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당 오현 스님과의 인연은 내가 불교계 언론에 막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벌써 30년이 훌쩍 지났다. 스님은 1988년 내가 막 입사했던 신문사에서 상임논설위원을 맡고 계셨고, 스님의 평생 도반이자 지음인 정휴 스님은 주필을 맡고 계셨다. 스님은 인사동의 한 여관에 장기투숙하면서 신문사로 출퇴근했다. 

두 스님은 신문사에 상근하며 일종의 역할분담을 했는데, 호랑이같이 호통치며 기자들을 무섭게 조련했던 정휴 스님은 아버지의 역할을, 무산 스님은 야단맞고 의기소침해 있는 기자들을 달래는 엄마의 역할을 담당했다.

“야야―, 고약한 중하고 일하려니 힘들제? 내 다 안다, 힘든 줄. 다 너거들 잘되라고 그러는 것이니 이해해라. 자, 자, 밥 묵으러 가자.”

기자들이 주필 스님으로부터 한바탕 ‘푸닥거리’를 당한 날이면, 스님은 잠시 후 사장실 문을 빠끔히 열고 나와 기자들을 다독여주곤 했다. 기자들은 이렇게 시나브로 정휴 스님에게는 미운 정이, 무산 스님에겐 고운 정이 들었다. 그 정이 무르익어 몸과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을 만큼 깊숙하게 밸 무렵, 스님은 설악산 신흥사의 책임을 맡아 신문사를 떠났다.

설악으로 가신 후 스님은 좀처럼 서울행을 하지 않으셨다. 볼일이 있어도 살짝 다녀갈 뿐, 조계사나 인사동 근처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연히 인사동 거리에서 마주친 어느 날, 스님께 물었다. 서울은 통 안 오시느냐고, 신문사에 한 번도 안 오시니 섭섭하다고. 그랬더니 스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다. 

“야야, 그전에는 예서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용돈을 얻어 썼지만, 이제는 내가 무조건 줘야 하는 기라. 그러니 여기 안 오는 기다. 하하하.” 

 

기자 일을 오래 하다 보면, 책 몇 권쯤 출간하게 마련이다. 나 역시 출판사의 제안으로 몇 권의 책을 냈는데, 내세울 만한 역저가 아니어서 반연들에게도 출간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2000년도에 《선을 찾아서》라는 책을 꽤 큰 출판사에서 펴내고도 나의 이런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책을 낸 지 몇 달이 흐른 어느 날, 스님의 전화를 받았다. 

“이놈의 자슥, 책을 냈으면 나한테 한 권 보내야지! 모른 체해? 내 지금 시청 앞 프라자 호텔에 와 있으니 당장 한 권 가지고 온나.” 

부랴부랴 책 한 권을 챙겨 들고 스님께 달려가 책을 드렸다. 앞으로는 책을 내면 잊지 않고 스님께 꼭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더니, 껄껄 웃으시며 ‘수고 많았다’는 격려로 그동안의 비례를 눈감아주셨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인도에 가면 누구나 붓다가 된다》라는 에세이집을 출간했고, 약속대로 신사동 《불교평론》 사무실로 스님을 찾아가 전해드렸다. 스님은 그 책을 받아들고 술술 넘기다가 강가(갠지스강)에서 시(詩) 비슷하게 써놓은 운문을 보시더니, “너, 시 써라. 시 써봐!”라고 강권하셨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3년 뒤인 2010년, 시로 등단하게 되었는데, 등단시 가운데 한 편이 〈강가〉다. 이렇듯 스님은 내가 기자의 길에 들어섰을 때도, 또 문단에 들어섰을 때도 힘이 되어주셨으니. 인연의 깊이가 한두 생은 아닐 듯싶다.

 

가당치도 않게 신문사 경영을 맡았던 때가 있었다. 적자에 허덕이는 신문사를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만방으로 뛰어다녔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절의 스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곤 했는데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고심 끝에 설날을 즈음해 세배를 핑계 삼아 스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스님, 세배 받으십시오.” 하며 3배를 올렸더니 덕담 대신 “이놈의 자슥, 20년 만에 처음 세배를 하러 왔구나!” 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죄송합니다, 스님.” 하며 그동안의 결례를 사과하자, 스님은 주머니에 있던 10만 원짜리 수표를 한 움큼 집어 “옛다, 세뱃돈이다.”라며 건네주었다. 얼핏 봐도 너무 큰 액수여서 “너무 많아요, 스님. 받을 수가 없습니다.”라며 사양하자, 스님은 “이놈의 자슥이! 두말 말고 받아라. 20년 치다.”라며 호통을 쳤다. 아마 내 입에서 신문사 좀 도와달라는 말이 나올 것을 간파하고 선수를 치신 듯했다. 그렇지만 염치불구하고 “신문사가 어렵습니다. 제가 책임을 맡게 되었는데 좀 도와주십시오.”라고 애걸했더니 “야야, 내가 도와줄 마음이 생기면 바람처럼 날아가 도와줄 것이니, 그 말은 그만하라.”고 하셨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세뱃돈만 잔뜩 받고 돌아왔으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돌아와 세어보니, 세뱃돈치고는 큰 돈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한 푼이 아쉽던 형편이라 세뱃돈은 후원금 명목으로 신문사에 입금했다. 아무려나, 그때 받은 세뱃돈은 내 생에 가장 큰 액수여서, 지금도 설날이면 그때의 스님 모습이 떠오른다. 

스님께서 상경해 신사동에 계신다는 첩보가 들어오면 가능한 한 시간을 내어 찾아뵙곤 했다. 2011년경 어느 날 스님을 뵈었는데, 난데없이 “사는 게 지겹다.”며 “내년에 갈란다.”라고 툭 한 마디 던지셨다. “더 살고 싶은 생각도 없고, 지루하기까지 하다”며 “인제 그만 정리를 해야겠다.”는 스님의 이어지는 말씀을 들으며 반신반의했다. 

본래 선승의 어법은 역설적이고 기발하며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어서 속내를 알아차리기 어려운 법이다. 스님의 넋두리 아닌 넋두리를 들으면서 나는 세상에 3대 거짓말이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거,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거, 노인네 빨리 죽고 싶다는 거라는 속설이 떠올라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래도 고승의 말씀이니 그냥 한 말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몹시 무거워지는 순간, 스님은 주섬주섬 장삼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보이며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야야, 내 이번에 스마트폰 한 대 샀다.”고 자랑했다.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 막 출시되던 시기여서 사용법이 생소하고 복잡해 주로 젊은 세대들 중심으로 스마트폰 유통이 시작되는 중이었다. 더 살기가 싫어 내년에 가겠다는 분이 스마트폰을 들고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는 ‘이크! 이 노장에게 또 당했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날의 재미난 광경을 훗날 〈어느 노승의 말씀〉이라는 시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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