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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웠던 그러나 다정했던
[78호] 2019년 06월 01일 (토) 명법 구미 화엄탑사 주지

내가 스님을 뵌 것은 2012년 무렵이다. 《불교평론》 편집위원으로서 일 년에 두 차례, 만해마을에 있을 때 몇 차례 스님을 뵈었다. 스님을 가까이서 지켜본 것은 아니지만 뵐 때마다 외로운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편의 시로 보여주긴 하셨지만, 스님 홀로 계셨을 그 세계를 우리가 감히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오해에 스님이라고 상처받지 않은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만해마을에 있을 때였다. 스님은 몇 번이나 “내가 만해마을을 지어서 세상 사람들 욕을 다 듣는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씀인가 했다. 문예창작을 지원하기 위해 만해마을 한 층을 통째로 작가들에게 내주고 있는데 누가 스님에게 욕을 하랴 싶었다. 

내가 머물 때도 작가 몇 사람이 보름 또는 한 달 예정으로 만해마을에 와 있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스님에게 고마워하면서도 말끝에 꼭 하는 말이 있었다. “스님이 무슨 돈이 그렇게 많아서…….”

‘아, 이것이구나! 스님에게는 욕이구나!’ 비로소 스님의 말씀이 이해되었다. 

사람들은 스님의 진면목을 모른다. 그냥 돈이 많아서 나눠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승속을 막론하고 돈이 많다고 다 스님처럼 하지는 않는다. 기부를 할 때도 치밀한 계산을 깔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환심을 사거나, 돈 자랑을 하거나, 조금 나은 경우조차 과시욕이 있다. 스님을 만난 후, 나는 돈을 쓸 때 그 사람의 진가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배웠다. 스님은 생면부지 사람에게 아무 계산 없이 돈을 주었다. 보통 사람들은 스님들이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맞는 생각이다. 하지만 진정한 무소유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스님은 돈에서 자유로운 분이었지만 그 때문에 더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스님이 입적하신 후, 언론을 통해 수많은 미담이 흘러나올 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능히 그럴 분이었기에. 

내가 만해마을에 머문 것은 두어 달, 그 사연도 참 독특하다. 국제선센터에서 소임을 그만두고 급히 나오면서, 유난히 추웠던 겨울, 나는 종로에 있는 오피스 건물에 얹혀살았다. 같은 편집위원인 이혜숙 교수가 내 사정을 스님께 말씀드리고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갑작스럽게 만해마을로 가게 되었다. 

만해마을에 도착했을 때, 나는 스님으로부터 장문의 휴대전화 메시지를 받았다. 누추하지만 편히 잘 지내라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당시 만해마을을 동국대학교에 인계하는 일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는데, 내 방과 당신 방은 넘기지 않을 테니 평생 만해마을에서 살라고 약속하셨다. 후에 나는 스님에게서 직접 만해마을을 동국대에 기증한 까닭을 들었다. 

“작년이야, 내 정신이 전과 같지 않은 거야. 그래서 정신이 온전할 때 정리하려고 만해마을을 맡길 사람을 찾았는데, 상좌들 중에는 그럴 만한 인물이 없고, 능력 있는 사람을 데려다 놓으면 그 녀석들 등쌀에 견디지 못할 게 분명해. 여기저기 달라는 데가 있었지만, 동국대학교에 기증하기로 했어. 큰 학교니까 만해마을을 잘 운영할 거야.”

노스님들이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골치를 앓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제자 키우기를 소홀히 한 것이 원인이지만 때로는 좋은 제자를 두고도 판단력이 흐려져 생전의 업적을 모두 망치는 일을 보았는데, 스님은 판단력이 흐려지기 전에 서둘러 주변 정리를 한 것이다. 그다음 해부터 안거철마다 무문관에 들어가셨는데, 그로부터 6년 후 입적하셨으니 끝까지 맑은 정신을 유지한 채 생을 마감한 스님의 정신력이 놀라울 뿐이다.

그해 삼월, 나는 만해마을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동국대학교에 기증하는 과정에서 일부를 남겨두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떠날 준비를 하던 중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스님의 메시지를 받았다. 큰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될 일이기에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지만, 스님은 그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는지 만날 때마다 내 거처를 걱정하곤 하셨다. 

스님은 《불교평론》을 창간부터 지금까지 지원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지원하면서도 단 한 번도 주인행세를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편집위원들에게 맡기고 당신은 지원만 했다. 2012년, 필화로 《불교평론》 폐간을 결정한 때도 편집위원들이 백담사로 찾아가 간곡히 말씀드리자 아무 조건 없이 다시 지원해주었다. 

《불교평론》 편집위원들이 일 년에 한 번 스님을 만나는 날이 있다. 연초에 세배를 드리러 《불교평론》 사무실에 모이는데, 당신이 계신 강원도로 우리가 갈 법도 했지만 바쁜 사람들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서울로 걸음을 했다. 그때마다 세뱃돈을 챙겨주셨는데, 다들 교수고 학자지만 할아버지에게 세뱃돈 받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재미있는 것은 해마다 세뱃돈 액수가 달랐다는 사실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스님은 기분 내키는 대로 주었다. 편집위원들이 웃으며 “스님, 올해 세뱃돈은 줄었습니다!” “스님, 올해는 많이 주셨네요!” 라고 하면 스님은 껄껄 웃으며 살아온 이야기들을 하나둘 들려주었다. 

작년이 마지막 세배였다. 스님은 알고 계셨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음날 나는 무빙템플 회원들과 신사동 사무실에서 법회를 했다. 그날 스님은 사람들을 불러 마지막 인사를 하셨는데,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내실에서 나오며 스님은 우리 공부를 방해할까 봐 까치발로 살금살금 나가셨다. 그것이 내가 본 스님의 마지막 모습이다.

스님이 떠나신 후, 편집위원들끼리 세배를 드릴 어른이 안 계시다고 한탄한 적이 있다. 어찌 세배뿐이랴. 뵐 때마다 정신이 번쩍번쩍 들곤 했는데, 우리를 깨우쳐줄 어른이 안 계시니 빈자리가 크기만 하다. 일주기가 될 때까지 《불교평론》 세미나실에 모셔진 스님의 영정 사진을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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