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중의 자랑이자 한국불교가 낳은 큰 선지식 설악무산 사형님과의 만남은 1977년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사스님께서 열반에 드시어 문도 중에 연장자인 사형 오현 스님을 신흥사 주지로 모시게 되었고, 내가 총무 소임을 맡았다. 

우리는 주지와 총무로 이 년 반 정도 동고동락했다. 넉넉지 않은 절 살림을 꾸리다 보니 힘든 일도 있었지만, 사형님과 함께할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 후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만나곤 했지만, 그렇게 이어온 인연이 삼십 년이 넘는다. 삼십 년의 세월 동안 사형님의 외연과 정신적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오현 스님은 강남스타일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외출할 때면 ‘옷고름 잘 매라’는 나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던 스님에 대한 인상이다. 나는 그때마다 불경한 사제가 되어 “시님, 옷고름 반듯하게 매세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형님은 고쳐 맬 생각이 전혀 없었다. 뭐든지 반듯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와는 반대였다. 사소한 옷고름 매는 것조차도 자신의 생각대로 할 만큼 그는 세상 틀에 갇히기를 거부했다. 

사형님은 정말 당신 스타일로 일생을 사신 분이다. 나는 강남스타일로 살다가 가신 분이라 하고 싶다. 사형님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하고도 곡차 한잔을 나누곤 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곱추춤을 추어 좌중을 웃음바다로 이끌었다. 소탈하기가 원효 스님 같은 분이기도 하다. 세간에서는 수행자가 곡차를 좋아한다고 허물로 삼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사형님의 심지에 깃든 자유 정신을 본다. 집착을 끊어낸 분에게 곡차가 무슨 대수인가 싶어 신흥사에서 총무 소임을 맡아 두 해를 보내면서 당귀 곡차를 직접 만들어 드린 적도 있다. 허물을 삼는 사람의 눈에는 허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무애도인으로 보였다. 

사형님은 평범한 잣대로는 결코 잴 수 없는 분이다. 수행자의 잣대로도, 선사의 잣대로도 속인의 잣대로도 잴 수 없는 분, 어디에도 걸림 없이 살다간 대선사요 대자유인이다.

한 시대를 앞서간 도인

신흥사 주지를 맡은 사형님은 업무용으로 현대자동차 포니2를 운행토록 했다. 산중의 사찰에서는 차가 필수품이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마음을 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지금은 스님이 운전하는 것은 보편화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세인들의 입살에 곧잘 오르내리는 시절이었다. 깊은 산골에 있어도 사형님의 생각은 앞서갔다. 보존해야 할 것은 보존하고, 새로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사형님 덕분에 심심산골에서 장 보아 나르는 것이 수월했다.

어느 때 서울에 볼일이 있어 상경할 때였다. 서울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였다. 어느 때는 한계령을 넘어갈 때도 있고, 어느 때는 진부령을 넘어갈 때도 있었다. 사형님과 나는 특히 춘천가도를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한참을 달리다가 풍광이 아름다운 강촌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직접 당귀로 만든 곡차를 따라드렸다. 사형님은 곡차 한두 잔에 기분이 좋아져서 ‘지원 사제’라고 불렀다. 

그분 특유의 부름이 있다. ‘지원 사제’ 이렇게 부를 때는 시 한 수가 잘 마무리되거나, 시 한 수를 낭독할 때이다. ‘지원 사제님’ 하고 부를 때는 약간 심기가 불편할 때의 칭호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분이 좋으면 ‘— 님’이라고 부르는데, 사형님은 호칭마저 남달랐다. 

  

곡차 한 잔에 시 한 수

어느 날 곡차 한 잔을 드신 사형님이 나를 불렀다.

“지원 사제, 나 시집 한 권 낼란다.”

사형님은 원고를 내보이면서 시집명을 무엇으로 하면 좋을지 물었다. 그러면서 시조 한 편을 읊었다.

 

비슬산 굽잇길을 스님 돌아가는 걸까/ 나무들 세월 벗고 구름 비껴 섰는 골을/ 푸드득 하늘 가르며 까투리가 나는 걸까

거문고 줄 아니어도 밟고 가면 운(韻) 들릴까/ 끊일 듯 이어진 길 이어질 듯 끊인 연(緣)을/싸락눈 매운 향기가 옷자락에 지는 걸까.

절은 또 먹물 입고 눈을 감고 앉았을까/ 만첩첩(萬疊疊) 두루 적막 비워도 좋은 것을/ 지금쯤 멧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는 걸까.

— 〈비슬산 가는 길〉 전문

 

스님의 초기작품 중에 명작으로 꼽히는 이 시조는 언제 읽어도 가슴이 먹먹하다. 거기에는 온 산하대지의 슬픔과 아련함이 다 녹아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게 좋겠다고 했다. 스님은 그러자며 원고 뭉치를 들고 서울로 향했다. 춘천가도를 달릴 때 사형님은 기분이 좋아 어깨춤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원고 뭉치를 들고 출판사의 문을 밀고 들어설 때는 내 가슴도 참으로 벅찼다. 그러나 첫 시집 제목은 나중에 《심우도》로 바뀌었다. 

사형님은 가난한 집에 태어나 한 입이라도 덜려고 절에 소머슴으로 들어온 이야기를 가끔 했다. 소를 키우는 ‘소머슴’으로 들어온 인연으로 심우도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은 시집의 머리말이 어떤지 읽어봐 달라고 했다. 

제2부는 70년대 초 경허와의 만남에서 얻어진 것들이다. 비구나 시인으로는 경허를 만날 수가 없었다. 동대문 시장 그 주변 구로동 공단 또는 막노동판 아니면 생선비린내가 물씬 번지는 어촌 주막 그런 곳에 가 있을 때만이 경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런 곳은 내가 나로부터 무한정 떠나고 떠나는 길목이자 결별의 순간인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나서 시집 제목을 《심우도》로 정한 속내를 짐작했다. 선사다운 가풍을 보여주자면 서정적인 제목인 〈비슬산 가는 길〉보다는 《심우도》가 더 낫다는 판단이었던 듯하다. 

사형님의 시 〈심우도〉는 이분이 도달한 선오(禪悟)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가를 감히 측량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승속의 경계를 넘어 무애행을 감행했던 사형님. 생과 사, 승과 속, 세간과 출세간의 분별을 일찍이 놓아버렸던 원융무애(圓融無碍)의 정신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알게 되었다. 사형님에게는 세상천지가 공부방이었고,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선지식이었다. 깨닫기는 어렵지만 깨달음을 표현한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리고 깨달음을 세상에 드러내 보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사형님은 자신의 공부를 옛날 스님들과는 달리 ‘한글 선시조’라는 형식에 담아냈으니 그 독창성은 참으로 입이 딱 벌어지는 경지라 할 것이다. 

 

재 한 줌

사형님의 작품 중 도반을 먼저 보내고 마음 아파하면서 쓴 〈재 한 줌〉이라는 시조가 있다. 그때 사형님의 비통한 마음이 지금의 내 마음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조를 다시 읽으며 그리움을 달래고자 한다.

어제 그끄저께 영축산 다비장에서/ 오랜 도반을 한 줌 재로 흩뿌리고/ 누군가 훌쩍거리는 그 울음도 날려 보냈다.

거기, 길가에 버려진 듯 누운 부도/ 돌에도 숨결이 있어 검버섯이 돋아났나/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그대로 내려왔다.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 어느 숲 눈먼 뻐꾸기 슬픔이라도 자아낼까/ 곰곰이 뒤돌아보니 내가 뿌린 재 한 줌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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