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뒤집고 산을 거꾸러뜨릴 기량

2007년 한 일간지가 오현 스님과의 대담기사를 실었다. 신문에는 오현 스님이 자신의 시집을 설명하는 모습의 사진도 실렸는데, 한 손에는 담배가, 다른 한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나는 기사 속 오현 스님의 사진을 보고서 옛일이 떠올라서 절로 웃음이 났다.

오현 스님은 내 은사이신 영허당 녹원 대종사와 인연이 깊었다. 오현 스님은 녹원 스님을 깍듯하게 모셨고, 녹원 스님도 오현 스님을 소중히 아끼셨다. 오현 스님이 1970년대에 김천 계림사, 구미 해운사, 상주포교당(상락사)의 주지를 역임한 것도 녹원 스님 덕분이다.

오현 스님이 해운사 주지 소임을 살 때의 일이다. 문안 인사를 갔더니 스님께서는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스님과 환담을 하는데 밖에서 한 여성 신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스님은 한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다.

“스님, 계세요?”

오현 스님은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뒤 여신도에게 합장했다. 물론 합장한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었다. 마루에 서 계신 오현 스님을 여신도가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스님, 손에 든 게 뭡니까?”

여신도의 말에 오현 스님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스님은 태연스럽게 다시 시선을 돌려서 여신도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야가 와 여 있노(이 담배가 왜 내 손에 있노)?”

스님의 태도는 참으로 태연자약했다. 표정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자 오히려 여신도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는 이 일화가 오현 스님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스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대기대용(大機大用)한 마음을 지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바다를 뒤집고 산을 거꾸러뜨릴 기량을 지닌 스님이었기에 일각(一刻)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결코 당황하는 법이 없었다.

이후 오현 스님은 정호당 성준 선사에게 입실한 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신흥사의 법맥을 계승해 중창불사에 매진하는 한편, 시 창작에 전념했다. 스님이 떠난 8교구의 빈자리는 컸다. 손수 이발기를 들고 다니면서 사하촌 코흘리개 아이들의 머리를 깎아주던 오현 스님의 미담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회자되곤 했다.

난마(亂麻) 같은 문제도 묘안을 제시해주던 스님

나는 종단의 부름을 받아 이런저런 소임을 맡았던 터라 종종 오현 스님을 뵐 수 있었다. 3교구에 입실한 후, 오현 스님은 자신의 법호를 주석하는 산 이름인 설악(雪嶽)으로 지으셨다. 설악산의 맹주가 된 스님은 만해사상실천선양회를 설립하고 만해축전을 전 세계인의 축제로 발전시켰다. 

내가 종종 오현 스님을 찾아뵌 까닭은 종단의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때마다 설악산은 별과 달과 구름과 바람이 외따로이 존재하면서도 함께 어우러지는 이치를 보여줬고, 산주(山主)인 오현 스님은 엉킨 실타래와 같은 문제일지라도 매우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묘안(妙案)을 가르쳐주었다.

언젠가 종단의 총무원장 선거를 앞둔 시점에 찾아뵈었을 때 스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했다. 

“이번 총무원장 선거에는 법등 스님이 출마하지 그래요? 스님이 나선다면 내가 팔을 걷고 도우려고 하는데…….”

조계종은 삼권 분립에 입각해 행정부인 총무원, 입법부인 중앙종회, 사법부인 호계원을 두고 있지만, 다른 부서의 수장에 비해 총무원장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런 막중한 소임을 맡기에는 내가 부족함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속내를 밝히자 오현 스님은 못내 아쉬워하셨다. 그러나 가장 믿고 따르는 선배 스님 중 한 분인 오현 스님이 지지해줬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무엇보다도 오현 스님이 나를 총무원장감으로 눈여겨봤다는 것이 가슴이 벅찰 정도로 기뻤던 것이다. 

천애(天涯)의 나래 펴고 만법(萬法) 넘어가신 스님

내가 오현 스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은사이신 녹원 스님의 영결식장에서였다. 오현 스님은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노구(老軀)를 이끌고 녹원 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에 참석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결제 중이었음에도 사리를 수습하는 마지막 시간까지 직지사에 머무르셨다. 

돌아보면 가없는 허공과 같은 마음을 지녔던 터라 스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후덕하게 대하셨다. 하지만 스님은 망자(亡者)에게는 박덕하셨다. 나는 오현 스님이 스님들의 다비장에 간 것을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그런 오현 스님인지라 내 은사 녹원 스님의 영결식과 다비식에서 보인 태도는 매우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는 ‘날이 추우니 그만 내려가시라’고 여러 차례 권했으나, 오현 스님은 내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녹원 스님께서 마지막 가시는 길인데 지켜 드려야지.”

오현 스님은 녹원 스님을 기린 시조 〈청학(靑鶴)〉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백년 님의 원을

황악(黃嶽)으로 두시고서

 

외로시면 날빛 한 자락

즐겨시면 달 하늘을

 

천애(天涯)로 펼쳐진 나래

만법 넘어가십니까.

 

은사스님의 사십구재를 마치고 오래지 않아서 오현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건봉사 다비장에서 나는 오현 스님의 법체를 태우는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주 간의 온갖 법도인 만법(萬法)을 넘어가신 두 스님을 마음속으로 기려야 했다. 

오현 스님은 고준(高峻)한 문체의 ‘직지사 기행초 연작시’를 7편이나 남기셨는데, 나는 재주가 미천해 오현 스님을 위해 남길 게 없으니 스님의 진영에 일주향을 사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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