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은 모두 잊어버려라

내가 처음 큰스님의 서울 거소였던 신사동의 《불교평론》 편집실을 찾은 것은 10년 전 어느 겨울이었다. 출판일을 시작한 이후 어려움을 겪던 내게 불교평론 주간인 홍사성 선배가 편집일로 생계를 꾸려보는 게 어떻겠냐고 배려해준 덕분이었다. 쭐레쭐레 선배의 발걸음을 뒤쫓아 사무실의 문을 연 순간 나는 질겁하고 뒷걸음질 쳤다. 문을 열자마자 몸에 검은 비단을 두른 해골인형 두 개가 “켈켈켈켈……” 소리를 내며 비웃듯 눈앞에서 춤추었기 때문이다. 

이후 출근할 때마다 흉측한 해골의 춤과 섬뜩한 웃음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얼마 후 인형의 웃음소리가 사라지고(방문객들의 원성이 높아) 해골들에도 적응이 될 무렵, 큰스님의 해골철학을 들을 수 있었다. 태국 한 사원의 법당문에 걸린 미스 태국으로 뽑혔던 여인의 백골 이야기로 시작하는 큰스님의 해골법문을 내 깜냥껏 요약하자면 색즉시공이었다. 지금 내 모습은 한순간의 모습이기에 영원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집착이 사라지고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오늘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해골인형으로 나의 기를 꺾어버린 큰스님에게 인사를 드릴 때도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큰스님에게 “십수 년 전, 다른 자리에서 큰스님을 뵌 적이 몇 번 있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내심 ‘그래, 반갑다. 어서 오너라’라는 환대를 기대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스님은 “그깟 일, 다 잊어버려라.”라고 냉정하게 말씀했다. 그리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는 다 잊어버렸다. 그때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고, 너 또한 그때의 네가 아닐 터이니, 지난 일은 모두 잊어버려라.” 

그제야 난 소스라치듯 놀라며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건성건성 살아오던 지난날의 추억에 기대어 앞으로도 그저 대충 살아갈 요량이었던 정신상태에 대한 일갈이었다.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눈에 나를 꿰뚫어본 스님은 아마도 내가 해골인형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아셨던 것이리라.

 

오늘의 맞춤법을 따라야

《불교평론》과 《유심》을 제작하면서, 편집자들의 직업병이라고 할 오자(誤字) 발생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숙명적으로 수많은 오자로 문인, 학자들 그리고 독자들에게 죄를 범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큰스님께서 잡지가 나올 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정독하신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긴장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큰스님의 지적은 거의 없었다. 이런저런 편집 실수가 잦았지만 홍 선배를 통해 크게 기분 상하지 않을 정도로 뒤늦게 전해져 올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큰스님이 직접 그달 발행된 《유심》을 펴들고 황황히 편집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대뜸 ‘왜 이런 오자를 교정하지 못한 채 책을 발행했느냐’고 나무라셨다. 전에 없던 꾸지람이어서 당황한 나는 스님이 가리킨 페이지를 들여다보고 다소 안심했다. 다른 출판사의 광고면에 인용된 시에서 오자가 났기 때문이었다. “스님, 이 페이지는 저쪽 출판사에서 제작한 것이어서 편집실에서 바로잡기가 어렵습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러자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스님이 찬찬히 이르셨다. “무릇 남의 일을 더 신경 써서 잘해줘야 한다. 아무리 광고라지만 우리 잡지에 실리는 내용이 잘못되었는데, 어찌 그냥 지나친다는 말인가. 내 책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일수록 더욱  빈틈없이 살펴줘야 한다.”

 

언젠가 전집을 새롭게 펴내려던 큰스님이 원고 뭉치를 들고 편집실로 오셨다. 마침 다른 직원들이 없어 내가 작품을 정리하는 일을 돕게 되었다. 컴퓨터에 입력된 시 원고를 다시 정리하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이미 발표된 작품들이었지만 스님은 꼼꼼히 다시 읽으며 표현을 바꾸기도 하는 등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몇 군데에서 편집장이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내가 “스님, 이 말은 요즘 맞춤법과는 맞지 않습니다.” 하고 주제넘은 참견을 했다. 그랬더니 스님은 흔쾌히 지금의 맞춤법으로 고치라고 했다. 곁에 있던 분이 “스님, 이미 오래전에 발행된 시집에 실린 것입니다. 맞춤법이야 늘 바뀌는 것인데, 새삼스럽게 고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했지만 스님은 단호했다. 

“예전에 발표된 것이 무슨 대수인가? 시집이 만들어지면 누가 읽는가. 지금의 독자들 아닌가. 지금의 독자들에게 지금의 맞춤법으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 

사실 스님이 남긴 시들 중에는, 펴낼 때마다 시구가 달라져 정본(定本)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운 작품도 있다. 비단 맞춤법이나 구절뿐 아니라 제목까지 바뀐 경우도 왕왕 있다.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서정과 사유의 갱신에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스님의 선시는 감상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각성을 촉구하는, 살아 있는 활구(活句)라는 평론가들의 찬사는 현실에 바탕한 새로움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로 작품의 경지를 높여오신 덕분이었을 것이다.

 

못생긴 동그라미의 인연

한번은 스님께서 부르더니 통장 계좌번호를 적어오라고 하셨다. “아이가 대학 다닌다면서? 자네 명의 말고 아이 이름으로 된 계좌번호를 알려줘.” 하셨다. 아이에게 용돈이라도 좀 주실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얼마 후 아이가 ‘조오현’이란 분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 이름으로 매월 몇십만 원씩의 돈이 송금된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스님의 장학금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설악산 큰스님이라고 설명한 뒤, 부처님이 주시는 장학금으로 알고 부디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그 뒤 아이는 함께 절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법당으로 가서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자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걸 보며 나는 ‘불연(佛緣)이 따로 없구나’ 생각하며 흐뭇했다.

큰스님의 도움은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수년 동안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이가 졸업한 후 스님께  “큰스님께서 보살펴주신 덕에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번듯한 회사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하고 감사를 드렸다. “아비보다 훌륭한 자식을 둬서 참 좋겠구나.” 하며 기뻐해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한참 뒤에야 나는 매월 큰스님의 장학금을 받는 대학생 자녀들이 전국 도처에 걸쳐 백여 명 이상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슨 장학재단이나 단체의 이름으로가 아니라 스님의 개인 통장을 통해 남 모르게 베풀고 계신다는 거였다. 20년 이상 매달 도움을 주셨다니, 스님과 맺은 불연 덕에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진출한 사람들의 숫자는 헤아리기조차 쉽지 않다.

 

몇 년 전 무문관에서 나오신 스님께 인사를 드린 적이 있다. 그러자 스님이 “내가 너한테 별로 남겨준 것이 없다. 오늘은 이 시집에 서명을 해줄 터이니 잘 간직하거라.” 하셨다. 시집은 미 컬럼비아대학에서 펴낸 《적멸을 위하여(For Nirvana)》 영문판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한 자 한 자 “김종현 님께 드립니다. …… 모월 모일 설악무산” 하고 써내려가던 스님은 서명 뒤에 찌그러진 타원 하나를 그리고 그 안에 점을 세 개쯤 찍으셨다. 그리고 ‘껄껄’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덧붙이셨다. “이렇게 해야 나 죽으면 기억이라도 할 것 아니냐.” 

큰스님은 그림이나 글씨도 일가를 이루어 걸출한 작품을 많이 남기셨다. 그럼에도 흔하디흔한 스님의 시집 서명을 떠올리는 것은 마지막에 그려놓으신 못생긴 동그라미 때문이다. 천진한 스님의 얼굴을 닮은 찌그러진 동그라미 그림은 스님의 시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한 대목에 나오는 감자 한 알을 연상하게 한다. 

“……늙은 중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더니 예닐곱 아이가 감자 한 알 쥐어주고 꾸벅, 절을 하고 돌아갔다 …… 그 산마을을 벗어나서 내가 왜 이렇게 오래 사나 했더니 그 아이에게 감자 한 알을 받을 일이 남아서였다// 오늘도 그 생각으로 무작정 걷고 있다”.

어린아이가 건넨 감자 한 알의 인연 덕에, 큰스님이 곧잘 토로하시던 ‘산악 같은 외로움’을 이겨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작은 인연을 지중하게 여기는 생에 대한 통찰이 이념과 종교를 뛰어넘어 시대의 스승으로 불리도록 한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도 큰스님이 그려준 못생긴 동그라미를 소중하게 간직할 인연이 남아서, 무망하기 짝이 없는 책 만드는 일을 아직 붙들고 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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