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隨處作主)’. 내 사무실 정면에 걸려 있는 액자의 글이다. 임제 선사의 말씀으로, 국전 서예 부문 심사위원장을 지낸 청남 오제봉 선생이 쓴 글씨다. 25년 전 강원도 설악산에서 무산 스님이 나에게 주셨는데, 그때부터 수처작주는 나의 좌우명이 되었다. 

‘어디 가나 주인이 되어라.’ 나는 모든 일에 주인 의식을 갖고 일하고자 한다. 오현 스님이 이 글을 나에게 주셨을 때는, 어디 가나 무엇을 할 때나 주인 된 자세로 정치를 하라는 말씀이었을 것이고, 나는 이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다. 

1993년 봄, 광명에서 보궐선거로 당선된 나는 당시 설악산에서 쉬고 있던 최형우 의원을 찾아갔다가 무산 스님을 만났다. 무산 스님은 나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대해 주셔서 그 뒤로 백담사를 수도 없이 찾았다. 어느 때는 밤새껏 곡차를 드시면서 말씀해 주셨는데, 나는 혼절할 정도로 말씀에 귀 기울였다. 

2007년 나는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백담사를 거쳐 봉정암까지 올라갔다 내려와서 한 결심이었다. 고민도 많이 했지만, 그때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이 무산 스님이 주신 말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진일보(進一步)’하라는 말씀이었다. 

“손학규, 용기를 가져라. 경기 나오고 서울대 나온 놈들 배짱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한다. 백척간두에 진일보해라. 한 발 자국만 앞으로 내디디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데, 바로 그때 앞으로 나가라. 썩은 동아줄 잡고 살겠다고 낑낑대는데, 탁 놔라. 그런 배짱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한다.”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새로운 정치의 길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기독교인인데 절에 많이 갔다. 절에서 잠도 많이 자고, 절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했다. 전남 강진에서는 백련사에서 2년을 살기도 했다. 많은 큰스님들을 뵈었지만, 오현 스님이야말로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다. 용돈도 많이 주셨다.

무산 스님은 머리가 무척 좋고, 세상사에 밝아, 절집 살림에도 능한 경영 솜씨를 발휘한 분이셨다. 

전두환 대통령이 어려울 때 백담사에 거처를 마련해 주셨지만, 전두환 대통령을 보지는 않으셨다고 한다. 중광 스님도 모셨다. 백담사에서 매년 개최한 만해축전은 세계적인 문화행사로 발전했다. 만해대상을 제정해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적인 인사들에게 시상을했다. 매년 만해축전에 참석하는 것은 나에게는 커다란 영광이었다. 

무산 스님이 곡차를 즐기신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스님은 당신이 머리가 너무 좋아 제정신으로 살면 나쁜 짓을 많이 할 것이기 때문에 술에 취해서 산다고 농담을 하셨다. 항상 그렇게 자신을 낮추시는 것이었다. 생신이라고 축하 전화라도 드리면 ‘중한테 생일이 어디 있느냐’며 꾸짖으셨다. 스스로를 ‘스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다. 

항상 어려운 사람,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공경하셨다. 밥하는 보살님들, 청소미화원들부터 챙기셨다. 정치인에게도 모든 사람이 한 표를 가졌다는 사실을 중시하라고 말씀하셨다. 정치인으로서 새겨들어야 할 첫 번째 경구였다.

스님은 나의 아내를 좋아하셨다. ‘손학규는 아내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못난 남편 만나 보살이 고생 많다’고 하시며 아내의 어깨를 두드려 주시곤 했다. 

스님의 시집 《아득한 성자》에는 내 아내에게 주신 시가 있다. 〈떠 흐르는 수람(收攬)-손학규 애처 이윤영 여사에게〉라는 시다. 오현 스님이 쓰신 시 중에 사람 이름을 넣어 헌정한 것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고 한다. 영광일 뿐이다.

2010년 봄으로 기억된다. 춘천 대룡산 자락 거두리에 있는 농가에서 칩거할 때 스님이 오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다 집주변을 쭉 둘러보시며 한 말씀 하셨다. “대룡산에 오르고, 닭 키우고, 텃밭에 푸성귀 키우고 있으니 얼굴도 편안해 보이고 좋다” 하셨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으셔서 눈을 감고 한참을 계시더니, “이 자리는 절터 자리야. 터가 너무 편해. 중이 될 거면 몰라도 빨리 나가. 나라도 어지럽고 할 일도 많은데……” 

스님의 뼈있는 한 말씀 때문이었을까? 몇 개월 후 칩거를 마치고 나와 민주당의 대표로 출마해 당선되고 정치를 재개했다. 아마도 큰스님의 눈에는 손학규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수처작주’ 하라고 일침을 주신 것 같다. 

매사에 거침이 없고 오직 자유로웠던 무애(無碍)도인 큰스님! 제가 가는 길을 지켜봐 주시고 가피를 내려주소서. 

“마음껏 살아봐! 백척간두에 진일보 해!” 하고 다시 한번 저를 꾸짖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소서. 

부디 불국정토에서 평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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