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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텅 비었다-큰스님 떠나시고 한 해
[78호] 2019년 06월 01일 (토)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지난 한 달 사이에 큰스님이 세 번 꿈에 나오셨다. 

한 번은 마치 작은 불상처럼 어둠 속 멀리 꼼짝 않고 서 계셨다. 엄지손가락만 하게 보였으니 어떤 표정을 짓고 계셨는지 알 수 없다. 또 한 번은 좀 더 가까이 계셨다. 고개를 숙이고 계셨고 사뭇 엄숙해 보이셨다. 나머지 한 번은 한 일주일 전이다. 모로 누워 계셨는데 어깨가 몹시 아프신 듯했다. 두어 번 돌아누우시며 통증을 이기려고 애쓰고 계셨다. 나를 향해서는 세 번 다 아무 말씀 없으셨다.   

내가 처음 큰스님을 만난 것은 아마도 2000년 봄이었던가 한다. 충북대학교 시간강사 시절이니 경력증명서를 떼어보면 언제쯤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최동호 선생께서 백담사에 올 수 있느냐 하셔서 강의가 청주에서 네 시 반쯤 끝나는데, 갈 수 있겠다 말씀드렸다. 버스를 몇 번을 갈아타고 백담사 아래 주차장 차단기 있는 곳까지 갔을 때는 벌써 밤 열 시는 되었다.

산골에서는 이미 한밤중이어서 절에서 차를 내려보내 주었고, 절에 올라가 보니 웬 괴승 같은 분이 선생과 함께 계셨다. 이 밤에 여기까지 찾아온 것도 장한 일이라 하셨다. 재미있는 이야기들 끝에 잠에 들 때가 되었는데, 큰스님은 문득 내 이름을 써서, 민호는 나와 함께 자자, 하셨다가, 아니다, 가서 저들과 함께 자라, 하고 말씀을 거두셨다. 그때 나는 일순 당신의 외로움을 엿본 것도 같았다. 나중에도 큰스님은 종종 외로워 보이셨지만, 그 외로움 때문에 당신의 위의를 스스로 허무는 ‘틈’은 보이지 않으시려 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방금 생각난 것인데, 그날 잠깐 나를 당신의 거처에서 함께 자도록 하려고 하신 것은 당신의 외로움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무렵 내가 앓고 있던 지독한 외로움을 보신 까닭이 아니셨던가 한다. 대학원은 다른 사회와 꼭 같은 정글이었고, 나는 그 정글에서 상처받고 포효하는 한 마리 야수였다. 문단에 나온 지 여러 해 되었지만 문단이라는 사회 역시 대학원과 같았다. 나는 사랑 대신에 어둠을 보았고, 겪었고, 삶의 이상과 나 자신이 처한 상황의 괴리 속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날 밤 큰스님은 내 ‘처절한’ 부족함과 어리석음에 깊이 감심되셨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 때 그분이 베푸시는 사랑이나 ‘상’ 같은 것은 단지 부족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구해주는 한갓 방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큰스님은 ‘구부러진 나무’의 비유를 즐기셨다. 저 설악산 나무들을 보아라. 곧고 길쭉하게 잘 생긴 것들은 모두 다른 데 쓰이고 없고 산을 지키는 것은 못생긴 구부러진 나무들 아니냐.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 않으냐. 이 말씀을 당신은 여러 가지로 조금씩 바꾸어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달리 말씀해 주셨다. 그 사람이 세상에 쓰이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것 같을 때는 산을 지키라고 그러는 것이라 하셨고, 또 잘난 사람에게는 그 잘남에 만족지 않도록 경계해 주시는 말씀으로도 쓰셨다. 이 ‘구부러진 나무’의 비유야말로 큰스님의 여러 말씀 중에서도 당신의 삶 자체로부터, 산 경험으로부터 얻은 깊은 깨달음이 담긴 말씀이 아닐까 한다. 

 나는 어리석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은 사람의 하나일 것이다. 자기 세계 안에 파묻혀 있음이 이보다 더할 수 없어, 늘 고립을 자초하고, 이상을 표방하되 비루한 욕망에 시달리기 끝이 없다. 편벽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한번 아니다 마음먹으면 절대 타협을 안 하려는 까닭에 나로서는 그것이 맞되 남들 눈에는 하나도 옳은 점이 없는 것이 많다. 비좁은 틈에 끼이고, 날카로운 모서리 위에 서고, 위태로운 낭떠러지 끝에 서서, 나는 그래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노라고 자위하기를 끝이 없다. 이런 행태가 이어진 끝에 거금 8, 9년 전에는 남들 모르는 마음의 병이 깊이 들어 있었다.

2013년경, 그때 나는 운전면허 취소 상태로 신촌역에서 서울대입구역까지 전철을 타고 다니며 핸드폰으로 소설을 쓰고 있었다. 나중에 《연인 심청》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된 나의 첫 ‘공식’ 소설이 그렇게 써졌다. 그해 유월 초쯤 큰스님 뵐 기회가 있었다. 담소를 나누던 중에 나도 모르게, 스님, 제가 소설 한 편 연재해 드릴까요?, 했다. 무슨 소설이냐고, 한번 보내보라 하시기에 그때부터 휴대폰 장문 문자 메시지 기능을 사용해서 쓰던 소설을 한 회 한 회 연재해 드렸다.

200자 원고지로 따져 6,700매쯤 썼을 때다. 그로부터 쓰고 보내 드리는 나날 끝에 마침내 8월 말쯤 몽골에 가서 소설 초고의 끝을 보았다. 큰스님께서 간간이 보내오시던 소감의 문자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중에서도, 그거 곡진하다, 하고 한 문장 보내주신 것도 있다. 나중에 소설이 완성된 것을 보시고 꼭 영어로 번역하라 하셨건만 아직도 그 분부를 이행하지 못했다. 외국 사람이면 반드시 새롭게 볼 것이라 하시면서, 당신께서 도와주시겠다고도 하셨건만. 그러나 이 소설에 관해서라면 나는 당신께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얻어낸’ 셈이다, 남들 모르는 부끄러운 사연과 더불어.

한번은 새로 지은 흥천사에 계시던 큰스님께서 오늘 오라 하셨다. 갔더니 검찰총장과 ‘독대’를 하고 계셨는데, 감히 내가 합석할 자리는 아닌 듯했다. 물러가 한참 기다리니 같이 공양을 들자 하셔서 다시 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다. 손님이 떠난 후 당신은 심기가 편치 않아 보이셨다. 그 무렵 〈한겨레신문〉 한 면에 걸쳐 인터뷰를 하시면서 정부의 행태에 관해 날카로운 비평을 가하신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큰스님은 선승들이나 고집스러운 승려들 보기에는 위태로울 정도로 세속에 가까이 계셨다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이 좌다 우다, 진보다 보수다 갈라져 있을 때 당신은 한편으로 〈조선일보〉와 함께 만해축전을 이끄시고, 다른 한편으로 김근태 의원 같은 분을 아끼시고 ‘작가회의’ 사람들을 기꺼이 만나 도움을 주셨다.

세상 떠나신, 작가회의 이사장이시던 이문구 선생과 함께 백담사 앞 시내에서 물놀이하던 기억이 난다. 신경림 시인을 선생이라 늘 깍듯이 높여 응대하시고 김남조 시인을 맞아 ‘손잡고 오르는 집’에 함께 가자던 당신이셨다. 정치적 당파와 종교의 차별을 넘어 큰 하나 이루는 세계를 늘 꿈꾸셨다. 세상에 절대 진리란 없다는 것, 사람들이 믿는 진리라는 것도 그 이름이 진리일 뿐임을 명확히 깨닫고 계신 분이셨다. 내 앞에서 손수 찻잔과 밥공기와 컵을 움직이시며, 그릇이란 어떤 그릇도 본디 큰 것 앞에서는 작고 작은 것 앞에서는 클 뿐이라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기만 하다.

큰스님 떠나신 지 벌써 일 년. 당신이 아무것도 남겨 놓은 것 없이 가셨으니, 가셔서 더없이 평안하시리라 생각한다. 덕분에 나의 세상은 텅 비어 버렸다. 여기 이 자리에 당신의 그 무애한 자유와 웃음을 제대로 기록해 두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긴다. 아직 나는 당신께서 이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기꺼이 오셨다 가신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rady@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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