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신달자 시인이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계실 때 나는 사무국장으로 회장을 도와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다. 모처럼 한국시협 집행부가 만해마을로 MT를 갔다. 그때 서울에 계시던 무산 스님께서 전화가 와서는 다짜고짜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국회에 들어가야 하니 빨리 올라오라고 말씀하셨다. 

그해 한국시협에서는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예산이 많이 필요한 사업이라 정부의 지원을 받고 싶다고 말씀드린 일이 있었다. 스님은 이를 염두에 두고 있다가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국회 문공위원인 어느 의원과 약속을 잡으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상경해서 이튿날 국회의원회관 앞에서 스님을 만나 그 의원을 만나러 갔다. 사업계획서를 전달하고 사업에 관련한 의견을 나누고 나오자 스님께서 점심식사는 신사동의 유심 사무실로 가서 하자고 하셨다. 가는 도중에 뒷자리에 앉아 계시던 스님이 갑자기 “여의도 공원이 있다믄서…… 그리 가보자.” 하셨다. 차를 근처에 세워두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스님께선 처음 와본다 하시면서 철봉에도 매달려 보고 그네에 두 발을 올려놓으시고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그네를 타시기도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기도 하고 재미있어서 나도 깔깔 웃었다. 

그렇듯 스님께선 어떤 일도 구애받지 않고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분이신 듯했다.

 

2012년 3월 나의 네 번째 시집이 나왔다. 우편으로 보내드릴 수도 없고 해서 문자를 드렸더니 축하하는 의미로 밥을 사줄 테니 나오라고 하셨다. 광화문 근처의 한정식집에서 만나 식사했다. 스님은 식사를 거의 안 하시고 말씀 중에도 웃으실 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셨다. 수줍어하시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런 모습은 처음 뵈었다. 

식사 후 모셔다드리겠다고 하니 극구 싫다고 하시다가 차에 타셨다. 삼각선원이 생기기 전이라 그 무렵에는 서울에 오시면 조그만 오피스텔에 계셨다. 거처에 도착해서 내가 “저 화장실 가고 싶은데요.” 했더니 “그럼, 올라가자.” 하셔서 스님의 침소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스님은 “커피 마실 거면 알아서 타 먹어라.” 하시더니 당신께선 머그잔에 인스턴트커피 병을 기울여 커피 가루를 손바닥에 쏟아 머그잔에 던지듯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서 훌훌 저어 드셨다. 

방안에 커다란 냉장고가 두 개나 있기에 열어보니 김치가 가득 들어 있었다. 신흥사, 낙산사, 백담사 김치가 1년 숙성, 2년, 3년 숙성한 것까지 있어서 맛을 보니 기가 막혔다. “내가 워낙 김치를 좋아하지 않나.” 하시며 어디선가 커다란 김치통을 가져오셔서 김치 한 통 담아가라고 하셨다. 나는 염치불구하고 김치를 가득 담고 냉동실에 있는 스님 드시는 연잎밥까지 몇 개 챙겨서 갖고 왔다. 그 김치는 여태껏 내가 먹어 본 것 중 가장 맛있는 김치였다. 무거운 김치통도 손수 차에까지 들어다 주셨다. 

그런 모습에 송구하면서도 스님이 건강하시다는 증표 같아 한편으론 반갑기도 했다. 이듬해 가을, 개성 보쌈김치를 내가 직접 할 자신이 없어서, 김치 명인에게 부탁해 정성껏 담가 보내드렸다. 스님은 고맙다는 답 문자도 잊지 않으셨다.

 

2014년 가을, 아버지 기일에 온 가족이 산소에 갔다가 일어서려는데 스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속초에서 버스로 서울 올라가는 참인데 지헌이 시간 있겄나?” 하셔서 약속장소로 갔더니, 다짜고짜 “이가림이한테 가보자.” 하셨다.

스님 모시고 인천의 이가림 선생님 댁으로 갔다. 아파트 입구 상가에서 카드를 주시며 고기도 좋은 거로 사고 과일도 사오라고 하셔서 바리바리 장을 봤다. 이가림 선생님은 편찮으신 뒤로는 오래간만에 뵈었는데, 1층 창가의 방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이 유일한 낙일 정도로 운신을 못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스님께선 대뜸 “다리를 잘라라. 그러면 차라리 휠체어라도 타고 바깥 구경이라도 할 수 있지 않겠나?” 하시는 것이었다. 병든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아프셔서 반어적으로 말씀하시는구나 싶었다. 

스님 주변엔 사람도 많고 일일이 챙기시는 일도 많은 것 같은데 작은 인연을 귀하게 여기고 위로하고 도와주시는 모습을 뵐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 우리 집 혼사 얘기를 했는지 아들 결혼식에 축의금을 보내주셔서 깜짝 놀란 적도 있었다.

몇 년 전 만해축전 전야제에서 스님께서 김남조 선생님 손을 잡고 무대에 오르더니 “10년 후에 우리 결혼합시다.” 하셔서 참석자 모두를 한바탕 웃게 한 적이 있다. 그 후 김남조 선생님이 무슨 상을 타게 되셨었데 나에게 전화하시더니 “약혼자가 상을 타는데 꽃다발이라도 준비해야 안 되겠나. 지헌이가 꽃다발 하나 준비해 온나.” 하셔서 꽃다발을 준비해 드린 일도 있었다. 

이제 와 밝히지만 스님께선 해마다 명절이면 김남조 선생님께 명절 선물을 보냈는데, 그 심부름을 나에게 시키셨다. 스님이 입적하시자 김남조 선생님도 충격을 받으셔서인지 스님이 그렇게 아프셨다는데 말 좀 해주지 그랬냐고 나를 나무라셨다.

 

언젠가 스님께서 “김지헌이 이름 지어줄까?” 하셔서 송구하기도 하고 감사해서 “예, 감사합니다.” 했다. 마침 그해 여름 만해축전 때 신달자 선생님이 유심작품상을 받게 되어 몇 사람이 축하 겸 만해마을에 갔다. 나는 해마다 하안거 동안거 해제 법회에 참석해 왔으므로 그때까지 4일간 만해마을에서 숙식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 내 입장을 헤아린 스님께서는 며칠씩 만해마을에서 하는 일 없이 있을 순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인제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님의 침묵’ 백일장 심사를 하도록 배려해 주셨다. 그 백일장에서 류미야 시인이 장원했던 게 생각난다. 스님의 그런 마음 씀씀이가 너무나 감사해서 더욱 회한이 남는지도 모르겠다. 

그해 하안거 해제 법회 날 나는 스님으로부터 ‘선래(善來)’라는 법명을 받았다. ‘잘 왔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이름대로 잘 와서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스님이 보면 뭐라고 하실까. 

 

스님은 경상도 사투리가 심하신 편이라 전화를 하시면 가끔 잘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한번은 스님이 전화하셔서 인사동에 유명한 만둣가게가 있다던데 만두 좀 사 오라고 했다. 나는 삼각선원에 만두 먹으러 오라는 말씀으로 잘못 알아듣고 빈손으로 갔더니 스님께서 내 손을 보며 “만두는 사 왔나?” 하시는 게 아닌가. 민망해서 얼른 가서 사 오겠다고 했더니 말리면서 “여기도 만두는 있다. 삼각선원에 있는 거로 먹자.”고 하셨다. 만두 공양은 못 올리고 절에서 끓인 만둣국만 얻어먹고 온 셈이 됐다.

이렇게 늘 받기만 하고 아무런 보답도 해드리지 못했는데 작년 5월 26일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전갈을 듣고는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나흘 전 부처님오신날에 뵈었을 때 목소리가 쩌렁쩌렁 힘이 넘쳐서 돌아가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 하던 터였다. 그러나 돌아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었다. 스님은 오랫동안 염불도 하시고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 거명하면서 축원과 덕담을 해주셨다. 그때 나는 기분이 이상해서 마지막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두었다.

스님은 뵐 때마다 죽음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도 어떤 때는 농담처럼 흘려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무엇보다 더 좋아진 시로 제5 시집을 출간해 자랑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아쉽다.

스님은 아마도 마지막 열반의 시간마저도 이미 가늠하시고 좋은 날을 택하신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천진난만한 본래의 모습으로 가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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