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루 키 큰 무영수(無影樹)

연전에 김병무, 홍사성 두 시인이 ‘무산선사 송수(頌壽)시집’이라는 표제를 단 《고목나무 냄새를 맡다》(2012)라는 시집을 펴낸 적이 있다. 여기에는 무산 조오현 큰스님에 대한 오랜 경험과 발견의 과정이 시인들의 빛나는 언어를 통해 풍요롭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편자들은 “스님은 평생 스스로 빛나기보다는 남을 빛내주는 일로 사신 분이다. 시를 모아놓고 보니 스님이 얼마나 캄캄한 밤하늘이었는지 더욱 실감 난다.”라고 말하였는데, 그만큼 이 시집은 이 땅에서 오랫동안 시를 써온 시인들에게 오현 스님의 영향과 감염이 얼마나 크고 깊었던가를 절감하게끔 해주었다. 

작년 5월 말 스님은 지상의 삶을 마감하고 열반에 드셨다. 나를 포함한 많은 묵객에게 늘 “한 그루 키 큰 무영수(無影樹)”(〈된바람의 말〉)로 계셨던 스님은 이 세상에 수많은 언어와 표정과 흔적을 남기고 떠나셨다. 특별히 그 흔적 가운데 으뜸인 스님의 시조는 우리 시단에서 불일불이(不一不二)의 세계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깊은 형이상학적 사유의 극점을 보여준 바 있다. 

스님은 〈재 한 줌〉이라는 작품에서 자신이 결국 무(無)로 돌아가 천지만물과 섞여들 것이라고 예감하였는데, 그렇게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서 무로 돌아가신 것이다. 이제 스님은 우리에게 크나큰 빛을 쬐어주고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거목으로 남을 것이다. 그 갈피갈피에서 나는 스님이 흘려 보내주신 순간들을 가까이서 누리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서 그 경험적 삽화를 떠올려보자니 아득하고 아늑하기만 하다.

 

오현, 깊음과 오램의 뜨거움

시조를 통해 만난 오현 스님을 먼저 이야기해보자. 당연히 이는 시인-평론가의 관계일 것이다. 스님 시조에 대해 나는 여러 편의 글을 썼다. 첫 글은 2005년 10월에 쓴 〈타아(他我)가 발화하는 심연의 언어〉였다. 고인이 된 박구하 선생이 펴내던 《시조월드》에 실렸다. 

글이 발표되고 한참 후인 2006년 여름에 나는 스님을 처음 뵈었다. 다른 분들보다 한참 늦은 만남이었을 것이다. 만해축전 때 ‘문인의 집’ 앞에서 스님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인사를 드리자 내 손을 붙잡고 한참 힘을 주신 채 서 계셨다, 일 년 전 발표된 그 글을 말씀하시면서, 스님 시조에서 타아의 실존 속에 스스로 타자가 될 때 드러나는 대상의 진실을 잘 발견했다고, 큰 평론가가 나타났다고 과분한 격려를 주신 모습이 첫 기억이다. 

그 후로 나는 역시 고인이 된 고광영 선생이 유심 사무실에서 일할 때 더러 그곳에서 스님을 뵙고 불교며 시조며 시인이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한 스님 버전의 말씀을 경청할 수 있었다. 평론가에게는 시인을 발견하는 것이 큰 임무일 텐데, 오히려 스님이 평론가를 발견하여 나로 하여금 시조에 대해 문학에 대해 스님에 대해 여러 편의 글을 쓰게끔 하셨고, 그때마다 가장 충실한 독자로서 날카롭고 따듯한 피드백을 주셨던 것이다.

 

그다음으로 문자메시지를 통해 만난 스님이다. 이는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인데, 스님은 시간의 구애 없이, 어조의 가림 없이, 어른으로서 체면 유지 일절 없이,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자주 사신(私信)을 보내셨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지금 올 수 있느냐는 의사 타진 아니면 지금 당신이 겪고 계신 육체적, 심리적 고통에 관한 호소였다. 전자라면 대개 오라고 하신 곳으로 냉큼 가서 말씀을 듣고 오면 되었고, 후자라면 나 또한 장문의 답신을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이 나는 것은 올 수 있겠느냐는 한밤중 메시지를 아침에야 본 것이었다. 전화를 드릴까 하다가 스님 거처로 서둘러 가 점심을 함께하면서 그때 스님의 단골 말씀이었던 ‘외로움’과 ‘죽음’에 대한 서늘한 그늘을 만날 수 있었다. 식사를 통 안 하시던 때였다. 나는 순간순간 시간을 재면서 도망 나오기 바빴는데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세속적 분주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스님을 찾은 적도 여러 번이다. 하안거, 동안거에 드신 줄 알면서도 혹시 하면서 문자를 드리면 시자 이름으로 느린 답신이 오곤 했고, 시간이 좀 지나면 그때를 기다렸다가 나는 스님을 찾아뵙고 말씀을 듣고 밥 얻어먹고 용돈 타고 오현 식솔로서의 고마움을 느끼곤 했다. 어쨌거나 메시지 음향과 함께 명멸하던 서투른 문법의 활자들이 문득문득 그립기만 하다.

 

마지막으로 질서정연하지는 않지만 그때그때 떠오르는 스님의 편모(片貌)들이 있다. 한양대 국문과 학생들과 강원도 쪽으로 학술답사를 갔을 때 이도흠 교수와 함께 스님을 일부러 찾아뵈었다거나, 설이면 신사동으로 세배를 가거나, 한때 격외시단이라고 하여 《유심》에서 행했던 특별 원고청탁의 역할을 도곡동에서 맡거나 하면서, 나는 스님과 공적, 사적 기억을 단속적으로 이어갔다. 그때마다 스님은, 물론 누구에게라도 그러셨겠지만, 당신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잊지 않으시며 때로 장난기 어리고 때로 가장 진지한 부탁을 하셨다. 

세목이 지금도 또렷하지만, 이 또한 스님과 한 약속이니 두고두고 글을 통해 기억을 통해 더러 삶을 통해 지켜갈 뿐이다. 스님께서 남겨주신 그 깊음과 오램의 뜨거움으로 말이다.

 

희미하고 선명한 증언과 기억들

공연히 빈 물 속에 그물을 던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스님은 〈침목(枕木)〉이라는 작품에서 역사를 떠받쳐온 모든 순간이 다 철로를 가능케 해준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역사의 어느 한순간도 의미 없는 것이 없다는 전언을 들려주셨다. ‘침목’이란 기차선로 아래에 까는 목재를 말하는데, 스님에게 ‘역사’라는 긴 철로를 떠받쳐온 한순간 한순간의 사건이나 인물이나 그 결과는 모두 선로를 가능케 한 평등한 ‘침목’이었던 것이다. 

스님은 아무리 어두운 세상의 억압을 받는다 해도, 혹은 쓸모없어 버림받는다 해도 그것은 모두 “긴 역사의 궤도를 받친/ 한 토막 침목”의 역할을 저마다 감당해낸 것이라고 노래하신 것이다. 비록 자신의 생애는 한 줌 재로 남았을지라도 그것이 역사의 행간에 견고하게 존재하는 ‘침목’ 형상을 취하고 있다는 스님의 사유야말로 오래도록 우리 모두의 그리움으로 남을 것이다. 

이제 스님과 만난 모든 순간이 하나하나의 ‘침목’이 되어 역사 저편으로 흘러간다. 모든 증언은 희미하고 또한 선명하다. 그것을 일일이 재현하는 것은 일견 불가능하고 일견 불필요할 것이다. 스님을 떠올리는 지금의 기억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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