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나 한번 하이소 

지리산 골짜기 마천에서 ‘80년대 시조’ 동인과 ‘오류’ 동인이 만난 것은 1996년 늦가을로 기억된다. 시조단의 막내둥이였던 1980년대 출신들이 시조의 당면문제가 시급하다는 위기의식으로 마련한 자리였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열린시조》라는 잡지였고 그 책임을 모두 다 내가 져야 한다는 중론에 엉겁결에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한술 더 떠서 이왕이면 반연간지보다는 계간지를 해야 한다는 고재종 시인의 꼬드김에 계간지로 겨울에 창간호를 발간하게 됐다. 

당시 나는 광주여대에 재직하고 있었고 고재종, 신덕룡과 같이 잡지 《시와 사람》을 시작한 터였다. 출간은 강경호 시인이 맡기로 했다. 이와 아울러 현대시조 100인선의 100권 시집 간행 계획을 확정하고 이를 위한 준비 작업을 하면서 바쁘게 보낼 때였다. 그런데 의당 100인선에 들어가야 할 조오현 스님의 원고가 늦어지고 있었다. 연락도 잘 되지 않을 시절이었지만, 그렇다고 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오래전에 출간되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무산심우도》라는 시집을 어렵사리 구해 그것을 워드로 작업하여 스님께 보내드렸다. 

그러고 나서 얼마가 지나 스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작품도 쓰지 않는데 100인선에서 빼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노라고, 이게 제 개인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100인선 편집위원회의 결정이라고 얘기해 드렸다. 통화 끝에 지방에서 그 힘든 일을 하니 식사라도 하라고 《열린시조》 구독계좌 번호로 돈을 조금 부친다는 거였다. 확인해보니 금액이 많아 깜짝 놀랐다. 이름을 절대 밝히지 말라고 당부해서 산중시인(山中詩人)으로 알리기만 했다. 100권의 시조집 간행 때문에 작고(作故) 문인들의 원고 작업과 평론비 등 개인적으로 기천 만 원의 돈이 들었지만 유일하게 도움을 받은 것은 스님에게서였다. 

비싸게 샀다고 억울해 말어 

스님은 만나면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다. 한번 시작하면 한 시간은 예사였다. 그중에는 더러 중복되는 얘기도 있었는데, 스님의 독특한 경제론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얘기는 내게 삶의 방식을 바꾸어준 하나의 계기가 됐다. 

한 절에 큰 스님이 한 분 있었어. 절 소유의 못쓰게 된 밭을 수천여 평 가지고 있는데 이 스님이 인부를 사서 하루에 얼마씩 일당을 주고 그걸 개간을 시켰어. 기계로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은 더디고 품삯은 많이 들어갔지만 소출이 별로 신통찮은 거야. 그걸 사 먹으면 돈도 얼마 안 들고 좋은데 그걸 부러 시킨 거야. 그 인부들이 품삯 받아먹고 사는 것이 큰 거야. 생각해봐. 그 인부 먹고살기 위해 그 돈을 쓰는 거 아녀. 쌀도 사고 배추도 사고 무도 사고 고춧가루도 사고 그러면 그 쌀을 가져오기 위해 트럭 운전사도 살고 그 쌀이나 배추 키운 농부도 살고, 그래서 돌고 돌아 다 먹고 사는 거 아녀. 

지엽아, 이것 100원짜리 지갑인데 장사치한테 속아서 1,000원에 샀다고 쳐봐. 얼마나 억울하겠어? 그러지 않것어?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도 억울할 일 아녀. 그 장사치 나한테 팔아먹고 살고 그 돈이 돌고 돌아 다른 사람 다 먹게 하는 것이니 그것 생각하면 내가 조금 비싸게 샀다고 해도 그리 억울할 일 아니제.

사실 스님의 말이 옳지 않은가. 그 뒤로 나는 물건을 사고 나서 그것이 필요한 물건이라면 조금 비싸게 샀다고 해서 억울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기 이전에는 나는 주로 물건값을 흥정하면서 깎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뒤로는 잘 깎지 않고 산다. 

없는 게 가장 좋은 거여 

중학교 친구를 보기 위해 오랜만에 해외 나들이를 했는데 싱가포르에 도착한 날 스님께서 문자를 보내왔다. 지금 어디에 있냐고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한국에 도착해서 바로 찾아뵈었다. 외로울 때가 가끔 있다는 거였는데 그런 말씀을 좀처럼 하지 않으셨는데 말씀 중에 외롭다는 얘기를 하셨다. “외로움이 그냥 외로움이 아니고 절벽 같은 외로움이야.” 그 말이 두고두고 나에게 맺혀 왔다. 그 절벽 같은 외로움이 눈에 잡힐 듯이 다가왔다. 

이를 데 없이 중요한 것을 다 흩어버릴 정도로 광활하면서도 대범하기 그지없는 분이 진솔하게 그런 말을 하시다니. 

스님은 경제론과 더불어 《열린시학》 《시조시학》 거기에 《한국동시조》까지 잡지를 발행하는 것을 보고, 또 대형 전시회나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을 보고 느닷없는 얘기를 하셨다.

지엽이는 잡지에 대학교수에 출판사에 너무 하는 게 많아. 그런데 본래 가장 좋은 것은 그대로가 좋고, 없는 것이 좋은 법이야. 행사를 하려고 애쓰지 마. 안 하고 없는 게 가장 좋은 거야. 문학 잡지, 그것도 다 쓸데없는 짓거리야. 작품이 최고지 작품만 남는 거야. 봐봐, 《현대문학》 누가 했다는 거 그것 누가 알아줘? 발행인이고 주간이고 다 그거 필요 없어. 하지만 좋은 작품 남기면 그 사람은 알아주잖아.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은 중중하다 

이승휴문화상을 수상하시게 되어 축하드린다는 문자에 스님은 답을 보냈는데 소회를 이렇게 밝히셨다 

이지엽 교수님 

오래 살면 흉한 일만 만나게 된다는 고인들의 말이 떠오릅니다. 죽을 일만 남은 노골이 상을 받는다는 언론 보도와 지인들의 전화를 받고 할 말이 없어 알았다 알았다 했습니다. 참으로 민망합니다. 내일은 추석이군요. 설악무산 합장 (2016년 9월 14일 오후 5시 35분) 

물론 상금 3천만 원은 다 기부를 하셨다. 상을 받으러 삼척에 다녀온 다음 다음날 또 이런 문자를 보내오셨다. 

옛사람이 오래 살면 험한 꼴을 많이 보고 강하다 했습니다. 다 늙어빠져 상 받으러 간다고 생각하니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은 중중하여 독주를 한 병 했더니 아직도 정신이 이몽가몽합니다. 허물이 있더라도 이해하여 주십시오. 사진과 축화 보았습니다. 내설악 무금선원에서 설악무산 합장 (2016년 10월 5일 9시 52분)  

스님은 평소에 시단과 시조단을 위해 크고 작은 일을 많이 하셨다. 문학상도 많이 제정해 그 많은 상금의 치다꺼리를 혼자 다 하셨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름 넣기를 싫어하셨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셨다. 그런 분에게 상을 드렸으니 얼마나 황감하셨으랴. 

어미 새처럼 그냥 그렇게 

스님은 가족을 귀하게 여겼다. 사람의 인연도 그래서 소중하게 여겼다. 가족들을 다 불러내서 밥도 사주셨다. 한 번 보면 잊지 않으셨다. 어미들이 새끼를 사랑하고 지아비가 지어미를 사랑하는 것을 이렇게 보여주셨다. 

그냥 그렇게 먹이를 물고 

새끼들 보금자리 찾아서 가는 

어미 새 어미 새처럼 

그냥 그렇게 

졸작 〈일념만년거〉입니다. 모든 어미들이 새끼를 사랑하는 마음은 일념이고 똑같습니다. 우리는 모든 어미들이 자기 새끼들을 기르는 일념으로 살아갈 수밖에. 

이지엽 교수가 무산 스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나 무산 스님이 이지엽 교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일념일진대 우리는 그냥 그렇게. 설악무산 합장 (2017년 7월 1일 오전 2시 45분) 

며칠 동안 먹지도 못하고 타미플루 수액주사도 못 맞고 세훈 어미가 중앙대 응급실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문자를 보내셨다. 

 

마음 아프다.

이지엽 교수 안사람 처음 보고 이지엽 장가 잘 갔구나, 처복이 있구나 속으로 생각했는데. 보고 싶은데. 밥을 못 먹다니 밥 못 먹으면 그까짓 회장 다 버리고 내자 간호하세요.

나는 식도 절반을 덜어내고도 죽기 싫어 이놈이 죽었나 살았나 눈을 끄먹끄먹거리면서도 밥을 먹어요. 마누라 간호 잘하세요. 돈 명예 다 필요 없어요. (2018년 1월 14일 오후 9시 21분)

스님은 늘 그랬다. 가족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지아비 지어미로서 인륜의 대사를 사람됨에 두셨다. 스님의 〈어미〉라는 시가 그렇고 〈일념만년거〉라는 시가 그렇다. 당신 앞으로 된 인연을 끊고자 부단히 애쓰면서도 대중에게는 은연중 꼭 해야 할 일을 인연에 두었다. 작년 초파일 무렵에 스님을 생각하며 작품을 썼다. 발표도 하기 전에, 미처 스님을 뵙기도 전에 열반에 드셨다. “절벽같이 그리운 날”이란 표현을 도용했다. 

주야로 긋지 않고 내려오는 개울물소리/ 잔잔한 율조의 마르잖는 물소리/ 눈 오는 적막한 밤도 얼음장 밑 그 물소리 

살 만한 절도 있고 힘든 절도 있고/ 잘 쓴 놈도 있고 못 쓰는 놈도 있어/ 세상은 널따란 운동장, 잘 나가봐야 그 안이지    

조금 손해 봤다고 탓할 일 아니여/ 내게 그걸 팔아 그 장사치 먹고 살고/ 그 이윤 돌고 돌아서 다 먹고 사는 일이니 

하려고 애쓰는 것 애초보다 더 못하고/ 갖다 두는 것은 없는 것보다 못한 법/ 잡지 거, 쓰잘 데 없다 작품만이 남는 거여. 

중하다는 작품에도 이제 욕심 다 버리고/ 귀 먹먹 돌아앉은 백담 말간 돌부처여/ 조용히 웃으시던 모습 절벽같이 그리운 날

— 졸시 〈백담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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