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변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無常)은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사람의 인생도 그렇고 직업도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중에서 신문기자라는 직업만큼 무상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는 직업도 흔치 않을 것이다.
사람을 만나고 인터뷰하고 특정 사건을 취재하고 글로 전달하는 것이 신문기자의 ‘하드 적’ 측면, 즉 외견상 떠올릴 수 있는 직업적 특징이겠지만 ‘소프트 적’ 측면, 즉 하는 일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매우 변화무쌍한 것이 신문기자라는 업(業)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기자는 입사하면 일정 기간의 수습 기간을 거쳐 특정 부서에 배치되고 출입처에 배정받는다. 신문사 편집국은 정치부,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등으로 나뉘어 있고 각 부서 안에서 다양한 출입처로 출근하게 된다. 크게 보면 정치부의 경우에는 여당과 야당을 출입하는 기자들이 있고, 경제부에는 다양한 경제부처와 업종별로 상이한 기업군을 출입하는 기자들이 있다. 문화부의 경우에도 출판, 영화, 음악 등 분야별로 다양한 출입처가 있다.
올해 만 35년째 기자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내 또래 기자들 중에서도 꽤 많은 부서와 출입처를 경험했다고 생각한다. 부서로는 정치부만 빼고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거의 모든 부서에서 다양한 출입처를 경험했고, 논설위원을 지내며 사설이 어떻게 결정되고 어떻게 쓰이는지도 경험했다. 지금은 시사주간지와 월간지를 만드는 출판국 분야로 옮겨 신문과는 또 다른 형태의 꽤 긴 글을 쓰고 있다.
흔히 기자들은 ‘출입처의 변화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직업의 변화에 버금간다’라고 말할 정도로 출입처를 옮길 때마다 일의 내용이나 일상의 루틴에서 큰 변화를 겪는다. 이미 해당 출입처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나 후배들의 도움을 받고 전임자로부터 충분한 인수인계를 받는다 해도 어제까지 여당을 출입하며 여당의 입장을 듣고 취재하던 사람이 다음 날 아침 야당으로 옮겨서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다. 출입처마다 쓰는 언어부터 다르고 사람들의 생각이나 업무 방식이 천차만별이니 말이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면 사회부 사건기자로 경찰서를 출입하다가 하루아침에 경제부로 옮겨 한국은행을 출입하다가 또 하루아침에 문화부로 발령받아 작가나 연예인들을 만나는 식으로 변신해 왔다. 잦은 출입처의 변화로 한 분야를 깊게 알고 파고드는 전문성은 갖지 못했을지는 몰라도 정말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을 35년간 만나오면서 그들의 삶과 고민을 전했다고 할 수 있다.
기자의 일 자체가 이렇게 역동적이고 변화의 연속인 것도 있지만 주로 성공한 사람들, 물의를 일으킨(?) 뉴스 메이커들이 취재의 대상이다 보니 취재원들의 극적인 삶도 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했다. 이른바 세속적으로 잘나가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나쁜 뉴스의 주인공이 되어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거나 비난의 화살이 되어 심지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를 옆에서 지켜볼 일이 많았다.
오랜 기간 한 직장을 다니며 직업 자체를 바꾸지 않고 살았지만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나는 ‘모든 존재와 현상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거치며, 영속적인 것은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며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나는 무슨 메시지를 전하는 기자가 될 것인가 하는 진지한 물음 앞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굳이 말하자면 팔정도의 시작인 ‘정견(正見)’, 세상을 바르게 본다는 것은 늘 기자인 내게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보도라는 행위가 진실에 다가가는 여정이라면, 그 길 위에서 내 시선은 과연 바른가, 내 문장은 누군가의 고통을 재료로 삼지는 않았는가. 이런 물음들은 흔들리고 방황하는 나를 잡아주는 성찰의 씨앗이었다.
그러면서 사람을 비난하고 허물을 지적하는 기사보다 칭찬하고 그 사람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원을 세우게 됐고 그것은 지난 30여 년간 기사와는 또 다른 형태의 글쓰기로 열매 맺었다.
한국불교를 세계화시킨 숭산 대선사 평전 《삶의 나침반》이나 대한민국 민주화의 영웅 김지하 시인의 일대기를 그린 《김지하와 그의 시대》 그리고 요즘에는 대한민국 산업화의 영웅인 삼성그룹 고 이건희 회장 평전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평소에 나는 기자의 삶이 ‘만행’을 하는 수행자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건 사고와 만나며 무상을 경험했고 경험하는 시간들이기 때문이다. 요즘 시대는 말 한 줄, 글 한 편이 무력하다는 허탈감이 들 때도 많았지만 말은 씨앗이고, 글은 인연이라는 믿음 속에서 불교는 내 일을 내면의 길과 연결지어 주었다.
만나는 일은 기자의 본질이다. 불교가 말하는 자비(慈悲)도 결국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에서 시작된다. 나는 한때 질문하는 데만 집중했다. 인용할 만한 말을 끌어내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점점 깨달았다. 말하지 않는 부분에서 더 많은 진심이 흘러나온다는 것을. 자비는 공감의 기술이 아니라, 고통의 기척을 알아차리는 감각이라는 것을 말이다.
허문명 / 동아일보 출판국 부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