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너무도 곤고하여 자살에 이를 사람도 뒷동산에 올라 지친 몸을 기대고 잠시 숨을 돌리며 멀리 바라볼 큰 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또 그럭저럭 살아갈 힘을 얻는 법이다. 모든 기운과 힘을 남김없이 소진했는데 길마저 잃은 듯하여 털썩 주저앉은 나그네에게 그래도 먼 창공에서 별만 맑게 빛난다면, 또 지친 몸을 이끌고 가야 할 길을 걸을 수 있다. 무산 스님은 필자에게 기댈 큰 나무였고 또 별이었다. 

스님을 처음 뵌 것은 설악의 골짝으로 와당탕탕 냇물이 쏟아지며 번뇌 망상을 헤집어놓고 새들의 노랫소리마저 바위에 스며드는 적멸을 느끼던 한여름날 백담사였다. 의상만해연구원 12명의 상견례 자리였다. 절을 드리고 어떤 화두를 내리실까 기대감을 가슴 가득 품고서 스님을 바라보았는데, 스님에게서 들은 첫 말씀이 “난 돈 쓰는 재미로 산다.”였다. 속으로 ‘아니! 큰스님이라더니 땡중 아니야?’라고 반문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스님이야말로 돈에서 교환가치와 증식(增殖)과 물질적 욕망은 쏙 빼버리고 사용가치만 남기는 반자본주의적 주체이자 삼의일발(三衣一鉢)만 빼고는 무소유를 실천하는 진정한 불제자임을 알게 되었다. 스님의 돈은 걸인과 걸승, 고통받는 서민, 가난한 문인과 학자들에게는 감로수였고, 높이 있는 자에게는 죽비였다. 

그 품은 너무도 넓어 진보와 보수의 차이도 녹였고 이웃종교인도 똑같이 품었다. 낙승(落僧)이라 늘 스스로를 깎아내리지만, 거칠 것이 없는 원통무애(圓通無碍)의 도인이었다.

 

원효의 화쟁사상으로 서로 대립적인 형식주의와 맑스주의를 종합하여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이론서인 졸저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를 탈고한 1999년에 이르기까지는 필자는 스님이든, 불교학자든 불교 관련 인사는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불교대학은커녕 철학에도 문외한인 문학도였고, 단 한 분의 스님도 모셔 보지 못한 기독교도였다. 향가를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독학으로 불교를 공부하며, 변방 중의 변방에 있었다. 

이 미천한 학궁이 참 아름다운 스님과 불자 지식인들과 도반으로 지내거나 《불교평론》의 편집위원장이나 불교단체의 대표 자리에 오르고, 조계종의 《한글법요집》에 들어갈 의례문의 번역까지 맡게 되고 무엇보다도 부처님을 따르게 된 것은 가히 기적이다. 그 중심에는 무산 스님이 계셨다. 졸저를 읽고 참으로 미천한 학궁을 《불교평론》과 의상만해연구원에 불러주었고 인연이 닿을 때마다 과찬을 하며 홍보대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스님의 사랑을 넘치게 받던 나머지 몇 차례 응석을 부렸다. 그럴 때마다 스님은 큰 우주였고 필자는 작은 웅덩이였음을 절감하였다. 초반에는 의상만해연구원의 연구원들에게 만해축전을 맡기면서 ‘여러분은 집현전의 학사 노릇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루는 만해축전에서 참여단체들이 지원금을 유용하는 사례를 말씀드리고 정화를 요청한 적이 있다. 스님은 “나도 다 안다. 벌과 나비가 꿀이 있기에 꽃으로 날아드는 게다. 학자들 공부하느라 고생하는데 밥값에 좀 보태라고 한 거다.” 

언젠가는 고광영 사장과 함께 찾아가서 〈조선일보〉와 만해축전을 함께 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다. “꽃만이 아니라 돌을 던진 사람도 사랑해야 불자(佛子)인 게다. 〈조선일보〉가 고은 시인이나 이영희 교수 같은 진보 인사에게 상을 주는 것이 더 아름답지 않더냐?” 

 

《불교평론》 폐간 사태 때는 스님에게서 아버지를 보았다. 윤창화 선생이 《불교평론》에 경허 스님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다. 사실에 입각한 학술적인 글이었지만, 경허 문중에서는 서운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무렵 나는 10여 년간 해온 불교평론 편집위원을 쉬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지만 잡지 폐간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나는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성명서를 냈다. 얼마쯤 지나서 편집위원장이던 허우성, 전 편집위원장이던 조성택 교수 등과 함께 복간을 간청하러 갔다. 나는 “스님께서 저보고 언젠가는 편집위원장을 한 번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잡지를 속간해야 제가 편집위원장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스님은 “엄마하고 딸하고 싸우면 누가 이기는가? 딸이 이긴다. 대신 엄마는 지고도 돌아서서 웃는다.”라고 말씀하셨다.

필자가 불교개혁 운동, 특히 총무원장의 연임 반대 운동에 매진하는 바람에 스님에게는 곤란한 상황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말리거나 자제하라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 진보적 지식인으로 쌍차, 세월호 등 여러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서도, 잘한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한 적은 없다. 대신 저번에 쓴 칼럼을 읽었는데 잘 썼다고 하시거나 “노숙자들의 아픈 삶 속에 진리가 있다”라거나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진짜 부처야”라고 말씀하며 에둘러 격려해 주셨다. 

하루는 오라 하더니, 너무도 황송하게 손수 송이밥을 지어서 주셨다. 고생하는 듯하여 밥이나 먹이려고 불렀다고 했다. 처음 《유심》을 복간했을 때도 그랬다. 주간도, 편집위원도 스님이 모두 겸했다. 고광영 사장에게 전화하여 이번 호에는 아무개에게 청탁하라 하고는 한 달 뒤에는 지명도가 아니라 가난한 정도에 따라 원고료를 파격적으로 책정했다. 명색이 국문과 교수인 필자도 스님의 기억력 앞에서는 혀를 내두르며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시인의 이름이 거론되면 과거와 현재의 시풍, 경제적 상황까지 정확히 짚어냈고, 당사자도 잊은 필자의 글에 대해 평가도 했다.

의상만해연구원이 해체된 이후에는 1년에 한 번 정도씩 뵐 뿐이었는데, 지리산의 한 암자에 머물 때 전화가 왔다. 한번 보자는 말씀이었다. 오늘은 후배와 산행 중이라 안 되고 주말에 올라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내가 사는 것이 하도 심심해서 낙승 주제에 술이나 먹다 죽자 하고 곡기를 끊은 지 한 달이 됐어. 그래도 죽지 않길래, 그냥 살기로 했어. 갑자기 이 교수가 생각이 나서 전화했네. 삶이 참 덧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요새 더없이 심심하네.” 그러나 나는 그 심심함을 단 한 자락도 메워드리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기댈 큰 나무와 별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부처님이 스치듯 나타나셨는데 세인이 알아보지 못한 《삼국유사》 속의 한 편 설화인 듯도 하고, 한바탕 좋은 꿈을 꾼 듯도 하다. 낙승이라 했지만 무애도인이었고, 한 마리 벌레라 했지만 우주를 품은 허수아비였고, 성자보다 나은 하루살이였다.        ahurum@hanmail.net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