적 의미는 “불보살과 신중(神衆)을 그려서 법당에 걸어 둔 불화(佛畫)의 한 유형”을 의미한다. “불화란 불교 신앙의 내용을 압축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써 만들어진 형태에 따라 벽화(壁畫)・경화(經畫)・탱화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탱화가 불화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만다라의 사전적 의미는 “우주 법계(法界)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眞髓)를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 여학생으로부터 아심 스님은 불화와 삼존여래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탱화나 조상(造像)에 있어서의 원칙은 삼비오안(三鼻五眼)이라”는 것, 그 “삼비오안이란 부처님의 얼굴을 그리는 원칙으로, 얼굴의 길이는 코의 세 갑절이 되어야 하고 넓이는 눈의 길이의 다섯 배가 되어야 하며, 신장(身長)은 얼굴의 여섯 갑절 반이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불가에서는 키의 표준을 팔등신(八等身)에 두지 않고 육등신반(六等身半)이라고”한다는 것 등등, 불화 그리기의 화법을 불화와 불상을 연구하는 여학생으로부터 듣게 된다. 

그리고 이 여대생보다 더 젊었을 때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정희(精姬)라는 본명으로 불렸던 과거로 돌아가,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여 월남했던 19살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같이 월남한 약혼자 김동성. 그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되어 송악산 전투에 배속되어 싸우다가 전사하게 된다. 그의 유해를 찾으려고 백방으로 헤매지만 찾지 못하고 수덕사에 이르러 스님이 된 과거를 회상한다. 그리고 그 여대생에게 공주박물관에 같이 가 달라고 요청하여 그곳을 다녀온 뒤 아심 스님은 탱화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김동성 소위의 넋을 위로해주기 위해 참선이나 예불보다는 ‘금어’가 되려고 탱화 공부를 하게 된다.

 

여대생이 다녀가고 세 번째 맞는 여름이었다. 아심 스님은 어제 이어 오늘 아침도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새 법의로 갈아입고 붓을 들었다.

지금 아심 스님이 그리고 있는 여래상은 보통 탱화와는 누가 보든 달라 보였다. 어제에 이어 오늘은 채색에 여념이 없었다.

아심 스님의 손길이 움직일 때마다 여래상의 모습은 돋보였다. 장단(章丹) · 초청(初請). 이청(二請) · 삼청(三靑)이 칠해졌고, 다시 황(黃) · 양록(羊綠)과 주홍(朱紅) · 석간주(石間朱) · 분묵(粉墨)이 칠해지는가 하면, 육색(肉色) · 다자(茶紫) · 옥색(玉色) · 지황(地黃)과 같은 조색으로 법도에 따라 공간 공간이 메워져 있다.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스님의 얼굴은 물론 손잔등에까지 구슬땀이 맺혀 있었다. 스님은 그런 더위까지도 잊고 있었다. 그대로 그림이 다 완성된 것이 아니다. 지금 스님이 잠시 붓을 놓고 있는 것은 그림의 가장 어려운 마지막 고비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스님은 수건으로 콧등과 손잔등에 내솟아 있는 땀방울을 닦고 나서 다시 붓을 들었다. 아심 스님이 든 붓은 부처님의 눈매를 그리고 있었다. 그 가는 붓이 오고 갈 때마다 부처님의 표정은 달라져 갔다.

개안미소(開眼微笑)…….

대자대비의 부처님이 비로소 눈을 뜨고 중생을 향해 가는 미소를 띠었다.

아심 스님은 붓을 놓았다. 그리곤 자기가 그린 여래상 앞에 합장 배례하였다. 여래상은 지금까지 있어 온 부처님의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부처님의 얼굴이었다.

정한숙의 소설 〈금어〉의 결말 부분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보듯이 여래상 탱화 그리기의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아심 스님의 심리묘사와 행동도 자세히 묘사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탱화에서 불화의 마지막 그림 순서인 불화에 눈 찍기이다. 점안(點眼)이다. 점안은 “불교에서 신앙의 대상을 처음으로 봉안하는 의식”을 말한다. “불상이나 불화, 불탑, 불단 등을 새로 마련하여 봉안하면서 행하는 의식이다. 개안(開眼), 개광명(開光明)이라고도 하며, 구체적으로 개안공양”이라고도 한다. 위의 인용문에서 ‘개안미소(開眼微笑)’가 이를 말한다. 이 의식은 불화에 부처의 영험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의식이다. 단순한 탱화로서 예술 작품이 아니라, 부처의 영감과 신통력, 이적(異蹟)을 불어넣는 의식이기도 하다. 소설 〈금당벽화〉에서 관음상의 아미와 아미 사이의 미간에 일점(一點) 찍기와 소설 〈금어〉의 점안은 같은 불교의식으로 거룩한 예술적 행위이다. 이를 〈금어〉에서는 “개안미소(開眼微笑)” “대자대비의 부처님이 비로소 눈을 뜨고 중생을 향해 가는 미소를 띠었다”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정한숙의 〈금당벽화〉는 해방공간과 전후 1950년대의 유일한 불교소설로서 자리매김이 가능한 소설이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 경향이 다양하기 때문에, 혹은 역사소설과 예술가소설로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또는 불교소설의 지속적인 창작을 하지 못하고 1971년에 〈금어〉만을 발표했기 때문에 불교소설가로서 면모를 유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금당벽화〉는 발표 당시에 척박한 불교소설의 문을 열어준 소설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

 

유한근 / 시인 ·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학과, 동 대학원, 명지대 대학원(박사)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평론) 당선 등단.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역임. 시집 《사랑은 흔들리는 행복입니다》 평론집 《현대불교문학의 이해》 《인간, 불교, 문학》 등 저서와 논문 다수. 만해불교문학상, 문학평론가협회상, 동국문학상, 월산문학상 등 수상. 현재 《인간과 문학》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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