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5년이 가까워온다. 1996년 가을, 설악산은 단풍이 한창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때 나는 봉정암에서 기도 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른스님이 잠깐 내려오라는 전갈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백담사로 내려갔더니 ‘이제부터 네가 봉정암 책임을 맡아야겠다’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어리둥절한 나에게 스님은 전후 사정을 말씀했다.

“지우 수좌가 외국 가서 포교하겠다고 설악산을 떠난다 한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네가 봉정암을 관리해야겠다.”

“저는 지금 기도 중입니다.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

“어른이 말하면 들어라. 토 달지 말고.”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봉정암으로 올라갔다. 그렇지만 궁금했다. 스님은 어째서 문중의 많은 스님을 놔두고 나에게 그 일을 맡겼을까? 뒷날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전해줬다.

“정념이 갸가 고암 노스님 열반하기 전까지 시봉을 아주 잘했다. 부모도 노망들었다고 버리는 세상이다. 어른을 모실 줄 알면 그걸로 됐다.” 

사실 나는 스님의 직계 상좌도 아니다. 고암(古庵) 노스님의 문하인 용탑선원 성욱(性旭) 화상 앞으로 출가했다. 그런데도 스님은 오로지 고암 노스님을 임종 때까지 모셨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믿으셨다. 그렇게 해서 스님 밑에서 배우며 일한 세월이 25년에 가깝다.   

낙산사에 화재가 난 것은 주지로 부임한 지 보름이 채 안 된 2005년 4월 5일이었다. 인근에서 발화한 산불이 방화선을 넘어 천년고찰 낙산사를 덮친 것이었다. 천재지변이라고는 하지만 책임자로서는 속된 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박복해서 불이 난 것은 아닌지 싶어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었다. 

화재 소식을 듣고 어른스님도 급히 낙산사로 오셨다. 사람들이 ‘천년고찰이 불에 탔으니 얼마나 걱정이 크냐’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자 스님이 하시는 말씀.

“낙산사 불난 것 걱정하지 말고 그대들 마음에 삼독(三毒)의 불 끄지 못한 걸 걱정해라.”

부처님은 상두산에 올라 저녁노을을 보며 ‘그대들 육근(六根)에 탐진치가 불타는 것 같다’는 명법문을 남긴 바 있다. 그런데 스님은 낙산사 화재를 두고 마음의 불부터 끄라고 명법문을 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낙심에 빠진 나를 불러서는 위로와 당부의 말을 잊지 않으셨다.

“걱정하지 마라. 낙산사는 관음도량이다. 중생들은 어렵고 힘들 때 불보살의 원력에 의지한다.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낙산사는 그동안 여러 차례 화마를 만났다. 그때마다 몇 번이고 다시 복원하고 중창했다. 원력을 모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지가 흔들리면 안 된다. 신심과 원력으로 불사를 해라. 나는 너를 믿는다.”

어른스님의 ‘나는 너를 믿는다’는 한 말씀은 무엇보다 큰 힘이었다. 그 말씀을 믿고 10년간 중창불사를 했다. 스님의 신뢰는 낙산사 복원불사의 주춧돌이었다.  

어른스님을 모시고 했던 일 가운데 서울 돈암동 흥천사 불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흥천사는 비구 · 대처 정화 와중에 대처 측이 오랫동안 점유해온 사찰이다. 문제는 대처 스님들이 입적하면서 절이 폐허 지경에 이른 것이다. 대처 스님들이 살던 요사채들은 22가구 60세대가 세입자로 살고 있었다. 

도량정화를 하자면 이들을 내보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무려 100억 원에 이르렀다. 궁여지책으로 종단에서는 사찰 소유 임야 1만4천 평 중 4천 평을 처분하기로 했다. 평당 4백만 원씩이면 160여억 원이 되는데 100억 원은 세입자 내보내는 비용, 60억 원은 복원불사 비용으로 쓰자는 복안이었다. 중앙종회 재정분과에 보고까지 거친 것이므로 집행만 하면 될 상황이었다. 당시 총무원장 특보단장이던 나는 신사동 선불선원으로 어른스님을 찾아뵙고 이 사실을 말씀드렸다. 스님은 단호하게 한마디로 말씀하셨다.

“안 된다! 옛날 종단에서 강남 봉은사 땅 팔아먹고 얼마나 후회했냐. 강북에 그만큼 싼 땅이 어디 있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각하면 안 된다.” 

그렇지만 10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스님은 총무원으로 가서 종단으로부터 기채승인을 받아오면 신흥사에서 적극 돕도록 하겠다고 했다. 종단은 100억 원에 대한 기채승인을 허락했다. 스님은 삼보정재를 수호한다는 원력을 가지고 일하라고 했다. 물론 거액의 돈을 대출받는 일이라서 몇 차례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쨌든 흥천사는 매각을 중지하고 강북의 중요한 포교 거점이 됐다. 흥천사는 이후 요사채 신축과 한옥으로 지은 어린이집 등을 운영하며 착실하게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스님의 결단과 신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낙산사 불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스님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혹시 잘못한 일이 있어 꾸중을 하시려나 했는데 무슨 서류를 준비하라고 했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잡지 《유심》의 발행인이 되라는 말씀이었다. 《유심》은 1918년 만해 한용운 스님이 창간해서 3회를 내고 폐간한 잡지다. 스님은 2001년 《유심》을 시전문잡지로 복간해서 발행하고 있었다. 낙산사 복원불사만 해도 코가 석 자인데 잡지도 문학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잡지 발행인을 하라니 여간 난감하지 않았다. 

“자네는 발행자금만 지원하면 돼. 나머지는 전문가들에게 맡길 테니 걱정 말고.”

‘어른의 말씀이 곧 법’이라 여기는 나로서는 불만이 있어도 다른 이유를 댈 수 없어 머뭇거렸다. 선뜻 동의하지 않는 듯하자 스님은 나를 달래려는 듯 이유를 설명했다.

“낙산사를 복원하는 것은 유형의 절을 짓는 일이야. 그러나 잡지를 만들고 좋은 작품을 싣는 것은 정신의 절을 짓는 일이다. 좋은 시 한 편이 절 한 채 짓는 것 못지않아. 그리고 이 잡지를 통해 많은 시인 묵객과 지식인이 불교와 친해질 수 있다면 그게 얼마나 큰 포교이겠는가.” 

나는 어른스님이 돌아가신 후 수많은 문인과 지식인들이 신흥사로 조문 오는 것을 보고서야 뒤늦게 그 말씀이 허언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쩌다 보니 나는 2005년부터 총무원 사회부장으로 불려나간 이후 재무부장, 총무부장 같은 종단 살림을 챙기는 사판(事判)의 길을 걷고 있다. 어느 종교도 다 그렇겠지만 종단일이라는 게 복잡하고 어려운 과제가 한둘이 아니다. 언젠가는 사표를 내고 흥천사 복원불사에 전념할 생각으로 스님께 허락을 구했다.

“하긴 종단일이란 잘해야 본전이고 조금만 잘못하면 망하는 길이지.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한다. 자네 일신 편해지자고 물러나는 것만이 잘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자네를 원하는 곳이 있으면 가서 일해라. 그게 자네의 운명이다. 다만 한 가지는 명심해라. 소임자는 남 위에 군림하려 하면 안 된다. 철저히 하심하고 겸손하게 봉사하겠다는 생각으로 해라. 그래야 사판에 가 있어도 망하는 일 없을 게다. 그게 자네가 할 수행이다.”

 

열반하시기 얼마 전에는 만해마을로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

“무조건 화합해라. 시비하지 마라. 본사 주지 우송 스님이 잘하고 있으니 그를 도와 설악산에 말썽이 생기지 않도록, 전국에서도 모범이 되는 산문 되도록 힘을 모아라.”

스님은 그동안 무조건 나를 믿고 낙산사와 흥천사 불사를 맡겨준 어른이다. “나는 너를 믿는다”는 그 한마디를 믿고 여기까지 왔다. 어찌 그 믿음과 가르침을 잠시라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결초보은의 마음으로 스님의 유지를 받들고자 다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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