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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익구, 정토사회를 꿈꾼 민중불교운동의 대부
특집 | 재가불교운동을 이끈 사람들
[78호] 2019년 06월 01일 (토) 이영근 open84000@gmail.com
   

여익구(呂益九, 1946~2012)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변호인〉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게 된 책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공안당국의 주장처럼 용공 서적이라기보다 인문학 도서로서,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사란 대중들이 줄지어 앞으로 나아가는 대열과 같고 역사학자 역시 그 대열의 뒷부분 어딘가에서 앞사람들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다. 다만 대열이 곧바로만 진행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리저리 굽기도 하고 때로는 아예 되돌아오기도 하여, 그때마다 역사가의 눈에 더 잘 보이는 과거의 사건들은 달라질 수 있다.’ 

말하자면 정확히 확인할 길 없는 지나간 시절의 객관적 사실을 규명하려 노력하는 것보다 각기 잘 보이는 사건들에 대한 역사 해석을 통해 삶의 교훈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의미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는 것은 역사가만이 아니라 역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겠다 다짐하고 실천하는 운동가 역시 자신이 참여한 대열이 현재 어디쯤 위치하고 있고 그 길의 끝이 어떻게 귀결될지는 전혀 모르는 채, 다만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 맞추어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불태울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 자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후세에 맡겨두고.

꿈을 찾는 나그네 여익구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한국현대 불교사의 중요한 흐름 중 하나로 민중불교운동이 있었다. 물론 ‘현대 재가불교운동을 이끈 선각자들’이라는 본 특집의 주제에서 볼 때 민중불교가 재가자들만의 운동이었는가 하는 의문은 남는다. 하지만, 실제 재가 신자들 사이에서 맹아가 트였고 그 운동을 본격화시킨 지도자가 한때 승려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환속하여 재가자로 활동한 여익구였기 때문에 별 물의는 없으리라 본다.

그는 1946년생으로 6 · 25 발발 사흘 만에 부친을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형과 함께 어렵게 성장했다고 한다. 1965년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7년 동국대 경영학과에 입학 후 이듬해 군에 입대 맹호부대원으로 월남에 파병되어 14개월 복무하고 귀국해서 만기제대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전장에서의 체험과 당시 월남 불교도들이 정부에 저항하는 모습 등을 목도한 탓인지 1971년 복학한 여익구는 만해사상연구회에 가입 불교 공부에 매진하다 72년 사학과로 전과했다. 그리고 대중들 앞에 뚜렷이 그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통해서였다.

민청학련 사건은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인민혁명당과 연계하여 국가전복을 획책한 반체제운동으로 조작하면서 긴급조치 4호를 발령하고 180명을 구속 기소한 사건이다. 구속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8명은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지 채 19시간이 지나기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건에서 동국대 총책으로 수배를 받다 구속되어 7월 13일 열린 비상군법회의 첫 공판에서 이철 · 유인태 · 김지하 등 9명은 사형, 유근일 등 7명은 무기징역이 선고되고, 20년형을 구형받은 여익구에게는 징역 15년이 내려졌다. 당시 치안본부에 근무하고 있던 여익구의 친형은 그 일로 끝내 경찰을 사직하게 되어 평생 반목하며 지내게 되었다. 

법정의 최후진술에서 재판관을 향해 ‘부처님이 이 자리에서 판결하신다면 죄인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들일 것’이라고 일갈했던 그는 대부분의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검거된 지 9개월 만인 1975년 2월 15일 특별조치로 사면을 받아 석방되었다.

이후 여익구는 불교계도 역사사회의 현실에 동참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하던 고은, 황석영, 고준환, 전재성 등과 공부 모임을 결성해 개운사 대원암에 주석하던 탄허 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다 그 모임이 공안당국에 포착돼 전재성과 함께 다시 3개월가량 구속되기도 했다. 뒤에 ‘민중불교회’란 이름이 붙여진 이 모임의 실체에 대해 전재성은 딱히 명칭도 정한 적 없는 시국 토론회였다고 증언했으며 결국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 무렵 여익구는 제럴드 섹터(Jerrold Schcter)의 The New Face of Buddha를 번역, 제3장 〈민족주의와 불교〉를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게재하고, 남은 원고는 고은에게 맡겨둔 채 법정 스님 소개로 다솔사 효당 최범술 문하로 출가했다. 그 원고는 1979년에야 《불타의 새 얼굴》이란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미국 저널리스트의 눈에 비친 1960년대 격동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월남, 태국, 버마, 실론, 중공, 일본 등 아시아 민중들이 불교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재정립하려는 다양한 노력을 담고 있다. 특히 월남 편에는 당시 73세의 노승 틱꽝득(釋廣德) 스님이 프랑스 식민지배의 산물로 등장한 가톨릭계 정권의 그릇된 불교정책에 대항하여 분신자살로 부당함을 호소하는 장면이 실려 있어 충격을 주었다.

길 없는 길에서의 출가수행과 하산

효당가에 몸을 맡긴 여익구는 효당 스님에게서 《반야심경》 《법화경》 《천태사교의》 등을 배웠다. 특히 《반야심경》의 색즉시공을 해석하면서 “공이라는 거는 그냥 공이 아니라 그게 본질 속에서는 공과 색이 따로 없고 그것이 현실에 나와서는 역사의식이 되는 거다.”라는 스님의 말씀에 탄복했다고 한다. 그런 불교의 자체 해석 속에서 새로운 행동철학을 촉발시킬 수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화엄경》의 53 선지식 이야기나 《능엄경》을 읽으며 본질의 철학적 세계를 현상 위에다 펼칠 가능성을 찾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사실 여익구가 출가를 결심하고 스승을 찾아 구산 스님을 만났을 때는 독재권력과 재벌 위주 정책을 언급하자 ‘너는 세상을 짧게 살아서 모른다’는 말에 실망했다고 한다. 또 경봉 스님을 만났을 때는 아예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 하는 선문답에 어기가 질렸다고 한다. 그에 비해 최범술 스님은 일본유학도 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며 해인사 주지를 지내고 국민대학과 해인대학을 창설하기도 한 분이어서 그런 가르침이 가능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처승이라는 사실이 한계였는데, 남들에게 전하기 어려운 가정사를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이상 공부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에 멱정(覓丁)이라는 법명을 받을 무렵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찾을 멱(覓) 자 고무래 정(丁) 자를 쓴 법명에 대해 고은은 《불타의 새 얼굴》 서문에서 “무슨 개뼈다귀를 찾는 고무래”인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현응 스님은 ‘꿈을 찾는 나그네’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아무튼 여익구는 이후 탄허 스님을 찾아가 은사로 모시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탄허 스님은 흔쾌히 승낙하셨는데, 민중불교회 시절에도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한 질문에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역사의식에 눈뜬 분이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스님 상좌들의 반대였다. 그러자 스님은 평소 교류하던 관상가나 명리학자들 앞에 여익구를 세웠다. “장차 큰 불사를 하겠습니다. 중노릇을 오래 할 것 같지는 않고.” 하는 반응들이 나오자 스님은 “그렇지, 나도 그렇게 보았네.” 하셨다. 그리고는 반대하는 상좌들에게 “내가 책임질 테니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마라.”고 못을 박았다고 한다.

그렇게 탄허 스님을 모시게 된 여익구는 대중들의 따돌림을 피해 처음에는 24시간 스님의 시자 노릇만 했다. 스님은 그에게 《대학》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가 ‘너는 안 되겠다’며 포기하셨다고 한다. 그럼에도 여익구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스님 가르침의 체(體)보다 용(用)에 마음이 쏠렸다고 했는데, 말하자면 불교의 본질적 이치보다는 현상의 응용에 더 큰 관심을 가졌었다는 이야기로 이해된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에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는 승려 생활 내내 불교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을 대중에게 소개하기 위한 번역에 몰두했다. 그렇게 모은 원고의 일부를 엮은 것이 환속한 뒤 1981년 4월 민족사에서 펴낸 《불교의 사회사상》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가 당시 교무로 있던 현각 스님과 뜻이 맞아 1977년 동안거 중 2달간 월정사에서 화엄살림법회를 열기로 했다. 당대 불교계 선지식으로 익히 알려져 있던 탄허 스님이 직접 《화엄경》을 강설한다는 소문에 전국에서 200여 명의 스님이 몰려 법회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때 참여한 이들 중에는 무비 스님, 법산 스님, 비구니 성일 스님 등 불가에서 젊고 유능하다고 이름난 이들이 많았다. 당시 여익구는 당시 눈빛이 남달리 초롱했던 현응 스님이 특별히 기억난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참석했던 스님들과의 교감을 통해 상당한 인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탄허 스님을 모시면서 여익구의 몸에 가장 뚜렷하게 밴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새벽 4시에 기상하여 아침에 한 시간 동안 참선하고 일과를 시작하는 것으로, 환속한 후에도 그런 생활습관은 평생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승복을 벗을 때가 다가왔는데, 1979년 마지막으로 전국을 한 바퀴 돌아보자는 생각에 사복으로 갈아입고 여기저기를 다녔다. 그러다 박남주 시인을 만나러 광주에 갔을 때, 박정희 시해사건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접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서 여익구는 월정사 시절 만난 간호장교 공화춘과 결혼을 약속했다. 그리고 당장의 호구지책 겸 장차 노동운동을 할 생각으로 구로공단의 대한광학에 들어가 연마공 생활을 3, 4개월쯤 하다가 학교로 복학했다. 운동권 대선배로서 학교로 돌아온 그를 1980년 봄 민주화의 열기가 가만히 놔주지 않았다. 박정희가 죽고 이제 곧 민주화가 될 줄 알았지만,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12 · 12쿠테타로 군권을 장악하고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겸임하면서 민주화에 대한 또 다른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 정국 탓에 여익구는 자의와는 상관없이 학생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그렇게 5월 15일 서울지역 대학들이 총동원된 서울역 앞 시위에 동국대생 2천 명을 이끌고 나갔고,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다시 구속되었다.

사실 그때 여익구는 6월 1일 조계사에서 탄허 스님을 주례로 결혼식을 올릴 예정으로 청첩장까지 다 돌린 상태였다. 그런데 신랑이 구금되어 있어 신부 홀로 하객들에게 양해 인사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4개월 구속수감 후 8월에 선고유예로 석방되어, 9월 6일 대각사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번역 등으로 생활하다 월정사 시절 도반이던 민족사의 윤창화 사장을 만나 편집장으로 근무하던 중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대불련)’ 사무총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민중불교운동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다.

실천불교에 대한 대학생 불자들의 보다 현실적인 욕구

민중불교운동의 발단과 전개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므로 여기서 잠시 대불련이라는 단체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기로 한다.

대불련은 황산덕 · 서돈각 박사가 지도하던 서울법대 불교학생회 회원이던 신호철, 전창렬, 김윤권, 명호근 등이 동국대 룸비니학생회 최동수, 오형근 등과 협력하여 1963년 서울대, 동국대, 공사, 육사 등 15개 대학 32인의 발기인대회를 거쳐 창립된 단체이다. 창립 후 1964년 《대한불교》를 인수한 덕산 이한상 거사와 홍도 스님, 광덕 스님 그리고 많은 지도교수의 적극적 후원으로 각종 법회와 수련회, 사상강연회, 봉사활동 등을 거듭하며 외연을 확장한 결과 1980년대에는 전국에 140여 개 지회를 둘 정도로 발전했다. 특히 당대 불교계 여망이었던 불교군종제도와 석가탄신일 공휴일 제정 청원운동에 꾸준히 힘을 보탠 결과 각각 1968년과 1975년에 법제화를 성취해내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생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대불련 동문회는 대학을 졸업한 불자들을 모두 회원으로 받아들여 조직을 키우자는 일부 주장으로 한때 학사불교회로 개칭하여 내분을 빚기도 하는 등 조직적 운영에 미숙함을 보이기도 했다. 때문에 대불련은 선배나 지도교수들의 지나친 간섭을 피해 철저히 학생 주도의 조직이라는 원칙이 강하게 작용하게 되었다. 특히 창립 초기에는 불교종단이 조계종 하나밖에 없었지만, 천태종과 태고종 등이 종단 등록을 마친 1970년 이후에는 불교의 신행행태상 종파가 무의미하므로 특정종단 소속이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실천불교에 대한 대학생들의 보다 현실적인 욕구가 대불련 내에서 분출하기 시작했다. 전재성이 회장이던 1975년에는 포교를 위한 민중들의 현실에 대한 설문조사를 전국 지부별로 시행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갔다. 그 후 최연 회장이 주도한 1976년 송광사에서 개최된 여름 수련회인 ‘화랑대회’에서는 ‘민중불교 실천을 위한 전진대회’라는 슬로건으로 그때까지 꾸준히 언급되었던 민중불교를 공식적인 논제로 삼았다. 그때 발표된 여러 논문 중 전재성의 〈민중불교론〉은 이후 좀 더 가다듬어져 1977년 10월 《월간 대화》에 실렸다. 그리고 그 무렵 덕산 거사의 지원도 끊기면서 본부 사무실도 풍전빌딩에서 조계사 후문 옆 반지하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1979년 역시 송광사에서 열렸던 화랑대회는 연구조사국(국장 이희선)이 준비한 강의와 토론 내용에 선배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파행을 빚었다. 당시 대회는 법정 · 황석영 · 임헌영 · 백기완 · 전재성을 강사진으로 초빙해 한국 민주주의의 실상, 한국불교의 기득권층 옹호성향에 대한 반성, 불자들의 올바른 자세를 논의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회장이 강의 진행 중지를 요구하고 이에 불복하는 연구조사국원 전부를 해임했다. 그러자 대회에 참석했던 동국대와 서울대 불교학생회 전원이 대회 보이콧을 선언하고 철수해버렸다.

이후 1980년 1월의 정기대의원총회에서는 이희선과 최연이 대불련 혁신을 공약으로 각각 회장과 대의원회 의장으로 출마했으나 집행부에서 적극 지원하는 후보에게 밀려 근소한 차로 이희선이 낙선하는 바람에 앞서 당선된 최연도 의장직을 사퇴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새로 선출된 회장은 지명직 부회장으로 지난해 연구조사국원이었던 김지형을 임명하고 필자를 조직부장으로 임용함으로써 민중불교에 대한 논의는 지속해가기로 했다. 이어서 2월 새로 조직된 본부집행부 MT에서 여러 안건과 함께 대불련의 사원화가 논의되었다. 

당시는 이미 동국대생 이희선 · 안동일, 서울대생 신상진 · 조성렬, 외국어대생 김정우 등이 법련사에서 사원화운동의 기초를 닦고 있었다. 사원화의 당위성은 대략 두 가지로 집약되었다. 먼저 민청학련 때 학교 단위 조직이어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기독학생총연맹(KSCF)이 회원들을 각 교회 청년대학부로 옮겨 기독청년협의회(EYC)를 결성한 사례가 검토되었다. 마찬가지로 학교 단위로 조직된 대불련 역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공안당국의 압박을 피해 사찰 단위로의 변신은 필연적이었다. 또한 1년의 절반이 방학 기간인 대학의 현실을 다소나마 해소할 수 있고 졸업 후 청년회로 전환하여 평생 불자로서 신행을 이어갈 수 있는 점도 장점으로 꼽혔다. 그래서 우선 과도적인 조치로 1지회 1사찰 인연 맺기를 통해 활동 범위를 학내에서 지역사회로 넓혀나가기로 했다.

그러나 5 · 17 비상계엄확대와 함께 내려진 전국대학 휴교령으로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해 그해는 여름대회도 치를 수 없었다. 게다가 극도의 공안정국 속에 회장이 중도 사퇴함으로써 부회장 김지형이 회장 서리를 맡았다. 한편 전남지부장 조선대생 김동수가 5 · 18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어 본부 임원과 다수 서울 학생들이 7월 14일 광주 향림사에서 거행된 49재에 참석하고 망월동 묘지도 참배했다. 그리고 가을에는 부회장 이희선이 노일현 · 김지형 등과 학내시위를 벌이고 구속되었다. 4학년으로 졸업을 앞둔 그들은 대졸자로서 사회적 기득권을 포기하고 평생 사회운동가로 살겠다는 의지에서 스스로 전과자의 길을 택한 것이다. 당시 학생운동권에서는 1, 2학년 때는 선배의 도움을 받으며 사회과학 스터디그룹에서 공부하고, 3학년이 되면 후배들을 지도하다가 4학년으로 올라가면 그 같은 선택을 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10월 27일 법난이 일어났다. 5월 광주민주항쟁을 폭력으로 진압한 군사정권이 자신들의 강제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회정화를 외치던 시절 오랜 분규에 휩쓸려 왔던 불교계도 그 표적이 된 것이다. 그래서 대불련은 법난에 항의하는 집회를 강행하기로 결의하고 11월 22일 100여 명이 모여 조계사에서 10 · 27법난 규탄대회를 열었는데, 집회 후 곧바로 체포될 것을 예상했지만 철야농성 후에도 경찰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같은 의지를 전국에 확산시키기로 하고 지부들을 차례로 방문해 성토대회를 이어갔다. 하지만, 당시 방송과 신문, 심지어는 외설적인 주간지까지 동원해 불교계 치부라 할 만한 것들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정권의 흑색선전을 대불련으로서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1981년 초파일 제등행렬에서 전두환 정권을 비난하는 유인물이 뿌려지는 사건을 계기로 회장 정용학 등 본부 임원 여러 명이 연행되었다. 이튿날 심야에 문화총림 여래사(如來使) 사무실에서 비상소집된 전국지부장회의에서는 여익구를 사무총장으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문화총림 여래사는 1981년 초 최연과 황희을, 송미기, 장범중 등 대불련 출신 졸업생들이 모여 불교문화사업을 하며 수익도 도모하고자 모인 단체로, 가을에는 민중불교를 표방하는 기관지 《청년 여래》를 발간하기도 했다.

   

5·3인천사태 시위현장의 여익구(사진 왼쪽)와 박계동(사진 오른쪽). 1986년 명동성당

남다른 친화력과 조직역량

그렇게 대불련 사무총장이 된 여익구는 먼저 대불련 본부조직부터 재정비하고자 최연을 간사로 임명하고 필자에게 조직부장을 맡을 것을 요구했다. 이후 여익구는 대불련의 전체 현황을 파악해가며 큰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는데, 공개조직일 수밖에 없는 대불련의 내실화와 승가사회의 조직화가 일차적인 목표였다.

여기서 대불련의 내실화란 전국조직이고 산하에 다수의 지회가 있는 만큼 낱낱의 단위조직을 상대로 직접 지도하고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기보다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더욱 의식화된 회원들은 사원화팀이나 노동운동 같은 실천적인 현장으로 가도록 뒤에서 후원했다. 말하자면 몇몇 학생들을 상대로 직접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가르치기보다 각 지회가 자발적으로 그럴 필요성을 깨닫게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런 활동에는 탈춤을 비롯한 민중문화를 대불련에 접목시킨 것이 효과적이었다. 일례로 여익구가 사무총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한 일 중의 하나가 당시 병신춤으로 알려지기 시작하던 공옥진을 초청해 조계사 뒤뜰에서 공연한 것이다. 그리고 본부 문화부 안에 탈춤반을 조직해서 교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구며 꽹과리를 짧은 시간 내에 익히면서 흥미를 느낀 반원들은 기예만이 아니라 거기에 깃든 민중 정서를 이해하게 되고 시중의 소비적인 문화와는 다른 주체적 삶의 방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역과 전국행사에서 몇 차례 공연을 선보이자 당장 부산지부 등도 탈춤반을 스스로 조직했는데, 본부 탈춤반이 봉산탈춤을 전수받은 데 비해 부산지부는 지역 특색을 갖춘 양산탈춤을 배웠다. 

그런 식으로 각 지회에서 같이 읽고 토론할 도서목록은 물론 당시 유행하던 운동가요와 더불어 잘 알려진 민요에 불교가사를 붙이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새로 발굴된 민요를 채보해 불교가사를 단 노래집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고, 회보 《진리의 벗》을 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불련 전국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이전에는 정부 행정조직을 본받아 서울 · 부산과 각 도청소재지에 지부를 두고 그 산하에 지회들을 소속시켰는데, 본부의 전달사항을 지부가 지회들에 연락하고 다시 그 결과를 수거해 본부에 보고하기에는 학생조직으로서 능력에 넘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대학이 3개 이상 있는 도시들은 모두 지부로 승격시키고 2개인 도시는 준지부, 1개인 도시는 특별지회로 지정하여 지부보다 상대적으로 행정력을 늘리기 용이한 본부에서 직접 관장했다. 다만 도청소재지들은 기득권을 인정하여 경기, 충남, 충북 등 기존의 도 단위 명칭을 그대로 쓰도록 했다. 말하자면 은행 조직을 모방해 효율성을 고려한 조직개편이었는데, 각 지역 내 원활한 연대활동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그러자 당시 도시 간 구분이 무의미해지기 시작한 마산 · 진해 ·창원의 경우 도시명의 뒷글자를 딴 산해원이란 이름으로 한 지부로 묶어줄 것을 본인들이 요구해 와 그대로 승인했다. 또한 장차 사원화운동이 활성화될 때를 염두에 두고 사찰 단위 대학생회도 지회로 가입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런 조직구성은 현재의 대불련 헌장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을 사무총장이 직접 한 것이 아니라 큰 틀의 방향만 제시하고 본부임원들이 알아서 능동적으로 수행하도록 한 것이 조직의 귀재였던 여익구의 착안이었다.

   
 

그리고 승가를 조직하는 일은 ‘대불련 지도법사단’을 구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자신의 승려 시절 만났던 젊고 의욕 있는 스님들을 모아 처음 50여 명으로 지도법사단을 결성했다. 효당가에서 인연을 맺은 여연 스님과 월정사 시절 도반이었던 현각 · 현기 및 도수 · 현응 · 현담 · 성문 · 원혜 · 묘주 스님 등이 참여했고, 지도법사단장은 혜산 스님이 맡아주었다. 이렇게 조직된 지도법사단은 잘 알려진 것처럼 곧바로 1981년 7월 11일~16일 중앙승가대에서 승가 사상 최초로 경제나 사회사상 등 사회과학 분야도 함께 토론한 ‘전국청년승가육화대회’를 개최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1982년 6월에는 동국대, 중앙승가대,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운문사, 봉녕사 등 전국 강원에서 500명이 참여한 ‘전국학인승가연맹’을 발족하는 등 청년 승가조직을 활성화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당시 필자도 스님들과의 준비모임에 배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대한민국에서 저만큼 젊은 스님들 많이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말하던 여익구의 발언이 기억난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사무총장을 맡고 처음 여름대회를 준비하던 중, 필자에게 자료집 견적을 받아오라는 임무가 주어졌는데, 거의 열 군데 가까운 인쇄소의 대동소이한 견적에도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았다. 그때 ‘아, 예산에 자신이 없구나’ 하고 깨달은 필자가 조계사 근처 인쇄소에서 대회가 끝난 후 지급하는 조건으로 조금 비싼 견적을 올리자 그제야 허락이 떨어졌다. 사실 어디에서도 정기적인 재정후원이 없던 당시, 대불련을 관장하는 일이 여익구에게 큰 부담이었음을 짐작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조국과 민중을 불타의 품으로’라는 주제로 법주사 인근 국민학교에서 열린 화랑대회를 700명이 참석한 가운데 무사히 마치고 2학기를 맞았을 때, 원주 상지대 지회장이 개신교 부흥회장 앞에서 할복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개종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승려 출신임을 내세워 불교를 함부로 폄훼하고 다니는 명진홍 목사라는 자의 만행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를 알게 된 대불련 본부에서는 조계사에서 대대적인 규탄대회를 열었고, 집회 도중 절 안에 들어와 있던 사복형사들까지도 정당한 종교행사를 사찰한다고 절 밖으로 쫓아냈다. 광신적 기독교도들의 폭거가 횡행하던 시절 대불련의 이런 규탄대회는 조계사 주변 스님들이나 불자들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대외적으로는 여익구라는 사람이 불자임에 틀림없다는 믿음을 심어줬고, 대내적으로는 ‘자비문중’이라는 막연한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대다수 대불련 회원들에게 정당하게 분노하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그런 집회는 이후에도 서울과 지방에서 개종선교회가 부흥회를 여는 곳마다 찾아가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그런 가운데 12월 ‘사원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의 주범이 된 법우 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 기숙사인 기원학사에서 생활하다 2학년 말 인도철학과인 관계로 퇴사해 천호동 어느 포교당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곳 지하에 있던 야학이 주지 스님과의 불화로 쫓겨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야학을 떠맡았다. 당시 야학은 가정형편 때문에 정규학력을 채우지 못하고 사회로 나온 아이들을 검정고시를 통해 학교에 복귀시키는 검정야학과 노동자들의 의식을 고양시켜 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노동야학이 있었는데, 그곳은 검정야학이었다. 

법우 스님은 직접 아이들과 부대끼며 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검정고시가 아니라는 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급격한 의식의 변화를 보인 법우 스님은 문화총림 여래사 팀의 조력을 받으며 묘각사에서 청계천과 동대문 일대 봉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여래사 야학을 운영했다. 그리고 대불련 지부나 지회들이 서울, 전주, 부산, 인천, 청주 등지에서 운영하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는 야학들을 연합해 ‘불교야학연합회’를 결성하려다가 벌어진 사건이 ‘사원화 사건’이다. 이후 전국적인 검거 선풍이 야학들은 물론 문화총림 여래사와 법련사에서 이전한 칠보사 사원화팀 그리고 관련된 대불련 지회 등으로 번져나갔다. 결국 150여 명이 검거돼 조사받은 끝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법우 스님 3년, 최연 2년, 서울대생 신상진은 1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대불련은 1982년 여름대회 이름을 ‘한국불교 1,600년 대회’로 바꿔 해인사 인근 국민학교에서 7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치렀다. 그해에는 학생들 행사와 별도로 해인사에 지도법사단 스님들이 상당수 모였는데, 사복경찰이 교사로 위장해 대회장에 상주하는 등 삼엄한 감시를 펼쳤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민한 주제를 다루면서 특별한 빌미를 제공하지 않고 대중들을 통제하는 여익구의 지도력은 해인사 경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당시 총무원 총무국장이던 지형 스님과 가깝게 교류하게 되면서 종단 종책연구소 산하에 11월 30일 동국대 한상범 교수가 소장, 정승석이 간사로 참여한 ‘불교사회문화연구소(불사연)’ 출범을 돕게 되었다.

그렇게 민중불교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을 의식화시키고 조직화하는 작업을 숨 가쁘게 진행하던 가운데 1983년 초 여익구는 대불련 사무총장직을 사임했다. 당시 그는 자료수집을 위해 일본여행을 원했는데, 안기부에서 여권발부를 미끼로 사퇴를 요구하자 그에 응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행 후 여익구는 조계사 정화회관 2층에 있던 불사연 연구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대불련은 후임 사무총장을 추대하지 않고 필자 혼자 간사직을 수행했다.

그리고 7월 17일 범어사에서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라’는 주제로 중앙승가대와 동국대 석림회, 전국 강원과 선방 스님들, 대불련, 대한불교청년회 1,700여 명이 모여 출 · 재가 연합조직인 ‘청년불교도연합회(청불련)’를 출범시켰다. 그날 배포된 《청년불교도백서》는 그때까지 불교계 분규의 실상을 다루고 그에 관한 개선방안을 엮은 것으로 불사연에서 수개월의 작업을 거쳐 발간한 것이었다. 따라서 출 · 재가의 결속, 불교혁신, 민족불교 구현, 불국정토 건설을 표방하며 교단개혁을 외쳤지만, 대회의 어떤 자료에도 민중불교라는 단어는 넣지 않았다. 불교의 자주화를 우선 과제로 생각한 출 · 재가 연합조직이라는 점을 배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불과 20일 만인 8월 6일 신흥사 신임주지 부임을 둘러싸고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청불련 소속 스님과 청년불자들은 곧바로 개혁종단수립을 목표로, 종단의 자율정화와 총무원장 사퇴, 종회 해산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호법구종법회’를 개최하여 많은 스님이 단식에 돌입했다. 

불교계 안팎에서 비판여론이 들끓자 조계종 원로회의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총무원과 종회 해산, 전국승려대회 개최를 결의했다. 그리고 9월 5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를 통해 비상종단을 출범시켰지만, 기획위원장을 맡은 여익구에 대한 공안당국의 압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여익구만 배제하면 불교계를 대표하는 비상종단의 정통성을 인정하겠다는 압력이 거듭되자 비상종단 기획실장을 맡았던 지형 스님과 사무처장 성문 스님이 결국 사퇴를 권했다. 그러자 여익구는 물러나 칩거하며 집필에 몰두했는데, 그때 쓴 것이 1985년 1월 도서출판 풀빛에서 발간된 《민중불교입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비상종단은 1984년 7월, 당시로는 파격적일 만큼 혁신적인 제도개혁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제도개혁안과 종헌개정안을 둘러싼 진통 끝에 1984년 8월 1일 기득권 스님들이 성철 종정 등 원로스님을 등에 업고 소집한 승려대표자회의에서 새 종헌을 무효화시키고 비상종단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후 여익구는 종단 내 무용지물이 되어 있는 불사연을 인사동으로 옮겨 ‘불교사회문화연구원’으로 개칭하고 원장에 취임했다. 당시 연구원에서는 기관지 《불교와 사회》를 3호까지 발간하고 민중불교를 보다 뿌리 깊은 신행 형태로 성숙시키기 위한 실험적인 법회도 꾸준히 열었다. 법회에서는 삼귀의를 정확한 본뜻을 살리기 위해 남방불교에서 행하는 팔리어 게송으로 불렀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한편 비상종단을 와해시키고 총무원장이 된 녹원 스님 측으로부터 초파일 봉축행사에 대한 개혁방안을 기획해보라는 일종의 유화책이 제안되기도 했다. 여익구는 제등행렬을 초파일 당일보다 며칠 앞당겨 각 사찰의 당일 봉축행사에도 도움을 주고 출발장소도 여의도광장보다 서울운동장같이 사전법회에 참가자의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장소를 제안했다. 이런 기획은 그 즉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몇 년 후부터는 제안대로 시행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독일의 국제자선단체 TDH(Terre des Hommes)의 지원을 받아 구로동에 ‘민중법당’을 설립하고 빈민아동교육사업을 벌이기도 했으나, 불교사회문화연구원 시기 여익구가 집중한 것은 민중불교운동연합 설립을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민중불교운동의 대부로 우뚝 서다

이어지는 1985년의 정치 상황은 2·12 총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지휘하는 신민당이 예상외의 선전으로 제1야당으로 등장했다. 그러자 재야운동권은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건립, 야당 정치권과의 연대도 가능한 대중운동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5월 4일 ‘민중불교운동연합(민불련)’도 반독재 민주화를 기치로 창립되었다. 창립대회에서 경찰의 방해로 작지 않은 피해도 있었지만, 고문으로 경우 · 월운 스님과 용태영, 지도위원에 고은, 김지하, 황석영, 장기표와 성열 · 지선 스님 등을 모시고 의장에 여익구, 부의장에 진관 스님과 김래동, 집행위원장에 서동석, 기획위원장에 현기 스님 등으로 초대 임원진을 구성했다. 마침내 불교계 최초의 재야 대중운동단체이자 청불련의 뒤를 잇는 출 · 재가 연합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까지의 대불련 인맥을 비롯한 출가와 재가의 방계조직과 재야운동권의 불교 신자들까지 총망라한 본격적인 민중불교 실현을 위한 조직체였다.

민불련은 창립하자마자 재야민주세력의 결집체인 민통련에 가입해 사회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고, 기관지 《민중법당》을 발행해 광주학살의 진상, 10 · 27법난의 실상, 안기부의 고문 실태 등을 알렸다. 그리고 불교전통의 현대적 재해석도 시도했다. 일례로 1985년 8월 31일 화계사에서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불교의 우란분절이자 민중들이 농사일을 하루 쉬던 전통명절인 백중을 ‘생명해방 대축제’로 개최하려다가 공안당국의 제지로 불발되기도 했다. 그밖에도 1985년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 파업을 계기로 촉발된 ‘구로동맹파업’에 대한 지원 활동과 농성, 1986년 초 민통련을 중심으로 전개된 개헌투쟁에 이르기까지 각종 집회 · 시위 · 농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5 · 3 인천민주항쟁을 총괄 지휘한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 의장 여익구가 수배를 받게 되었다. 5 · 3항쟁은 1986년 5월 3일 인천 주안역 인근 시민회관 일대에서 수도권 지역 시민단체, 대학생, 노동자 등 5만여 명이 운집하여 군부독재 타도와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한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당시의 안기부는 점점 더 거세지는 국민의 개헌요구를 잠재우고자 이 시위를 좌경용공 세력에 의한 조직적 체제전복 기도로 조작하여 소요죄로 129명을 구속하고 60명을 지명수배했다. 이 사건으로 여익구는 이후 공개활동을 못 하고 오랜 도피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민불련은 민통련 해산명령에 맞선 농성투쟁으로 고광진 2기 의장이 수배되기도 하고, 김근태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이 고문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11월 4일 재야, 종교계, 야권의 연대기구인 ‘고문 및 용공조작저지공동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질 때 불교계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

1986년 5월 9일에는 민불련뿐만 아니라 지선, 청화, 진관, 명진, 성문 등 152명의 스님이 조계사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여 민주적 개헌을 주장했다. 그리고 6월 5일에는 218명의 스님이 ‘불교정토구현전국승가회(정토승가회)’를 창립했다. 동국대학교 정각원 불상 앞에서 진행된 창립총회를 통해 스님들만으로 구성된 사회운동단체가 탄생한 것이다. 이어서 9월 7일에는 승려 2천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9 · 7 해인사 전국승려대회’를 열어 불교자주화와 사회의 민주화를 천명하면서 불교 관련 악법 즉각 철폐, 사찰 관광유원지화 중지, 불교탄압 전면거부, 10 · 27 법난 해명 등을 요구했다. 또한 10월 26~27일에는 봉은사에서 정토승가회, 민불련, 대불련, 중앙승가대, 동국대 석림회 등이 연합해서 25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10 · 27 법난규탄 및 불교자주쟁취대회’가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7년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발생과 은폐조작, 4 · 13 호헌조치, 6월항쟁과 이한열 사망 그리고 6 · 29선언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한 해였다. 불교단체들은 ‘박종철군 49재봉행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조계사는 물론 전국 각 사찰에서 49재를 지낼 것을 결의했다. 그러자 민주진영은 불교계가 추진하는 49재일인 3월 3일을 ‘3 · 3 고문추방민주화대행진’으로 명명하고 전국적인 추모의 분위기 속에 대행진을 준비했다. 그리고 당일 지선 스님을 비롯한 20여 명의 스님과 민불련, 대불련 소속 학생, 신도 수백 명이 조계사로 들어가려다 경찰의 저지에 막히자 사찰 앞 노상에서 천도재를 지냈다. 또한 5월 16일에는 청화, 지선, 성연, 명진 등 조계종 스님 751명이 시국성명서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견해-4 · 13조치 철회와 민주개헌을 촉구하며〉를 발표했다. 

한편 5월 18일 광주 원각사에서 원각사 불일청년회와 대불련 회원 100여 명이 ‘5 · 18 광주희생민주영령추모법회’를 개최했는데, 법회 도중 경찰이 난입해 무차별 폭력을 자행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격분한 출 · 재가 불자 5천여 명 등 1만여 명이 5월 27일 원각사 앞 가두와 금남로 일대를 가득 메우고 ‘원각사 경찰난입 및 불교탄압규탄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같은 날, 민주당과 종교계, 재야단체 등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여 4 · 13 호헌조치 철회 및 직선제 개헌 공동쟁취를 선언했다. 이 선언에는 함석헌, 문익환, 김대중, 김영삼 등과 함께 석주 스님이 고문으로 참여했고 박형규, 계훈제, 송건호, 고은 등과 함께 지선 스님이 상임공동대표로 참여했으며 청화, 지선 스님이 지역 · 부문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또한 성연, 진관 스님이 상임집행위원으로 참여했고, 고광진 의장을 비롯한 민불련 2기 집행부가 실무진으로 참여해 불교계의 연대활동을 이끌었다.

그런데 이 모든 움직임은 여익구라는 한 인물이 불교계에 제시한 사회참여와 자주권 회복이라는 당위성에 대중들이 호응한 결과로서, 지금도 그를 일컬어 민중불교의 대부라고 부르는 데 이견이 없다. 그러나 3년 반의 긴 수배 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6월항쟁에 따른 직선제 개헌과 이후 대선정국에서 김대중계와 김영삼계가 분열함으로써 군부독재를 종식시키지 못한 탓에 재야운동권에 이어 불교계마저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이에 따라 민중불교 운동도 상당 기간 갈피를 못 잡고 원활한 연대활동에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수배 중 집필한 《민중불교철학》을 1988년 11월 민족사에서 출판한 여익구는 1989년 7월 체포되어 3개월여의 구속 기간을 거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도피 기간 중 1987년 6 · 10 대회의 명동성당 농성현장에서 가족을 상봉하여 아빠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어린 아들과 스티로폼 바닥에서 며칠 함께 지낸 일과, 역시 수배 중이던 전태열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던 일들이 나중에 알려지기도 했다. 이후 민통련의 뒤를 이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서 민주쟁취위원장을 맡았으나 업무 중 다시 구속되었다가 4개월 만에 집행유예로 석방되기도 했다.

이후 1989년부터 진행되기 시작한 동구권 몰락과 1991년의 소련 해체는 재야운동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그리고 1990년의 3당합당은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지만 곧바로 부산 · 경남지역 재야운동권의 절멸을 초래했다. 당시에는 재야 출신 인사들이 적지 않게 국회의원으로 진출해 있어, 그런 저변의 사정이 여익구를 정계 도전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가 광명에서 준비한 1992년 총선은 사면복권이 안 되어 포기해야 했고, 이후에도 몇 차례 도전이 있었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의 이력에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사업회 부회장, 역삼노인복지관 관장,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정책특보, 한국남동발전 감사, 한국지도자 육성장학재단 이사장 등이 부가되었지만, 201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파란만장했던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불편하지만 넘어서야 할 진실

여익구가 품었던 민중불교의 기본개념은 그가 펴낸 《불교의 사회사상》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다음의 문장으로 잘 대변된다.

‘삶’의 현장에서 역사나 사회의 구조를 도외시하고 인간이나 사회를 말한다면 그것은 추상과 관념이 되어 구체적인 현실을 도피하게 된다. 그런 ‘종교’는 생동하는 종교가 아니라 이미 죽은 종교다. 존재의 본질을 정견(正見)한 데서 출발한 불타의 가르침은 오늘날 이데올로기화된 모든 개념, 이상, 주의들을 좀 더 근원적인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따라서 불교는 ‘근본주의(Radicalism)’이다. 아니 주의(主義)라는 말 자체까지도 하나의 절대개념으로 보아 그것을 초월한다.

이것은 일찍이 만해가 ‘마르크스주의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한다면 마르크스주의도 종교’라고 설파한 것만큼이나 깊은 종교적 통찰력을 내비친 것으로, 불교의 반야공관을 사회운동의 논리로 풀이한 것이라 하겠다. 민중불교에 대해 많은 염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면 폭력의 문제, 계급투쟁적 성격의 문제 같은.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폭력이든 계급이든 정의(正義)의 문제만큼이나 쉽게 판가름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그래서 불가의 계(戒)는 개차법(開遮法)을 허용하지 않는가. 단하(丹霞) 선사를 예로 들겠다. 불상을 불살라버린 단하의 죄는 절도죄인가 아니면 기물파손죄인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

 

이영근 
불교출판인. 동국대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대불련 18대 대의원회 의장과 총무간사를 거쳐 불교사회문화연구원 연구간사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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